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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메세니아에서 당한 스파르타의 굴욕적 패배


입력 2015.07.19 10:30 수정 2015.07.19 11:16        박경귀 (사)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박경귀의 ad Greece 62>필로스 왕국의 역사 서린 메세니아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 주 >

박경귀 (사)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박경귀 (사)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메세니아인들은 기원전 7세기부터 스파르타의 식민지로 전락한 후 230여 년 간 노예, 즉 헤일로타이 생활을 해야 했다. 하지만 오래 전부터 메세니아 땅에 한 맺힌 역사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스파르타에 못지않은 영광의 시대도 있었다. 기원전 20세기부터 12세기까지 그리스 본토에서 가장 먼저 발흥한 미케네 문명 시대에 메세니아 지역에는 미케네 왕국과 쌍벽을 이루던 필로스(Pylos) 왕국이 있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왕국 가운데 하나였던 셈이다.

메세니아의 고대 메세네 유적지를 둘러보고 고대 왕국 필로스 유적지를 찾아 나섰다. 고대 필로스 왕궁 유적지를 답사하고 스팍테리아 전투의 전적지가 마주 보이는 현대 필로스 지역까지 둘러보았다. 메세네에서 필로스 왕궁이 있는 메세니아 서남부 내륙 지방까지는 50km 정도에 불과하지만 시골길과 농로가 뒤섞인 구불구불하고 험한 구릉길이다.

작은 시골 마을을 여러 번 지나고 트랙터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올리브 농장의 좁은 농로 길을 숱하게 통과해야 한다. 1시간 20여분 주행하는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좌우로 보이는 풍경은 전부 올리브 농장이다. 올리브 농사는 메세니아 농업의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무려 3400여년 가까이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고대 필로스 왕국 터를 둘러볼 생각에 마음이 설랬다.

필로스의 현명한 왕 네스토르

필로스 왕국이 이름을 날린 건 네스토르(Nestor) 왕의 활약 때문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는 그의 활약을 중요한 대목으로 다루고 있다. 그는 아가멤논이 이끈 아카이아(그리스) 연합군 가운데 60대 원로 장수로서 경륜과 지혜로 리더십을 발휘했다. 특히 전술에 대한 안목까지 깊어 아가멤논의 신뢰를 받았다.

네스토르는 필로스 왕국의 넬레우스 왕의 12아들 가운데 하나다. 기원전 14세기 후반 경에 헤라클레스가 필로스 왕국을 습격하였을 때, 아버지와 형제들은 모두 죽고 네스토르만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네스토르는 젊을 때 이아손을 비롯한 그리스 각지의 여러 영웅들과 함께 황금양털을 찾기 위해 아르고 호 탐험대에 합류하기도 했다.

문헌에 그의 이름이 등장하여 이름을 천하에 날리게 된 것은 역시 60세가 넘은 노년에 트로이 전쟁에 참전한 덕분이다. 그는 당시 게레니아(Gerenia)라고 불린 지역에 있던 필로스 왕국의 왕이었다. 그는 1,000여척으로 이루어진 아카이아 연합군에 두 번째로 많은 함선을 이끌고 참전했다. ‘일리아스’의 함선 목록을 보면, 미케네 왕이자 연합군 총사령관을 맡은 아가멤논이 100척을 이끌었고, 헬레네의 남편이던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가 60척을 거느리고 참전했다.

또한 이타케의 왕 오뒷세우스가 12척, 헤라클레스의 아들 틀레폴레모스가 로도스의 함선 9척을 지휘했다. 크레타의 장수 이도메네우스는 80척을 이끌었다. 네스토르 왕은 무려 90척의 함선을 지휘하며 참전했다. 참전한 나라마다 거의 왕이나 최고로 명성이 높은 장수들이 자기 나라의 주력 부대를 이끌고 참전했던 정황으로 보아 참전 함선의 수만 보아도 당시의 나라별 국력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그렇다고 보면 필로스가 꽤 강성한 나라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참전군의 군세는 연합군 진영에서의 발언권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게다가 네스토르는 참전 장수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축에 속했던 것 같다. 군영의 회의에서도 풍부한 경륜에서 우러나오는 무게 있는 발언을 자주하던 네스토르는 여러 장수들에게도 존경과 신뢰를 받았다. 총사령관인 아가멤논은 오만한 성격이었지만 그 역시 네스토르는 각별히 예우했다.

