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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 300 결사대가 죽어간 협곡을 직접 보니...


입력 2015.06.07 10:17 수정 2015.06.07 10:18        박경귀 (사)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박경귀의 ad Greece 56>테르모팔레 협곡에 울리는 자유를 향한 투혼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 주 >

박경귀 (사)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박경귀 (사)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기원전 490년에 제2차 페르시아 전쟁을 일으켜 그리스 본토를 침략했던 페르시아의 다레이오스의 대군은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와 플라타이아 연합군에 의해 무참하게 패배했다. 그동안 무적의 기록을 세우던 페르시아군에게는 굴욕적인 일이었다.

아테네의 대철학자 플라톤은 마라톤 전투를 승리로 이끈 아테네 전사들의 용맹을 높이 기렸다. 그는 자신의 저서 '메넥세소스'에서 소크라테스가 연설하는 형식을 빌어 마라톤 전투의 용사들을 유럽 대륙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자유의 아버지’라고 칭송했다.

“정말 그 당시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 것입니다. 대체 그 분들이 용기와 관련하여 어떤 사람들인가를. 즉 그 분들은 마라톤에서 이민족 세력을 맞이하여 아시아 전체의 교만을 응징하였으며 이민족 사람들에 대해 최초로 전승비를 세웠고, 다른 그리스 사람들을 선도하는 교사가 되어 페르시아의 힘이 무적이랄 것도 없을 뿐 아니라, 어떠한 대군도, 어떠한 부도 그들의 용맹 앞에서는 굴복하고 만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용사 분들을 우리들 육신의 아버지일 뿐 아니라 우리들과 이 대륙에 함께 사는 모든 사람들의 자유의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 사람들은 그 분들의 위업을 본받아 그 이후의 전투에서도 그리스 사람들의 안녕을 위해 온갖 위험을 감수했기 때문입니다. 마라톤 전사들의 후예로서 말입니다.”


플라톤의 좌상, 아테네 학술원 앞에 있다. ⓒ박경귀 플라톤의 좌상, 아테네 학술원 앞에 있다. ⓒ박경귀

페르시아군 사령관 다티스와 아르타프레네스는 철군하면서 포로로 잡은 에우보이아 섬의 에레트리아 주민들을 페르시아의 수사로 끌고 가 다레이오스 대왕에게 바쳤다. 다레이오스는 그것으로 그리스 세계를 완벽하게 정복하겠다는 탐욕과 오만을 완전히 버렸어야 했다.

하지만 대왕은 마라톤 전투의 패배에 노발대발하며 다시 그리스를 칠 준비를 했다. 각 도시에 이전보다 훨씬 많은 함선과 군마, 군량과 수송선을 조달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스를 칠 정예부대를 선발하고 준비하는 등 3년 동안 부산하게 전쟁 준비를 했다. 그 와중에 이전의 페르시아 대왕 캄뷔세스에 의해 종속국이 된 이집트가 반란을 일으켰다. 다레이오스는 차제에 이집트와 그리스 모두를 응징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다레이오스는 그리스로 출정하기 전에 크세르크세스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한창 원정 준비를 하던 중 자신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재위 36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크세르크세스는 부왕의 모욕을 갚는다는 명분으로 그리스 원정을 결정한다. 물론 크세르크세스도 처음에는 그리스 원정에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리스를 정복한 후 그곳의 태수가 되고 싶었던 마르도니오스의 간교한 설득과 조국에서 내쫓겨 페르시아로 망명한 전 스파르타의 왕 데마라토스의 충동질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런 탓에 왕의 숙부인 아르타바노스가 주장한 전쟁불가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르타바노스는 마라톤 전투에서 거의 아테네군 단독으로 페르시아 대군을 격파했던 만큼 그리스 중장보병의 위력이 막강함을 상기시켰다. 또 그리스 해군이 해전에서 페르시아 해군을 이기고 페르시아 육군이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도강하기 위해 설치하는 다리를 해체할 경우 퇴로를 차단당해 괴멸될 수 있음을 경계한 것이었다. 당시의 그리스 군의 전력을 꿰뚫고 있던 그의 판단은 정확하고 예리한 것이었다. 아르타바노스야말로 직언을 한 충신이었다.

