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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당신의 아이를 죽이지 마라...그것도 갑질이다


입력 2016.02.14 10:13 수정 2016.02.14 10:14        데일리안 (dmswnl20@nate.com)

<신성대의 이제는 품격>인격도 모르고 인권이라니...결국은 교육

자고나면 일어나는 자식 살해로 뉴스보기가 무섭다. 흡사 동물원이나 아수라장에 갇혀 사는 느낌이다. 도무지 이 참혹한 발작증상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단순히 스트레스성 강박장애인가? 천민자본주의가 썩어가면서 내품는 거품인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충실하게 공자의 가르침을 지켜온 동방예의지국을 자처하는 나라가 어쩌다 이 모양이 되었나? 자살공화국! 자식살해공화국! 어느 사회학자도 속 시원하게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다. 그저 물질만 추구하고 인성교육을 소홀해온 탓이란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이 말 속에는 자식을 소유물로 여기는 의식이 잠재되어 있다. ‘아이는 내가 만드는 내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생명이란 절대자(절대적인 그 무엇)로부터 창조된(주어진) 것이 아니라 제 필요에 의해 만들고 안 만들고 하는 동물농장다운 발상을 바탕에 깔고 나온 구호이다. 자신의 의지(편의)대로 생산할 아이를 조절한다? 생명을 신성한 존재로 여기는 생명존엄 사상이 아예 끼어들 소지가 없다. 더 이상 인간이란 신성한 그 무엇이 아니게 된 것이다.

또 ‘하나만’ 혹은 ‘둘만’이라는 표현 속에는 남의 그것(물격)과 비교하고 경쟁하는 데서 나온 발상이다. 잘 훈련시켜 다른 아이들보다 우월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갇혀 아이를 키운다. ‘키운다’라기 보다는 제 마음에 들게 ‘만든다’란 표현이 더 적당하겠다. 그러니까 부모가 만드는 인형(아바타)이자 제품(상품)인 것이다. 신제품 개발하듯 하나만 낳아 집중투자해서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공부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오만과 열등감에서 나온 이기적인 발상이다.

그렇게 낳은 아이를 키우다가 더 이상 잘 키울 자신이 없을 때, 남들과의 경쟁에서 낙오되었을 때, 아이가 제가 원하는 대로 자라주지 않을 때, 아이는 실패작(불량품)으로 폐기시켜야 한다는 강박증에 빠지게 된다. 아직 멀쩡한 데도 불구하고 귀찮고 지겹다는 이유만으로 버려지는 가구나 옷처럼. 더 이상 귀엽지 않다고 유기되는 애완동물처럼.

소유냐 존재냐?

나아가 아이의 실패는 자신의 실패, 자신의 실패는 아이의 실패! 그 실패의 부끄럼(흔적)을 지워버리고 싶고, 그게 자신의 책임이자 권리인양 확신하게 된다. 또한 그 같은 용감한(?) 행위가 더러운(섭섭한) 세상 혹은 신(神)을 향한 복수(한풀이)라고 여겨 가족을 살해하고 저도 자살한다. 마지막 소유권 행사다.

잘났든 못났든, 유능하던 무능하든, 부모의 책임을 다하든 다하지 못하든, 자식에게 부모는 있는 그대로 존재의 이유가 된다. 그러니 악착같이 살아서 자식이 다 클 때까지 지켜봐줘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럼에도 정히 가야겠다면 자식은 두고 혼자 가라! 자기처럼 비참하게 살까봐? 천만에! 사람의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일, 역경과 비참은 인간을 더없이 강하게 만들기도 한다.

차마 할 말은 아니지만, 자살에도 품격이 있다. 이 나라에선 자살도 막장, 막가파다. 지혜라도 조금 남았다면 “부모로서의 도리를 다 못하고 어린 자식들을 남겨놓고 갑니다. 어느 분이든 못난 저 대신 거두어 사랑으로 길러주신다면 다음 생에서 꼭 은혜를 갚겠습니다”라는 쪽지라도 남겨놓고 갈 일이다. 아무렴 그 부모보다 못한 삶을 살지는 않을 것이다.

