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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종 대신 택한 투쟁, 그리스 세계의 자유를 되찾다


입력 2015.06.21 10:08 수정 2015.06.21 10:08        박경귀(사)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박경귀의 ad Greece 58>페르시아 전쟁의 대미(大尾), 플라타이아 전투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 주 >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기원전 480년 제3차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와 페르시아는 테르모필레 협곡의 전투에 이어 두 번째로 살라미스 해협에서 격돌했다. 결과는 테미스토클레스가 주도한 그리스 연합 함대의 대승으로 끝났다. 지난 회에서 그 전투 상황과 승리의 요인을 자세히 소개한 바 있다.

모든 전투에서는 승리의 주역인 영웅이 탄생한다. 살라미스 해전은 테미스토클레스를 승첩의 영웅으로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공헌한 사람이 있다. 아테네군을 함께 이끌었던 아리스테이데스가 그 사람이다. 그는 테미스토클레스에 가려 활약상이 덜 조명되었지만, 테미스토클레스와 최고의 정적이면서도 국가를 구하는 대의 앞에서 사원(私怨)을 버리고 흔쾌히 협력함으로써 해전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그렇지만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로 곧바로 페르시아 전쟁이 종결되지는 않았다. 700여척의 함선을 보유했던 페르시아 해군은 살라미스 해전에서 200여척이 격침당했지만, 나머지는 그대로 건재했다. 패전하고도 페르시아 해군은 40여 척을 잃고 330여척의 함선을 보유한 그리스 연합 함대의 거의 배 정도의 함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잔여 함선의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페르시아 함대는 페니키아 함선을 포함해서 정예 주력부대들이 참패했다는 점에서 사실상 괴멸에 가까웠던 것이다.

페르시아 해군은 전의를 잃고 아테네 외항인 팔레론을 거쳐 퇴각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 함대를 추격하여 헬로스폰토스 해협까지 진출해서 크세르크세스가 가설한 선교(船橋)을 끊어버릴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냥 도망치게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퇴로를 차단할 경우 페르시아 대군이 그리스 영토에 고립되어 다시 그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일 수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이런 의견을 가진 다수의 장군들을 설득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추격을 주장하는 아테네 병사들에게 추격을 포기하자고 설득했다.

“우리는 도망치는 그들을 더는 추격하지 맙시다. 이런 위업을 달성한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한 인간(크세르크세스)이, 그것도 불경한 무법자가 아시아와 에우로페(유럽)를 동시에 통치하는 것을 시기하신 신들과 영웅들이었소. 그는 신성한 것들과 세속적인 것들을 가리지 않고 불 지르고 신상들을 내동댕이쳤소. 그는 또 바다에도 매질을 하며 거기에 족쇄들을 던져 넣었소. 지금 우리는 만사형통하니, 헬라스에 머물며 우리 자신과 가족들을 돌보도록 합시다. 외국의 침략자들이 완전히 격퇴된 지금 각자 자기 집을 수리하고 들판에 씨를 뿌리도록 합시다.“

살라미스 해협의 승전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전후 복구에 힘쓰자는 얘기였다. 이 대목에서명량해전에서 승리한 후 이순신 장군이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않고 그저 “천행이었다”라고 말했던 것이 상기된다. 물론 테미스토클레스는 탁월한 지휘관이긴 했지만, 이순신 장군과 같은 고결한 인품까지 갖춘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 함대가 페르시아 함대를 추격하지 않게 된 상황을 영악하게 활용했다. 자신의 심복을 크세르크세스 대왕에게 몰래 보내 자신이 대왕에게 호의를 보이기 위해 그리스 함대의 추격을 저지시켰노라고 공치사를 했던 것이다.

