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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들의 문학교과서 제대로 보신 적 있나요


입력 2015.12.14 10:07 수정 2015.12.14 10:15        데스크 (desk@dailian.co.kr)

<굿소사이어티 칼럼>반대한민국 정서로 오염

친일작가 용서 못해도 월북작가는 ‘특별대우’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이 이어지고 잇는 가운데 문학교과서도 편향성이 심각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사진은 현행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중 수정 명령을 받았던 교과서 6종. ⓒ연합뉴스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이 이어지고 잇는 가운데 문학교과서도 편향성이 심각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사진은 현행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중 수정 명령을 받았던 교과서 6종. ⓒ연합뉴스

역사 교과서와 문학 교과서(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문학 부분과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를 지칭) 가운데 어느 쪽에 문제가 더 많은가? 물론 이런 비교를 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다. 어느 과목 하나 좌편향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상황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이런 제목을 내세우는 이유는, 사회 교과서보다, 역사 교과서보다 문학 교과서가 더 큰 문제들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문학 교과는 다른 어떤 과목보다 더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 그 이유는 첫째, 문학에서 얻은 감동이 학생이라는 한 인간의 삶 자체를 바꿔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청소년들은 문학 작품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간접 체험을 하기 때문이다. 셋째, 요즘의 청소년들은 학교 교육이 아니면 거의 문학 작품을 접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학 교과는, 청소년들이 양질의 문학에 이르게 해주는 거의 유일한 통로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 중요한 문학 교과서의 내용 사이사이에는 아닌 척하면서 그러나 더욱 확실하게 반 대한민국 반 자본주의 정서를 심어놓을 수 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교과서가 문학 작품의 발췌 게재로 이뤄진다는 점과 작품의 상징성을 교사가 해설해준다는 수업 특성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왜 하필 그렇고 그런 작품만 골랐을까?

이런 글을 쓰고 토론을 할 때마다 필자가 늘 전제로 두는 점이 있다. 그것은 이런 논란의 중심에 서는 것은 문학 작품 자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문학 작품 자체에 대해 평가하고 비판하거나 편향성을 지적할 의도는 없다. 우리나라에는 엄연히 표현의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단지 필자가 의혹을 갖는 것은 교과서 편자들의 의도에 대해서이다. 그 많은 문학 작품 가운데 왜 하필 그 작품을, 그 긴 내용 가운데 왜 하필 그 부분을 골라 실었을까?

교과서에서 수록 작품들이 단원의 목표에 얼마나 충실한지, 어떤 점 때문에 그 작품을 실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찾아보기 어렵다. 어차피 문제의 편자들에게 단원의 목표는 중요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필자의 의혹처럼 단지 교사가 그 내용을 이용하여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폄훼하게 유도할 수 있는 작품과 부분을 고르는 데 역점을 두었다면 말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어떻게 반국가적 • 반기업적 • 반시장적 정서를 주입할 수 있는지 그 예를 살펴보겠다.

침략한 적은 미화하고 남한은 못 살 곳이라고?

교학사(김형철) 1학년 2학기 교과서(중)에 실린 권정생의 ‘몽실언니’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왜 그렇게 무서운 전쟁을 하는 거여요?” “서로 남의 나라 땅을 빼앗으려고 그런단다.” 6.25전쟁은 분명 북한이 불법으로 침략한 전쟁이다. ‘서로’ 남의 나라 땅을 빼앗으려고 한 전쟁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이 교과서에 소개된 ‘몽실언니’의 일부분에는 몽실이를 죽음에서 구해주는 착한 인민군 오빠와 몽실이에게 식량을 나눠주는 착한 인민군 언니가 연달아 나온다. 장편 동화 중에 하필 그 부분을 골라 실은 교과서 편자의 저의는 무엇일까?

디딤돌 3학년 2학기, 좋은책 1학년 1학기, 지학사 1학년 2학기 교과서(이상 중), 디딤돌 문학 상(고)에 실린 황순원의 소설 ‘학’에서도 문제를 찾을 수 있다. 6.25전쟁 때 농민동맹 부위원장으로 부역했던 죽마고우를 호송하게 된 주인공의 이야기. 어릴 때를 생각하며 결국은 그를 풀어준다. 사사로운 감정과 개인의 임의적 판단으로 적에 협조한 사람을 풀어주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탈출한 다음 두 사람의 삶은 어떻게 변할까? 도망간 친구는 결국 공산 진영으로 갈 것이다. 자유 진영으로 오면 다시 붙잡혀 더 큰 벌을 받을 것이니까. 풀어준 친구는 전시에 적을 풀어준 일로 중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창비 문학2(고)와 디딤돌 문학 상(고)에 실린 최인훈의 ‘광장’은 여러 출판사가 선택해온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특히 많이 다뤄지는 부분은 주인공 이명훈이 남한도 북한도 아닌, 중립국을 선택하는 부분이다. 그 과정에서 남한은 게으름과 방탕한 자유가 있는 곳으로 묘사된다. 고귀한 자유가 왜곡되고, 남한이 북한이나 다를 바 없이 살만한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심어줄 수 있다.

