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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민족 부활을 꿈꾼 우국지사들의 마지막 불꽃


입력 2015.07.26 08:58 수정 2015.07.26 09:29        박경귀 (사)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박경귀의 ad Greece 63>비잔틴 제국의 황성 옛터, 스파르타의 미스트라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 주 >

박경귀 (사)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박경귀 (사)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메세니아의 필로스 답사를 끝내고 메세니아 주의 주도(州都)인 칼라마타로 향했다. 산을 구비 구비 넘는 길이었지만 잘 포장된 2차선 도로여서 1시간 정도 걸렸다. 시내에 있는 고고학 박물관에 들렀다. 칼라마타의 인구는 채 5만 명이 되지 않지만, 메세시아에선 가장 큰 산업도시다. 메세니아의 풍부한 농산물, 특히 올리브의 집산지로 농산물 가공업이 발달한 항구도시다.

주도이니 만큼 메세니아 전역에서 출토된 고대 유물이 많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박물관 규모는 작지 않았지만, 고대 그리스 유물은 매우 적었다. 대부분 비잔틴 시대의 유물이 차지하고 있었다. 다소 실망스런 수준이다. 역시 이 도시가 고대에 발달했던 도시가 아니라 근대에 상업적으로 발전한 도시이다 보니 고대의 유물을 많이 갖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아무튼 현지 사정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여행을 다니다 보면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뜻밖의 귀중한 유물과 유적을 만나기도 하지만, 반대로 이곳처럼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곳도 있게 마련이다.

칼라마타에 있는 메세니아 고고학 박물관 전경 ⓒ박경귀 칼라마타에 있는 메세니아 고고학 박물관 전경 ⓒ박경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상징하는 청동 해마 상이다. 기원전 5세기~1세기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신전에 봉헌된 독특한 작품으로 예술성이 뛰어나다. 칼라마타 메세니아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상징하는 청동 해마 상이다. 기원전 5세기~1세기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신전에 봉헌된 독특한 작품으로 예술성이 뛰어나다. 칼라마타 메세니아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아폴론의 두상이다. 길 이정표인 헤르마(Herma)에 부조된 것이다. 3세기경 제작, 칼라마타 메세니아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아폴론의 두상이다. 길 이정표인 헤르마(Herma)에 부조된 것이다. 3세기경 제작, 칼라마타 메세니아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메세니아 고고학 박물관은 이름난 소장 유물은 적지만 작은 유물 하나하나에도 상세한 설명과 함께 공간 배치와 진열, 조명 등을 섬세하게 꾸며놓았다. 고대 유물을 소중히 다루는 이들의 정성과 노고는 알아줄만 했다.

박물관 관람을 끝내고 칼라마타 시내에서 잠시 쉬며 저녁을 들고 한밤에 타이게토스 산을 넘어 스파르타로 향할 것인가, 아니면 해가 지기 전에 산을 넘을 것인가 잠시 망설였다. 2014년 2월에 스파르타에서 올림피아로 가기 위해 타이게토스 산을 넘을 때는 깜깜한 새벽녘에 넘는 바람에 산악의 험준함을 느끼지 못했다. 오로지 차량의 라이트가 밝혀주는 빛의 터널 속 길 이외에 주변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비게이션이 포장도로가 아닌 시골 산길로 잘못 안내하는 바람에 1차선 비포장 산골도로를 극심한 고생을 하며 넘었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식은땀이 난다. 어떻게 그렇게 험악한 산길을 넘을 수 있었던지...

이번에는 이미 말끔하게 포장된 2차선 도로를 확실하게 확인해 두었고, 네비게이션도 길을 제대로 잡아놓고 있었다. 이참에 해가 지기 전에 타이게토스를 넘어보기로 했다. 험악한 산의 경관을 조금이라도 보기 위해서였다. 스파르타 방문은 이번이 세 번째다. 2014년 2월 첫 번째는 밤늦게 도착해서 하룻밤 묵고 올림피아로 가는 바람에 스파르타 유적 답사를 하지 못했다. 2014년 8월의 두 번째 방문 때는 스파르타의 아크로폴리스와 주변 유적지를 답사했다. 하지만 그때 역시 방문 계획 일정이 부족해서 미스트라를 답사하지 못했었다. 이번 3차 방문에서는 아예 메세니아 답사 후 미스트라 유적지를 거쳐 가는 일정을 잡았다.

칼라마타에서 타이게토스 산을 오르기 시작하자 그리스에서 가장 험준한 산악 도로의 정경이 펼쳐졌다. 해지기 전에 출발하길 잘 한 것 같다. 거리는 60km 정도밖에 안되지만 구불구불 험준한 산길이라 1시간 20분 정도 소요되었다. 오후 7시가 넘었으니 출출했지만, 일단 해가 떨어지기 전에 타이게토스를 넘어가 스파르타에서 저녁을 먹을 작정이었다.