민중들의 변덕이 심한 아테네에서 향후 자신의 입지가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것에 대비하여 보험을 들어 두려 했던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이런 간교한 측면이 있었음을 분명하게 기록해 놓고 있다. 훗날 이런 조치의 진가가 실제로 발휘되었다. 몇 년 후에 테미스토클레스가 아테네에서 시민들의 미움을 사 추방당하고 생명을 위협받자 페르시아로 도망쳐 크세르크세스에게 몸을 의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유를 위해 맞섰던 적장에게 투항한 것이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영웅을 포용할 수 없었던 아테네인들의 협량을 탓해야 할지, 자신의 공에 도취되어 오만하게 굴었던 테미스토클레스의 잘못을 탓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그리스 연합함대는 페르시아 함대의 추격을 단념했다. 그 대신 페르시아에 부역했던 키클라데스 제도의 여러 섬들을 돌며 그들을 위협하여 재물을 거두었다. 그리스 연합 해군이 에게 해를 휘젓는 동안 그리스 본토에서는 또 다른 전운이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의 300결사대를 전멸시키고, 아티카 지방을 초토화시킨 페르시아 육군은 건재했다. 그들은 대왕과 함께 아테네를 포기하고 그리스 중부지방까지 퇴각한다. 그러다가 페르시아의 육군 총사령관 마르도니오스는 해전의 패전으로 충격을 받아 완전히 철군하려고 하는 크세르크세스 대왕에게 정병 30만 명을 남겨주면 그리스 전체를 노예로 만들어 바치겠다고 공언한다.

전쟁을 하자고 왕을 설득했었던 그였던 만큼 귀국한다 해도 패전의 책임 추궁을 당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의도야 어떻든 그렇지 않아도 실의에 빠졌던 대왕은 그에게 전쟁을 맡기고 하루빨리 악몽 같은 그리스 땅을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마르도니오스에게 군대를 넘겨주고 호위군단만 거느리고 철군을 서두른다.

마르도니오스의 30만 대군이 그리스에 그대로 남아있는 한 전쟁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그리스 세계 역시 자유의 수복은 유예되었다. 마르도니오스는 테살리아에 주둔하며 겨울을 나면서 그리스 각지에 사절을 보내 항복을 권하거나 이간질을 했다. 그는 대왕이 아테네를 함락했던 것처럼 자신도 똑같은 업적을 세우고 싶었다. 그는 아테네에 사절을 보내 항복하고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으면 아테네의 자유와 독립을 보장해 줄 것이며, 다른 땅까지 덧붙여 주겠다고 회유했다. 하지만 아테네인들은 이를 완강하게 거부했다.

이에 마르도니오스는 보이오티아를 거쳐 아테네를 다시 침략했다. 살라미스 섬으로 퇴각했다 해전의 승리 이후 귀환했던 많은 아테네 시민들은 다시 살라미스 섬으로 피난가야 했다. 마르도니오스는 아테네의 빈 도성을 함락하고 남아있는 신전과 집들을 파괴하고 불살랐다.

그 사이 아테네인들은 여러 차례 스파르타에 원군을 요청했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해전 이후 펠로폰네소 반도 방어를 위해 코린토스 지협에 방벽을 쌓는 일에 매진하며 아테네의 구원 요청에 선뜻 응하지 않았다. 아테네는 할 수 없이 스파르타가 돕지 않겠다면 아테네가 부득이 페르시아에 항복하고 동맹을 맺어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약탈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일만 명을 동원하기도 쉽지 않았던 스파르타가 페르시아의 30만 대군에 맞선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테네와 메가라가 페르시아에 영구적으로 점령당한다면, 그 다음 차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일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결국 스파르타도 분분했던 의견을 정리하고 페르시아와 맞서 싸우기로 결정했다. 스파르타가 참전하게 되자, 펠로폰네소스의 각 도시들도 동참하기로 한다. 이제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마지막 결전은 불가피했다. 이들이 맞붙은 대회전이 바로 플라타이아 전투이다.

플라타이아는 아테네에서 북서쪽으로 6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아테네에서 차량으로 1시간 20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다. 필자는 2014년 2월에 아테네에서 출발하여 플라타이아 지방을 경유만 하고 테베를 거쳐 델포이를 방문한 적이 있다. 지난 5월에는 페르시아 전쟁의 마지막 전쟁터였던 테베 지역과 플라타이아를 직접 답사했다.

