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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남의 나라 전승일에 불려만 다닐건가


입력 2015.09.05 10:01 수정 2015.09.05 10:01        이종근 편집국장

<칼럼>우리 운명을 우리 스스로 결정하는 힘을 가져야

1945년 2월 크림반도 얄타에서 열린 회담에 참석한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사진 왼쪽부터) 동영상 화면 캡처. 1945년 2월 크림반도 얄타에서 열린 회담에 참석한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사진 왼쪽부터) 동영상 화면 캡처.

러시아의 전승기념일에 이어 중국 전승기념일이 화려하게 열렸다. 박 대통령이 참석해야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말도 많더니 이젠 텐안문 망루 위에서 붉은 깃발 군대를 바라봐야하는 소회보다 푸틴 보다 의전 서열이 높느냐 마느냐를 놓고 그야말로 국민적 관심이 집중됐다.

이 논쟁들을 지켜보는 내내 그야말로 배알이 꼬였다. 남의 나라 전승기념일에 불려다닐 걱정을 해야하기에 앞서 우리는 왜 우리 전승기념일에 남의 나라 정상들을 초빙할 기회가 없을까. 왜 우리는 우리의 역사에서 승리를 기념하는 날이 없을까.

각국의 전승기념일은 세계 2차대전과 관련이 있다. 2차대전에서 독일군이 항복 문서에 서명한 날을 승리의 날로 잡아 전승기념일로 기념한 것이다. 그런데 나라별로 날짜가 다르다. 영국은 5월 7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5월 8일, 러시아와 옛 소련 국가들은 5월 9일이다.

사연은 이랬다. 독일군은 5월 7일 프랑스연합군 사령부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스탈린이 소련 대표가 불참했다는 이유로 그 다음날인 5월 8일 오후 10시 43분 베를린 소련군 사령부에서 다시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시차가 2시간 빠른 모스크바 시간으로는 5월 9일 0시 43분.

그리하여 영국은 첫번째 서명한 날을, 영국을 제외한 서방은 5월 8일을, 소련은 시차를 감안해 5월 9일을 각각 전승기념일로 정하게 된 것이다. 소련의 말한마디로 또 다시 항복하게 된 것은 그만큼 2차 대전에서 소련의 피의 대가가 컸기 때문이다. 레닌그라드 봉쇄 때만 해도 시민들이 100만명이 굶어죽었다. 소련 전체의 희생자는 2800여만명으로 추산된다.

중국의 전승기념일도 세계 2차대전과 관련이 있다. 5월 8일 독일의 항복에 이어 9월 2일 일본의 도쿄만 요코하마항에 정박중이던 미군 전함 미주리호 선상에서 일본 대표가 정식으로 항복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2차 대전은 공식적으로 종언을 고하게 된다. 중국은 2014년부터 미주리 항복 조인식 다음날인 9월 3일을 전승절로 정하고 기념하고 있다.

그럼 70년전 이렇게 다른 나라들이 전승의 분위기에 축배를 들고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했나. 일제의 폭압에 항거하고 견뎌온 대한민국의 운명은 어떻게 결정됐나. 70년전 2월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은 당시 소련에 속해있던 크림 반도 얄타에서 만나 조선을 신탁통치하기로 밀약한다. 그리고 5개월후인 7월 26일 독일 베를린 교외 포츠담에서 다시 미국 루스벨트, 영국 처칠, 중국 장제스가 만나 조선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킬 것을 재확인한다.

한마디로 그들은 승전국이었고 우리는 패전국의 노예였다. 그들끼리 만나서 전리품을 나누는 과정에서 우리를 남북으로 갈라놓았고 그것도 신탁통치하기로 하면서 20년을 할까 30년을 할까를 놓고 논의를 하였다. 우리는 당시 그것도 모른채 “집에 가자”를 외치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희망찬 미래에 부풀어 있었다.

우리에게 전승절이 없는 이유는 자명하다. 천만이 봤다는 영화 ‘암살’에도 나오는 대사다. 분열돼 있었다. 국제 정세에 까막눈이었다. 상해 따로 미국 따로 만주 따로 국내 따로 독립운동 단체들 따로 임정 따로 의열단 따로 독립군 따로 모두 다 따로였다. 그 결과 우리는 2차대전에 ‘참전’하지 못했고 승전국의 일원이 되지 못했고 우리의 운명을 남의 손에 맡겨야했다. 그 결과 지금까지 우리는 전세계 유일한 분단국이 됐고 일촉즉발의 위험 속에 살고 있으며 우리의 운명을 이리 만든 승전국들의 전승기념일에 불려다니는 처지가 됐다.

푸틴 옆자리든 시진핑 옆자리든 그게 그리 중요한가. 몇 번째 자리보다 중요한 것은 다시는 우리의 운명을 논하는 자리에 우리가 빠지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며 4자 회담이든 6자회담이든 한중일이든 우리의 의지로 열리게 하는 일이다.

그를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져야한다. 우리에게 그럴 힘이 있는가고 언제 한번 진지하게 반문해본 적이 있는지. 우리에겐 어떤 무기가 있는지 살펴본적이 있는지. 매년 되풀이되는 국방비 증액 삭감 논쟁에서 우리의 국력에 걸맞는 국방비인지 그 내역을 들여다본 적이 있는지.

그를 위해서는 자학적인 국사 교육을 바꿔야한다. 지금까지의 역사교육은 모두 패망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전투든 전쟁이든 승리한 날의 기념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임진왜란만 해도 3개 대첩이 있다. 6.25 전쟁만 해도 다부동 전투 등 기념해야할 날들은 많다.

왜 우리나라는 전승기념일이 없느냐는 아이들의 질문에 평화를 사랑해서라는 엉뚱한 대답을 언제까지 되풀이할 것인가. 언제까지 남의 나라 전승기념일에 참석 여부를 고민해야하는가.

이종근 기자 (myjockey@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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