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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 '관치'에 저항한 재계 큰어른 정주영


입력 2015.11.24 08:55 수정 2015.11.24 09:23        박영국 기자

<탄생 100주년 기획-아산 정주영에게 배운다(하)>

신군부 압력에도 "경제는 민간이 주도해야" 뜻 안 굽혀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1980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정 명예회장은 1977년 4월부터 1987년 2월까지 10년 동안 제 13~17대 전경련 회장직을 맡아 재계의 수장으로 활동했다.ⓒ아산정주영닷컴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1980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정 명예회장은 1977년 4월부터 1987년 2월까지 10년 동안 제 13~17대 전경련 회장직을 맡아 재계의 수장으로 활동했다.ⓒ아산정주영닷컴

“정부는 유효경쟁체제가 유지될 수 있도록 기업환경을 조성해 통화신용정책과 환율조정 등의 일반 정책으로써 경제활동을 유도하고, 산업분야는 민간기업인의 자유경쟁원리에 일임하는 방향으로 전환시켜야 한다.”(1978년 9월8일 고려대 최고경영자교실 특강에서)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끌었다는 점 외에 경제계에 남긴 또 다른 큰 족적은 정치적 격동기에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으로서 ‘큰어른’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특히 경제계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위해 기업 강제 통폐합 등 전횡을 일삼던 전두환 신군부에 맞서 산업분야는 민간기업인의 자유경쟁원리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경제계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격동의 시기에 전경련 회장 맡아…기업 통폐합 반대하다 신군부와 갈등

정 명예회장은 1977년 4월 기업인들의 만장일치 결의를 통해 전경련 회장에 추대된 이후 다섯 번을 연임하며 1987년 2월까지 10년간 경제계를 이끌었다.

이 시기는 대한민국 현대사를 통틀어 가장 혼란스러웠던 격동의 시기였다. 그가 전경련 회장을 맡은 지 2년 뒤인 1979년 10·26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고, 그해 12월에는 전두환, 노태우 등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가 일으킨 군사반란사건 12·12사태가 벌어졌다.

신군부는 경제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민간 기업을 공사화하거나 통폐합하는 내용의 일명 ‘투자조정’을 단행했다. 주요기업 그룹의 계열사 166개 기업들을 1984년까지 강제 정리하는 내용의 시책까지 발표했다.

이런 살벌한 와중에서도 정주영 당시 전경련 회장은 1978년 고려대 특강에서 언급한 ‘경제는 민간이 주도해야 한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1982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과 환담하고 있다.ⓒ아산정주영닷컴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1982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과 환담하고 있다.ⓒ아산정주영닷컴

정 명예회장이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맡던 시절인 1974~1988년 전경련 국제담당 상무 등을 지내며 그를 보필했던 박정웅 메이텍 대표는 정 명예회장을 ‘신군부로부터 경제계를 지켜낸 인물’로 회고했다.

“전두환 씨가 박정희 대통령 시해 이후 12·12사태로 권력을 잡았는데, 군부 인사들이 갑자기 정권을 잡으면 기반이 없으니 사방에 자기 힘을 과시해서 사회 각계가 자신을 무서워하고 따르게 해야 되는데 경제계가 그 타깃이 됐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한 게 대한상의 회장과 무역협회 회장, 중소기업중앙회 회장, 중소기업 회장을 갈아치운 것이고, 대기업들이 모인 전경련도 정주영 회장이 고분고분 말을 안들으니 바꾸려고 갖은 압력을 행사했었죠.”

정 회장은 신군부의 기업 통폐합 작업이 한창이던 시절 경영자총협회에서 주관하는 업계간담회에서 “한국이 사회주의사회도 아닌데 정부가 나서서 민간이 만든 기업을 강제로 통폐합하려 한다”라는 발언을 했을 정도로 신군부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였다.

당시 신군부는 경제수석과 상공부장관 등 고위 관료들을 동원, 압력을 가해 정 명예회장을 전경련 회장에서 물러나도록 압력을 가했고, 정회장의 전경련 회장 2차 연임 임기가 끝나는 1981년 2월 20차 전경련 정기총회에서 그들과 원만한 협조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인물이 선출되도록 내정해 놓고 물밑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정 회장 역시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압력에 버텼다가는 전경련이 대정부 관련 사업을 펼치는 데 바람직하지 않겠다는 판단 하에 정기총회에서 연임을 고사하겠다고 밝혔다.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1981년 10월 8일 한국을 대표해 아시아경제계 지도자회의에 참석하고 있다.ⓒ아산정주영닷컴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1981년 10월 8일 한국을 대표해 아시아경제계 지도자회의에 참석하고 있다.ⓒ아산정주영닷컴

하지만 당시 롯데그룹을 대표해 회의에 참석한 고 유창순 회장이 의사진행 발언에 나서며 상황은 뒤바뀌었다.