이번에는 마라톤 전적지를 답사하고 에우보이아 섬의 에레트리아와 칼키스를 둘러본 후 칼키스에서 테베로 향했다. 테베는 칼키스에서 남서쪽으로 큰 길을 따라 45km 정도 떨어져 있다. 자동차로 40분 정도 걸렸다. 플라타이아는 테베에서 20km 정도 떨어져 있어 차로 30분 정도 소요된다. 플라타이아에는 현재 페르시아 전쟁의 유적은 남아있는 것이 없다. 다만 그곳의 주변 지형지세를 통해 옛 전투의 상황을 보다 생생하게 상상해 보고 싶었다. 또 플라타이아에서 북서쪽으로 20여분 가면 테베군이 천하무적이던 스파르타 군을 괴멸시킨 레욱트라 전적지가 있다. 그곳도 함께 둘러볼 수 있었다.

테베의 에파미논다스가 스파르타군을 격파한 레욱트라 전투의 승전비이다. 상부에 높이 솟아있던 기둥은 소실되었다. 플라타이아에서 북서쪽으로 14km 정도 떨어진 오포소스 강가에 있다. ⓒ박경귀 테베의 에파미논다스가 스파르타군을 격파한 레욱트라 전투의 승전비이다. 상부에 높이 솟아있던 기둥은 소실되었다. 플라타이아에서 북서쪽으로 14km 정도 떨어진 오포소스 강가에 있다. ⓒ박경귀

테베는 그리스 남부 지방의 위쪽에 자리 잡고 있는 교통의 요지이다. 북쪽으로는 보이오티아를 거쳐 테살리아 지방으로, 북서쪽으로는 델포이, 남쪽으로는 아테네와 코린트로 나아가기 편리한 곳이다. 그리고 도시를 둘러싼 얕은 산들을 벗어나면 북쪽과 남쪽으로 넓은 평원이 펼쳐진다. 특히 남쪽에는 키타이론 산맥이 동서를 가로지르듯 길게 버티고 서 있어, 아티카 지역과 지리적 경계를 확실하게 구분시켜 준다. 플라타이아는 키타이론 산맥의 북사면 기슭에 자리한 작은 도시이다.

테베는 카드모스가 최초로 창건했다. 페니키아의 왕 아게노르의 왕자였던 제우스가 납치해 간 에우로페를 찾아오라는 아버지의 엄명을 받아 세상 이곳저곳을 헤매다 테베에 이르렀다. 그는 이곳에 있던 성스런 샘물을 지키던 용을 물리치고 용의 치아를 땅에 뿌려 거기서 솟아나온 다섯 용사의 도움을 받아 테베를 건국했다.

용과 싸우는 카드모스의 모습, 에우보이아에서 발굴된 암포라, 기원전 560~550년 경 작품 용과 싸우는 카드모스의 모습, 에우보이아에서 발굴된 암포라, 기원전 560~550년 경 작품

돌을 던져 샘물을 지키던 용을 물리치는 카드모스, 이탈리아 파에스툼에서 발굴, 기원전 360~340년 경 제작, 르부르 박물관 돌을 던져 샘물을 지키던 용을 물리치는 카드모스, 이탈리아 파에스툼에서 발굴, 기원전 360~340년 경 제작, 르부르 박물관

테베는 여러 신화와 전설이 서린 곳이다. 오이디푸스 왕의 신화와 일곱 장수 이야기의 무대이기도 하다. 또 그리스인에게 최고의 사랑은 받은 디오니소스신의 어머니인 세멜레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런 흥미로운 스토리들은 여러 비극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 아이스퀼로스의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 에우리피데스의 ‘박코스 여신도들’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테베는 페르시아 전쟁 당시까지만 해도 키타이론 산맥 너머에 있는 아테네와 적대적이었고 스파르타와 가까이 지냈다. 그러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시기에는 아테네와 손잡고 스파르타와 맞섰다. 테베가 최고의 융성기를 맞은 건 기원전 4세기 중반이다. 그들은 기원전 371년에 당시 그리스의 무적을 자랑하던 스파르타군을 레욱트라 전투에서 괴멸시킨 후 그리스 최강의 군사국가가 되었다.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명장 에파미논다스가 이끌던 시대가 테베의 황금시대였다.

