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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끝나자 정치권 마녀사냥만 '내탓이요'는 실종


입력 2016.04.18 05:09 수정 2017.10.16 10:03        데스크 (desk@dailian.co.kr)

<칼럼>여당 패배 특정인 특정세력 탓 아닌 총체적 문제

야당도 선거 결과 아전인수 말고 겸허히 스스로 개혁해야

(Ⅰ)
제20대 국회의원 총선거 결과를 소략하게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새누리당'

참패를 당한 것은 어떤 핑계로 피해가려 해도 가려지거나 희석될 수 없다. 져도 철저히 졌다.

①먼저 장기적인 경제침체와 민생위기가 표심을 돌려 세운 측면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경우 1차적 책임은 정부와 여당에 있다고 보는 게 상식에 부합한다.

②그 다음의 패인은 공천과정에서 벌어졌던 해괴한 헤프닝이다.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의 지나친 자신감과 점령군 사령관 같은 위압적 태도가 지지자들을 돌려세운 제1요인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 윤상현 의원의 막말, 김무성 전 대표의 ‘옥새들고 나르샤’가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③그렇다고 낙천된 사람들이 피해자라고 주장할 근거도 아직은 없다. 공관위 활동 과정에 룰이 작동하고 있었다면 그건 정당 자체의 행위다. 그리고 국회의원직은 특정인의 특허 받은 가업이 아니다.

④청와대가 공천을 좌지우지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는 공관위원 모두를,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행동하는 저능 로봇으로 몰아세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결례다.

'더불어민주당'

분당으로 인해 초래된 위기를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집권 새누리당보다 지역구 선거에서 5석이나 더 얻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만하다. 그렇다 해도 ‘승리’를 강조하지는 않는 게 좋겠다.

①무엇보다 호남에서의 참담한 패배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게 됐다.

②더 충격적인 것은 정당득표율에서 국민의 당에 졌다는 사실이다. 지역구 후보의 당락에는 개인적 요인이 크게 작용한다. 반면에 정당득표율은 순전히 정당의 몫이다.

③새누리당의 강력한 지역기반이던 TK(1석)와 PK(8석)에서 당선자를 낸 것은 대단한 성과라고 할 만하다. 지역주의의 강고한 벽에 작지만 틈을 만든 것이다.

④수도권에서의 압승도 특기할 만하다.

'국민의당'

20대 총선은 안철수와 국민의당을 위한 선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창당대회 후 2개월 11일 만에 치러진 총선에서 국민의 당은 전체 의석의 12.7%(38석)을 확보했다.

①특히 호남지역 즉 광주‧전남‧전북에서는 의석 28개 가운데 23개를 차지했다.

②호남 말고는 서울에서 2석을 보탰을 뿐이지만 정당득표율에서는, 더민주당에 앞섰다. 호남지역당이 아닌 전국 정당으로서의 위상을 주장할 수 있는 명분을 확보한 것이다.

③안철수 대표로서는 기세 좋게 재기의 무대에 오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④다만 다양한 동기나 이유로 더민주당을 탈당한 정치인들이 상층부를 형성한 가분수 정당이라는 구조적 취약성이 짐으로 지워졌다.

(Ⅱ)

승리했거나 스스로 이겼다고 여기는 야당들은 책임논쟁을 겪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새누리당의 경우 ‘책임’ 문제를 정리하지 않고서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기가 어렵게 됐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몽땅 탓을 돌림으로써, 참담한 패배감에서 해방되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게 쉬운 방법인 것은 틀림없지만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선거의 패배가 어느 특정인, 특정세력 탓이라고 하는 것은 억지다. 그것은 새누리당과 정부의 총체적 패배다. 천하흥망 필부유책(天下興亡匹夫有責)이라고 하는 것처럼 정당 및 정권 구성원 모두가 책임의 일단을 지고 있다. 지도부가 엄연히 갖춰져 작동해 온 정당이 아닌가.
당연히 책임 소재는 가려져야 한다. 그럴 때 개선이 가능하다. 다만 이는, 엄밀히 말해서 새누리당 집안 문제다. 기실 국민은 이미 새누리당을 선거로 심판했다. 선거일 현재의 의석수 146석에서 24석을 감하는 징벌을 가한 것이다.

선거 결과는 ‘주권자의 명령’이기도 하다. 하루빨리 선거 뒷수습을 하고, 곧바로 일자리를 비롯한 민생문제 해결에 나섬으로써 서민들의 눈물을 닦아주라고 유권자는 요구했다. 이에 따르지 않을 경우 다음엔 의석을 감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정권을 내놓게 할 수도 있다는 강력한 경고일 수도 있다.

정치의 과제를 행정으로 풀려고 해서는 안 된다. 행정은 지시 → 이행의 구조를 갖지만 정치는 대화 → 타협의 과정으로 이뤄진다. 공천의 과정과 배경은 언젠가 밝혀질 것인 만큼 시간을 두고 풀어 가면 된다. 서로 편을 갈라 책임 공방을 하는 중에도 정부의 임기는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당정이 함께 깨닫지 않으면 안 되겠다.

