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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열망이 2차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다


입력 2015.05.31 09:41 수정 2015.06.01 06:15        박경귀 (사)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박경귀의 ad Greece 56>자유를 지킨 마라톤 전투의 승리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 주 >

박경귀 (사)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박경귀 (사)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역사를 바꾼 전쟁터 마라톤 평원

아티카 반도의 맞은 편 에우보이아 섬의 중심 도시인 에레트리아가 페르시아에 함락 당했다. 마음껏 방화와 약탈을 한 페르시아 대군은 이제 주적으로 설정한 아테네로 향했다. 그들이 어느 곳을 상륙지역으로 택할지 아테네의 장군들을 짐작할 수 없었다. 아테네를 직접 공략하려면 수니온 곳을 돌아 아테네의 외항인 팔레온 항으로 직행해야 했다. 페르시아군은 그곳에서 상륙을 저지하려는 아테네 군과 교전하거나, 아테네군이 농성작전을 펼 경우 아크로폴리스까지 두어 시간이면 당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페르시아군은 일단 아테네군이 성 밖에서 응전할 것으로 보고, 자신들이 기병 작전을 전개하기 용이한 넓은 평지 지역을 찾았다. 그곳은 바로 마라톤 평원이었다.

지금의 마라톤 평원은 올리브 나무가 무성한 한적한 시골 들판이다. 아테네의 동북쪽 해안에 위치한다. 거리로는 가까운 길로 아크로폴리스에서 40km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가는 길이 험하다. 거대한 펜텔릭(pentellic) 산이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산은 아테네의 주요 건축물에 소요된 고급 대리석 생산지로 유명했다.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역시 펜텔릭 대리석으로 건축되었다.

지금도 마라톤 지역으로 가려면 펜텍릭 산의 동남쪽을 우회하거나, 북동쪽으로 더 멀리 우회해야만 한다. 필자는 마라톤 지역을 2014년 8월과 올해 5월 두 차례 답사했다. 첫 번째는 아테네에서 팔리니(pallini)를 거치는 동남쪽 우회로를 통해 갔고, 두 번째는 아테네 공항에서 곧바로 스파타(spata)라는 시골을 지나 해안도로를 타고 올라갔다. 이 길은 피케르미(pikermi)라는 마을에서 아테네에서 오는 우회로와 합쳐진다.

마라톤 지역으로 가는 길은 왕복 2차선 도로로 시골길이다. 길가에는 유난히 소나무가 많다. 아테네 공항에서는 자동차로 30분 정도, 아테네 시내에서는 1시간 정도 걸린다. 산악이 중심지역을 거의 다 차지한 아티카 반도는 주로 해안에 도시와 마을들이 산재하고 있다. 너른 들판은 마라톤 평원이 전부다. 물론 여기도 그렇게 광활한 곳은 아니다. 스키니아 해변에서 내륙으로 3~4km 정도의 폭에, 그리고 남쪽 초입에서 북동쪽으로 7km 정도 너비의 들판이 펼쳐진다.

2500년 전에 이곳에서 국가의 사활을 걸고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보기는 쉽지 않다. 현재의 마라톤 평원의 모습은 전형적인 농촌 마을의 풍경이다. 올리브 농장이 많이 보이고 각종 채소류를 가꾸는 밭이 산재해 있다. 비닐하우스도 보인다. 해변으로 나가보면 넓지 않은 모래사장이 있고, 시민들이 평화롭게 해수욕을 즐긴다. 8월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의 모습이다. 사람들이 동양의 낯선 이방인을 진기한 듯 바라보는 걸 보면, 동양인들이 그리 많이 방문하지는 않는 듯하다.