그는 “전경련은 경제정책에 대한 의견을 정부에 건의하는 순수한 민간경제단체인데, 정부가 갑자기 회장을 바꾸려고 한다”면서 “정주영 회장이 반드시 전경련 회장을 하라는 법은 없지만, 정부 압력으로 바뀐다면 더 이상 전경련은 민간 경제계를 대변하는 자율단체가 아니게 된다”고 주장했다.

참석자들이 이에 박수로 동의하며 다시 정 명예회장이 만장일치로 연임하게 됐다.

박 대표에 따르면, 그 뒤에도 전두환 정권은 여러 차례 전경련 회장 교체를 위해 압력을 가했고, 정 명예회장은 ‘경제는 민간이 주도해야 한다’는 신념을 고수하며 전두환 전 대통령과 정 명예회장의 관계는 더욱 악화됐다.

◇올림픽 유치 계기로 전두환과 관계 급진전…경제계 의견 적극 전달

그렇다면 이처럼 정부에 ‘반골’로 낙인찍힌 정 명예회장이 어떻게 이후에도 오랜 기간 전경련을 이끌며 경제계의 목소리를 대변해 왔을까.

반전의 계기가 된 건 88올림픽 유치였다. 모두 안될 것이라 생각했던 올림픽 유치를 정 명예회장이 보란 듯 성공시켜 놓으니 전두환 전 대통령 입장에서도 자신의 재임 기간 큰 업적이 될 만한 일을 해준 정 명예회장을 홀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박정웅 대표는 당시 상황을 이같이 회상했다.

“올림픽 유치가 확정되고 나서 전 대통령을 비롯, 국내 정계와 경제계, 문화계 인사들이 참석하는 기념 리셉션이 열렸는데, 막판에 대통령이 한마디 하는 자리에서 갑자기 ‘내가 이 기회에 꼭 해야 할 말이 있다. 우리나라에 바람직한 지도자상이 어떤 것인지를 얘기하고 싶다’ 하더니 정주영 회장을 언급하는 겁니다. 둘이 사이가 얼마나 나빴는데, 갑자기 분위기 반전이 된 거죠.”

당시 리셉션에 앞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올림픽 유치의 주역 정 명예회장과 접견하는 자리에서 대통령이 여러 가지 부족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올림픽 유치를 성공시킨 점을 치하하자 정 명예회장은 “저는 영어도 못하고 국제 감각도 없습니다. 저는 한 게 별로 없고 다른 사람들이 도와줘서 유치에 성공했습니다”며 공을 주변 사람들에게로 돌렸다고 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이들 두고 “정주영 회장이 각별한 아이디어를 내서 조직위원들을 설득한줄 알았더니 주변 사람 공으로 돌리더라”면서 “우리나라 지도자들은 뭘 하나 하면 생색만 내기 바쁜데, 정 회장의 겸손함과 호연지기에 반했다”고 리셉션 내빈들에게 말했다.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1981년 서울올림픽 유치위원장 자격으로 유치확정서에 공식 서명하고 있다.ⓒ아산정주영닷컴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1981년 서울올림픽 유치위원장 자격으로 유치확정서에 공식 서명하고 있다.ⓒ아산정주영닷컴

이 일을 계기로 둘 사이의 갈등은 해소되고 가까운 관계가 되면서 정 명예회장은 대통령에게 국가경제정책 관련 의견을 전달하고, 경제계를 대표해 대통령에게 바른 말을 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고 박 대표는 전했다.

특히, 한국경제의 선진화를 위해서는 ‘관(官)주도 경제’에서 ‘민간(民間)주도 경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정부에 전달해 1980년대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을 촉진시키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재계에는 전체의 뜻을 모으고 이를 강력한 목소리로 정부에 전달할 리더가 사실상 없었다”며 “정주영 전 회장과 같은 ‘큰어른’이 있었다면 각종 현안에서 재계의 답답함을 풀어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영국 기자 (24py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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