상식이지만 위기는 곧 기회이기도 하다. 1 대 1의 무한정쟁 체제보다는 대화가 있는 3당 체제가 대의민주정치 제모습찾기에 유리할 수가 있다. 새누리당도 더민주당도 제3당인 국민의당에 끌려 다니지 않으려면 상호간의 소통 협력 채널을 가동해야 한다. 국민의당 또한 의정의 균형자로서 입지를 다지려면 정당 간 갈등이 아닌 협력의 조장자가 되어야 한다.

최선의 패배 수습책은 조속히 당내 단합을 이루면서 정부와 사이에 원활한 협력 및 보완관계를 구축하는 하는 일이다. 정부에는 임기가 있으나 정당의 경우는 다르다. 정치에 관한한 무한책임을 지는 게 정당이다. 정권 창출도 당연히 정당의 책임 중에 하나다.

(Ⅲ)

통치자나 입법자들이 모범 삼을 만한 일화들이 있다. 읽을 때마다 느낌이 새롭다.

①당의 통일을 이루고 바탕을 다진 2대 황제 태종(太宗)의 이야기다. 우리에게는 고구려 안시성 침략자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남겼지만 중국인들에겐 ‘정관(貞觀)의 치세’를 연 최고의 명군으로 기억되고 있다.

정관 17년 명상 위징(魏徵)이 세상을 떠났다. 황제가 말했다.

“짐은 세 개의 거울을 가지고 있었다. 청동으로 거울을 만들어 의관을 바로 하고, 역사를 거울로 해서 나라의 흥망성쇠를 알며, 사람을 거울로 삼아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을 알았다. 이제 위징이 죽었으니 거울 하나가 깨지고 말았구나.”

그 훨씬 전의 일이다. 하루는 태종이 조회를 마치고 와서 위징을 들먹이며 버럭버럭 화를 냈다. 황후가 그 까닭을 물었다.

“그 촌놈이 조회에서 또 나에게 대들었소. 이 시골뜨기를 죽이지 않으면 내 원한이 풀리지 않을 거요.”

황후가 바로 나가더니 예복을 갖춰 입고 와서는 황제에게 하례를 올렸다.

“사서에 이르기를 성군 밑에는 직언하는 신하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감축드리지 않을 수 없는 일이지요.”

②당나라 6대 황제 현종(玄宗)은 만년에 양귀비에 빠져 국사를 소홀히 했다가 안사(安史)의 난을 당하기까지 했지만 치세 전반기에는 명군으로 칭송받았다. ‘개원(開元)의 치’가 행해지던 시절 신하 가운데 한휴(韓休)가 있었다. 그는 황제의 작은 과실도 지나치지 않고 직간을 했다. 이 때문에 현종은 연회 자리에 앉으면 늘 한휴에게 들키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어느 신하가 한휴의 파직을 주청했다. 그 사람 때문에 임금이 수척해졌다는 이유에서였다. 현종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비록 나는 말랐지만 천하는 살찌도다. 파직은 당치도 않은 일이다.”

③고대 그리스의 스파르타가 융성할 수 있었던 데는 리쿠르구스의 법제개혁이 결정적 기여를 했다. 그의 법은 이후 600년간이나 개정 없이 행해졌다. 그는 법제 개혁 작업을 모두 마친 후 시민들을 모아놓고 당부했다. 자신이 만든 법에 대한 신의 의사를 확인하기 위해 델피신전으로 가려하는데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고치지 말고 지켜달라는 것이었다. 시민들은 그러마고 서약했다. 그는 델피 신전에 가서 신탁을 구했다. 신은 그의 법이 훌륭하고 그 법대로 하면 나라가 융성할 것이라는 신탁을 내렸다. 그는 이 내용을 적어서 스파르타로 보냈다. 그리고 자신은 자결했다. 스파르타 시민들이 영원히 이 법을 지키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④아마 리크루구스보다 훨씬 후대의 사람이었겠지만 고대 아테네의 솔론도 탁월한 개혁가였다. 그의 법 가운데는 특이한 것도 많았다. 예컨대 정변이 일어났을 때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고 관망하는 사람은 권리를 박탈당하게 하는 규정을 두었다. 자식에게 한 가지의 기술도 가르치지 않는 아버지는 노후에 부양받을 권리가 없다는 내용도 있었다. 솔론의 법은 상원에 의해 공포됐다.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솔론을 찾아왔다. 이 뜨거운 관심을 그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일설에 의하면 그에게 왕이 되라고 권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자칫 그런 유혹에 넘어갈 것을 우려해서 그는 상업상의 이유를 들어 10년간 외유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법이 정착될 때까지 나라 밖에 나가 있었던 것이다.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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