인성이 아니라 인품의 문제!

조선 선비정신으로 인성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애초부터 유교는 사회질서를 안정시키자는 것이 목적인 정치적 종교였다. 천하를 쟁취하는 데는 소용이 없지만 일단 쟁취한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는 더없이 좋은 도구가 되었다. 그렇지만 사회가 안정되고 나면 필시 빠르게 부패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더 이상 추구할 것이 없어 체제안정과 기득권 유지에 안주하다가 대개는 외침(外侵)에 몰락한다. 그리하여 다시 혼란기, 유교가 부활하기를 2천5백 년 동안 반복해왔다.

중학생 딸을 때려 숨지게 한 뒤 11개월가량 방치한 혐의를 받는 목사 아버지 A(47·왼쪽)씨와 계모 B(40)씨가 5일 오전 영장실질심사를 받고자 경기도 부천시 원미경찰서에서 인천지방법원 부천지원으로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중학생 딸을 때려 숨지게 한 뒤 11개월가량 방치한 혐의를 받는 목사 아버지 A(47·왼쪽)씨와 계모 B(40)씨가 5일 오전 영장실질심사를 받고자 경기도 부천시 원미경찰서에서 인천지방법원 부천지원으로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봉건시대가 다 그랬듯 유교의 윤리나 도덕에는 인격존중이나 인간존엄성 확보에 대한 개념이 없다. 조선이 망한지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하여 한국인들은 아직도 프랑스대혁명이 인류사에서 왜 그토록 위대한 사건인지,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 왜 위대한 작품인지 잘 모른다. 자기존중, 인간존엄성에 대한 인식이 없고, 또 그것을 확보하기 위해 피흘린 기억도, 치열하게 고뇌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현대사에서 벌인 이념투쟁이 고작, 그저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몸부림 친 기억밖에 없다.

스스로 쟁취한 자유도 아닌, 피강제적으로 노비신분에서 벗어난 한국인들은 노예 상태에서 배운 에티켓 수준의 예절, 규칙, 도덕관념대로 그저 막연하게 살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처 주인되기 연습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이들에게 자아니, 인간존엄이니, 독립된 인격체니 하는 말은 먼 나라 이야기다. 스스로 소유할 수 있게 된 이들에게 ‘내 아이는 당연히 내 것’이다. 심지어 요즘 부쩍 흉폭해진 연인간의 폭력도 이 비뚤어진 소유욕이 빚어낸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지난 날 주인이 자기를 부리듯 내 아이니까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단순한 의식 밖에 없다. 아이(노비)의 의사는 아랑곳없이 주인(왕)의 의지(마음)대로 길러져야 하는 것이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갑(甲)질이다. 그리고 그 기대치에 부응하여 자식은 절대복종과 열심으로 성공해서 더 센 갑(甲)이 되어야 한다. 신분상승! 그게 최고의 효(孝)다. 21세기의 한국인들은 이 고착된 봉건적 사유의 틀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격(人格)도 모르고 인권(人權)?

자나 깨나 ‘인권’을 부르짖는 나라지만 ‘인격’에 대해서는 무관심이 아니라 무개념이다. 그게 뭐 그리 중요하냐는 식이다. 인격이란 사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팔자 좋은 자들의 가식이거나 액세서리쯤으로 여긴다. ‘도가니’ 사건이나 교사들의 성추행, 보육교사의 어린이 학대도 실은 그 때문이다. 누구든 인권의 문제로만 보지 인격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

어디 그 뿐인가? 아이를 공부벌레 내지는 춤추고 노래하고 운동하고 피아노 치는 기계, 시험기계로 만드는 것 또한 따지고 보면 부모들의 폭력으로 아동학대에 해당한다. 다만 그것이 아이의 미래를 위한 선한(미련한) 의도에서라는 이유로 묵과될 뿐이다. 유럽 선진국들에선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를 온종일 가둬놓고 산보를 시키지 않으면 동물학대로 고발당한다. 한데 한국의 아이들은 하루 종일, 젊은 시절을 통째로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뺑뺑이 돌림을 당한다. 동물원보다 더한 곡마단의 동물 신세다.