현재의 마라톤 평원은 올리브 농장이 많고, 각종 채소를 가꾸는 밭이 가득하다. 마라톤 박물관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박경귀 현재의 마라톤 평원은 올리브 농장이 많고, 각종 채소를 가꾸는 밭이 가득하다. 마라톤 박물관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박경귀

남서쪽으로 바라본 마라톤 해변의 8월의 풍경이다.  ⓒ박경귀 남서쪽으로 바라본 마라톤 해변의 8월의 풍경이다. ⓒ박경귀

북동쪽으로 바라본 마라톤 해변의 8월의 풍경이다. 멀리 직각으로 길게 뻗은 키노수라 반도가 보인다. 이 반도가 마라톤 해변을 북동풍으로부터 막아주고 있다. ⓒ박경귀 북동쪽으로 바라본 마라톤 해변의 8월의 풍경이다. 멀리 직각으로 길게 뻗은 키노수라 반도가 보인다. 이 반도가 마라톤 해변을 북동풍으로부터 막아주고 있다. ⓒ박경귀

유서 깊은 마라톤 평원

마라톤 지역은 역사가 깊은 곳이다. 이를 증명하듯 이곳의 고고학 박물관은 선사시대의 다양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은 마라톤 평원의 남서쪽 초입의 해안에서 4km 정도 북서쪽으로 들어가면 나온다. 대중교통 수단이 없으므로 차량이 없으면 찾아가기 쉽지 않다. 하지만 그리스의 시골 인심은 후한 편이니 운 좋게 지나는 주민의 차량이 있으면 동승의 기회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작은 박물관은 마라톤 전투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이 지역의 오래된 유물들을 함께 전시하고 있다. 기원전 10세기에서 7세기 즈음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기하학 문양의 도기들도 다수 보인다. 아울러 부장용으로 쓰인 흑색 문양의 레키토스(Lekythos)도 상당히 많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이 지역에도 일정 규모의 도시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방패 모양의 대형 도기는 이 지역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란 점을 은유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기하학 문양의 도기들, 마라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기하학 문양의 도기들, 마라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기하학 문양의 도기, 마라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기하학 문양의 도기, 마라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흑색 문양의 레키토스와 방패 모양의 도기, 마라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흑색 문양의 레키토스와 방패 모양의 도기, 마라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흑색 문양의 레키토스, 마라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흑색 문양의 레키토스, 마라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마라톤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은 ‘마라톤의 소년 상’으로 명명된 청동상이다. 인근의 저택을 장식했던 작품이다. 인물의 섬세한 묘사로 미루어 아테네 최고의 조각가였던 프락시탈레스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머리에 뿔이 나있는 것처럼 보이는 데, 이는 등화용 물품을 꽂는 용도인 것으로 추정된다. 아테네 고고학 박물관에 진본이 전시되고 있고 마라톤 박물관에는 복사본이 전시되고 있다.

‘마라톤의 소년 상’의 진품이다. 기원전 340~330년 작품으로 추정, 아테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마라톤의 소년 상’의 진품이다. 기원전 340~330년 작품으로 추정, 아테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마라톤 평원에 이집트 신전이?

마라톤 박물관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의외의 유물을 발견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발견은 열성 여행자에게 주는 선물이다. 이집트 신전에서 발굴된 유물들이다. 그리스 도시에서 이국적인 이집트 신전이 있었다는 점, 그 자체가 이색적이다. 그리스 문명의 포용성과 폭넓은 교류를 짐작하게 한다. 필자는 델로스 섬, 그리고 올림포스 산 인근 도시 디온에서도 이집트 신전에서 출토된 몇몇 유물들을 확인한 바 있다.

이런 현상은 헬레니즘 시대를 이끈 마케도니아 지역과 국제 도시였던 델로스 정도에 국한된 영향인 듯 여겼었는데 아티카의 한적한 도시였던 마라톤 지역에서 이집트 신전의 유물들을 만나니 놀라웠다. 이는 마라톤 지역이 에게 해에서 그리스 북부 지방으로 올라가는, 그리고 북부 지방에서 아티카 지역으로 내려오는 항행로의 길목에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마라톤 평원의 남쪽에 이집트 신전이 있었다. 신전은 모두 네 개의 출입문을 가진 견고한 방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출입문의 외부와 내부에는 각각 2개씩의 대형 대리석상이 있었다고 한다. 이집트의 대표적인 신인 사라피스와 그의 아내 이시스 상이었다.