그가 분석한대로 2차 페르시아 전쟁은 스파르타가 미처 참전하기도 전에 마라톤 전투는 아테의 승리로 끝이 났었다. 그렇다면 그리스 전 도시국가들이 연합하여 페르시아에 대항할 경우, 아무리 페르시아의 대군이라고 해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또 사실 훗날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 연합함대에 참패한 후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 해군에 의해 헬레스폰토스 다리가 해체될까 두려워 서둘러 페르시아로 철군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반란을 일으킨 이집트를 토벌한 크세르크세스는 자신만만했다. 그는 전쟁을 반대한 숙부 아르타바노스를 크게 질책한 후 그의 직언이 타당한 측면이 많아 마음에 걸리자, 나중에는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하며 회유한다. 자신의 꿈에 나타난 환영이 그리스를 정벌하라고 요구하는데, 이는 영예로운 조상들과 신의 뜻인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르타바노스가 잠시 대왕의 옷을 잠시 입고 옥좌에 앉아 잠이 들었을 때에도 꿈의 계시가 그대로 나타날지 확인해 보자는 것이다.

아르타바노스는 대왕의 강권에 못 이겨 그리한다. 그가 옥좌에서 잠이 들었을 때 대왕이 꾼 꿈과 유사한 꿈을 꾸게 된다. 아르타바노스는 결국 그리스 정벌이 신의 뜻이라는 점에 동의하고, 대왕의 전쟁 준비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지만, 필자의 생각에는 그리스를 침략하려는 대왕의 강력한 의지를 간파한 아르타바노스가 대왕의 요구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동일한 꿈을 꾼 것처럼 위장한 것이 아닐까 싶다.

아르타바노스는 대왕이 합리적 전세 파악에 무관하게 제국의 막강한 군사력을 과시하고 싶었던 만큼 어떤 이유로도 그 뜻을 철회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끝까지 전쟁을 반대할 경우 본국에 남겨질 것이고, 대왕이 수도를 비운 사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왕이 자신을 미리 죽이려 할 것임을 직감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니 전쟁의 승패와 무관하게 대왕의 뜻을 따르는 것이 자신의 목숨을 부지할 유일한 방도였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페르시아 전 제국에서 그리스를 정벌하려는 크세르크세스 대왕을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게다가 전쟁 준비 중에 꾼 꿈에도 더 고무되었다. 그는 “어린 가지들이 온 세상을 덮고 있던 올리브 가지로 만든 관(冠)을 그가 쓰고 있다가 그 관이 그의 머리에서 사라지는 꿈”을 꾸었다. 점술가들에게 해몽하게 하자 그들이 해몽하기를 “온 세상과 전 인류가 그에게 종속될 것”이라고 했다. 해몽을 들은 크세르크세스가 기고만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해몽이었다. 올리브관은 최상의 영예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페르시아 대왕의 지위 그 자체만으로도 영예로운 올리브관을 이미 쓰고 있는 셈이 아닌가. 그런 상징적 관이 사라졌다면 이는 자신의 명예가 크게 실추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몽했어야 옳지 않았을까. 이는 전쟁 수행을 통해 얻게 될 숱한 대왕의 선물을 기대한 점술가들의 이기심과 아부에서 나온 잘못된 조언이었다고 생각된다. 하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전쟁에 들떠 있는데 자신들이 반대한다고 한들 대왕의 의지를 어떻게 꺾을 수 있었겠는가. 결국 이루지 못할 일이니 이왕이면 대왕의 귀에 달콤한 말로 아부하는 게 자신들의 신상에 나은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크세르크세스는 5년여 동안 대대적으로 그리스 원정 준비를 마친 후 기원전 480년에 원정길에 나선다. 그는 페르시아 대군이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널 다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바다의 강풍으로 다리가 부서지자 헬레스폰토스 바다에 300대의 매를 치게 하고 바닷물에 족쇄 한 쌍을 내려 징벌할 정도로 오만이 극에 달했다.

페르시아군은 함선 674척을 나란히 묶어 헬레스폰토스를 도강하는 다리를 완성하여 대군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넘어오게 했다. 또 1차 침략 시 트라키아 지방의 아토스 곶에서 폭풍으로 200여척의 함선이 잃고 퇴각했던 전례를 우려하여 아토스 반도를 가로지르는 운하를 파게하여 거친 바다를 우회하는 위험을 피하게 했다. 그는 함선들을 땅 위로 끌어 아토스 지협을 건널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후세에 기념비를 남길 욕심에 운하를 파게 했던 것이다.