그가 창안한 사선진전술(斜線陣戰術)은 앞으로 전진하는 데 용이한 반면 측면 공격에 취약한 중장보병의 약점을 파고든 기발한 전술이었다. 이 전술로 막강한 스파르타군을 격파할 수 있었다. 하지만 테베의 패권국가의 위상은 10년을 못 갔다. 에파미논다스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원정하다 기원전 362년에 전사했기 때문이다. 그가 죽은 후 테베는 급격하게 패권을 잃게 된다.

그리스 세계가 쇠락하고 마케도니아 왕국이 발흥하면서 테베의 운명은 비참해진다.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가 그리스를 복속시키려 하자, 테베는 아테네와 동맹을 맺고 마케도니아와 카이로네이아에서 맞선다. 기원전 338년에 벌어진 이 전투에서 청년 알렉산더가 활약한 마케도니아군이 승리한다. 이후 그리스 세계는 정치적 독립을 잃고 마케도니아에 굴복하게 된다. 그리스 세계의 자존심을 걸고 분기했던 테베와 아테네마저 무너지자 마케도니아에 맞설 국가가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기원전 336년에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가 갑자기 암살당하자 테베는 이때를 노려 마케도니아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이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했다. 테베의 전 성벽을 파괴했다. 그리스의 모든 국가들에 대한 시범 케이스였던 셈이다. 한동안 그리스의 맹주를 자처했던 테베의 초토화는 그리스 세계를 경악시켰다. 알렉산더는 이렇게 그리스를 힘으로 안정시킨 후 동방원정을 떠날 수 있었다.

지금의 테베는 과거의 영화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고대 테바이의 유적을 거의 갖고 있지 못하다. 현재 고고학 박물관의 일부로 쓰고 있는 고대 테바이 성곽의 일부만 남아 있다. 시내 중심 지역에 있는 아폴론 신전이 있던 자리마저 황량하게 버려져 있다. 거대한 신전 기둥 몇 개만 나뒹굴고 있는 모습에서 테베의 쇠락의 역사를 더듬을 수 있을 뿐이다.

테베 고고학 박물관과 연결되어 있는 테베의 옛 성곽의 일부 ⓒ박경귀 테베 고고학 박물관과 연결되어 있는 테베의 옛 성곽의 일부 ⓒ박경귀

아폴론 이스메니오스 신전이 있던 주변은 잡풀만 무성하다. ⓒ박경귀 아폴론 이스메니오스 신전이 있던 주변은 잡풀만 무성하다. ⓒ박경귀

아폴론 이스메니오스 신전이 있던 중심부에는 거대한 기둥 조각 몇 개만 나뒹굴고 있다. ⓒ박경귀 아폴론 이스메니오스 신전이 있던 중심부에는 거대한 기둥 조각 몇 개만 나뒹굴고 있다. ⓒ박경귀

테베 고고학 박물관 전경, 2015년 5월 현재 보수 관계로 휴관 중이다. ⓒ박경귀 테베 고고학 박물관 전경, 2015년 5월 현재 보수 관계로 휴관 중이다. ⓒ박경귀

잠시 테베의 영욕의 역사를 돌이켜 보았다. 다시 페르시아 전쟁 이야기로 돌아가자. 제3차 페르시아 전쟁 초기부터 테베는 친페르시아 성향을 보였다. 이미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레오니다스 왕이 그들을 의심하고 오랫동안 그들을 묶어두는 전략을 쓴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그리스가 격파 당하자, 테베는 아예 페르시아편에 가담했다.