타이게토스 횡단 도로는 산맥 가운데 이어졌다 끊어지길 반복하는 계곡 사이로 나 있었다. 그 험준한 타이게토스 산 중에도 산골 마을들이 군데군데 나타났다. 농사지을 땅도 없고 올리브 나무도 잘 자라지 않는 척박한 곳에서 이들이 어떻게 생활해 가는지 궁금하다.
40여분을 계속 오르막길로 산을 올랐다. 마침내 타이게토스의 산 정상에 올랐을 때, 운 좋게도 2400미터가 넘는 고지의 산줄기가 이어진 가운데로 장엄하게 넘어가는 아름다운 황혼을 볼 수 있었다. 내리막 역시 계곡의 산허리를 감고 돌았다. 40여분 타이게토스를 내려가는 동안 수백 미터 산골짜기를 내려다보며 아찔한 느낌이 계속 들었다. 절벽의 바위를 뚫고 간신히 길을 내어 짧은 바위 터널 같은 곳을 몇 차례 통과하기도 했다.

1시간여를 산을 오르고 내려오는 동안 왕래하는 차를 보기가 힘들었다. 칼라마타에서 스파르타로 넘어가는 차는 내 차를 앞질러 간 차량이 단 한 대 뿐일 정도다. 맞은편 차선에서 칼라마타로 넘어가는 차량도 서너 대 정도에 불과했다. 타이게토스 산맥으로 인해 메세니아와 스파르타의 생활권이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느낌이 든다.

타이게토스 산의 계곡 허리를 휘감고 도는 험준한 협곡도로이다. 메세니아와 스파르타 사이를 왕래하는 도로 가운데 가장 잘 포장된 도로이다. ⓒ박경귀 타이게토스 산의 계곡 허리를 휘감고 도는 험준한 협곡도로이다. 메세니아와 스파르타 사이를 왕래하는 도로 가운데 가장 잘 포장된 도로이다. ⓒ박경귀

첩첩산중 타이게토스 산정 곳곳에는 작은 산골 마을들이 산재해 있다. ⓒ박경귀 첩첩산중 타이게토스 산정 곳곳에는 작은 산골 마을들이 산재해 있다. ⓒ박경귀

타이게토스 산맥의 한 등성이에서 황혼을 만났다. 2천 미터가 넘은 고지의 암산 꼭대기부터 아스라이 물들어가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박경귀 타이게토스 산맥의 한 등성이에서 황혼을 만났다. 2천 미터가 넘은 고지의 암산 꼭대기부터 아스라이 물들어가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박경귀

극도의 긴장 상태로 산을 넘다보니 배고픈 줄도 몰랐다. 산을 무사히 넘었다. 스파르타의 전사들이 메세니아를 침략할 때 배를 타고 우회하거나, 이 계곡을 타고 넘었을 것이다. 중장보병이 산을 넘을 경우 족히 이삼일은 걸렸을 것이다. 이 곳 어딘가에 부실한 신체로 태어난 아이들을 버리는 절벽 아포테타이(Apothetai)도 있었을 것이다. 타이게토스 산은 스파르타인들의 삶을 강인하게 만드는 수련장이자 삶을 지켜주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

스파르타 시내 호텔에서 숙박하고 모처럼 느긋하게 늦게 아침 7시에 기상했다. 첫 답사지가 바로 코앞에 있기 때문이다. 미스트라는 타이게토스 산의 동쪽 기슭에 있었다. 스파르타 시내에서 남서쪽으로 5km 정도 떨어져 있다. 미스트라의 지형은 천혜의 요새다. 타이게토스 산맥 기슭에 600여 미터의 산봉우리가 외따로 홀로 떨어져 우뚝 솟아있다. 남쪽과 서쪽은 수백 미터 깎아지른 절벽이고 동쪽과 북쪽 역시 가파르다.

산봉우리에 성채가 있다. 빌라르두앵 성채다. 성채는 ‘암석의 왕관’으로 불린 만큼 암산의 절벽위에 고고하게 버티고 있다. 동쪽과 북쪽의 경사면에는 비잔틴 제국의 황궁과 수도원들이 자리 잡고 있다. 비잔틴 시대에는 산 전체를 성벽으로 두른 하나의 성채 도시였다.