페르시아 대군은 헬레스폰토스의 바다를 함선 다리를 통해 7일 밤낮으로 쉬지 않고 건넜다. 얼마나 많은 대군이었을까? 크세르크세스가 헬레스폰토스를 건넜을 때, 한 주민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제우스여, 왜 그대는 페르시아인으로 변장하시고 제우스란 이름대신 크세르크세스라는 이름을 쓰시나이까? 헬라스를 쑥대밭을 만드시는 것이 그대의 소원이라면 혼자서도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시거늘 어찌하여 세상 사람들을 다 데려오시나이까?”

페르시아군의 전력이 정확히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다. 페르시아에 복속된 여러 민족과 나라에서 숱한 병력과 함선을 징발했으니 엄청난 규모였음에는 틀림없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육군만 170만 명, 삼단노선은 1,207척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그 외에 소형 선박들 군마 운반선들을 합쳐 함선의 수는 총 3,000척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지나친 과장인 것 같다.

크세르크세스는 육로를 통해 그리스 본토를 향해 진군하면서 거치는 곳마다 그곳의 부족들에게 원정에 참여하도록 강요했다. 소아시아 지역에 사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강제로 참전했음은 물론이다. 이들은 200여척의 함선에 그리스 병사처럼 무장하고 참전했다. 행군 진로에 있던 주변 국가들 역시 군마와 식량, 병력을 지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면 갈수록 불어난 페르시아 대군의 군세를 전해 듣는 그리스 전역은 공포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페르시아의 행군로에 있었던 그리스 북부지방의 마케도니아 지역과 테살리아의 여러 도시들은 페르시아 대군을 환대하며 전쟁에 부역했다. 이제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페르시아에 굴종하거나 아니면 전멸을 각오해야 했다.

그러나 전쟁은 병력 수만을 가지고 승패를 예단할 수는 없다. 크세르크세스 대왕의 참모 역할을 하던 전 스파르타 왕 데마라코스는 그리스의 전력을 묻는 대왕에게 이렇게 진언한다.

“헬라스(그리스)는 원래 가난한 나라로 지혜와 엄격한 법 덕분에 용기를 갖게 되었고, 또 용기 덕분에 가난과 독재를 물리칠 수 있었사옵니다. 라케다이몬(스파르타)인들은 헬라스를 노에로 만들게 될 전하의 제안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옵니다. 또 그들은 다른 헬라스인들이 모두 전하에게 투항한다 하더라도 전하에 맞서 싸울 것이옵니다. 그들이 과연 그럴 수 있는지 그들의 수에 관해서는 묻지 마소서. 그들에게 전하와 맞설 사람이 1000명 또는 1000명 안팎밖에 없다 하더라도 그들은 전하와 맞서 싸울 것이옵니다.”

대왕은 스파르타 전사가 아무리 용맹해도 “그들 한명에 1000명 이상이 될” 페르시아 군을 어떻게 막을 수 있느냐며 말도 안 되는 허튼소리라며 코웃음 쳤다. 그는 페르시아군의 전투 방식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병사들을 채찍질로 공격을 독려한다면 수적으로 더 우세한 적을 공격할 수 있겠지만, 각자의 의지대로 싸울 경우 어떻게 우세한 적에게 감히 달려들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답답한 데마라토스는 다시 스파르타 전사들이 용맹이 채찍이 아니라 법에서 나오는 것임을 강조한다.

“라케다이몬인들은 일대일로 싸울 때는 누구 못지않게 잘 싸우지만 집단으로 싸울 때는 세상에서 가장 용감하옵니다. 그들은 자유롭지만 전적으로 자유롭지 않사옵니다. 그들의 주인은 법이며, 그들은 전하의 신하들이 전하를 두려워하는 것 이상으로 법을 두려워하옵니다. 아무튼 그들은 법이 명하는 대로 행동하는데, 법의 명령이란 언제나 같사옵니다. 즉 아무리 많은 적군을 만나더라도 싸움터에서 도망치지 말고 대열을 지키며 버티고 서서 이기든 죽든 하라는 것이옵니다.”

