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귀의 ad Greece 65>아테네 영욕 지켜본 국제항 피레아스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 주 >
피레아스(고대 페이라이에우스)는 지중해 최대의 크루즈 관광 거점 항구다. 에게 해에 흩어져 있는 2천여 개의 섬을 오가는 대형 크루즈와 작은 여객선들이 붐비는 곳이다. 그리스 수도인 아테네의 외항으로써 최고의 산업항구이기도 하다. 해운과 상공업의 중심지로 그리스 경제의 심장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다.
아테네 남서쪽에 있는 피레아스는 시가지가 계속 확장되면서 아테네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연담도시가 되어 이제 하나의 도시생활권을 이루고 있다. 아테네로부터 10여km 정도 떨어져 있지만 하나의 도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에 걸맞은 지하철과 많은 노선의 대중교통수단이 편리하게 구비되어 있다.
작은 항구로 한촌이었던 페이라이에우스가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제3차 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80년) 직후다. 전쟁 당시까지만 해도 아테네의 주 항구는 페이라이에우스 남쪽에 있던 팔레론이었다. 페이라이에우스가 아테네의 관문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살라미스 해전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의 혜안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아테네가 부강한 국가가 되기 위해서 해군력을 활용해 해양패권을 추구해야 된다는 점을 역설했다. 그는 과거 해군력이 미미할 당시 사용되던 팔레론 항구는 해양국가로 본격적으로 발돋움하려는 아테네의 관문 역할을 하기에는 협소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이에 따라 큰 만(灣)을 지닌 페이라이에우스 항이 주항으로 개발되고, 팔레론이 보조항으로 기능하게 된다. 페이라이에우스는 기원전 5세기에 아테네의 생존이 걸린 군항이자 무역항의 기능을 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해군력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 안보 전략을 확실히 다지기 위해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아테네와 페이라이에우스, 그리고 팔레론을 성벽으로 잇는 대공사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이미 페르시아 전쟁 당시 아티카 전 육지를 내어주고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전함으로써 아테네를 기사회생시킨 역사적 경험을 살리고자 했다. 즉 육지에서 밀릴 경우 언제든지 바다로 나가 대적하는 전략을 쓸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자 했다. 이를 위해 항구를 안전하게 수호하고 아테네와 항구 사이를 군사와 인력, 물자가 안전하게 오갈 수 있는 방벽이 필요했다.
아테네가 거대한 방벽을 쌓으려 하는 기미를 눈치 챈 스파르타는 이를 저지하려 했다. 하지만 테미스토클레스는 양국을 오가는 사절단을 지연시키고 억류시키는 교란 작전을 펴면서 기어코 방벽을 완성한다. 기원전 479년의 일이다. 스파르타의 눈치를 보면서 급하게 축성하느라 전체를 잘 다듬어진 돌로 성벽을 쌓지는 못했다. 가옥이나 무덤에서 가져온 비석과 다른 용도로 깎은 돌들도 섞여 있었다.
그래도 방벽은 꽤 유용했다. 짐수레 두 대가 마주 통과할 수 있는 너비로 성벽을 쌓고, 성벽 사이의 공간은 잡석이나 진흙이 아니라 네모나게 깎은 큰 돌덩이들로 채워졌고, 이 돌덩이들의 바깥쪽은 무쇠와 납 꺾쇠들로 연결시켰다. 약 8km에 이르는 ‘대방벽’은 아테네가 유사시 최후의 방어진지 역할을 할 수 있을 터였다.
해군력을 계속 강화하고, 수도 아테네와 관문 항인 페이라이에우스, 그리고 팔레론 간의 성벽이 구축됨으로써 아테네는 해양패권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게 된다. 이후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의 맹주가 되어 제국화 된다. 기원전 5세기 중반 50여 년 간 아테네가 황금기를 누리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은 페이라이에우스였다. 이곳으로 동맹국들에서 징발하는 함선과 병력, 곡물과 현금, 생활 물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곧 동맹국의 본부가 있던 델로스 섬과 페이라이에우스 항은 국제 항구의 기능을 하게 된다.
