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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의 전사' 스파르타에 가린 비참한 자들의 운명


입력 2015.07.05 09:53 수정 2015.07.05 09:54        박경귀 (사)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박경귀의 ad Greece 60>스파르타의 노예였던 비운의 메세니아인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 주 >

박경귀 (사)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박경귀 (사)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그리스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한 스파르타는 후대의 역사가는 물론 그리스 문명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에게 늘 주목받는 국가이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스파르타가 강성할 수 있었던 배경에 비운의 국가의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스파르타가 독특한 전사문화와 병영국가를 만들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험준한 타이게토스 산맥의 서쪽에 있는 메세니아를 정복하면서 비롯되었다.

스파르타는 같은 그리스 민족인 메세니아를 정복하기 위해 전 시민이 전투에 집중하는 전사문화를 만들었다. 메세니아를 정복한 후에는 그들을 농노, 즉 헤일로타이(heilotai)로 만들어 스파르타를 먹여 살리게 만들고 자신들은 오로지 전사로서의 활동에 전념했다. 전쟁포로로 잡은 다른 나라 사람들을 노예로 삼는 것을 불문율로 삼았던 다른 그리스 국가들로부터 스파르타가 지탄을 받는 이유다.

스파르타 시민들은 농업, 상업, 수공업 등 일체의 근로 및 경제활동에서 해방되었다. 헤일로타이에게 농업을, 상업과 수공업은 준 시민 상태의 페리오이코이(perioikoi)에게 맡겼다. 스파르타는 철저하게 시민, 준 시민, 노예의 세 계층으로 이루어진 신분사회, 이른바 리쿠르고스 체제를 유지했다.

우리는 스파르타의 영광의 이면에 착취와 잔혹한 대우를 받았던 메세니아 인들의 처절한 삶이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절대 강자 곁에 있던 메세니아인들은 2백년이 넘도록 비참한 약자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헤일로타이’는 ‘포로’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 그들의 삶의 전쟁 포로의 그것과 다름없었다.

그들은 농토에 매여 있었고 매년 일정량의 수확량을 스파르타의 지주에게 바쳐야 했다. 토지에 귀속되었던 관계로 당연히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다. 스파르타는 메세니아인들의 반란의 싹이 트지 않도록 매년 전쟁을 선포하고, 저항적인 위험인물들을 공공연하게 제거했다.

필자는 2013년부터 2015년까지 스파르타를 세 번 답사했다. 두 번째 방문할 때까지 메세니아를 가보고 싶었지만, 일정이 맞지 않아 가지 못했다. 스파르타를 답사한 후 파르나소스 산맥을 넘어 메세니아로 가는 일정을 짜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개의 관광객들의 경우에도 교통의 오지에 있는 메세니아를 일정에서 빼기 일쑤다. 우리나라에도 메세니아 유적지에 대해 전혀 소개된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필자의 호기심을 더욱 더 자극했다.

지난 5월에야 비로서 메세니아에 가 볼 수 있었다. 이번에는 아예 올림피아를 두 번째 답사한 후 메세니아를 한 낮에 답사한 후 그 다음 날 파르나소스 산맥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넘어가 스파르타를 세 번째로 답사하는 여정을 잡았다.

전날 올림피아 성역을 답사한 후 메세니아로 향했다. 왕복 2차선 도로로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서쪽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한 시간 정도 내려가다 칼로네로에서 좌회전에서 20분 정도 가다보면 코크라스라는 작은 마을을 지난다. 이곳을 조금 벗어나자마자 우회전하여 1차선 시골 마을 산길을 30여분 넘어가면 메세니아에 당도한다.

이 길은 매우 험하다. 우마차도 지나는 일이 거의 없다시피 한 길이다. 상태가 매우 좋지 않지만 그나마 포장이 되어 있어 다행이다. 중간 중간 작은 산사태 인해 크고 작은 돌들이 길 위에 쏟아진 채로 있을 정도여서 인마의 왕래마저 드문 길이다.

코크라스에서 메세니아로 넘어가는 산길의 언덕배기에서 내려다본 메세니아 북쪽 산마을 전경이다. 코크라스에서 메세니아로 넘어가는 산길의 언덕배기에서 내려다본 메세니아 북쪽 산마을 전경이다.

메세니아로 넘어가는 길가의 작은 마을 입구에 있는 한 독립투사의 흉상, 1820년대에 오스만 투르크에 대항하여 독립전쟁을 벌였던 투사들의 이런 동상들이 그리스 곳곳에 있다. ⓒ박경귀 메세니아로 넘어가는 길가의 작은 마을 입구에 있는 한 독립투사의 흉상, 1820년대에 오스만 투르크에 대항하여 독립전쟁을 벌였던 투사들의 이런 동상들이 그리스 곳곳에 있다. ⓒ박경귀

산길을 굽이굽이 오르다 높은 산의 꼭대기를 넘어가면, 멀리 바위투성이인 유난히 험해 보이는 삼각형 모양의 산이 보인다. 아마 그 산이 메세니아의 이토메(Ithome) 산일 것으로 짐작하고 나아갔다. 메세니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산성을 쌓고 스파르타인들에 저항하며 오랫동안 괴롭힌 곳이라면 저 정도의 험준한 산이 아닐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역시 짐작이 맞았다.