데마라토스가 스파르타 전사들의 용맹을 크세르크세스 대왕에게 경계할 것을 호소했지만, 그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리스 전역은 페르시아 대군의 시시각각의 진군 소식에 공포에 휩싸였다. 이미 대왕의 전령이 대다수 국가들에 항복할 것을 전했고, 많은 국가들이 페르시아 대왕에게 흙과 물을 바치며 부역했다.

크세르크세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에는 항복을 요구하는 전령을 보내지 않았다. 10년 전 2차 페르시아 전쟁 당시 항복을 권하는 전령을 보냈을 때, 이 두 도시는 페르시아 전령을 산채로 구덩이와 우물에 빠트려 죽였기 때문이다. 대왕은 그 무엄한 행동의 대가가 무엇인지 이번에 철저하게 응징해 주고자 했다.

페르시아의 군세가 어떠하든지 그리스가 맞서 싸울 것을 예견된 일이었다. 소아시아의 페르시아 사령관이었던 휘다르네스가 그리스인들에게 항복하면 각자에게 헬라스를 통치할 땅을 줄 것이라며 그리스인들을 회유한 데 대해, 이에 응답했던 그리스인들의 말 속에서 그리스인들의 결연한 의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휘다르네스여, 그대는 상황을 잘 몰라서 우리에게 그런 조언을 하시는 것이오. 그대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고 그런 조언을 하시니 말이오. 그대는 노예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알아도, 자유가 무엇인지는 전혀 경험해보지 않아 그것이 달콤한지 아닌지 모르신단 말이오. 그대가 자유를 경험했더라면 우리에게 창뿐 아니라 도끼를 들고 자유를 위해 싸우라고 조언했을 것이오.”

데마라토스와 그리스인들의 말은 기개가 넘쳤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페르시아 대군의 3차 침략 전쟁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반응과 준비 상황은 어떠했을까? 스파르타와 아테네 역시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막강한 페르시아 대군의 침략에 대해 두려움에 휩싸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의견이 분분했다.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리스인들은 델포이를 찾았다. 예언의 신 아폴론에게 예지의 신탁을 구한 것이다.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델포이의 여사제 퓌티아에게 각각 어떻게 국가를 수호해야 좋을지 물었다. 먼저 스파르타인들에게 절망스런 신탁이 내려졌다.

“광활한 스파르테의 주민들이여, 너희들의 운명을 들어라.
너희들의 크고 영광스런 도성이 페르세우스의 자손들의 손에
파괴되든지, 아니면 온 라케다이몬 딸이 헤라클레스의 후손인
자신의 왕의 죽음을 슬퍼하게 되리라.
황소의 힘도, 사자의 힘도 적에게 대항할 수 없으리라.
그는 제우스처럼 강력하나니 단언하건대, 그는 멈추지
않으리라, 둘 중 어느 한쪽이 갈기갈기 찢기기 전에는.”


스파르타인들이 페르시아 대군에 대항할 수 없고, 더구나 스파르타의 왕이 전사하게 되리라는 참담한 예언이었다. 하지만 스파르타인들은 이 불운한 운명의 예언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다만 그들은 8월의 올림피아 제전 기간 동안은 전쟁을 하지 않고 또 만월(滿月)이 되기 전에는 출전하지 않는 관습에 따라 출병을 머뭇거리고 있었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종교적 믿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페르시아군이 그리스 북부 지방을 지나 진군해 오는 급박한 상황에서 관습의 고수만을 주장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10년 전 마라톤 전투에서도 만월을 기다리느라 뒤늦게 아테네 지원에 나섰다가 전투가 다 끝난 상황만 확인하는 헛수고를 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스파르타는 그리스 최강의 육군을 보유한 자신들이 물러선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절충적 방법으로 우선 레오니다스 왕과 친위대 300명을 결사대로 파견하고 나머지 전군은 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도록 스파르타에 머물며 제전의식에 참여하도록 했다.

스파르파의 시내 중심가에 있는 레오니다스 왕의 동상, ⓒ박경귀 스파르파의 시내 중심가에 있는 레오니다스 왕의 동상, ⓒ박경귀

또 그리스 각 도시국가는 긴급 회합을 갖고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중심이 되어 페르시아에 맞서 싸우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멀리 시켈리아(현 시칠리아)의 도시 시라쿠사이 참주 겔론에게도 원군을 요청하는 사절단을 보냈다. 이에 겔론은 2만병의 중장보병과 기병 2천명, 200척의 함선 등 대규모 병력을 파견할 용의가 있다며, 그 대신 그리스 총사령관직을 자신에게 맡겨야 한다는 오만한 조건을 내걸었다. 스파르타인이나 아테네인들이 아무리 궁박한 처지에 처했다하더라도 겔론의 과도한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구원병 파병은 무산되었다.