호메로스는 단순히 트로이 전쟁기를 묘사한 것이 아니다. 그는 전쟁 과정에서 빚어지는 인간들의 갈등과 죽음, 신과 영웅들의 희로애락을 웅장하게 그리고 있다. 그가 묘사한 ‘일리아스’를 관통하는 주제를 보면, 인간들의 분노와 증오가 전쟁을 촉발시키고 전세를 역전시키며, 전쟁을 종결짓는 데 막중한 역할을 하고 있다.

아내 헬레네를 파리스 왕자에게 빼앗긴 남편 메넬라오스의 분노와 증오, 가문의 수치를 씻으려는 메넬라오스의 형 아가멤논의 분노로 전쟁은 시작되었다. 하지만 전쟁을 뜨겁게 달구고 결말짓게 만든 동인은 무엇보다도 영웅 아킬레우스의 분노와 증오다. 하지만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처음으로 촉발시키는 것은 굴복시켜야 할 적인 트로이아가 아니라, 같은 그리스 연합군의 수장인 아가멤논이었다. 천하의 맹장 아킬레우스의 분노의 방향이 적이 아닌 아군에게 먼저 향했다는 점이 트로이 전쟁에 얽힌 인간들의 애증의 복잡성을 가중시킨다. 물론 이 때문에 독자들을 더 흥미진진하게 만들고 있기는 하다.

네스토르 왕은 내부로 향한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완화시키고, 대적해야 할 적에게 분노가 투사되도록 결정적인 공로를 세운 사람이다. 그리스 연합군의 내분과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아가멤논의 안하무인적인 탐욕에서 비롯되었다. 아가멤논은 전쟁 와중에 얻은 전리품인 아폴론의 사제 크리세스를 차지했지만, 아폴론의 보복으로 많은 병사들이 화살을 맞아 죽게 된다.

그러자 그는 대신 아킬레우스에게 전리품으로 주어졌던 브리세이스를 총사령관의 위력으로 빼앗는다. 이에 아킬레우스가 분노하며 아가멤논과 격렬한 말다툼을 한 끝에 그를 죽이려 했다. 위기의 순간에 아테나 여신이 관여했다. 그녀는 칼을 뽑아 아가멤논을 찌르려는 아킬레우스의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그를 준엄하게 꾸짖었다.

“나는 그대의 분노를 가라앉히려고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대가 내 말에 복종하겠다면 말이다. 그대들 두 사람을 똑같이 마음속으로
사랑하고 염려해주시는 흰 팔의 여신 헤라가 보내셨다.
그러니 자, 말다툼을 중지하고 칼을 빼지 말도록 하라.“


아테네 여신이 왕림한 것을 아킬레우스 이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그래도 분을 삭이지 못하고 아가멤논을 힐난했다. 모욕을 당한 아가멤논은 점점 더 화가 치솟았다.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테나 여신이 아가멤논을 죽이기 위해 칼을 빼려는 아킬레우스의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분노를 가라앉히라고 명령하고 있다. ‘아킬레우스의 분노’, Giovanni Battista Tiepolo(1696·1770)작,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 아테나 여신이 아가멤논을 죽이기 위해 칼을 빼려는 아킬레우스의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분노를 가라앉히라고 명령하고 있다. ‘아킬레우스의 분노’, Giovanni Battista Tiepolo(1696·1770)작,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

