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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대기업 사라지면 우린 정말 행복해지나


입력 2015.10.17 09:58 수정 2015.10.17 09:58        데스크 (desk@dailian.co.kr)

<굿소사이어티 서평>불평등해야 평등해지는 역설의 경제학

'박정희, 살아있는 경제학' 좌승희 지음 백년동안 펴냄 '박정희, 살아있는 경제학' 좌승희 지음 백년동안 펴냄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 속담은 상대적인 소외감에 민감한 인간 마음을 말해준다. 그게 보편적인 심리구조임을 드러내주는 우화가 러시아에도 있는데, 이건 좀 섬뜩하기조차 하다. 애써 외면해왔던 인간심리의 한 구석을 들키는 느낌 때문이다. 확실히 인간은 작은 차이, 사소한 격차에 예민하게 반응하는데, 우화는 이렇다. 어느 날 시골 농부가 신기한 요술 램프 하나를 발견했다. 만지작거리던 순간 그 램프에서 요정이 튀어나온다.

요정은 “소원을 말하세요. 지금 즉시 들어드리겠습니다.”고 요청했는데, 농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웃집 염소 얘기를 꺼냈다. “글쎄 그 사람이 염소 한 마리를 키우는데 젖도 잘 나오고 새끼도 줄줄이 낳는 바람에 저와는 비교도 안 되는 부자가 됐다는 거 아닙니까.” 요정이 물었다. “그럼 염소 두 마리를 만들어드리면 소원 성취를 하시는 거네요?”이때 농부의 대꾸가 뜻밖이었다. “그런 게 아니라오. 내 소원은 부디 이웃집 그 염소 한 마리를 죽여 버리는 거니까.”

부자-대기업만 사라지면, 우린 행복해지나?

‘이웃집 염소 죽이기’는 더 이상 우화가 아니라 지금 이 나라의 집단정서로 자리 잡았다. 예전엔 재벌청산에 경제력집중 해체라는 구호로 등장하더니 지금은 사회적 기업, 경제민주화, 보편복지 따위의 유행어로 반복된다. 그건 부자와 대기업만 사라지면, 즉 이웃집 염소 한 마리만 죽여 버리면, 대한민국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섬뜩한 공식이다.

실제로 ‘염소 죽이기’는 지난 30년 가깝게 한국인 모두를 사로잡았던 신조였음을 기억해두자. 민주화 항쟁 이후 형성된 87년 체제란 정치에서 과잉 민주주의의 등장을 알렸지만, 경제의 측면에서는 평등주의의 늪을 뜻한다. 헌법에 명문화된 경제민주화가 그걸 새삼 말해주는데, 핵심은 격차 따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앙앙불락이다. 한국경제가 왜 바닥을 기는가에 대한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핵심은 그 대목이다.

투자가 부진하고 기업가 정신이 퇴조한 탓이라는 진단이 있는가 하면, 한국형 발전모델의 한계라는 주장도 있지만, 그건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1960~80년대 8%대 고성장을 거듭하던 한국경제가 지금 3% 저성장에 목매는 건 평등주의 신조, 즉 이웃집 염소 죽이기 심리 때문이다. 기업 성장이 곧 경제발전이라는 판단 아래 더 많은 일류기업을, 더 많은 염소를 키울 생각을 하는 사람이 드물어진 게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다.

이런 배경에서 등장한 경제학자 좌승희 박사의 새 책 <박정희, 살아있는 경제학>(백년동안)은 너무도 소중하다. 이 책은 87년 체제가 애서 땅에 파묻어왔던 박정희 경제운용의 철학과, 새마을운동의 원리 안에 모든 게 담겨있다고 본다. 한국인들은 자기 안의 보물을 채 모른 채 살고 있다고 해도 된다는 뜻이다. 박정희야말로 살아있는 경제학의 틀을 제시한 지도자라는 얘기인데, 때문에 이 책 제목은 <경제학, 박정희에게 길을 묻다>로 정해도 됐을 정도다.

‘박정희 반대로’가 정치경제 개혁인가?

터놓고 말해 지난 30여 년 한국민은 ‘박정희 반대로’하는 게 권위주의 청산이고, 정치경제 개혁이라고 하도 굳게 믿는 바람에 박정희 경제발전 드라이브와 새마을운동에 담긴 경제원리를 바라 볼 기회를 스스로 놓쳐왔다. 그래서 새마을운동의 가치를 알아본 외국에서 한 수를 배우고 싶어서“무엇이 새마을운동의 원리입니까?”라고 물어오면 모두 우물쭈물한다. “하면 된다는 캔 두 스피릿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게 전부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다짐? 세상 어디에 그런 걸 강조하지 않았던 사회가 역사에 없었고, 그걸 내세우지 않았던 교육이 동서고금에 없었다. 그런데도 왜 한국 땅의 1970년대 새마을운동만이 유독 성공한 개혁운동으로 각광받는가? 우린 막상 그걸 잘 모르며 산다. 왜 유럽의 4H운동이나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 북한의 천리마운동 같은 비슷한 시기 각 지역의 사회개혁프로그램은 지지부진했거나 거꾸로 정치사회적 재앙으로 이어졌는데 비해 왜 새마을운동만이 거대한 성공을 거뒀는가?