그리스 연합군은 육군과 해군의 연합 작전을 구상했다. 1차 전략은 페르시아 대군이 테살리아 평원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자는 전략이었다. 페르시아 군이 올림피아 산을 오른쪽에 두고 해안을 따라 진군하다 테살리아로 진입할 유력한 통로는 험준한 템피(Tempi) 계곡이었다. 그리스 연합군은 1차 저지선을 템피 계곡으로 정하고 1만 명의 중장보병을 긴급 배치했다. 1만 명은 마라톤 전투 병력과 동일한 수로 승리를 기대하는 의미도 있었다. 10년 전에 아테나 전사 9천명과 플라타이아 전사 1천명이 그리스의 구원자가 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테살리아의 유력자들은 이미 친페르시아로 기울어 있었다. 그들은 테살리아 평원을 지나 템피 계곡 사이를 흘러 바다로 페네이오스 강의 물길을 페르시아군이 막을 경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테살리아 전체가 물바다가 될 것을 염려했던 것이다. 그리스 연합군의 테살리아의 모호한 태도에 불안했다. 게다가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드로스(페르시아를 정벌한 알렉산드로스가 아님)가 그리스 연합군에게 페르시아 대군이 다른 길로 테살리아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주자 역습을 우려하여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리스 연합군이 고심 끝에 2차 방어선으로 선택한 곳은 테르모필레 협곡이었다.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과 결사대 300명을 포함한 그리스 연합군 7천여 명은 전차 2개 정도가 동시에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험준한 산과 바다에 접한 협곡에서 결사항전하기로 결정했다. 그리스 해군은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바라보이는 에우보이아 섬의 동북쪽 아르테미시온에 진을 쳤다. 페르시아와 그리스 연합군의 육군과 해군은 멀지 않은 거리에서 서로 협공하는 형세로 맞섰다.

테르모필레 협곡의 전경, 산기슭 옆에 좁은 길이 있고 오른쪽이 바로 바다였었다. 바다였던 곳이 2500년의 퇴적으로 지금은 넓은 평원으로 변했다. ⓒ박경귀 테르모필레 협곡의 전경, 산기슭 옆에 좁은 길이 있고 오른쪽이 바로 바다였었다. 바다였던 곳이 2500년의 퇴적으로 지금은 넓은 평원으로 변했다. ⓒ박경귀

테르모필레 협곡 전적지에 세워진 레오니다스 왕의 동상. ⓒ박경귀 테르모필레 협곡 전적지에 세워진 레오니다스 왕의 동상. ⓒ박경귀

테르모필레 협곡 전적지에 세워진 레오니다스 왕의 동상, ⓒ박경귀 테르모필레 협곡 전적지에 세워진 레오니다스 왕의 동상, ⓒ박경귀

테르모필레 협곡 전적지 기념물에 조각된 스파르타 전사 상 ⓒ박경귀 테르모필레 협곡 전적지 기념물에 조각된 스파르타 전사 상 ⓒ박경귀

테르모필레 협곡 전적지 기념물에 부조된 스파르타 전사들의 전투 장면 ⓒ박경귀 테르모필레 협곡 전적지 기념물에 부조된 스파르타 전사들의 전투 장면 ⓒ박경귀

테르모필레 협곡 전적지 기념물에 부조된 스파르타 전사들의 전투 장면 ⓒ박경귀 테르모필레 협곡 전적지 기념물에 부조된 스파르타 전사들의 전투 장면 ⓒ박경귀

테르모필레 협곡 전적지 기념물에 부조된 스파르타 전사들의 전투 장면 ⓒ박경귀 테르모필레 협곡 전적지 기념물에 부조된 스파르타 전사들의 전투 장면 ⓒ박경귀

페르시아 육군은 테르모필레 협곡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손실이 없었다. 하지만 해군의 경우 스키아토스 섬과 그리스 본토 사이의 바다를 통과해 테르모필레쪽으로 가는 세피아스 곶을 향해 항해하다 폭풍을 만나 400여 척의 배가 침몰하고 수많은 인명 피해를 입는 날벼락을 당한다. 그리스인들이 북풍의 신 보레아스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 통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800여척의 함선이 건재했고 여전히 그리스 함대의 세배가 넘었다.

