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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계백이 칼을 갈았다는 ‘송정마을 선돌‘의 비밀


입력 2015.09.20 10:32 수정 2015.09.20 10:38        최진연 문화유적전문기자

<최진연의 우리 터, 우리 혼 - 성석기행>치성 드리면 득남

공주 이인면소재지에서 금강방향인 지방도 96호를 따라 대학리 가는 길에 이곡리가 있다. 마을 끝 지점 도로 옆 언덕에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이곳에 남근석이 있다. 이곡리 남근은 모두 3기다. 느티나무에서 약 30m 정도 떨어진 다리아래 계곡에 1기가 있으며, 또 하나는 농로를 따라 200m 정도가면 산기슭에 1기가 있다.

하지만 계곡과 산기슭의 선돌은 돌무더기만 남아 있고 남근은 누군가에 의해 도난당했다. 남아있는 남근은 3m 정도의 돌무더기위에 자연석을 다듬어 세웠는데, 높이가 1m 남짓하다. 그런데 이곡리 선돌은 공주지역의 다른 선돌과는 확연히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선사시대 유물이 아니라 조선시대 때 화강암을 다듬어 세웠다.

마을사람들은 이곡리 선돌을 ‘삼형제바위’로 부른다. 자식이 없는 한 노인이 아들을 얻기 위해 쌓았다고 했다.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대보름에 제사를 지냈지만, 지금은 마을동제는 치루지 않고 개인들이 자식을 얻기 위해 치성을 드린다고 했다.

마을을 내려다 보고있는 이곡리 남근석ⓒ최진연 기자 마을을 내려다 보고있는 이곡리 남근석ⓒ최진연 기자

이인면 남쪽 탄천면 남산리에도 선사시대 거석들이 많이 분포돼 있다. 남산리 송정골 마을로 부르는 이곳은 청동기시대 때 최대 취락지로 알려진 부여 초촌과 인접해 있는데, 송정골 지형은 구릉과 드넓은 들판이 이어진 곡창지대로 옛 사람들의 주거환경으로는 최상의 장소다. 이 주변에는 청동기시대 유적이 많이 산재해 있다.

송정마을에는 당시사람들이 풍농과 다산을 바라는 뜻에서 세운 선돌이 1기가 있다. 이 선돌은 서쪽을 보고 있는데, 원래는 하나의 돌덩어리였으나, 윗부분 절반정도가 절단돼 바로 옆에 떨어져 있다. 선돌이 왜 잘렸는지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자연현상으로 보기는 어렵다. 선돌의 높이는 약 3.3m, 넓이가 1.5m, 두께는 30cm에 이른다. 땅에 떨어진 돌덩어리까지 합하면 입석 높이는 5m 정도는 될 것으로 보인다.

공주지역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보기 어려운 선돌이다. 현재 마을수호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올리고 있으며, 사람들은 ‘장군바위’로 부르고 있다.

이 선돌은 백제의 명장 계백장군의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곳에 치성을 드리면 기이한 일이 일어난다고 믿고 있다.

탄천면 남산리 송정마을에 선돌이 잘린체 옆에 떨어져 있다ⓒ최진연 기자 탄천면 남산리 송정마을에 선돌이 잘린체 옆에 떨어져 있다ⓒ최진연 기자

옛날 계백장군이 황산벌 전투에 나가면서 탄천면 남산리에서 칼을 갈았다한다. 그는 칼을 다 간 뒤 부처 모퉁이 서 있는 돌을 칼로 베었다. 돌은 무처럼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이를 본 백제의 병사들이 사기가 충천해 황산벌에서 장렬하게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나당연합군의 수가 워낙 많아 패하고 말았다.전쟁이 끝난 뒤 살아남은 한 병사가 장군이 돌을 벤 장소인 모퉁이를 잊지 못해 찾아와 초막을 짓고 살았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는데, 가문의 대를 이을 생각으로 선돌 앞에 무릎을 꿇고 계백장군에게 아들을 얻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아들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내려오고 있다.

또 다른 전설은 이 선돌이 기자석(祈子石)으로 소문이 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얻는 영험을 얻었다 한다. 그 중에는 9대 독자도 있었는데, 기도덕분에 아들 셋을 얻었다는 전설이 있다.이런 이야기를 전해들은 이웃 마을 젊은이가 부처 모퉁이를 지나가다가 선돌을 손가락질 하면서 “저까짓 돌덩어리가 무슨 힘이 있어 아들을 만든단 말이여, 다 말쟁이들의 장난이지” 하면서 비웃었다.

이후 그 젊은이는 손가락이 아파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됐다. 한의원에도 갔지만 고칠 수가 없었다. 용하다는 점쟁이에게 갔다니 “왜 부처님한테 손가락질을 하며 욕을 한 것이여” 하면서 나무랐다. 젊은이는 부처 앞 선돌에 찾아가 고사를 지내며 자신의 무례함을 뉘우쳤다. 그랬더니 손가락이 씻은 듯이 나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 마을사람들은 젊은이가 고사를 지낸 정월 초이레부터 열나흘까지 개인별 고사를 지냈으며, 정월대보름에는 마을에서 동제를 지내기까지 하고 있다고 한다. 전설은 늘 흥미진진하게 우리 곁에 남아있다.

최진연 기자 (cnnpho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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