고백하자. 상식이지만 한국인은 대다수가 가까운 현대사의 일을 잊고 살자는 거대한 집단망각과 어이없는 허위의식에 빠져 산다. 경제학자 좌승희 박사의 지적대로 “국내외 경제학계가 그 성공의 동인을 모르고 있다”(<박정희, 살아있는 경제학> 166쪽)는 학문적 블랙홀이 우리의 냉정한 현실이다. 상황이 이토록 고약하니 지방에 있는 영남대 정도 한 곳에 박정희 리더십과 새마을운동을 가르치는 코스가 있다.

또 그들이라고 새마을운동의 원리를 대내외적으로 설명해줄 능력을 갖추고 있는가는 별도의 문제다. 박정희가 새마을운동을 전개하던 40여 년 전 야당 측은 “그건 정치운동의 일환”이라며 엉터리 공격을 감행했는데, 그런 오해는 지금도 여전하다. 그래서 영남대의 그 코스워크를 정권유지 차원이라고 냉소하는 이들이 지식인 그룹에 수두룩하다.

이런 고약한 상황에서 촌티 나는 새마을운동이란 말에 격차와 불평등을 외려 경제발전의 원리로 삼는, 이웃집 염소 죽이기와 정반대로 해 가난을 물리친 놀라운 경제원리의 발상이 숨어있다고 보는 학자 역시 드물거나 전무하다. 예외가 있다면 조금 전 언급한 경제학자 좌승희 박사다. 그는 말한다.

“‘이웃집 염소 죽이기’와 정반대로 훌륭한 이웃, 흥하는 이웃을 옆에 두고 따라 배우는 것이 성공의 첩경이자, 새마을운동의 핵심원리이다.” 이웃집에서 염소를 키워 부자가 될 때 그 격차를 기꺼이 인정하라는 것이다. 그것에 괜한 분노와 원한의 마음을 품지 말고 분발해야 한다. 이를테면 스스로 나서서 염소 두 마리, 세 마리를 키우려는 것이야말로 “하면 된다”는 캔 두 스피리트의 구체적 방법이요, 자조 자립의 노하우라고 그는 쉽게 귀띔해준다.

“훌륭한 이웃을 옆에 두고 배우는 것이 성공의 첩경이다. … 세상의 모든 변화는 흥하는 이웃을 따라 배우는 과정의 연속이다. 문화진화라는 경제의 발전과정 또한 후발자가 선두주자를 무임승차하여 배우는 과정이다.”(33~34쪽)

편견을 버린 채 이념의 옷을 벗겨내고 보면 간단한 얘기다. 기업의 성장과 경제력의 집중 없이 경제가 발전하는 사례가 없다. 격차를 허용하지 않고 경제발전은 없는 게 엄연한 진실인데, 세상은 매번 그걸 외면하기 마련이다. 박정희 시절이 대기업 우대정책을 폈다고 모두들 오해하지만, 1960년대 초 당시엔 대기업이 없었으며 때문에 중소기업을 집중 지원해 몸집을 불리는데 성공했을 뿐이다. 박정희는 경제적 차별화, 즉 격차가 시장경제의 기본원리라는 걸 꿰뚫어봤고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기 위해 선택과 집중을 했을 뿐이다.

그래서 중소기업을 대기업으로 키워냈고. 수도권의 비약적 발전을 이끌어냈으며, 바로 뒤이어 가난하고 게으른 전통마을을 부지런하고 스스로 돕는 셀프 헬프의 새마을로 바꿔놓았다. 맞다. 그의 시절 존재했던 것은 기적적인‘부익부 빈익부’의 과정이었다. 그런데도 세상은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스테레오타입에 따라 세상을 보려 하기 때문에 그 시대 진실을 보는데 실패한다.

박정희 “정권을 내주더라도 차등지원한다”

박정희의 핵심 스태프이던 비서실장 김정렴은 그걸 “조국근대화의 행동철학”이라고 규정하는데, 그게 과장이 아니다. 한마디로 새마을운동은 정치논리를 배제한 채 격차를 활용한 인센티브 주기의 지원방식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성공을 거뒀다. 그게 확실히 드러난 게 새마을운동 제2차년도인 1971년이다. 잘하는 마을 단위만을 선택해 집중 지원한다는 원칙을 그 해에 가장 강력하게 밀고 나갔던 성패를 갈랐다.

이런 얘기다. 그 전해에 정부는 전국 3만4천 개 마을에 시멘트 200~300포대와 현금을 적절히 배분했다.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유심히 체크해봤는데 공식적 채널과 별도로 비공개 감찰을 통해 입체적으로 성과를 살폈다. 시멘트 포대를 야적해놓은 채 비를 맞추는 식의 마을이 절반이나 됐다. 이걸 파악한 박정희는 이듬해 성과가 좋았던 마을 1만6천 곳에만 집중 지원을 결심했다. 시멘트 100~200 포대와 현금을 추가로 뿌렸다.