1970년대의 경제 개발 성과 폄훼

문학 교과서에 실린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경제 개발은 우리에게 삶의 풍요나 국가의 발전이 아닌 인간 소외 현상과 빈부의 양극화를 가져다 주었다. 그 여파는 지금도 계속되어 서민은 부자에 눌려 비참하게 살고 있다는 자기 연민에 빠지게 할 왜곡의 여지가 충분하다.

미래엔 2학년 1학기 교과서(중)에 실린 최일남의 ‘노새 두 마리’의 배경은 1970년대 서울 변두리 동네. 노새로 연탄 배달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고단한 삶을 그리고 있다. 교과서에서는 이 시대를 극도의 인간 소외 현상이 일어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시대로 가르친다.

교학사와 비상교육 3학년 교과서(중), 천재-고 천재-정 비상-박 미래엔 지학-최(이상 고)에 실린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갈등은 산업화가 한창일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비 문학2(고)와 해냄에듀 문학2(고) 등에 실린 신경림의 시 ‘농무’도 왜곡의 여지가 많다. 실제 자습서에는, 1970년대에는 1960년대의 산업화 정책에 따라 농업의 일방적 희생으로 고도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는 해설도 실려 있다. 고도 성장의 이면에서 소외된 농촌이 더 피폐해졌고 유신 체제의 정치적 상황과 산업화 양상으로 농촌이 급속도로 황폐화된 현상을 읊은 시라는 것이다. 새마을 운동 등을 통해 농촌이 예전보다 오히려 잘 살 수 있게 되었다는 내용은 당연히 언급하지 않았다.

친일작가 용서 못해도 월북작가는 ‘특별대우’

월북 작가와 친일 작가의 작품에 대한 편자들의 태도도 문제이다. 친일 작가가 민족에 대한 배신자라면 월북 작가는 대한민국에 대한 배신자이다. 이름 석자도 제대로 내밀 수 없었던 월북 작가들은 1988년에 해금을 맞았다. 그런데 친일 작가들을 갈수록 설 자리가 좁아진다. 그 차이는 무엇 때문에 생겼을까? 바로 교과서 편자들의 성향 때문이다.

미래엔 1학년 1학기 교과서(중)에 실리는 첫 작품, 다시 말해 중학교 입학해서 처음 배우는 문학 작품인 ‘해바라기 씨’는 정지용이라는 월북 작가의 작품이다. 같은 책, 중학생이 되어서 처음 배우는 소설은 현덕의 ‘나비를 잡는 아버지’이다. 위키백과에는 현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현덕(1909년 2월 15일~?)은 일제 강점기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소설가, 시인, 아동문학가이다. …… 광복 후 월북을 한 이후에는 1961년까지 작품 활동을 계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카프의 이념적 성향과 대체로 방향이 일치하는 작품을 썼다.”

‘나비를 잡는 아버지’에는 ‘가진 자=막돼먹은 인간’ ‘못 가진 자=피해자’라는 편 가르기가 확연히 드러나 있다. 이렇게 작품에 작가의 사상적 성향이 드러나는데 월북 작가의 작품을 교과서에 싣는 것은 문제 삼지 않는다. 우리나라 대표 서정시인 서정주의 시가 친일파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2000년 이후 국정 교과서에서 다 빠진 것과는 대조되는 현상이다.

약자는 무조건 선하다는 눈먼 논리의 반복

앞서 언급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난쟁이 아들딸 세 명이 각각 1인칭 화자가 되어 소설을 이끌어가고 있다. 그들은 모두 피해자로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직장에 다니는 성인인 세 자녀는 난쟁이인 아버지의 그늘 밑에서 여전히 살고 있다. 그것을 보면 그들이 오히려 난쟁이 아버지를 더 확실히 착취하는 가해자가 아닐까? 그러나 자신들을 피해자라 여기는 주인공들은 여러 종류의 범법을 저지른다. 그리고는 그 책임을 가진 자에게, 혹은 그들을 비호하는 사회에 돌린다. 법을 지켜야 한다는 건전한 사고를 가진 난쟁이가 오히려 답답한 사람으로 비춰진다.