그리스 함대에는 아테네의 명장 테미스토클레스가 있었다. 그는 10년 전 마라톤 전투에도 참전한 역전의 용사였다. 승리의 맛본 경험은 이번 전투에서의 자신감을 배가시켰다. 그는 함대의 주력인 아테네 함선을 이끌며 스파르타의 사령관 밑에서 실질적인 전략을 주도했다. 그는 2차례의 작은 교전을 통해 페르시아 함선 15척을 나포하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페르시아의 주력 함대가 에우보이아 섬을 우회하여 아티카를 공략할 가능성에 대비하여 에우보이아의 칼키스로 함대를 이동시키는 전략상 후퇴작전을 구사한다. 퇴각 과정에서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철수하는 그리스 보병을 구출하는 역할도 한 것 같다.

3차 페르시아 전쟁의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군을 물리친 아테네의 장군 테미스토클레스 동상, 아테네의 외항인 피레우스에 있다. ⓒ박경귀 3차 페르시아 전쟁의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군을 물리친 아테네의 장군 테미스토클레스 동상, 아테네의 외항인 피레우스에 있다. ⓒ박경귀

격전이 붙은 곳은 육지였다. 테르모필레는 천연의 요새였다. 해안선에 접한 좁은 길은 대규모 병력을 투입한 페르시아군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리스군에게는 소수의 병력으로 대군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최고의 방어선이었다. 페르시아 대군은 기마 정탐병을 파견하여 스파르타군의 전세를 염탐했다. 그리스의 주력군은 좁은 길의 성벽 뒤에 주둔해 있었고, 스파르타 전사들이 성벽 바깥에 주둔하고 있었다. 스파르타 병사들은 옷을 벗고 훈련하거나 더러는 머리를 빗고 있었다. 이들은 정탐병이 관찰하는 것을 알고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런 적정(敵情)을 보고 받은 크세르크세스는 기이하게 생각했다. 페르시아 대군이 눈앞에 있는데 고작 소수의 전사들이 최전선에 나선 모습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전쟁을 앞두고 유유자적 훈련을 하고 머리단장이나 하는 스파르타 전사들이 더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전 스파르타의 왕 데라마토스에게 이에 대해 물었다. 그는 스파르타 전사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러 갈 때에 머리를 손질하는 버릇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크세르크세스에게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리스군이 모두 도망치리라 여기고 5일간이나 기다려준다.

그러나 그리스군은 요지부동이었다. 할 수 없이 페르시아군을 무더기로 돌진시켜 짓밟아버리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돌진했던 페르시아군은 그리스군에 의해 도륙 당한다. 결국 크세르크세스는 왕의 친위부대인 ‘불사부대’ 1만 명을 전격 투입한다. 페르시아 최정예부대인 불사부대가 몇 차례 밀어붙였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테르모필레 협곡의 전투 장면을 묘사했다. 중앙의 인물이 레오니다스 왕이다. Jacques-Louis David(1748·1825)의 1793년 작 테르모필레 협곡의 전투 장면을 묘사했다. 중앙의 인물이 레오니다스 왕이다. Jacques-Louis David(1748·1825)의 1793년 작

스파르타군은 등을 돌려 집단으로 도주하는 척하다가 페르시아군이 바짝 추격해 오면 따라잡히는 순간 획 되돌아서서 갑자기 공격하는 방식으로 페르시아군을 괴멸시켰다. 스파르타 중장보병의 치밀하고 과감한 작전과 탁월한 백병전 기량에 페르시아군이 무력하게 무너지고 만 것이다. 페르시아군이 며칠을 부대별로 돌아가며 공격하고 온갖 작전을 써도 협곡의 고갯길을 장악하지 못하고 숱한 희생만 치러야 했다.

