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페이스북
X
카카오톡
주소복사

자유와 번영을 구하기 위해 리버티 로드를 뚫자


입력 2016.03.12 09:57 수정 2016.03.12 09:58        데스크 (desk@dailian.co.kr)

<굿소사이어티 기고>자유야말로 인류가 경쟁 끝에 얻고자했던 궁극의 이상

유라시아 친선특급에 참가한 경상북도 실크로드 익스프레스 탐험대원들이 예카테린부르크에 도착, 스베르들롭스크주 소재 유라시아 경계비를 방문해 아시아에서 유럽 방향으로 힘차게 뛰어오르고 있다.ⓒ연합뉴스 유라시아 친선특급에 참가한 경상북도 실크로드 익스프레스 탐험대원들이 예카테린부르크에 도착, 스베르들롭스크주 소재 유라시아 경계비를 방문해 아시아에서 유럽 방향으로 힘차게 뛰어오르고 있다.ⓒ연합뉴스

본디 두 다리 땅에 딛고 살아야 할 운명이건만, 푸른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와 같이 자유를 꿈꾸는 존재가 있었다. 우리 모두를 가리키는 그 이름은 ‘인류’.

‘더 멀리, 더 높이, 더 자유롭게...’ 그러나 신화 속에서 조차 자유는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어렵게 얻은 이카루스의 날개는 뜨거운 태양아래 보잘것없이 녹아내렸고 반짝했던 자유의 상징은 에게해(Aegean Sea)에 떨어져 버렸다. 흔히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인간의 과욕은 파멸을 부른다’에 있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실패로 끝난 이카루스의 이야기는 땅에서뿐만 아니라 하늘에서의 자유를 꿈꾸는 누군가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실패를 반복하기를 수천 년. 인류는 모두가 불가능하고 말했던 운명을 극복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날개를 만들었다. 실패는 더 큰 열망을 낳았을 뿐 자유를 향한 의지를 꺾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 만든 날개로 이 별의 땅이라면 어느 곳이든 하루 만에 밟아볼 수 있다.

이렇게 우리의 역사는 빈곤과 결핍으로부터의 탈출이고, 자유를 향한 격렬한 몸부림이었다. 더 좋은 집터, 더 좋은 식량에 대한 욕망은 점점 커져서 더 나은 영토와 자원, 무역항 등에 대한 욕망으로 확대 됐고, 그것들을 차지하고 지켜내기 위한 전쟁과 평화의 역사를 써왔다. 물론 생동하고 소멸하는 격변의 시간 속에서 마주한 현실의 한계는 이카루스의 날개를 태워버린 태양만큼이나 가혹했다. 만약 그 가혹함을 능가하는 ‘자유와 번영’, ‘더 나은 삶’을 향한 인류의 강렬한 의지가 없었더라면 우리의 역사드라마는 조기종영 됐을 것이다.

우리는 경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더 나은 삶에서’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더’라는 표현에 있다. ‘더’라는 표현은 비교 할 때만 존재할 수 있다. 그 비교의 대상이 타자인가 또는 어제의 나인가의 문제는 그 다음이다. 많은 사람들이 경쟁은 피곤하다고 말한다. 현대인은 무한경쟁, 승자독식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다움을 잃고 피폐한 삶을 살아가는 가여운 존재라고 했다.

또 누군가는 모두가 함께 일구고 똑같이 나눠 갖는 공동체의 삶이 아름답다고 했다. 서점가에는 ‘도시를 떠나라, 느림의 아름다움, 대한민국 도대체 왜 이러나’ 따위의 문구가 넘쳐났다. ‘나는 이렇게 사는게 좋다. 나는 이렇게 산다’ 류의 책을 비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니 논외로 치자. 그러나 ‘모든 문제는 경쟁밖에 모르는 자본주의에 있고 우리는 대안적 삶에, 자본주의가 아닌 제3의 삶에 희망을 걸어야한다.’고 말하는 대부분의 책들은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그 이면에서 무책임을 쏟아내거나 또 다른 전체주의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경제학자 토드부크홀츠(T.Buchholz)는 제3의 가면을 쓰고 나오는 반(反)자본주의와 반(反)경쟁에 대한 모든 책이 세상에 쏟아져 나올 때 일찍이 주장했다. “우리는 경쟁한다, 고로 존재한다” 고.