현실만 그런가? 영화나 드라마에선 뻑하면 사람을 패고 죽인다. 갑(甲)질, 왕(王)질로 사회를 막장으로 몰아가는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회장님 앞에서 다른 인간은 모조리 고양이 앞에 쥐다. 아이는 동산(動産)으로 협상, 거래, 흥정, 납치, 인질의 대상이다. 그걸 태연하게 보면서 아이들이 자란다. 그 뒷감당을 누가 하랴? 방송윤리위원회는 뭣 하는 기구인지? 어린이헌장이나 학생인권조례는 어디다 쓰려고 만든 건지 모르겠다.

아이를 독립된 인격체로 대우한 적이 있는가?

유교적 가르침을 받아온 한국인들은 사람을 동등하게 바라보는 시각이 없다. 장유유서(長幼有序)! 사람 사이에는 엄격하게 지켜야 할 차례와 질서가 있다고 배웠다. 하여 절로 계급사회가 된다. 저보다 나이만 많아도 무조건 말을 높이고 허리를 굽혀야 한다. 당연히 아이는 최하층민이다. 어린이가 사회에 나가기 전에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존댓말과 배꼽인사다.

주인장 매너가 아니라 하인 매너, 을(乙)이 되는 법부터 배우는 것이다. 하인에겐 인격이 없다. 주인의식이 뭔지, 인격이 뭔지를 알 턱이 없다. 그저 주인(상전)만 알 뿐이다. 어른에 대한 무조건적인 존중은 기실 복종에 다름 아니다. 존댓말과 굽신배(拜), 습관화된 한국인과 일본인만 그걸 전통적인 미덕이라며 의심의 여지없이 자랑스러워한다.

이런 사회에서 아이들은 당연히 소유의 대상이고, 사랑(애완)의 대상이었지 인격체로서 존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단 한 번도 인격적으로 대우받은 적이 없고, 당연히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이를 인격적으로 대우할 줄을 모른다. 귀여워해주고 잘 먹이고 공부시켜 주었으니 부모로서 할 일을 다 했다고 여긴다. 아이에게 금전적으로 시간적으로 투자(?)를 많이 할수록 남보다 더 훌륭한 부모인 줄 착각한다. 그러다 그게 불가능해질 때 부모로서의 의무를 지레 포기해버린다.

타인으로부터 존중 받아본 적이 있는 어린이만이 자기가 존귀한 존재임을 알게 될 것임은 당연한 이치. 그래야 타인을 존중할 줄도 안다. 사랑을 쏟는 것과 존중하는 것은 별개의 성질이다. 비뚤어진 사랑은 있어도 비뚤어진 존중은 없다. 인격은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존중에서 나온다. 법으로 주장하고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세우는 것이다.

존중도 기술이다

가령 전 가족이 어떤 모임에 나갈 때 대부분의 한국 부모들은 자신들의 화장과 옷차림에는 신경을 쓰지만 아이들은 아무렇게나 입혀서 데리고 나간다. 또 가족끼리 외식을 나가면 어른들은 술을 시키면서 동석한 아이들에겐 음료를 주문해주길 귀찮아한다. 그냥 식당에서 주는 수돗물만 마시게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아이의 인격을 무시하는 처사로 글로벌 중상류층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바로 삼류로 추락이다.

아이들도 파티나 공적인 모임에 동행할 때에는 부모와 거의 같은 수준의 정장을 해야 하고, 이왕이면 가족끼리는 앙상블을 하고 나가 누가 봐도 한 가족임을 금방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식당에선 어린이라 하더라도 쥬스나 생수 등 음료수를 반드시 주문해서 아이를 온전한 개인으로서 어른과 동등하게 대우해줘야 한다. 설사 아이들이 마시길 원치 않는다 하더라도 각자 따로 주문해서 아이가 자기를 존중하고 존중받는 법을 배워나가게 해야 한다. 음료수 시킬 돈이 아까우면 차라리 외식을 하지 않는 것이 낫다.