그런데 난관에 봉착한 페르시아군에 구세주가 나타났다. 그리스인 가운데 배신자가 나왔다. 에피알테스라는 멜리스인이 크세르크세스에게 테르모필레를 우회해서 공격할 수 있는 산 속의 비밀통로로 인도하겠다고 자청한 것이다. 테로모필레 협곡을 외호하고 있는 험준한 산정은 1천명의 포키스 중무장 보병이 지키고 있었다. 이들은 자국으로 진입할 수 있는 이 오솔길을 수호하는 한편 산 아래의 협곡에 진을 친 그리스군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페르시아 대군에 혼비백산하여 산 아래의 레오니다스 진영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페르시아군은 이 험준한 산을 직접 넘을 수가 없어서 이 산 뒤쪽으로 난 오솔길로 크게 우회하여 스파르타군의 후방을 기습했다. ⓒ박경귀 페르시아군은 이 험준한 산을 직접 넘을 수가 없어서 이 산 뒤쪽으로 난 오솔길로 크게 우회하여 스파르타군의 후방을 기습했다. ⓒ박경귀

테르모필레 전투 상황도이다. 적색이 페르시아군 진영, 청색이 그리스군 진영이다. 녹색의 선은 페르시아군이 우회한 산악 오솔길이다. Hans Erren(2015) 테르모필레 전투 상황도이다. 적색이 페르시아군 진영, 청색이 그리스군 진영이다. 녹색의 선은 페르시아군이 우회한 산악 오솔길이다. Hans Erren(2015)

스파르타군과 그리스군은 중문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 페르시아 군이 험준한 산을 우회하는 오솔길을 따라 그리스군 진영의 뒤에 위치한 협곡의 동문으로 진입할 경우 페르시아 군에 완전히 포위당하는 형국이 된다. 그렇게 될 경우 그리스 연합군 7천명은 몰살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레오니다스는 참전한 다른 도시 병사들을 모두 철수하도록 하고 스파르타 전사와 테스페이아인 등 1천여 명의 병력만으로 고갯길을 사수하기로 결정한다.

스파르타의 300 전사와 그리스 연합군들은 서문쪽으로부터 전진해오는 페르시아 주력군과, 산악을 우회해 동문으로 기습하여 후방으로부터 공격하는 페르시아군을 맞아 끝까지 용전분투할 각오를 한 것이다. 그런 만큼 전투의 상황은 처절했다. 어느 전투 치열했을지 한 일화가 이를 대변해 준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 한 트라키스인이 페르시아인들이 활을 쏘면 화살들에 해가 가려질 만큼 그들의 수가 엄청나다는 말을 하자,스파르타 전사의 태연하게 대답했다.

“트라키스 친구여, 그대는 좋은 소식을 전해주시는구려. 페르시아인들이 해를 가려준다면, 우리는 햇볕이 아닌 그늘에서 싸우게 될 테니 말이오.”

스파르타 병사 중 가장 용감하게 싸웠다는 디에네케스가 남긴 명언이다. 페르시아 대군의 공세가 얼마나 대단했고, 이에 맞섰던 스파르타 전사들의 죽음을 각오한 결연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레오니다스 왕과 그의 친위 전사들이 얼마나 용맹하게 싸우다 장렬하게 산화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실제로 분전 중에 전사한 레오니다스의 시신을 두고 서로 양 진영이 빼앗고 빼앗기는 전투가 네 번이나 벌어졌으니, 얼마나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는지 알 것 같다. 그렇지만 그리스군은 후방으로 기습한 페르시아군이 도착하자 양쪽에서 공격을 받고 전멸 당하고 만다.

필자는 테르모필레 협곡의 전적지를 두 번 답사했다. 2014년 8월에는 마케도니아 지역의 알렉산드로스의 왕성 펠라와 페르시아 원정의 출발지 디온을 답사하고 난 후 먼 길을 이동하다 보니 저녁 무렵에야 도착했었다. 길을 서둘렀지만 해가 뉘엿뉘엿 지는 황혼에 도착하여 오래 머물 수 없어 아쉬웠다. 올해 5월에 다시 찾은 이유였다. 이번에는 레오니다스가 300 전사들과 최후를 마친 중문의 고갯길 부근까지 천천히 둘러보았다.

