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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의 300 전설? 아이기나의 500 전사를 아는가


입력 2015.06.28 10:09 수정 2015.06.28 10:09        박경귀 (사)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박경귀의 ad Greece 59>아테네와 아이기나가 앙숙이 된 까닭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 주 >

박경귀 (사)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박경귀 (사)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아테네는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전 이후 에게 해의 해상 패권을 차지함으로써 그리스에서 가장 번영한 국가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아테네 이전에 에게 해의 해상 패권을 쥐고 흔들던 아이기나(Aigina, 현 애기나)의 존재는 덜 알려져 있다. 기원전 6세기부터 5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에게 해를 지배했던 것은 아테네가 아닌 아이기나였다.

아이기나는 아티카 반도와 메가라, 그리고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코린토스 지협으로 둘러싸인 사로니코스 만의 중앙에 위치한 섬이다. 아티카나 멀리 에게 해로 진출하기 쉽고, 코린토스와 에피다우로스 등 펠로폰네소스의 주요 도시로도 진출하기 용이한 해상 교통의 요지이다. 이런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아이기나인들은 그리스 국가 가운데 일찍이 해상 무역에 눈을 뜨고, 해군을 강화하여 해상 패권을 잡을 수 있었다.

필자는 2015년 5월 아이기나 섬 답사에 나섰다. 피레우스 항구의 E8 부두에서 출항하는 차량을 실을 수 있는 대형 크루즈를 이용했다. 배를 타고 에게 해의 에메랄드 빛 물살을 가르며 남서쪽으로 50여분 나아가면 닿는다. 아테네를 찾는 사람들에게 하루 섬 나들이로 알맞은 코스여서 관광객이 늘 붐빈다.

아이기나행 크루즈가 피레우스 항 E8 부두에 정박해 있다. ⓒ박경귀 아이기나행 크루즈가 피레우스 항 E8 부두에 정박해 있다. ⓒ박경귀

크루즈에서 바라 본 아이기나 섬이다. ⓒ박경귀 크루즈에서 바라 본 아이기나 섬이다. ⓒ박경귀

신화와 전설의 나라 아이기나

아이기나의 역사는 꽤 길다. 선사시대의 유적이 많이 발굴되었다. 기원전 2200경부터 2050년경까지 유지되었던 고대 성채의 흔적이 발굴된 것만 보아도 그렇다. 아이기나 아크로폴리스 주변에서는 기하학기 및 아르카익기 도기들도 많이 발굴되었다. 주로 아테네 및 코린트에서 수입한 것들이다. 아이기나는 가까운 육지인 코린트와 에피다우로스, 아테네 등과 교류하고 바다로는 크레타와 에게 해의 여러 섬들과 교류했던 것 같다.

특히 아이기나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가는 길목에 있는 섬인 까닭에 이집트 문명과 크레타 문명의 영향을 그리스 본토보다 더 일찍 더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 영향을 알 수 있는 유적이 있다. 아이기나 섬에는 있는 아파이아(Aphaia) 신전이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과 수니온 곶의 포세이돈 신전과 함께 그리스의 3대 신전으로 손꼽히는 걸작이다.

아파이아는 원래 크레타 섬의 토속 여신이었다. 그는 제우스가 카르메와 사랑을 나눠 낳은 딸 브리토마르티스(Britomartis)이다. 그녀는 크레타의 왕 미노스의 끈질긴 구애를 뿌리치다, 그에게 붙잡히려는 순간에 절벽으로 뛰어내렸다가 어부의 그물에 걸려 구출되었다. 그녀의 정절을 높이 산 처녀 신 아르테미스가 그녀를 영생하는 여신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 후 그녀는 ‘보이지 않는 자’라는 뜻의 아파이아로 불리게 되었다. 크레타인들이 신전을 세워 그녀에 경배 드리던 풍습이 아이기나로 건너 온 것이다. 필자는 이 신전을 보기 위해 아이기나 섬을 찾아 나선 참이었다.

기원전 2200경부터 2050년경까지 존속했던 도시 성채 형상을 복원한 모형, 아이기나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기원전 2200경부터 2050년경까지 존속했던 도시 성채 형상을 복원한 모형, 아이기나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기하학기(기원전 10~8세기)의 도기, 아이기나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기하학기(기원전 10~8세기)의 도기, 아이기나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기하학기(기원전 10~8세기)의 도기, 아이기나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기하학기(기원전 10~8세기)의 도기, 아이기나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아이기나 섬은 오랜 신화와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다. 하신(河神) 아소포스는 테베와 아이기나 두 쌍둥이 딸을 두었다. 어느 날 제우스가 어여쁜 아이기나에 혹해 독수리로 변신한 후 그녀를 오이노네 섬으로 납치해 간다. 이 섬에서 제우스와 아이기나가 사랑을 나누고 아이아코스를 낳았다. 이후 이 섬은 아이기나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다. 아이아코스는 아이기나 섬의 전설적인 왕이 된다.