이로 인해 이미 부역한 마케도니아와 테살리아, 테베 등 그리스 군대가 페르시아 진영의 선두에 서서 아테네와 스파르타 등 나머지 연합군과 맞서게 된다. 같은 민족이 서로 칼을 들이대는 이런 형국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다. 그 당시 그리스는 같은 언어와 신화, 문화를 공유하면서 헬레네스라는 민족적 자존심을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도시국가별로 지나친 자율과 독립이 강조되다 보니 민족적 단결심 같은 것이 생기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국가의 이익이 더 중요하게 여기고 민족의 공동 이익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국가 간의 그때그때의 이익에 따라 동맹도 되고 적도 되는 형국이었다.

아무튼 강대국 페르시아로 인해 같은 그리스 민족 간에 처음으로 대규모 격돌을 하게 된 것이 플라타이아 전투이다. 페르시아의 총사령관 마르도니오스는 중장보병의 전술에 익숙한 그리스 군대로 하여금 그리스 연합군의 가장 강한 전력과 맞서게 했다. 즉 페르시아 군의 좌익을 테베 등 부역 국가에 맡겨 그리스 연합군의 최강 전력이 배치될 우익과 맞서게 했던 것이다.

전투가 벌어진 플라타이아 평원은 20여km의 폭을 이루며 동서로 길게 뻗어 있다. 서북쪽의 파르나소스 산맥에서 발원한 깨끗하고 풍부한 수량의 아스포스 강이 평원을 수평으로 지나며 동쪽의 아티카 반도와 에우보이아 섬 사이의 에우리포스 해협으로 흘러들어간다. 너른 들판 가운데를 횡단하는 아소포스 강은 플라타이아 평원의 농산물을 키우고 살찌우는 젖줄이다.

아소포스 강은 자연 하천 형태로 남아있지 않고 시멘트 시공을 한 말끔한 관개수로로 관리되고 있다. 농사철이면 플라타이아 평원의 곳곳에 아소포스의 강물이 끌어들인 스프링쿨러가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내는 것을 볼 수 있다. 5월의 평원에는 보리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테베와 플라타이아 사이에 펼쳐진 플라타이아 평원이다. 이곳을 페르시아 기병대가 누볐을 것이다. ⓒ박경귀 테베와 플라타이아 사이에 펼쳐진 플라타이아 평원이다. 이곳을 페르시아 기병대가 누볐을 것이다. ⓒ박경귀

플라타이아 평원을 동서로 가로질러 흐르는 아소포스 강이다. ⓒ박경귀 플라타이아 평원을 동서로 가로질러 흐르는 아소포스 강이다. ⓒ박경귀

아테네가 결사 항전을 뜻을 굽히지 않고 스파르타가 참전할 기미가 보이자, 마르도니오스는 대결전을 준비한다. 그는 페르시아 기병대가 제 역량을 발휘하기 좋은 넓은 들판을 찾았다. 마르도니오스는 아테네에서 퇴각한 후 보이오티아의 플라타이아를 그 전장 터로 삼았다. 그곳은 인근에 있는 페르시아에 부역하는 테베의 든든한 후원을 받기도 쉬운 곳이기 때문이다. 테베로 입성한 마르도니오스는 테베인들로부터 환대를 받고 테베군에게 전투의 선두에 설 것을 지시한다.

기원전 479년 여름 페르시아의 35만 대군은 아소포스 강 북쪽에 진을 쳤다. 페르시아군이 30만 명이었고, 그들에 부역하여 동원된 그리스군이 5만명이 정도였다. 식량과 보급품을 보관하는 사각 담장의 한쪽 길이가 무려 10스타디온, 약 1.9km 정도가 되었다고 하니 군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이에 맞서는 그리스 연합군은 키타이론 산맥의 기슭에 위치한 플라타이아 좌우로 우익에 스파르타군, 좌익에 아테네군, 중앙에 다른 그리스 도시의 연합군을 배치했다.