성벽은 적은 병사로도 방어하기에 유리했다. 40여년이 지난 후 스파르타와 아테네 사이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벌어지자 이 방벽은 그 진가를 발휘했다. 당시 아테네의 정치지도자이자 장군이던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 육군에 대항하기 위해 아티카 전역에 흩어져 살던 농촌 시민들을 모두 방벽 안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편다. 농촌에 있던 사람들이 방벽 안의 아테네로 들어오게 되자 방어는 수월해졌다. 하지만 농촌의 과수와 농작물은 스파르타에게 속수무책으로 유린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도시에 집이 있거나 친척 집에서 피란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이주민들은 시내의 공터나 아크로폴리스 주변에 집을 짓고 살거나, 아크로폴리스를 제외한 시내에 흩어져 있는 신과 영웅들의 신전에 들어가 살기도 했다. 또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성안으로 몰려들자, 성벽을 따라 페이라이에우스 항의 공간을 할당하여 정착시키기도 했다.
스파르타와의 전쟁 초기에 성벽은 시민들의 안전을 확보하고 항구를 보전하여 해군력이 기동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밀집하여 살게 되면서 환경 위생이 불결해져 역병이 발생하게 된다. 수만 명의 시민이 역병으로 죽게 되고 페리클레스마저 전염되어 죽게 되면서, 결국 아테네는 기원전 404년 스파르타에 항복하게 된다. 기원전 4세기부터 페이라이에우스 항은 뚜렷하게 퇴조하기 시작한다. 물론 아테네가 로마의 속주가 된 이후에서 외항으로서의 기능은 계속 유지되었고, 곡물 수입과 사람과 물자가 왕래하는 주요한 항구 역할을 했다.
페이라이에우스는 아테네의 영광과 굴욕을 모두 지켜 본 역사의 증인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군항과 무역항으로서 기능하던 항구는 이제 관광 항으로 더 활성화되었다. 그리스 문명의 자취를 답사하려는 전 세계의 관광객들의 발길이 아테네와 피레아스 항으로 몰려들고 있다.
현대 도시 피레아스는 워낙 많이 개발된 탓에 고대 그리스의 유적이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고대기의 화려했던 시절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유물들이 피레아스 고고학 박물관에 상당히 많이 소장되어 있다. 대도시 아테네에 인접하여 독자적인 유물과 유적이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의외로 의미 있는 유물들이 꽤 있었다. 특히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서도 볼 수 없었던 고대기 청동 조각이 몇 개나 있었다.
고대 그리스 대리석 조각이나 청동 조각 원본의 대부분 유실되었다. 현존하는 작품들은 대부분 로마시대에 그리스 원작을 모사한 복제품이 대부분이다. 이런 사정으로 볼 때, 고대 그리스 시대에 제작된 청동 원작을 보는 것은 신선한 기쁨이었다.
관광객들의 대부분은 피레아스를 다른 관광지로 가기 위해 거쳐 가는 곳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이곳 박물관을 찾는 관람객이 많지 않은 이유도 그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상 외로 좋은 작품을 상당히 많이 소장하고 있는 피레아스 고고학 박물관은 꼭 들러봐야 할 곳이다.
그런데 유의할 점이 있다. 대도시 소재 박물관은 대개 하절기엔 오후 6시까지 관람할 수 있는 데 이곳은 오후 3시에 일찍 폐관한다. 의외다. 늦게 찾는 관람객이 자칫 낭패를 볼 수 있다. 필자도 이 곳이 대도시이니 당연히 오후 5~6시 정도에 폐관하려니 느긋하게 여기고 4시경에 찾아갔다가 발길을 돌리고, 다음 날 다시 찾아 가는 수고를 겪었다. 그래도 살라미스 섬과 아이기나 섬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곳 피레아스를 두 번이나 오가는 일정이 있어 큰 차질은 없었다. 더군다나 훌륭한 소장품이 볼 수 있어서 흡족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곳이 기대이상의 발견의 기쁨을 안겨주었으니.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장(kipec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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