아가멤논은 최대의 영토와 군사를 거느린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진 미케네의 왕이다. 그런 까닭에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의 위엄으로 적은 군대를 이끌고 참전한 다른 나라의 왕이나 장수들을 한 수 아래로 본 측면이 있었다. 반면 아킬레우스는 각자 나라를 대표하여 참전한 왕과 장수들이 아가멤논과 동등한 동료라는 의식을 가졌던 것 같다. 특히 그리스에서 가장 뛰어난 장수로 이름난 자신을 가벼이 여기는 아가멤논을 결코 용납하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아킬레우스는 여신 테티스의 아들을 자처했으니 신의 아들로서 인간의 왕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코 둘 다 무시할 수 없는 힘과 용맹을 갖춘 영웅인지라 이들의 격돌을 말리기 힘들었다. 분기탱천한 이 두 사람의 칼부림을 아테나 여신이 간신히 제지했지만, 분노를 완전히 가라앉히지는 못했다. 이 때 원로인 네스토르 왕이 나선 것이다. 네스토르는 자신보다 한참 젊은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 두 사람의 자존심도 살려주면서 동시에 각자의 잘못을 지적하며 서로 노여움을 거두도록 중재했다. 지혜와 용기를 갖춘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대가 아무리 위대하기로 그에게서 여인을 빼앗지 마시오, 처음부터
아카이오이족의 아들들이 명예의 선물로 그에게 준 것이니
그대로 두시오. 그리고 그대 펠레우스의 아들이여! 그대는
힘으로 왕에게 대항하지 마시오. 제우스께서 영광을 주신,
홀을 가진 왕에게는 훨씬 더 큰 명예가 돌아가는 법이오.
그대 아무리 강력하고 그대를 낳아준 어머니가 여신일지라도,
그가 더 많은 사람들을 다스리니 그대보다 그가 더 위대하오.
아트레우스의 아들이여! 그대는 노여움을 거두시오, 그는 역시
전 아카이오이족에게 사악한 전쟁을 막아주는 큰 울이기 때문이오.“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는 노장 네스토르의 지혜로운 말을 따라야 옳았다. 하지만 마주보는 열차처럼 질주하던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는 최종적 파국은 자제했지만, 아가멤논의 탐욕을 끝내 멈추지 않았다. 아가멤논은 기어코 아킬레우스에게 주어졌던 브리세이스를 빼앗아갔다. 아킬레우스는 눈물을 흘리며 브리세이스를 보내고 아가멤논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키웠다. 이후 아킬레우스는 모든 전쟁에서 손을 떼고 칩거했다. 그로 인해 패전을 거듭한 그리스군에게 엄청난 피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이 서로 싸우고 갈라선 그날부터 제우스의 뜻대로 트로이 전쟁은 전개된 셈이다.

‘브리세이스를 인도하는 아킬레우스’,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이 보낸 전령에게 브리세이스를 넘겨주는 장면을 그린 프레스코화이다. 폼페이 유적지에서 발굴되었다. 1세기 작품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 ‘브리세이스를 인도하는 아킬레우스’,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이 보낸 전령에게 브리세이스를 넘겨주는 장면을 그린 프레스코화이다. 폼페이 유적지에서 발굴되었다. 1세기 작품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

아킬레우스가 빠진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은 연전연패했다. 이번에도 지혜로운 네스토르가 국면 전환을 시도했다. 그는 아가멤논에게 원로들에게 잔치를 베풀도록 한 뒤, 주연 자리에서 아킬레우스에 많은 선물과 함께 특사를 보내 아킬레우스와 화해를 청할 것을 권고한 것이다. 특히 꾀가 많은 오뒷세우스와 용맹한 장수 아이아스를 아킬레우스에게 파견하도록 아가멤논에게 추천했다. 아가멤논은 이 건의를 수용하여 각종 황금과 선물, 아리따운 여인들과 전리품을 아킬레우스에게 지급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오뒷세우스와 아이아스를 사절단으로 보내며 아킬레우스에게 화해를 시도하기로 했다. 네스토르는 별도로 오뒷세우스에게 아킬레우스가 전투에 참가하도록 설득해보라고 단단히 일렀다.

하지만 아가멤논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찌른 아킬레우스는 동료 장수들의 간곡한 설득에도 직접 참전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다만 전세의 형국이 너무나 불리하자, 그의 동료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의 투구와 갑옷을 입고 나가 대신 전투하는 것까지 막지는 않았다.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가 무구를 입고 출전하자 아킬레우스가 직접 참전한 것으로 여긴 그리스 연합군의 사기가 올랐다.