아이아코스의 후손들은 역시 전설적인 영웅들로 수두룩하다. 그는 스키론의 딸 엔데이스와의 사이에서 아들 펠레아스와 텔레몬을 두었다. 두 아들은 이아손과 함께 황금모피를 찾아 떠났던 50여명의 그리스 영웅 대열에 참가했었다. 또 펠레아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와 텔레몬의 아들 아이아스는 트로이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그리스의 영웅들이다. 아이아코스는 영웅들의 아버지, 최고의 영웅이었던 것이다. 살라미스 해전 당시 아이기나 섬에 있던 아이아코스 신상을 모셔오도록 한 것도 그리스 연합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심리전의 일환이었을 것 같다.

트로이 전쟁 중에 사망한 아킬레우스의 시신을 옮기는 동료 장군 아이아스, 기원전 540~530년 작품, 뮌헨 국립 고대박물관 트로이 전쟁 중에 사망한 아킬레우스의 시신을 옮기는 동료 장군 아이아스, 기원전 540~530년 작품, 뮌헨 국립 고대박물관

수천 년 역사가 혼재된 아이기나의 아크로폴리스

아이기나의 고대 도시 유적은 19세기 후반에 독일과 호주의 고고학자에 의해 처음으로 발굴되었고, 이후 지금까지 유적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아크로폴리스 유적지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건축물과 헬레니즘 시대의 성채, 비잔틴 제국 시기의 건축물들의 유허가 혼재되어 있다. 또 도시를 둘러싼 성채 역시 고대 그리스 시대의 것과 로마 시대를 거쳐 비잔틴 시대의 것들이 혼재되어 남아 있다.

아이기나 아크로폴리스 유적이다. 멀리 남쪽으로 도시 에기나와 여객 부두가 보인다. ⓒ박경귀 아이기나 아크로폴리스 유적이다. 멀리 남쪽으로 도시 에기나와 여객 부두가 보인다. ⓒ박경귀

아이기나 아크로폴리스 유적지이다. 뒤의 기둥이 남아있는 곳이 아폴론 신전이다. 앞쪽의 건물 유허는 비잔틴 시대의 것이다. ⓒ박경귀 아이기나 아크로폴리스 유적지이다. 뒤의 기둥이 남아있는 곳이 아폴론 신전이다. 앞쪽의 건물 유허는 비잔틴 시대의 것이다. ⓒ박경귀

아크로폴리스 북쪽 해안을 둘러싼 성채 유적, 선사시대부터 비잔틴 시대에 이르는 여러 시대의 양식이 혼재되어 있다. ⓒ박경귀 아크로폴리스 북쪽 해안을 둘러싼 성채 유적, 선사시대부터 비잔틴 시대에 이르는 여러 시대의 양식이 혼재되어 있다. ⓒ박경귀

아이기나는 기원전 7세기부터 5세기까지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고, 이를 통해 부를 축적한 번영한 나라였다. 콜로나 언덕에 있는 아폴론 신전이 이를 뒷받침 한다. 기원전 6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에 이 신전이 세워졌다. 이 때가 아이기나가 가장 번영하고 강성한 시기였을 것이다.

바닷가 위에 웅장하게 서 있던 아폴론 신전의 유허이다. 바닥 기단은 온전하지만 기둥은 하나만 남아 있다. ⓒ박경귀 바닷가 위에 웅장하게 서 있던 아폴론 신전의 유허이다. 바닥 기단은 온전하지만 기둥은 하나만 남아 있다. ⓒ박경귀

아테네가 아이기나와 앙숙이 된 까닭은?

이런 힘을 바탕으로 아이기나는 한 때 아테네를 가장 괴롭혔던 국가다. 아이기나 사람들이 아테네인들을 앙숙으로 여긴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아이기나는 바다 건너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동의 해안에 있던 도시 에피다우로스에 종속되어 있었다. 아마 아이기나가 독립적인 해상력을 확보하기 전인 7세기경까지 그러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흉년이 계속 들자, 극복 방안을 델포이의 신탁에 물었다. 신탁은 풍요의 여신 다미아와 아욱세시아의 신상을 건립하면 흉년이 해소될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아테나 여신에게 매년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아테네의 신성한 올리브 나무를 베어다 신상을 만들어 봉헌했다. 이후 풍년이 들었고, 에피다우로스 사람들은 약속대로 아테네의 아테나 여신에게 해마다 공물을 바쳤다.

