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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함부로 흉보지 마라 우리도 몇년 안남았다


입력 2015.07.26 13:46 수정 2015.07.26 14:01        데스크 (desk@dailian.co.kr)

<굿소사이어티 칼럼>공짜 복지 포퓰리즘 경쟁

병든 중우 정치 풍조 뿌리 뽑는게 최우선 과제

아테네 도심 신타그마광장 앞에서 본 국회의사당.ⓒ연합뉴스 아테네 도심 신타그마광장 앞에서 본 국회의사당.ⓒ연합뉴스

‘나라는 어떻게 해서 망조가 드는가?’ 그리스 사회당 정권의 부수상이었던 테오도로스 팡갈로스는 2010년 9월 25일 의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그리스인들 모두가 함께 먹어 치웠다. 뇌물 주고받기와 공금 펑펑 쓰기로...” 이래서 오늘의 망조가 들었다는 것이다.

‘먹어 치우기’의 시작은 1981년이었다. 그 해 안드레아 파판드레우가 이끄는 사회당(PASOK)이 압도적인 표차로 정권을 잡았다. 그는 세상을 자기들이 대표하는 ‘빛의 세력’과 그 반대쪽의 ‘어둠의 세력’으로 갈랐다. 그로부터 10년 동안 그는 그리스를 자칭 ‘빛의 세력’이 주도하는 민중 민주주의 판으로 바꾸어 놓았다.

1990년대 초에 정권은 다시 보수 신민주당으로 넘어갔다. 희한한 것은 신민주당의 콘스탄틴 미초타키스 수상과 그 후의 코스타스 카라만리스 수상 역시 우(右) 클릭이 아니라, 사회당 뺨치는 좌(左) 클릭, 민중 민주주의로 갔다는 점이다. 대중이 이미 ‘공짜’에 톡톡히 중독돼 있던 터라 섣불리 “국민연금 때문에 나라가 파산할 지경이다” 어쩌고 했다가는 선거에서 깨지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래서 신민주당은 당명까지 아예 민중당으로 바꿨다. 명색이 자유주의 정당이라는 게 득표를 위해선 당의 영혼까지 반(反)자유주의에 팔아먹었던 것이다.

여당, 야당,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온 정계가 다 이렇게 포퓰리즘으로 가다 보니 국민연금 개혁, 건강보험 개혁, 공공지출 삭감, 교육개혁, 공기업 개혁 등 모든 절실한 개혁과제들이 찬밥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정권은 다시 사회당으로 넘어갔다가 요즘엔 그보다 더 독종인 시리자(Syriza, 급진좌파 연합)로 넘어갔다. 그리고 우(右)쪽에는 보수-자유주의 세력을 제치고, 극우성향의 배타적인 집단이 기승하고 있다.

그리스는 함께 해먹는 ‘물레방아 세상’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리스의 민중 민주주의는 그리스의 전통적인 부패사슬을 끊어놓은 게 아니라,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보수건 진보건 다 국민세금 펑펑 써가며 정치인, 관료, 이익집단, 대중이 함께 맞물려 해먹는 ‘물레방아 세상’을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 그리스인들 모두가 함께 먹어 치웠다‘는 말은 바로 그 뜻이었다. 그리스 위기의 핵심은 그래서 보수-진보가 이전에 보수-진보로 포장한 ‘정(政)-관(官)-민(民) 유착(癒着)’의 국가 파먹기였다.

그리스 정치에선 정치인과 유권자들이 공인(公人)과 공민(公民)으로서가 아니라 후원자(patron)와 단골 지지자(client)로서 만났다. 그래서 후원자는 표 값을 치렀고, 단골손님은 표를 팔았다. 표 값이란 봉급, 부수입, 연금 등 물질적인 유인책, 각종 규제를 면탈해 주는 것, 시장의 리스크로부터 보호해 주는 특혜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대기업 주인으로부터 작은 섬의 땅주인과 지방의 말단서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그리스인들이 노동이나 투자가 아닌 정치적 유착 관계로 나라의 공공재를 빼먹는 것을 지극히 당연한 관례로 쳐왔다.

이런 포퓰리즘 때문에 공공부문 근로자 임금은 10년 사이 2배로 뛰었고 은퇴자는 월급의 92%를 연금으로 가져갔다. 부자들은 세금망명을 하거나 조세포탈을 해서 나라 곳간이 텅텅 비었다. 거기다 2004년엔 비싼 올림픽까지 주최했다. 국가부채가 3천조 유로로 치솟았다. 30년 민중 민주주의의 파산이었다. 나라가 잠깐 사이에 거덜 난 것이다.

여야 모두가 포퓰리즘 경쟁으로 질주하는 우리 한국

그리스 민중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이기는 하지만 자유주의는 아닌 체제, 즉 민주주의적 반(反)자유주의(democratic illiberalism) 체제였다. 보수건 진보건 이 체제의 주역들은 사회가 다원적으로 분화돼 있지 않고 엘리트와 대중으로 양극화 돼있다고 설정했다. 그래서 다원적인 집단들의 타협이 아닌, 양극화 된 두 진영의 ‘적대적 공존’이 지속됐다. 준법(遵法) 정신이 마비되었고, 공무원은 국민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의식도 희박했으며, 반면에 민중이 관료를 지배해야 한다는 일종의 ‘민중 직접참여’ 또는 ‘중우(衆愚) 정치’ 풍조가 범람했다.

이런 그리스적인 사례를 돌아보면서 우리 한국정치의 오늘을 연상하게 되는 것은 결코 한가로운 공상만은 아닐 것이다. 우선 우리의 친노(親盧) 야당은 물론, 얼마 전 물러난 유승민 여당도 우리 사회를 ‘고약한 소수’와 ‘좋은 다수’로 첨예하게 양분하길 좋아한다. 친노는 우리사회가 1%의 가진 자와 99%의 못 가진 바로 양극화 돼있다고 주장했고, 유승민도 그런 시각을 “높이 평가 한다”고 했다.

새민련과 새누리당은 또한 그리스의 사회당 및 신민주당과 크게 다를 바 없이 양당 독점체제라는 ‘그들만의 잔치’를 통해 포퓰리즘 경쟁을 만성화 시켜 왔다. 그리스의 사례와 다를 바 없이 우리 정치에서도 자유주의 원칙을 무시한 채 “곳간 털어 갈라먹자” “세금 거둬 메우자”는 분위기가 기승하고 있다. 법과 공권력의 권위가 허물어지고, ‘떼’법과 불법난동이 일상화 하고 있다. 좌파는 원래부터 그랬지만, 최근엔 새누리당 주류가 그 방향으로 집권전략을 세우고 있다.

여당과 야당이 이처럼 포퓰리즘 경쟁으로 질주하는 한 우리도 그리스의 전철을 밟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한국은 물론 그리스가 아니다. 그러나 야당과 여당 속 ‘강남좌파’가 합작해 의회를 장악하고 그 힘으로 대통령의 4대 개혁안을 좌절시키는 오늘의 정계는 이미 민중주의적 국면으로 성큼 진입했다고 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협소한 리더십 스타일은 물론 비판을 받을 만하다. 하지만 표를 위해 다투어 대중영합 정치로 달려가는 정당권(圈)과 국회가 지금 시점에서는 더 퇴영적이다. 이에 대한 자유주의 시민사회의 견제가 절실한 시점이다.

글/류근일 언론인·전 조선일보 주필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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