곧 그리스군은 트로이 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러나 너무 적진 깊이 들어가지 말라는 아킬레우스의 충고를 잊고 파르토클로스가 패주하는 트로이군을 지나치게 추격하다 적장 헥토르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태산처럼 움직이지 않던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폭발시킨 것은 바로 절친의 죽음이었다. 이제 그 분노는 그리스 내부가 아닌 트로이군과 적장 헥토르에게 향했다. 아킬레우스는 격정적인 전투를 통해 트로이군을 격파하고 헥토르를 죽이는 대전환을 만들게 된다.

아무튼 네스토르는 트로이 전쟁의 와중에서 올바른 사리 판단과 식견으로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의 갈등을 완화하고 내분을 최소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 그는 두 아들까지 참전시켰는데 그 가운데 안틸로코스는 매우 뛰어난 활약을 한다. 그 역시 아버지 네스토르를 닮았던지 아킬레우스가 파트로클로스 장례식을 기념하는 제전을 열었을 때, 전차경기에서 좁은 코너를 돌 때 요령껏 메넬라오스를 제치고 나가 2등을 하기도 했다. 전차 모는 데 일가견이 있던 아버지가 일러준 방법대로 실행한 결과였다. ‘준족의 아킬레우스’라는 별명처럼 네스토르는 ‘전차를 타는 네스토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탁월한 감독 덕분에 선수가 훌륭한 성적을 올린 셈이다.

“너는 전차와 말들을 그 옆으로 바싹 붙여 몰되
너 자신은 잘 엮은 전차 위에서 말들의 왼쪽으로
살짝 몸을 구부리도록 하라. 그리고 오른쪽 말에게는
소리치고 채찍질하며 손에서 고삐를 늦춰주도록 하라.
하나 왼쪽 말은 튼튼하게 만들 바퀴통이
그 끝을 살짝 스친다고 생각될 정도로
반환점에 바싹 붙여 몰되, 돌에 닿지 않게 조심하라.“


필로스 왕궁의 유적

트로이 전쟁에서 맹활약하던 네스토르 왕을 상기하면서 그의 왕성을 향해 달려갔다. 도로도 협소하고 노면도 고르지 못한 시골 농로와 마을길을 지나 힘들게 필로스 왕성 유적지에 닿았다. 먼저 왕릉을 둘러봤다. 미케네의 아가멤논 왕릉보다 규모는 훨씬 작았지만, 조성 양식은 내부를 둥근 공간으로 만들고 원추형으로 둘러쌓는 톨로스(Tholos) 형식을 똑같이 취하고 있었다. 다만 네스토르 왕의 능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필로스 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톨로스이다. ⓒ박경귀 필로스 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톨로스이다. ⓒ박경귀

필로스 왕궁의 유적은 톨로스가 있는 곳에서 아래로 2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아, 그런데 보수 및 새로운 발굴 공사로 출입문이 굳게 닫혀 있는 게 아닌가. 왕국 유적은 거의 멸실되었지만, 네스토르의 왕궁 유적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직접 보고 싶어 험한 길을 달려왔는데 아쉬움이 컸다. 물론 고대 왕궁의 욕조의 일부와 왕궁의 바닥 기초의 흔적만 남아있기는 하지만 추가로 발굴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니 또 뭔가 기대되기도 한다.

필로스 왕궁 유적이다. 보수 및 새로운 발굴이 진행되는 관계로 관람이 불가능하다. ⓒ박경귀 필로스 왕궁 유적이다. 보수 및 새로운 발굴이 진행되는 관계로 관람이 불가능하다. ⓒ박경귀

‘네스토르의 컵‘, 필로스 왕궁에서 발굴된 황금 잔이다. 왕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하여 ’네트토르의 컵‘이란 이름이 붙었다.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 ‘네스토르의 컵‘, 필로스 왕궁에서 발굴된 황금 잔이다. 왕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하여 ’네트토르의 컵‘이란 이름이 붙었다.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

필로스의 왕궁 유적지와 2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톨로스 부근에도 발굴이 진행되고 있었다. ⓒ박경귀 필로스의 왕궁 유적지와 2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톨로스 부근에도 발굴이 진행되고 있었다. ⓒ박경귀