미스트라의 전경이다. 산정에 빌라르두앵 성채가 있고, 아래쪽에 판타나사 수도원이 보인다. 주변에 수도원 등 건축 유적이 산재해 있다. ⓒ박경귀 미스트라의 전경이다. 산정에 빌라르두앵 성채가 있고, 아래쪽에 판타나사 수도원이 보인다. 주변에 수도원 등 건축 유적이 산재해 있다. ⓒ박경귀

빌라드두앵 성채다. 비잔틴 시대에 축조되고 프랑크인들이 개축했다. ⓒ박경귀 빌라드두앵 성채다. 비잔틴 시대에 축조되고 프랑크인들이 개축했다. ⓒ박경귀

빌라르두앵 성채에서 내려다 본 정경이다. 바로 아래에 미스트라 마을이 보이고, 가운데 도로 끝에 이어진 곳이 스파르타 시내이다. ⓒ박경귀 빌라르두앵 성채에서 내려다 본 정경이다. 바로 아래에 미스트라 마을이 보이고, 가운데 도로 끝에 이어진 곳이 스파르타 시내이다. ⓒ박경귀

내부 성벽들이 거의 다 허물어진 빌라르두앵 성채의 내부이다. ⓒ박경귀 내부 성벽들이 거의 다 허물어진 빌라르두앵 성채의 내부이다. ⓒ박경귀

빌라르두앵 성채의 남서쪽 모퉁이 모습이다. 성벽 아래 전체를 조망하기 좋은 방어하기에 탁월한 위치에 망루가 세워졌다. ⓒ박경귀 빌라르두앵 성채의 남서쪽 모퉁이 모습이다. 성벽 아래 전체를 조망하기 좋은 방어하기에 탁월한 위치에 망루가 세워졌다. ⓒ박경귀

비잔틴 제국은 다시 부활한 그리스 제국이었다. 비잔틴 제국은 그리스인들에게 특별했다. 비잔틴 제국은 그리스인들의 신화와 역사, 정신과 관습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제국의 최후의 황제가 대관식을 치른 곳은 콘스탄티노플의 황궁이 아니라 그리스 정신이 충만하게 깃든 스파르타의 미스트라 지역에 있는 황제의 별궁이었다.

콘스탄티누스 11세 팔라이올로구스(Konstantinos Palaiologos, 재위 1448~1453)는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다. 그는 미스트라의 미트로폴리스에 있는 성 데메트리오스 아기오스 디미트리오스 교회의 황제 문장 위에 서서 비잔티움의 제국의 황제관을 받았다. 1449년 1월 6일의 일이었다.

빌라르드앵 성채에서 내려다 본 비잔틴 제국의 황궁 유적지이다. 2015년 5월 현재 보수 중으로 관람할 수 없다. ⓒ박경귀 빌라르드앵 성채에서 내려다 본 비잔틴 제국의 황궁 유적지이다. 2015년 5월 현재 보수 중으로 관람할 수 없다. ⓒ박경귀

미스트라에 있는 디미트리오스 교회, 이곳에서 비잔틴 제국 마지막 황제의 대관식이 열렸다. ⓒ박경귀 
미스트라에 있는 디미트리오스 교회, 이곳에서 비잔틴 제국 마지막 황제의 대관식이 열렸다. ⓒ박경귀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팔라이올로구스는 황제의 문장(紋章)인 쌍독수리가 새겨진 바닥돌 위에 서서 황제관을 받았다. ⓒ박경귀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팔라이올로구스는 황제의 문장(紋章)인 쌍독수리가 새겨진 바닥돌 위에 서서 황제관을 받았다. ⓒ박경귀

황제관을 받은 이 교회를 방문했던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교회 벽면의 <그리스도의 갈릴레아 기적>이라는 그림을 보면서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기 직전, 펠로폰네소스의 한구석에서 영원한 그리스의 정신이 되살아났던 것”이라고 평한 바 있다. 이렇듯 비잔틴 제국의 황혼기 예술의 자취는 황성 옛터인 미스트라 지역의 여러 교회와 수도원, 황궁에 애잔하게 남아있다.

미스트라에서는 비잔틴 제국의 황궁과 수도원을 중심으로 미술과 조각 예술이 다시 꽃을 피웠다. 또 14세기 들어 급격하게 쇠퇴하기 시작한 비잔틴 제국을 살려보고자 하는 마지막 시도도 이곳 미스트라에서 일어났다. 기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Giorgios Gemistos Plethon, 1355~1452)이 이를 주도했다.

성 디미트리오스 수도원의 성화이다. ⓒ박경귀 성 디미트리오스 수도원의 성화이다. ⓒ박경귀

성 디미트리오스 수도원의 천정화이다. ⓒ박경귀 성 디미트리오스 수도원의 천정화이다. ⓒ박경귀

그는 그리스 제국의 부활을 위해 바친 최후의 희생양이었다. 게미스토스는 비잔틴 제국의 곳곳에서 몰려든 우국지사들을 격려하면서 새로운 그리스 제국을 세우기 위한 방책을 궁구했다. 쓰러져 가는 비잔틴 제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그가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마지막 황제 테오도로스 팔라이올로구스에게 올린 시무책에서 절절이 느낄 수 있다.