종(種)의 생존은 어떤 극악한 환경의 변화 앞에서도 적응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적응하지 못한다면 제3의 선택은 없다. 살아남거나 도태되어 영원히 세상에서 사라지거나 둘 중 하나다. 뼈와 살을 깎는 고통뿐만 아니라 DNA까지 바꿔가며 생명의 줄을 이어가는 모든 진화의 순간이 경쟁이다. 타종과의 경쟁이고 스스로와의 경쟁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경쟁한다. 경쟁하지 않는 종은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런데 어찌하여 인간만의, 그것도 현대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인간의 경쟁만이 극히 부자연스럽고 부당한 것이란 말인가. 이것이야 말로 인간 오만(傲慢)의 극치다.

오만한 인간들은 도덕과 감정을 내세워 대중을 선동했다. 더러운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경쟁할 필요가 없다고. 모든 사람은 평등해야 한다고. 본인을 신이라고 착각한 자들은 치밀한 계획으로 이 세상을 자신들만의 천국으로 만들고자했다. 그렇게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시대보다 번영을 이루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떤 시대 보다 더 많은 인류를 말살했다. 약속했던 에덴은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수천만의 생명을 잃었다.

그들이 약속했던 비정한 경쟁 없는 아름다운 세상, 그것은 사막 한가운데 일렁이는 신기루와 같다. 목마른 이들의 마음을 보기 좋게 흔들지만 실제로는 물 한 방울 존재하지 않는 허상.

신기루가 진짜 위험한 이유는 따로 있다. 애초에 사막을 건너는 여행자의 물주머니가 가득 차 있다면 어렵게 가짜 오아시스를 찾아 모험할 필요도 없겠지만 혹시나 해서 발길을 돌린 오아시스가 가짜더라도 욕 한번 뱉으면 그뿐 큰 문제는 없다. 내 주머니에 진짜 물이 있으니까. 그러나 반대로 궁지에 몰린 사람일수록 신기루를 향해 타는 목마름으로 달려가기 마련이다. 결과는 치명적이다. 그 자리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그에게는 회생의 기회가 남아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빈주머니에서는 생명이 나오지 않는다.

경쟁이 없는 곳은 편안하다. 하지만 그뿐이다. 전체주의자들이 교묘히 꾸며낸 평등의 세상, 나누고 공유하는 삶이 위험한 이유는 가장 궁지에 몰린 사람들을 선동하고 현혹시켜 종국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망한 곳에서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리버티로드(Liberty Road), 경쟁이 이끄는 자유와 번영의 길

비단길이라 불리는 실크로드는 중국에서 시작해 아시아를 가로질러 타클라마칸 사막 가장자리를 따라 파미르 고원, 중앙아시아 초원, 이란 고원을 지나 지중해 북안까지 이르는 길이다. 어딘가에 있을 ‘황금섬’을 꿈꾸던 옛 로마인들과 서역의 미지의 ‘문화’를 향한 중국인들의 열망이 실크로드를 탄생시켰다. 누구보다 더 큰 이윤을 취할 수 있는 길을 개척하기 위해 수많은 생명과 시간을 투자했다. 작열하는 태양과 모래폭풍도 ‘자유와 번영’을 향한 인류의 열망을 막을 순 없었다. 피와 땀, 세대를 잇는 시간을 투자한 결과는 값졌다. 지리적 한계와 교역의 한계를 뛰어넘은 새로운 자유는 인류에게 더 큰 번영을 가져다줬기 때문이다.

실크로드가 문명을 꽃피웠듯이 인류 역사에는 자유와 번영을 가져다 준 ‘리버티로드(Liberty Road)’가 존재한다. 생각해보자. 지구에는 200여개가 넘는 국가가 존재한다. 어떤 나라는 청소년비만이 사회적 문제라고 연일 뉴스에서 떠들어대지만 또 어떤 나라는 아직도 굶어 죽는 아이가 수두룩하다. 왜 어느 나라는 부유하고 어느 나라는 빈곤에 시달릴까. 타고난 천연자원 덕택에 부유한 국가라고 해서 동시에 ‘자유’로운 국가는 아니다. 그리고 그 국가가 누리는 ‘번영’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도 장담할 수 없다. 반대로 ‘민주화’를 이루었다고 해서 모든 나라가 ‘번영’을 누리며 사는 것도 아니다. 국가의 운명은 ‘자유화’에 대한 인식과 실천에서 갈린다.