플라타이아 평원의 지세는 완전히 평평한 것이 아니라, 굴곡이 있는 낮은 구릉들이 불규칙적으로 전개되어 있다. 따라서 무거운 동체를 한 그리스의 중장보병이 전투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반면에 기동성과 넓은 시야를 갖는 기병의 작전은 보다 용이한 환경이었다. 파우사니아스는 페르시아군의 장점을 잘 살릴 수 있는 최적의 전투 지형을 선점한 셈이었다. 적이 원하는 장소가 아닌 자신이 원하는 장소에서 싸울 수 있다면 이미 승리의 절반은 움켜쥔 셈이었다. 마라톤 평원처럼 완전한 평지의 경우에는 중장보병을 가진 그리스에게 유리했었다.

플라타이아 평원에 산재한 굴곡이 있는 구릉이다. 이런 구릉들이 평지 사이에 꽤 많이 끼어 있다. ⓒ박경귀 플라타이아 평원에 산재한 굴곡이 있는 구릉이다. 이런 구릉들이 평지 사이에 꽤 많이 끼어 있다. ⓒ박경귀

그리스 연합군은 중장보병으로 구성되었다. 아테네인 8,000명, 스파르타인 5,000명, 메가라인 3,000명, 시키온인 300명, 플라타이아인 600명, 그리고 수백 명씩 파병한 여러 도시인을 포함하여 총 38,700명이었다. 9배에 달하는 병력을 가진 페르시아 대군을 맞아 과연 그리스군은 승리할 수 있을까?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은 스파르타의 장군 파우사니아스였다. 8천명의 아테네 전사를 이끈 아리스테이데스가 2인자 역할을 했다. 그는 10년인 35살 나이에 제2차 페르시아 전쟁의 마라톤 전투에 참전하여 승리를 맛보았고, 1년 전 살라미스 해전에서 다시 맹활약한 역전의 용사였다. 아테네 전사들의 경우 아마 아리스테이데스처럼 마라톤 전투에 참전했던 경험자도 상당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그리스인들 중에서 처음으로 페르시아 육군과 정면대결을 벌여 승리했던 경험자였다.

병력이 엄청나게 열세인 상황에서는 자칫 병사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할 수 있다. 그래서 승리의 체험, 실전 경험은 매우 소중한 것이다. 막강한 병력을 보유한 페르시아군도 그리스군 가운데 실전 경험자가 적지 않은 것을 두려워했을 수 있다. 파우사니아스도 이런 점을 고려하여 당초 아테네군을 좌익에 배치했다가 중간에 우익으로 이동시켜 페르시아 정규군과 맞서게 했던 것이다. 최강의 전력으로 판단한 스파르타군을 우익에 배치했다가 바꾼 것이다. 이런 요청을 받은 아리스테이데스는 전투가 가장 심할 곳으로 보낸다고 불평하는 아테네군을 이렇게 격려했다.

“적은 마라톤 전투 때보다 더 용감하지도 않고, 더 우수한 무기를 가지지도 않았기에 쉽게 쳐들어올 용기가 없을 것이다. 그때와 똑같은 활과 화살을 가지고 있고, 체력도 변변치 못하며, 그저 값진 수를 놓은 옷에 금으로 장식한 갑옷을 걸쳤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 무기와 육체는 전과 다른 것이 없지만, 용기는 승리의 경험이 있기에 전보다 열 배나 더할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단지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살라미스와 마라톤의 승리가 밀티아데스와 행운 때문이 아니라, 아테네 시민 전체의 용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아리스테이데스는 10년 전 마라톤 전투의 승리의 경험을 상기시키며 용기를 북돋운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 연합군이 진영을 바꾸자 마르도니우스도 페르시아 군을 우익으로 옮기고, 테베군이 중심이 된 그리스군을 아테네 군과 맞붙도록 위치를 바꾸었다. 이를 보고 파우사니아스는 진영을 다시 바꾸었다. 양 군이 서로 상대 전력을 가늠하며 전술 변화를 가졌던 셈이다.