“개인이나 민족이 그들의 마지막 희망을 잃도록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죽었다고 생각했던 많은 나라나 민족들이 부활했습니다. 위험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을 때 망설이는 태도는 절대로 허용될 수 없습니다. 폐하가 동의하신다면 이 국가 회복의 사업을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저는 그 일을 정말로 간절히 바랍니다. 특히 다른 사람은 감히 이 일을 해보겠다고 나서지 못한다는 것을 확신하므로 더욱 간절하게 청원 드리는 것입니다.“

제갈량이 촉의 2대 황제 유선에게 북벌을 위한 출사표를 제출하던 것과 같은 나라를 위한 충성과 비장함을 엿볼 수 있다. 게미스토스는 강력하고 공정한 새로운 국가를 구상했다. 그의 정치적 이상은 참주로 흐를 수밖에 없는 절대군주제도도 아니고, 실패했던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도 아니었다. 그는 미덕과 지식을 갖춘 귀족들이 왕의 자문으로 폭넓게 정치에 참여하는 과두제가 가미된 군주제였다.

그는 귀족들과 황제가 서로 등을 돌린 사이가 아니라 시혜와 협력 속에서 충성으로 국가를 경영하는 체제를 꿈꾸었던 것이다. 특히 그는 여러 나라의 용병에 의존하지 말고 국민군을 구성하여 자발적인 충성심으로 국가를 호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6세기에 사분오열되었던 이탈리아를 통일하기 위해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에게 국민군 결성이 긴요하다고 주청하던 마키아벨리가 연상된다.

게미스토스는 대부분 농노로 전락해버린 농민들의 피폐된 삶을 복구하기 위해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정책도 역설했다. 하지만 게미스토스의 충정은 아무 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팔라이올로구스 황가는 게미스토스 시책들이 너무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다. 비잔틴 제국의 황가와 기득권층은 그의 혁신적인 민족중흥 시책을 검토해 볼 만큼, 국가에 대한 진정한 충심과 절박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게미스토스는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기 1년 전에 98세의 나이로 여한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세상 사람들은 그의 충심과 노고를 기리며 슬퍼했다.

“모든 것을 포용하는 아주 거룩한 정신, 창공에서 가장 영롱하게 빛나는 별, 신성이 가득한 나팔을 소지한 자, 부드럽게 울음을 우는 나이팅게일, 커다란 기쁨을 주는 가정의 기둥이 여기 잠든 채 누워 있도다.“

하지만 그것도 말뿐이었다. 나라를 혁신하려던 그를 조롱하고 비판하던 권력자들은 그가 죽은 후에도 박해를 가해 교회에서 파문하도록 했다. 게다가 그의 혁신적 시무책이 담긴 저작들도 불태워졌다. 그는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불꽃을 살리려던 미스트라에 묻히지도 못했다. 꺼져가는 제국의 등불을 다시 살려보려던 게미스토스의 열정과 고뇌가 이 미스트라에 남아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곳에서 대관식을 치렀고 황궁에 머물렀지만, 언제까지나 스파르타에 평안하게 머물 수 없었다. 그는 오스만 투르크의 마호메트 2세가 비잔티움을 함락하기 위해 군사력을 비잔티움의 턱밑인 마르마라 해협 쪽으로 증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쟁터로 나아갔던 스파르타의 전사처럼 미스트라 황궁을 떠나 비잔티움으로 향했다.

비잔티움제국은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지원군을 포함하여 불과 7천여 명의 병사로 마호메트의 8만 대군의 총공세에 맞서야 했다. 결국 중과부적(衆寡不敵)인 비잔티움은 1453년 5월 30일 함락되고, 콘스탄티누스 11세는 분전하다 죽었다. 비잔틴 제국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리스인이 지배계층이 이루고 그리스 문화 자산과 로마의 정치사회적 자산을 바탕으로 천년 이상 존속했던 비잔틴 제국은 회복할 수 없을 만큼 쇠약해진 끝에 문을 닫아야 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평가대로 “비잔틴 제국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인종들의 모자이크였고 무력과 공포를 동원하지 않고서는 유지되지 않는 조직이었다. 제국은 내적 일관성과 통합된 영혼을 갖고 있지 않았으므로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

미스트라는 바로 숨을 거두어 가던 비잔틴 제국을 부활시켜 보려던 우국지사들이 몸부림치던 마지막 불꽃이었다. (다음 회에는 고도(古都) 미스트라의 아름다운 풍광과 유서 깊은 유적들을 소개합니다.)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kipeceo@gmail.com)

박경귀 기자 (kipec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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