물론 전국의 절반을 조금 넘는 마을에는 현물과 돈 지원을 모두 끊어버린 가혹한 결정인데, 이게 엄청난 정치적 논란 끝에 이뤄진 거의 혁명적 조치임을 기억해야 한다. 본래 국무회의에서는 ‘차등 없는 지원’을 결정했는데, 이걸 뒤집었던 것도 박정희 본인이었다. 당정에서 난리가 났다. 집권 공화당의 사무총장 길전식과, 내무장관 김현옥 등이 그렇게 하면 정치적 부작용이 심각하다고 뜯어말렸다.

71년 4월에는 대통령선거가 있는데, 현물과 현금 지원을 받지 못한 전국의 농어촌 절반은 박정희 후보에게 표를 줄 리 만무라는 게 이들의 논리였다. 이걸 정면돌파한 게 박정희였다. 그는 “정권을 내주는 한이 있어도 차등지원을 하겠다.”는 게 그의 단호한 발언(좌승희-김창근 지음 '이야기 한국경제' 69쪽)이다. 놀랍게도 기적이 일어났다.

지원에서 탈락한 1만8천개 마을 중 3분의1에 해당하는 6000곳에서 “우리도 염소를 키우자”는 쪽으로 성큼 돌아섰다. “이웃집 염소를 죽여달라”고 하소연하거나, 이웃집에서 뭘 하든지 관심 없다고 나자빠져 있는 대신 새로운 선택을 한 것이다. 균등 배분을 거부한 정부의 꾸준한 강공 드라이브가 이들의 잠재력을 흔들어 깨운 놀라운 승리다.

이후 박정희는 차등지원을 보다 세분화하면서 인센티브 주기를 불문율로 만들었다. 전국의 마을을 참여도가 낮은 기초마을, 중간의 자조마을, 최고의 성취를 보인 자립마을 등 3단계로 구분해 상위 두 개 그룹만을 골라서 지원했다. 분발하지 않으면 지원은 전혀 기대할 수 없다는 공식을 만들어 정면돌파를 한 것이다.

그 결과 새마을운동이 벌어진 지 딱 5년째 되는 해인 1974년 믿기지 않는 결과가 일어났다. 농촌과 도시의 가구당 소득수준이 같아졌다. 김정렴의 말대로 새마을운동 지원방식은 “조국근대화의 행동철학”인데 그게 과장이 아닌 게 수출진흥정책과 중화학공업육성정책 역시 능력과 성과에 따른 차등지원 방식이 여축 없이 작동됐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실은 새마을운동만은 박정희가 직접 핸들링을 했던 매우 예외적인 프로젝트였다. 그랬기 때문에 여하한의 정치논리 배제가 가능했다는 점도 기억해두자.

그의 사후 새마을운동은 빠르게 망가져갔다. 이후 집권한 전두환은 민간자율로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새마을운동중앙본부란 조직을 중앙에 만들고 관련법까지 제정했다. 결과는 우리가 잘 안다. 권력자가 회장을 맡으면서 새마을운동은 정치운동화됐고 관변단체의 하나로 추락했다. 더 결정적인 건 따로 있다. 5공 이후 농어촌 지원에서 ‘성과에 따른 차별지원’은 실종됐다. 엄두도 못 냈다.

정치의 셈법에만 밝은 정치인과 관료들은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n분의 1씩 갈라주고 갈라먹는 일에 익숙했다. 새마을운동의 차별화 지원의 신화는 이 바람에 완전히 잊혀졌다. 6공과 김영삼 정부를 거치면서 세상은 더욱 그러했다. 정치적 민주화 속에서 WTO 가입을 전후한 농업시장 개방 때 농업구조조정을 을 못 꿨다. 김영삼 정부는 1백 수십 조 원 규모의 자금을 농업 구조조정과 무관하게 즉 성과와 상관없이 무차별적으로 배분하는데 허겁지겁했을 뿐이다.

김대중 정부도 농어촌부채 탕감을 한다며 획일적으로 금리를 탕감했다. 이제 가늠이 되시는가? 박정희 시절 그토록 작은 지원으로 경제기적이 연출됐지만, 이후 그토록 천문학적 규모의 돈이 살포됐지만, 농어촌은 항상 지원 받는 곳으로 남아있다. 아직도 쌀 시장 개방문제는 풀리지 않는 난제로 남아있고, 구조조정은 탁상공론으로 지지부진하다.

자 결론이다. 좌승희는 염소 죽이기 대(對) 부자 마을 따라하기의 역설을 이렇게 표현했는데, 오래 기억해둘 만하다. “평등을 추구한 경제는 불평등해지고 역으로 불평등을 허용한 경제는 오히려 평등해지는 게 역설이다. ‘자본주의의 불평등 모순’을 적극 수용하는 나라는 오히려 그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성공하지만 이를 적극 청산하려는 나라는 하나같이 오히려 그 불평등의 질곡에 더 깊이 빠지고 있다는 역설에 빠진다.

글/조우석 문화평론가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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