해냄에듀 문학2(고)에 실린 김정한의 ‘산거족’ 주인공 황거칠은 남의 산을 무단으로 사용했다가 법원에서 패소한다. 판결에 불복하자 강제 철거가 진행되고 경찰에 연행되었다 풀려난 후에도 폭력을 다짐하는 황거칠 일행이 선한 사람, 도와줘야 하는 사람으로 그려져 있다. 이런 작품을 통해 경제력을 가진 사람들, 즉 대기업이나 재벌 등에 대한 부정적 의식이 길러지고 경제적 약자는 법을 지키지 않고 떼를 써도 되는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다. 또 소시민의 희망을 짓밟는 행위를 사회가 용인한다는 식의 이야기로 사회에 대한 불신을 키울 수 있다.

디딤돌 문학 상(고)에 실린 같은 작가의 작품 ‘모래톱 이야기’에서는 낙동강 하류의 조마이 섬 주민인 갈밭새 영감이 섬을 지키려다가 살인을 한다. 자칫 약자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살인을 불사해도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천재-정 지학사-권 비상-박 디딤돌 문학(고)에 실린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의‘나’는 불법으로 토지를 불하받았으면서 그것에 대한 법적 처리 과정에서는 약자인 양 정부에 저항하고 있다. 이런 작품을 통해 내게 유리하면 말없이 받아들이고 내게 불리하면 떼를 쓰고 나오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을 심어줄 수 있다.

안보의식을 독재의 수단으로 왜곡하는 장난질

디딤돌 문학 상(고)에 실린 이강백의 희곡 ‘파수꾼’에는, 이리 떼라는 가상 현실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구축하고 유지하려는 촌장과 그에 기만 당해 진실에 접근하지 못한 다수의 민중, 이리 떼가 가상에 불과하다는 진실을 밝히려는 파수꾼이 등장한다. 1970년대 국가 안보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며 국민의 자유와 여러 권리를 박탈했던 상황을 우화로 표현했다고 한다. 당시 독재 정치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안보까지도 이렇게 허구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물론 이상에서 예로 든 작품들이 자체 개편을 통해서 이미 빠졌거나 다른 부분으로 바뀌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내용을 실었던 편자들의 기본 정신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니 지적된 내용이 빠졌다고 방심할 것이 아니라 다른 부분 어디에 또 다른 문제적 내용이 숨어 있는지 더욱 면밀히 살펴야 할 일이다.

또 이런 논의에 자신의 작품이 거론된 작가들은 이를 불쾌하게만 여길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이 실린 교과서 감시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자신들의 작품이 원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혹은 앞뒤 맥락은 다 생략된 채 불순한 의도를 가진 편자들에 의해 악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학 교과서 수록 작품에 담긴 상징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원래 학생들의 몫이다. 그런데 학교 일선에서의 문학 수업은 주로 교사가 작품의 내용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러한 이유로 문학 수업에서의 교사의 역할은 다른 어떤 과목의 수업보다 훨씬 지대할 수밖에 없다. 우리말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다. 같은 말이라도 뉘앙스에 조금만 변화를 주면 전혀 다른 말이 되어버린다는 얘기다. 전국에 퍼져 있는 문학 교사들의 성향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교사들을 어떤 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보다는 편향된 해설로 이끌어갈 수 있는 작품을 교과서에서 아예 배제하는 것이 더 쉬운 방법일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수업 시간에 교사들에 의한 왜곡이 일어날 여지를 줄이기 위해 문학 교과서에 다음과 같은 작품들을 수록할 것을 제안한다. 물론 문학성 높은 작품으로 골라서 말이다.

# 시련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담긴 내용
# 장애인, 외국인 등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도 차별 없이 융합되어 살아가는 내용
# 이념적 편견을 주지 않을 수 있는 내용
# 전통 문화와 장인 정신 계승에 대한 긍정적인 내용
# 국가나 사회, 공동체에 대한 감사나 희망을 담은 내용
# 문학사적으로 확실한 가치를 지닌 작품
# 사상적 편향성이나 도덕적 문제를 지니지 않은 작가의 작품
# 자살 등 극단적 해결 방법을 내놓지 않는 작품
# 학생 스스로에게 창작의 의욕과 기회를 제공하는 작품

우리에게는 이미 수많은 양질의 국문학 작품이 있다. 또 지금 이 시간에도 아름다운 문학 작품이 계속 창작되고 있다. 그 가운데서 청소년들을 행복하게 하고 건전한 철학을 심어줄 수 있는 작품은 얼마든지 고를 수 있다. 청소년들이 그런 작품들을 읽고 자라야 우리나라의 미래가 밝아질 수 있다. 문학 교과서를 바로 잡는 것은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해 중요하고도 시급한 문제이다.

글/황인희 역사칼럼니스트·두루마리역사교육연구소 대표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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