노예 메세니아인들, 스파르타군을 굴복시키다

필로스 왕궁의 유적지를 거쳐 필로스 지역에서 벌어진 스팍테리아 전투 현장을 찾아 나섰다. 20여분 쯤 해안으로 내려오면 현대 도시 필로스에 닿는다. 필로스는 작은 읍내이다. 이곳에서 코앞에 있는 스팍테리아 섬 전경을 볼 수 있다. 스팍테리아 전투는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년)이 벌어지던 기원전 425년에 아테네에 의해 스파르타 군이 참패를 당한 전투이다.

아테네는 스파르타를 압박할 목적으로 그들의 식민지였던 메세니아의 남서부에 해안 마을을 이루고 있던 필로스를 점령하고 내륙에 면한 쪽에 성벽을 쌓았다. 아테네는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메세니아 주민들의 동조와 호응도 기대했을 것이다. 메세니아인들이 아테네와 합세해 반란을 일으킨다면 스파르타를 곤경에 처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뒤늦게 문제의 심각성을 간파한 스파르타는 아테네군을 고립시킬 목적으로 필로스 바로 앞에 있는 스팍테리아 섬에 중무장보병을 배치하고 필로스 해안을 봉쇄하려 했다. 그러자 아테네군은 섬 중간의 양쪽에서 상륙하여 스파르타 군을 섬의 북쪽 끝의 작은 요새로 몰아붙였다.

기대되었던 대로 메세니아인들은 이 전투에서 아테네를 도왔다. 그들은 철천지원수인 스파르타를 무찌르기 위한 증오와 복수심에 가득 차 사기가 충천해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스파르타군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섬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타고 올라갔다. 지세가 험한 것만 믿고 스파르타군은 파수병을 배치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테네군과 메세니아군의 기습 협공을 받은 스파르타는 독 안의 든 쥐의 형국이 되자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완전 고립되어 식량이 떨어져 굶주림에 지쳐 더 이상 싸울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군이 백기를 들자 전투는 27일 만에 끝났다.

섬으로 건너간 스파르타군 420명 중 292명이 포로로 잡혔고, 나머지는 모두 전사했다. 포로 가운데 120명은 스파르타인이었다. 전투에서 살아 돌아오거나 아니면 죽어서 방패위에 실려 가는 것을 철칙으로 여겼던 스파르타 전사들이 최초로 죽지 않고 항복한 사례였다. 병력 수는 적었지만, 결코 적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전통을 신앙처럼 지켜왔던 스파르타에게 이 전투의 패배는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더구나 자신들의 식민 지배를 받던 메세니아인들이 가세했다는 점에서 더 굴욕적이고 위협적이었을 것이다.

반면 메세니아인들에게는 자신들을 수탈하던 스파르타군을 격파했다는 그 사실에 크게 고무되어 독립을 위한 투쟁 의욕을 더욱 북돋우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희망을 보았을 것이다. 그로부터 4년 후인 기원전 421년에 망명한 메세니아인들이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부의 바다 건너편에 있는 나우팍토스인들과 힘을 합쳐 스파르타와의 전투에서 또 승리를 거둔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스팍테리아 전투의 전개 상황도이다. 붉은 색이 스파르타군 진영을, 청색 화살표가 아테네 군의 공략 방향을 나타낸다. 스팍테리아 전투의 전개 상황도이다. 붉은 색이 스파르타군 진영을, 청색 화살표가 아테네 군의 공략 방향을 나타낸다.

필로스 지역은 스팍테리아 섬을 사이에 둔 좁은 바다 출입구를 통제하기에 탁월한 입지를 갖고 있다. 이곳엔 14세기에 베네치아 군이 쌓은 성채가 남아있다. ⓒ박경귀 필로스 지역은 스팍테리아 섬을 사이에 둔 좁은 바다 출입구를 통제하기에 탁월한 입지를 갖고 있다. 이곳엔 14세기에 베네치아 군이 쌓은 성채가 남아있다. ⓒ박경귀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kipeceo@gmail.com)

박경귀 기자 (kipec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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