다음 날 또 그리스 군이 진영을 이동하는 어수선한 틈을 이용해 페르시아군이 먼저 스파르타군을 공격했다. 스파르타군은 미처 전열을 갖추기 전에 공격을 당해 흩어진 채로 대응하다 뒤늦게 밀집대형을 이루고 페르시아 군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기습을 당한 스파르타군을 구하기 위해 아리스테이데스는 아테네군을 급하게 이동시켰다.

8천명의 아테네군을 같은 그리스인인 테베군이 포함된 5만 명의 페르시아군이 막아섰다. 아리스테이데스는 페르시아군의 선두에 선 그리스군을 꾸짖었다.

“당장 싸움을 그만두어라! 하늘 무서운 줄 안다면, 그리스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군대를 도우러 가는 우리의 앞길을 방해하지 마라.”

결사적인 아테네군이 끝까지 저항한 테베 군을 물리치며 페르시아 5만 대군을 섬멸했다. 이 때 테베 귀족 300명이 아테네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스파르타군 역시 페르시아군 총사령관 마르도니우스를 죽이며 적의 진지까지 추격했다. 총사령관이 전사하자 페르시아군은 지리멸렬해졌다. 아테네군은 스파르타 군과 합세하여 적의 진영을 무너뜨리고 진지를 빼앗았다. 전투는 그리스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는 플라타이아이다. 이 도시의 좌우 구릉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박경귀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는 플라타이아이다. 이 도시의 좌우 구릉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박경귀

플라타이아 전투의 초기 상황이다. 아소포스 강을 경계로 북쪽에 페르시아 군의 진영이, 남쪽에 그리스 연합군이 대치했다. 출처 위키피디아 플라타이아 전투의 초기 상황이다. 아소포스 강을 경계로 북쪽에 페르시아 군의 진영이, 남쪽에 그리스 연합군이 대치했다. 출처 위키피디아

플라타이아 전투의 중기 상황이다. 페르시아 군이 스파르타군을 기습하고, 구원하려는 아테네군을 에워싸며 저지하는 상황이다. 스파르타군이 페르시아군과 싸운 지점은 데메테르 성역의 앞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플라타이아 전투의 중기 상황이다. 페르시아 군이 스파르타군을 기습하고, 구원하려는 아테네군을 에워싸며 저지하는 상황이다. 스파르타군이 페르시아군과 싸운 지점은 데메테르 성역의 앞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그리스 연합군은 페르시아의 35만 대군을 괴멸시켰다. 플루타르코스는 전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아르타바주스가 4만 명을 이끌고 도망에 성공했을 뿐 나머지는 완전히 전멸했다. 반면 그리스 군의 피해는 1,360명만 사망했다. 아테네 병사 52명, 스파르타 병사 91명, 테게아 병사 61명이 포함되었다. 그리스 연합군은 승전을 기념하여 제우스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제단을 이런 말을 새겼다.

“그리스인의 힘과 용기로
페르시아를 치고 자유를 되찾았으니
제우스께 이 제단을 올리고
승리에 대한 감사를 드려 여기에 제단을 세우노라.“


전투가 끝나자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승전의 공을 다투었다. 그러다가 그리스 민족 간의 불화를 없애기 위해 전투로 국토가 초토화된 플라타이아인들에게 영광을 돌리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들은 아테네와 마찬가지로 오래 전에 페르시아에 점령당해 국토와 도시를 파괴당했다. 또 이번 전투에도 외지로 피난 갔던 난민 병사 600명이 참전하여 조국의 수복을 위해 목숨 바쳐 싸웠다. 그들은 공헌은 칭송받아 마땅했다.