‘자유’를 이야기하면 보통 많은 사람들은 ‘민주화’와 일맥상통하는 정치적 자유의 확보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개개인의 정치적 자유는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경제 문제에 있어서는 ‘사회적 경제’를 실천하고 부유한 사람의 재산을 ‘분배’하자는 의견에 손을 들어주는 것이다. 대형마트를 규제해서 전통시장을 살리자는 네거티브형 정책 앞에서 너무나 쉽게 소비자로서의 개인은 사라지고 그 어떤 거부감도 없이 집단논리 앞에 굴복한다.

하지만 한 사회의 진정한 자유화는 정치적 자유와 더불어 경제적 자유가 확보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역사의 교훈에도 불구하고 전체주의와 계획주의가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서 기승을 부리는 이유 역시 대부분이 독립된 존재로서의 ‘개인’과 그 개인의 ‘경제적 자유’를 인정하지 못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처럼 불균형한 자유화의 부작용은 오늘날 과잉민주화와 심각한 대중선동과 현상으로 표출되고 있다.

‘개인’과 ‘경제적 자유’에 대한 몰이해를 극복하지 못하면 대한민국은 ‘리버티로드(Liberty Road)'를 개척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자 번영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개인과 경제적 자유를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 개인에 대한 이해는 그 존재 자체가 갖는 존엄과 자유를 인정하는 동시에 인간의 불완전성을 받아들이는데서 시작한다. 불완전한 인간이 하나의 규칙아래 모인다고 해서 완벽해질 수 없다. 우리는 인간의 필연적 ‘무지’에 대해 인정해야 한다. 이것만 인정할 수 있어도 계획주의와 전체주의적 발상에 속는 일은 현저히 줄어든다.

애초에 모든 개개인의 경제행위에 따른 정보를 기계적으로 한데 모으고 오류와 무오류를 걸러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통제하고 계획하는 사회주의 체제는 늘 지식과 정보에 있어 심각한 불완전성과 치명적 허점을 갖는다. 다행히도 불완전한 개개인의 분산된 정보와 행동이 확산을 거치면서 오류는 줄어든다. 개개인의 경제적 자유에 대한 인정은 교환과 생산을 촉진시키고 시장은 놀랍도록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질서를 유지한다.

환경주의자들은 인간이 완전한 균형상태를 이루고 있는 생태계에 인위적 해를 가해 생태계가 균형을 잃는다고 주장한다. 시장도 마찬가지다. 시장은 사회가 있는 곳, 생산과 노동이 있는 곳에서 자생적으로 생겼다. 교환의 원리를 떠올려보라. 자유로운 환경에서 가격은 가장 이상적으로 작동된다. 수많은 오류를 지닌 인간 이성으로 시장을, 국가를 설계하려고 하는 순간 시장은 왜곡되고 국가는 뒤틀린다. 잘 살던 나라도 망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남미의 수많은 국가들이 비극적이게도 몸소 그 사례가 되었다.

인류가 오늘날까지 생존해 온 원동력은 앞뒤가 다른 ‘도덕성’ 덕분도, 알량한 ‘감성’ 덕분도 아니다.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위해, ‘자유’를 위해 종의 생존을 걸고 치열하게 ‘경쟁’해 왔다. 그렇기에 ‘경쟁은 성스러운 것’이다. 이런 경쟁을 부정하고 왜곡하는 무리는 경쟁과 인류역사의 발자취에 몰이해 하거나 전체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불온한 세력, 둘 중 하나다. 경쟁에 대한 극단적 부정은 경쟁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수준의 단순 기호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한낱 신기루에 불과한 세상으로 순진한 이들을 이끄는 자들은 그 죄가 더욱 무겁다. 그곳에는 생명이 자랄 수 없다. 가짜 평등은 모두를 빈곤과 죽음에 빠트리는 덫이다.

왜 인간만이 더 나은 삶을 꿈꾸고 그것을 현실화할 수 있는 특권을 가졌는가. 바로 ‘자유’다. 스스로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내던질 수 있는 강렬한 의지와 욕망. ‘자유’야 말로 인류가 생과 사를 반복하면서 경쟁 끝에 얻고자 했던 궁극의 이상이다. '리버티로드(Liberty Road)', 자유와 번영을 위하여 우리는 반드시 이 길을 개척해야 한다.

글/김연주 자유경제원 연구원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0
0
관련기사

댓글 0

0 / 150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