그런데 아이기나가 함선을 대대적으로 건조하고 해상 패권을 잡게 되자 에피다우로스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 다미아와 아욱세시아 신상을 약탈해 갔다. 신상을 빼앗긴 에피다우로스가 아테네에 공물을 바치지 않게 되자, 아테네는 아이기나를 쳐들어가서 신상을 아테네로 모셔가려 했다. 하지만 이를 제지하려는 아이기나 군대와 원군으로 건너 온 아르고스 병사들에 의해 모조리 죽임을 당한다. 오직 한 사람만 아테네로 간신히 살아 돌아갔지만, 그 역시 아테네 병사들의 아내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브로치로 찌르는 바람에 죽고 말았다.

이 사건이후 아테네 사람들과 아이기나 사람들은 원한과 적대감을 품게 되었다. 하지만 아테네는 해군력이 강했던 아이기나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관계였다. 아이기나가 해군력을 이용해 자주 아티카 해안을 노략질하자, 아테네는 아이기나를 침략하려고 델포이에 신탁을 물었다.

신탁은 아이기나인들의 침략을 30년 동안 방치하다가 31년째 되는 해 영웅 아이아코스를 위한 신전을 건립한 후에 아이기나와 전쟁을 시작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기원전 5세기 전반까지 아테네가 바다에서 아이기나를 당해 낼 수 없었던 절대 열세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아테네는 아이기나를 대적할 힘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테네는 다른 나라와 대적할만한 함선을 갖추지 못했다. 약했다.

함선 건조가 숙원사업이었지만 돈이 없었다. 그런데 기원전 483년에 아테네의 라우레이온 광산에서 은광이 발굴되어 막대한 국고 수입이 생겼다. 그러자 테미스토클레스는 이 수입을 시민들에게 고르게 분배하자는 요구를 일축하고, 아이기나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함선을 건조하자고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200척의 함선을 건조하면서 아테네는 비로소 해상 강국의 토대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 전력을 아이기나와의 전쟁에 쓰기 전에 페르시아 함대와 살라미스 해전에서 맞붙게 되었던 것이다. 해군력 구축은 아이기나의 오랜 해상 침략으로 당한 서러움과 원한을 갚아주기 위한 적개심에서 비롯되었지만, 그렇게 해서 구축된 해군력이 아테네는 물론 그리스 세계의 자유를 수호하는 데 쓰이게 되었던 것이다.

아테네가 그리스 최고의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해군력이었다. 아테네가 페르시아 전쟁에서 전 국토를 빼앗기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해군 덕분이었던 것이다. 국가의 존망을 건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다시 아티카를 수복할 수 있었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의 황금기를 열 수 있게 된 원동력도 바로 강력해진 해군을 바탕으로 에게 해의 해양 패권을 거머쥐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강력한 해군은 아테네를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 자리 잡게 했고, 에게 해의 수호자 역할을 하게 했다.

아테네가 해상 패권을 장악하기 전까지 아테네와 아이기나는 자주 갈등을 빚었다. 기원전 490년 경 제2차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나자, 아이기나는 페르시아의 대왕 다레이오스의 요구를 받아들여 흙과 물을 바쳤다. 페르시아에 굴복한 것이다.

코앞에 있는 아테네가 크게 반발한 것은 당연했다. 육지에서 페르시아 대군이 몰려오고, 바다에서 아이기나가 페르시아 함대와 연합해서 쳐들어온다면 아테네는 살아남기 힘든 형국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아이기나의 배반을 알리고 이들을 제압해 줄 것을 요청하게 된다. 스파르타는 클레오메네스를 아이기나로 급파하여 페르시아에 부역하려는 아이기나 인들을 제어하기 위해 아이기나 섬에 주둔했다. 다행히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가 승리하고 페르시아 대군이 철군함으로써 한 숨을 돌렸지만 아이기나가 일으킨 이런 행동들이 아테네인들과 아이기나인들 사이에 더욱 깊은 원한을 쌓게 만들었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최고의 활약 보인 아이기나 해군