더군다나 야만인에게 더럽혀졌던 것을 씻어내기 위해 그리스의 모든 나라의 불을 끄고 델포이의 깨끗한 불을 다시 옮겨 쓰라는 델포이 신탁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숭고한 희생자가 플라타이아에서 나왔다. 플라타이아인 에우키다스라는 사람이 델포이에 가서 신성한 불을 가져오는 역할을 자임했다. 100km 거리에 있는, 그것도 험준한 파르나소스 산중에 있는 델포이로 하루 만에 달려갔다 돌아와 불을 전하고 쓰러져 숨졌다. 왕복 200km 거리를 하루만에 달려갔다 왔다오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마라톤 전투의 승리를 아테네에 전하기 위해 40여km의 거리를 한달음에 달려가 소식을 전하고 죽음을 맞이한 필립피데스와 같은 고귀한 죽음이었다.

플라타이아 사람들은 송덕비를 세워 그의 훌륭한 행동을 칭송했다.

“에우키다스, 하루 만에 델포이까지 뛰어갔다가
그날로 다시 돌아와 이곳에서 숨지다.“


모든 전투의 승전에는 영웅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스연합군의 총사령관 파우사니아스, 페르시아 기병대장 마시스티우스를 죽인 아테네 병사들, 페르시아 총사령관을 돌로 쳐 죽인 스파르타의 아림네스투스, 아테네군의 용맹한 전투를 이끈 아리스테이데스,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혼자 살아남아 욕을 먹다가 이번 전투에서 맹렬하게 싸우고 죽은 아리스토데모스... 용감하게 싸운 헤아릴 수 없는 부상자와 1,360명의 전사자 모두가 플라타이아의 영웅들이었다.

플라타이아 전투의 승전은 그리스의 중장보병과 페르시아의 경장보병, 기마병, 궁병의 대결이었다. 페르시아군은 기마병 기동에 용이한 장소를 선점하고도 전략적 이점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했다. 초기에는 기병대를 활용해서 그리스 군을 기습하고 식수원이던 샘물을 빼앗는 등 선전했지만, 막상 근접전이 벌어진 최종 전투에서는 기병이 밀집대형의 그리스 중장보병에 타격을 주지 못했다.

페르시아군은 나라를 짓밟힌 아테네군의 사무치는 원한을 이길 수 없었다. 테르모필레에서 순국한 레오니다스 왕과 300 결사대의 희생에 고무된 스파르타군의 불같은 투지도 당해낼 수 없었다. 원래 침략군의 싸울 명분은 취약했다. 그러니 사기가 충천할 수 없다. 더구나 자유를 되찾고자 하는 그리스군의 열망에서 나오는 적개심을 이길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 국가들 사이를 이간시키는 마르도니오스의 전략도 이번엔 먹히지 않았다. 아테네군에 첩자를 보내 이간을 시키던 것을 아리스테이데스가 적발하여 조치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이 만약 단결하면 어떤 일이 있어도 이길 수 없다는 진리가 플라타이아에서 또 한번 확인되었다. 헤도로토스는 바키스의 승리의 예언이 적중했음을 이렇게 전한다.

“테르모돈 강변과 풀이 무성한 아소포스 강변에
헬라스인들이 모이면 낯선 말을 하는 자들은 비명을 지르리라.
그러면 그곳에서 활을 든 메디아인들(페르시아인)이 이 때가 되기도 전에
수없이 쓰러지리라. 죽음의 날이 그들을 덮치면.“


페르시아의 야욕에서 비롯된 20여년에 걸친 세 차례의 그리스 침략 전쟁은 그리스에 엄청난 파괴와 참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동서양이 총 동원되어 맞붙은 세기의 전쟁은 페르시아의 참패로 끝났다. 이 전쟁은 동양의 전제군주제와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민주정의 대결이기도 했다. 대제국 페르시아와 대결하면서 작은 나라로 흩어져 있던 그리스 민족은 비로소 피와 눈물을 바치며 자유의 가치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또 그리스 민족의 잠재 역량을 확인하고 자긍심을 높일 수 있었다.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kipeceo@gmail.com)

박경귀 기자 (kipec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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