테르모필레 협곡은 2500년 전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지형이 달라졌다. 바다에 떨어질 듯 가파른 암벽과 산기슭에 있던 좁은 길의 형상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오랜 세월의 퇴적에 의해 바다가 메워져 협곡으로부터 4~8km 이상 해안선이 물러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테르모필레 협곡이 있던 산기슭에서 바다 쪽으로 드넓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테르모필레 협곡 앞쪽의 전경이다. 2500년 전에는 보이는 곳이 모두 바다였었다. 오랜 세월의 퇴적으로 지금은 넓은 평원으로 변했다. ⓒ박경귀 테르모필레 협곡 앞쪽의 전경이다. 2500년 전에는 보이는 곳이 모두 바다였었다. 오랜 세월의 퇴적으로 지금은 넓은 평원으로 변했다. ⓒ박경귀

테르모필레 협곡 전적지에 세워진 기념물이다. 승리를 의미하는 날개가 한쪽만 달려있다. 이는 스파르타 전사들이 전멸하는 패배를 당했지만 이들의 용맹스런 정신이 승리를 거둔 것을 상징하는 듯 느껴진다. 2015년 5월 방문 당시의 모습이다. ⓒ박경귀 테르모필레 협곡 전적지에 세워진 기념물이다. 승리를 의미하는 날개가 한쪽만 달려있다. 이는 스파르타 전사들이 전멸하는 패배를 당했지만 이들의 용맹스런 정신이 승리를 거둔 것을 상징하는 듯 느껴진다. 2015년 5월 방문 당시의 모습이다. ⓒ박경귀

테르모필레 협곡 전적지에 세워진 기념물이다. 2014년 8월 황혼녘에 방문했을 당시의 모습이다. ⓒ박경귀 테르모필레 협곡 전적지에 세워진 기념물이다. 2014년 8월 황혼녘에 방문했을 당시의 모습이다. ⓒ박경귀

물론 협곡의 왼쪽에 높이 솟은 산정의 험준한 산세는 그대로이다. 천혜의 방어선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혈투가 있은 지 30여년 만에 이곳을 찾은 헤로도토스는 레오니다스를 기념하는 돌사자상이 고갯길 입구에 서 있었다고 기술했다. 지금은 간 곳이 없다. 그 고갯길 위에는 레오니다스 왕과 동맹군을 떠나보내기 전에 전사한 이들을 위하 기념비도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전에 펠로폰네소스에서 온 4000명이
300만의 적군과 맞섰노라.”


지금은 그 기념비 역시 찾을 길이 없다. 다만 레오니다스 왕과 스파르타의 300 전사들을 기리는 시모니데스의 시가 새겨진 기념물이 남아 있다. 스파르타 전사들이 피를 토하면 쓰러진 그 자리에 세워진 이 시비는 이곳을 찾는 답사자에게 뭉클한 감동을 준다.

“지나가는 나그네여, 가서 라케다이몬인들에게 전해주시오.
우리가 그들의 명령을 이행하고 이곳에 누워 있다고.”


스파르타 전사들이 마지막까지 싸웠던 테르모필레 중문 부근의 고갯마루, 시모니데스의 시비가 있다. ⓒ박경귀 스파르타 전사들이 마지막까지 싸웠던 테르모필레 중문 부근의 고갯마루, 시모니데스의 시비가 있다. ⓒ박경귀

테르모필레 전적지에는 창을 겨눈 레오니다스 왕의 늠름한 동상이 세워져 있고, 기단의 부조에는 전사들의 용전분투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필자가 두 번째 방문했을 때는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왔다. 세르비아 관광객들이라고 했다.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레오니다스는 어떤 의미로 기억될까. 그는 스스로 죽음으로써 그리스 전 세계를 분기(憤氣)시키려 했을까? 그리스의 파수꾼을 자부했던 조국 스파르타의 명예를 위한 목숨을 바친 것일까? 그에게 무엇보다도 절실했던 것은 자신과 스파르타, 그리고 그리스 세계의 자유였을 것이다. 그에게 굴종하는 노예의 삶보다 더 치욕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데마라토스가 크세르크세스에게 공언한 내용은 그대로 실현되었다. 레오니다스 왕과 그의 근위병 300명(정확히는 298명)은 테르모필레 협곡의 전투에서 수만 명의 페르시아 군에 맞서 마지막 한 명이 목숨을 다할 때까지 물러서지 않고 싸우다 전멸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그리스 역사에서 영원한 전설이 되었다. 스파르타 군에게 불멸의 영예를 안겨주었음은 물론이다. 나아가 페르시아군에게는 스파르타 중장보병의 임전무퇴의 공포를 심어주었고, 그리스 군에게는 자유를 향한 투혼을 일깨워 페르시아 군을 몰아내는 동력으로 작용하게 했다.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kipeceo@gmail.com)

박경귀 기자 (kipec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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