메세니아는 그리스 국가 중 가장 슬픈 역사를 갖고 있다. 기원전 7세기부터 스파르타의 잦은 침공으로 괴롭힘을 당하다가, 기원전 6세기에 스파르타에 완전히 정복되어 노예로 전락한다. 스파르타인들은 군사 활동에 전념하는 동안 그들을 부양해 줄 국가노예가 필요로 했는데, 인접 국가인 메세니아인들이 그 희생양이 된 것이다.

메세니아는 스파르타와 3차례의 전쟁을 치르며 국가를 수호하려 했지만, 끝까지 스파르타의 전사들을 막아내지 못했다. 메세니아에 들어서는 길목에는 스파르타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견고한 성벽이 2500여년의 세월을 넘어 아직도 그 위용을 간직하고 있다. 스파르타를 막아내기 위해 그들이 얼마나 처절한 분투를 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메세니아의 성벽이 있는 이토메 산의 모습, 긴 장벽과 성루가 보인다. ⓒ박경귀 메세니아의 성벽이 있는 이토메 산의 모습, 긴 장벽과 성루가 보인다. ⓒ박경귀

이토메산의 산 허리를 잇는 메세니아 성벽, 아르카디안 성문 북쪽 능선으로 뻗은 모습이다. ⓒ박경귀 이토메산의 산 허리를 잇는 메세니아 성벽, 아르카디안 성문 북쪽 능선으로 뻗은 모습이다. ⓒ박경귀

메세니아의 성벽은 당시 그리스 도시 국가의 어느 성벽보다도 거대한 돌로 만들어진 매우 견고한 성벽이다. 그들이 스파르타인들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스파르타인들을 막아내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 알 수 있다. 아르카디안 성문의 경우 아주 독특한 구조를 띠고 있다. 대개의 성문의 경우 일자형의 성벽 중간을 끊어 성문을 성벽과 동일선상에 배치한다.

그런데 메세니아 성문의 경우 정방형의 구조물을 안과 밖의 양쪽에 대문을 만들고 그 안에 지름이 무려 19.36미터에 이르는 타원형의 공간을 두었다. 독창적이고 용이주도한 성곽 구조이다. 이는 바깥쪽 문이 붕괴되어 군사들이 들이닥치더라도 안쪽의 문이 닫힌 상태에서 타원형의 공간 속에서 일시적으로 지체되는 동안 성루의 위에서 침입자들을 공격하기 쉽게 한 것이다.

성문의 상인방으로 쓰인 돌은 거대한 하나의 돌이다. 대략 4미터가 넘어 보인다. 인간이 쌓았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다.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가 쌓았다는 티린스 성벽의 돌보다 훨씬 거대하다.

아르카디안 성문이다. 메세니아 성의 서쪽 주문이다. ⓒ박경귀 아르카디안 성문이다. 메세니아 성의 서쪽 주문이다. ⓒ박경귀

안내 표지판에 그려진 아르카디안 성문의 복원 추정도이다. ⓒ박경귀 안내 표지판에 그려진 아르카디안 성문의 복원 추정도이다. ⓒ박경귀

성문 가운데에 타원형의 공간을 둔 아르카디안 성문 ⓒ박경귀 성문 가운데에 타원형의 공간을 둔 아르카디안 성문 ⓒ박경귀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아르카디안 성문의 거대한 상인방(上引枋), 돌의 크기를 가늠해 볼 수 있도록 필자가 함께 했다. ⓒ박경귀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아르카디안 성문의 거대한 상인방(上引枋), 돌의 크기를 가늠해 볼 수 있도록 필자가 함께 했다. ⓒ박경귀

성 안쪽에서 남서쪽으로 바라본 아르카디안 성문 ⓒ박경귀 성 안쪽에서 남서쪽으로 바라본 아르카디안 성문 ⓒ박경귀

메세니아가 스파르타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것은 230여 년 만의 일이었다. 그것도 스스로 독립을 쟁취한 것은 아니었다. 테베의 걸출한 장군 에파미논다스(Epaminondas, BC 410? ~ BC 362)가 BC 371년에 레욱트라 전투에서, 그리고 BC 362년에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그동안 무적이던 스파르타를 연이어 패배시킴으로써 노예로 전락했던 메세니아는 해방을 맞게 되었다. 물론 메세니아인들이 스파르타의 식민통치를 벗어나기 위해 지난한 투쟁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 동안에 일부 메세니아인들이 아테네를 도와 스파르타와 싸웠던 것도 그 예다.