프랑스에는 나이 많은 노인들도 아주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외출을 하거나 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풍경을 자주 본다. 뒷모습만 보고는 젊은 멋쟁이인 줄 착각하기 일쑤다. 굳이 젊어 보이고 싶어 멋 내는 것이 아니다. 한국인들처럼 늙었다고, 가난하다고 함부로 막 살지 않는다. 그게 자기존중 매너다. 옛날 조선의 선비 역시 그렇게 살았었다.

자기만족이 반드시 자기존중은 아니다. 명품을 사 입고 맛 난 음식 배불리 사 먹는 것은 자기만족을 채워주는 것일 뿐이다. 혹여 아이의 성공이 부모의 자기만족을 위한 것은 아닌지? 우리는 자신의 아이나 남의 아이를 인격적으로 대한 적이 있기나 한가? 어떻게 대하는 게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일까? 가정에서나 학교에서 자기존중, 인간존엄, 생명존엄을 가르친 적이 있던가? 칭찬 몇 번 해준 걸로 존중해줬다고 착각하지는 않는지?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지난해 11월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남자고교 졸업식장에서 학생회장이었던 제이크 베일리는 불과 1주일 전에 악성 백혈병인 비호지킨 림프종 진단과 함께 몇 주밖에 살 수 없다는 시한부 통보를 받았다며 마지막 연설을 하였다. 그는 “우리는 누구도 살아서 자신의 삶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래서 당당하고, 멋지고 품격 있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러분이 가진 기회에 대해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며 “우리는 언제, 어디서 삶을 끝내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더 높은 것을 추구한다’는 교훈을 늘 명심하자!”고 당부해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연설은 정치인들의 말을 누르고 지난해 뉴질랜드 매시대학이 뽑은 '올해의 인용구'로 선정되기도 했다. 다행히 제이크는 지난달 29일 그동안의 집중적인 화학요법이 성공적이어서 드디어 암에서 완전히 해방됐다고 밝혀 다시 화제가 되었었다. 인간존엄성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있었기에 이룬 기적이라 하겠다.

이외에도 전 세계에서 장애를 가지거나 불치의 병에 걸린 수많은 아이들이 역경과 고통을 뛰어넘어 정상인도 쉽지 않은 어떤 목표에 도전하고, 기어코 그 꿈을 이루어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를 우리는 단순히 ‘인간승리’라는 상투적인 수식어로 칭찬하지만 실은 ‘인간존엄성 확보를 위한 도전’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격려하고 끝까지 도우며 함께하는 주변인들 역시 마찬가지. 어찌 단순히 측은지심이나 종교적 신념, 인권보장 때문만이겠는가? 그런 바탕이 있기에 남이 버린 중증장애아까지 가족으로 거두어 키울 수 있는 것이겠다.

틀을 바꾸면 생각도 바뀐다

한국은 지금 인성교육진흥법을 시행한답시고 각 교육기관마다 아이들에게 전통예절 가르치느라 야단법석이다. 안타깝게도 고작 생각이 거기밖에 미치지 못하는 모양이다. 자유, 평등, 창조를 외치면서 시대에 맞지 않는 누천년 전 계급사회의 윤리를 고집하는 건 억지다. 오히려 변태적인 인간만 양성할 뿐으로 자식 살해도 그 억눌림과 갈등의 폭발이라 할 수 있다.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없듯 우리의 행동거지를 그 옛날의 틀에 맞출 수는 없는 노릇, 예법이 시대를 따라 변해줘야 한다.

전통이 소중한 것은 사실이지만 절대적인 가치를 지닐 수는 없다. 인간존엄성 확보 없이는 그 어떤 인권헌장, 인권조례, 인성교육진흥법도 대안이 될 수 없다. 아이들에게 우선으로 가르쳐야 할 것은 삼강오륜이 아니라 자기존중의 기술이다! 품격 없인 존중도 없다. 글로벌 소통매너 교육이 그 시작이다. 많이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야 한다. 어른들부터 배워야 한다.

글/신성대 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데일리안 기자 (dmswnl20@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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