하지만 제3차 페르시아 전쟁이 발발하여 페르시아 대군이 그리스 본토를 유린하고 아테네를 점령하자, 아이기나와 아테네는 그리스 세계의 공동의 적인 페르시아를 물리치기 위해 구원(舊怨)을 털어버리고 협력했다. 아이기나 해군은 특유의 용맹으로 페르시아 해군을 괴롭혔다. 살라미스 해전에서도 30척의 함선을 갖고 참전하여 큰 활약을 했다. 결사적으로 싸워야 할 동기도 충분했다. 만약 그 해전에서 질 경우 살라미스 섬과 가까이 위치한 아이기나 섬 역시 페르시아의 수중에 떨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살라미스 해전이 벌어질 때 아이기나 함선의 한 기장이던 폴뤼크리토스는 페르시아 함선을 공격하면서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 장군을 향해 아이기나인들이 페르시아에 부역했다며 모욕했던 언행을 조롱했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의 자유를 위해 당당히 싸우는 아이기나인들의 용맹을 두 눈으로 똑바로 확인하라는 시위였을 것이다.

아무튼 헤로도토스는 살라미스 해전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한 사람들은 아이기나인들이고, 그 다음이 아테네인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이기나인들은 살라미스의 무훈에 따라 그에 상당하는 전리품도 배분받았을 것이다. 그들이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청동 돛대에 고정된 세 개의 황금별을 봉헌한 것도 그 일환이었을 것이다.

아이기나인들은 살라미스 해전 이후 벌어진 페르시아와의 최후의 결전인 플라타이아 전투에도 500명의 중장보병을 보내 참전했고, 아테네의 장군 아리스테이데스의 지휘 아래 용감하게 싸웠다.

하지만 페르시아 전쟁이 모두 끝나고 아테네가 패권 국가가 되자, 아이기나와 아테네의 해묵은 원한은 다시 도졌다. 기원전 459년에서 458년에 아테네가 아이기나를 대대적으로 침공했고, 이 이후 아이기나의 국력이 급격하게 쇠퇴하게 되었다. 또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벌이자, 아이기나는 스파르타 편에 서서 아테네에 대항했다.

전쟁기간 중에 아이기나 섬 근처에서 아이기나와 아테네 사이에 큰 해전이 벌어졌다. 아이기나 함선 70여척이 괴멸되며 아테네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아테네가 아이기나인들을 추방하고 자국민을 이주시키는 정책으로 아이기나를 지배했다. 기원전 210년 이후에는 페르가몬 왕의 지배를 받았고, 이후 그리스의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로마에 복속되었다.

아이기아의 융성의 뚜렷한 증거는 웅장한 아파이아 신전이다. 기원전 490년에서 480년에 세워진 도리아식 신전이다. 정면 6개, 측면 12개의 기둥이 받쳤던 이 신전은 20여개의 기둥이 남아 아직도 웅장미를 잃지 않고 있다. 특히 산 언덕 위에 우뚝 솟아 바다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어 주변의 풍광과 어울려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특히 신전의 양쪽 박공에 부조들의 예술성이 높이 평가받고 있다. 특히 서쪽 박공에 부조되었던 ‘죽어가는 병사’ 상은 탁월한 조각 작품으로 유명하다. 이 작품을 비롯하여 이곳에서 발굴된 상당수의 유물들을 이곳의 발굴을 맡았던 독일 학자들이 자국으로 옮겨 갔다. 이곳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 독일 뮌헨의 글립토텍 박물관을 언젠가 방문해야 할 것 같다.

남서쪽에서 바라본 아파이아 신전 ⓒ박경귀 남서쪽에서 바라본 아파이아 신전 ⓒ박경귀

동북쪽에서 바라본 아파이아 신전 ⓒ박경귀 동북쪽에서 바라본 아파이아 신전 ⓒ박경귀

아파이아 신전의 내부 구조도, 아파이아 신전 안내도 ⓒ박경귀 아파이아 신전의 내부 구조도, 아파이아 신전 안내도 ⓒ박경귀

아파이아 신전 모형도,  뮌헨 글립토텍(Glyptothek) 박물관 아파이아 신전 모형도, 뮌헨 글립토텍(Glyptothek) 박물관

아파이아 신전의 서쪽 페디먼트에 부조되었던 ‘죽어가는 병사’ 상, 글립토텍(Glyptothek) 박물관 아파이아 신전의 서쪽 페디먼트에 부조되었던 ‘죽어가는 병사’ 상, 글립토텍(Glyptothek) 박물관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kipeceo@gmail.com)

박경귀 기자 (kipec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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