특히 기원전 421년에는 망명한 메세니아인들이 나우팍토스인들과 힘을 합쳐 스파르타에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물론 메세니아의 독립을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메세니아인들은 이 승리에 감격하여 울림피아 성역의 제우스 신전에 ‘승리의 여신 니케’ 상을 조각하여 봉헌했다.

이 작품은 칼키디키의 멘데 사람인 파에오니오스가 조각했다. 여신의 아름다운 모습이 정교하게 조각된 걸작 가운데 하나다. 2.11미터에 달하는 여신상이 8.81미터의 높은 삼각형 좌대 위에 설치되었으니 그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 대리석상은 제우스 신전의 남동쪽에 우뚝 솟아 있었다. 세계의 유명 스포츠맨들과 유명 정치인들이 참배하던 그곳에 승전의 기념물을 조성함으로써 노예 상태에 허덕이던 메세니아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스파르타에 대한 통쾌한 복수를 당당하게 보여주었을 것이다.

자유를 찾기 위한 메세니아인들의 피나는 노력은 계속되었다. 그들은 스파르타에 맞서기 위해 험준한 이토메 산을 의지하여 뉴메세니아를 세웠다. 테베의 에파미논다스가 스파르타를 압박하기 위해 메세니아인들이 새로운 도시를 세우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에파미논다스는 스파르타의 오랜 식민지인 메세니아인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하는 한편, 스파르타가 코린토스로 진출하기 위해 가는 길목에 메갈로폴리스라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 메갈로폴리스는 스파르타에 목에 가시와 같은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이러한 나라 안팎의 정세 변화와 테베의 강력한 스파르타 압박정책은 메세니아인들이 자유를 찾게 하는데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뉴메세니아와 메갈로폴리스의 등장은 스파르타의 위축을 가속화시켰다. 결국 그리스의 군사 패권을 테베에게 넘겨주고 말았던 것이다. 에마피논다스를 추도하는 시는 이런 정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일은 나의 계획으로부터 비롯되었지.
스파르타는 영광의 머리칼을 자르고
메세니아는 스파르타의 아이들을 받아들였네.
테베의 창들로 만들어진 왕관이
메갈로폴리스의 머리 위에 씌워졌지.
그리스는 이제 자유롭다네.


승리의 여신 니케 상이다. 올림피아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승리의 여신 니케 상이다. 올림피아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승리의 여신상이 설치되었던 삼각형 좌대이다. 8.81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좌대 중 일부만 남았다. ⓒ박경귀 승리의 여신상이 설치되었던 삼각형 좌대이다. 8.81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좌대 중 일부만 남았다. ⓒ박경귀

새로운 메세니아는 험준한 이토메 산 둘레를 견고한 성벽으로 막아 보호했다. 새로운 메세니아는 기원전 4세기부터 로마 시대까지 착실하게 성장해 나갔다. 메세니아 유적지는 오랜 식민지 생활 끝에 자유를 얻은 메세니아인들이 성취한 도시 생활의 면모를 살펴 볼 수 있다. 오늘날 스파르타를 방문하면 남아있는 유적이 거의 없는 반면, 메세니아에서는 번성했던 고대의 자취를 당당하게 증명하는 건축물의 유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의 유적지 대부분 하절기에는 오후 5시에서 6시 정도에 문을 닫는 데 반해, 이곳은 오후 8시까지 관람할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다. 이는 교통이 불편한 점도 고려했겠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노력의 일환이 아닐까 싶다. 특히 덜 알려진 메세니아의 유적지를 널리 알려 굴욕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독립 이후 견실한 국가를 건설했던 메세니아의 자취를 보여주고 싶은 애틋한 마음도 작용한 게 아닐까 싶다.(메세니아 유적지의 상세한 답사는 다음 회에서 소개됩니다.)

메세니아인들이 기원전 4세기 전반에 건설한 뉴메세니아 유적지의 전경이다. ⓒ박경귀 메세니아인들이 기원전 4세기 전반에 건설한 뉴메세니아 유적지의 전경이다. ⓒ박경귀

메세니아 유적지 입구에서 바라 본 이토메 산 ⓒ박경귀 메세니아 유적지 입구에서 바라 본 이토메 산 ⓒ박경귀

메세니아의 전설적인 왕 레우키포스의 딸 이름을 딴 아르시노에(arsinoe) 분수대 유적 메세니아의 전설적인 왕 레우키포스의 딸 이름을 딴 아르시노에(arsinoe) 분수대 유적

메세니아의 아고라 지역이다. ⓒ박경귀 메세니아의 아고라 지역이다. ⓒ박경귀

메세니아의 원형극장 유적이다. 메세니아 평원을 바라보는 풍광이 아름답다. ⓒ박경귀 메세니아의 원형극장 유적이다. 메세니아 평원을 바라보는 풍광이 아름답다. ⓒ박경귀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kipeceo@gmail.com)

박경귀 기자 (kipec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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