이 두 신을 숭배하는 이집트 신앙은 기원전 4세기에 이미 그리스에 전파되었고,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지배 시대에 거치면서 확산되었다. 마라톤의 이집트 신전 역시 로마 지배 시대인 기원전 2세기에 세워진 것이다. 로마 태생으로 그리스인으로 귀화한 대부호 헤로데스 아티쿠스(Herodes Atticus, 기원전 101/102~177/178)가 세운 것으로 알려진다.

헤로데스 아티쿠스는 그리스 문명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남달리 지극했던 인물이다. 그가 복원한 유적이나 새로이 건축한 문화유산은 아직도 그리스 곳곳에 남아 있다. 그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아래에 아름다운 원형극장을 건립했고, 델포이의 퓌티아 제전의 무대였던 스타디온을 복원하기도 했다. 그리스 문명이 쇠락하는 시기에 태어난 그는 황금기 그리스 문명을 부활시키고 전승시키는 데 큰 업적을 남겼다.

마라톤에서 발굴된 이집트의 사라피스와 이시스의 대리석상은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두 대리석상의 신체 표현 양식은 직립의 형태에서 약간의 변화를 준 쿠로스(Kouros)와 코레(Kore)의 조각과 닮았다. 특이한 것은 이시스 상의 경우 그리스의 전통 신앙과 결합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시스 상은 그리스 곡식의 신인 데메테르와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상징물인 밀과 장미를 양손에 들고 있는 형상으로 묘사되었던 것이다. 두 문화의 융합이 한 조각상에 상징적으로 드러난 셈이다.

이집트의 신 사라피스 상, 마라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이집트의 신 사라피스 상, 마라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이집트의 신 이시스 상, 왼손에 밀 이삭을 들고 있다. 장미송이를 들고 있었을 오른손은 멸실되었다. 마라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이집트의 신 이시스 상, 왼손에 밀 이삭을 들고 있다. 장미송이를 들고 있었을 오른손은 멸실되었다. 마라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이집트 신전을 장식하던 스핑크스 상, 마라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이집트 신전을 장식하던 스핑크스 상, 마라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이집트 신전을 장식하던 호루스(Horus) 매 신의 상, 매의 머리에 이중의 왕관이 있었을 것이다. 마라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이집트 신전을 장식하던 호루스(Horus) 매 신의 상, 매의 머리에 이중의 왕관이 있었을 것이다. 마라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이집트 신전의 출입문을 상부 대리석의 일부, 좌우에 배치되었던 신상들, 아마 사라피스와 이시스의 좌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라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이집트 신전의 출입문을 상부 대리석의 일부, 좌우에 배치되었던 신상들, 아마 사라피스와 이시스의 좌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라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아테네의 배신자 힙피아스의 말로

스키니아 해변의 북동쪽의 들에는 늪지대가 있었다. 들판이 끝나는 곳에서 스키니아 해변을 감싸듯 손가락을 구부린 형상으로 키노수라 반도가 바다를 향해 길게 뻗어 곶을 이루고 있다. 이 키노수라 곶이 북동풍을 막아주며 마라톤 만(灣)을 보호하는 지세다. 현지의 지형을 둘러보면 페르시아군이 이곳을 상륙지점을 선택한 이유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600여척이나 되는 대함대가 안전하게 상륙할만한 이만한 지형이 아티카 반도에서는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상륙 이후에 기병전을 전개하는 것을 고려할 때 더욱 그랬을 것이다. 페르시아 함선들은 이 곶에 근접한 해변을 가득 메웠을 것이다. 스키니아 북동쪽 해안은 소나무가 무성하게 군락을 이루고 있고, 국립공원으로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그리고 스키니아의 긴 해변은 좁은 모래사장이 형성되어 있어 시민들의 해수욕장으로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때는 기원전 490년 8월 말이었다. 페르시아군은 아테네에서 망명해 온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 힙피아스를 향도(嚮導)로 삼아 마라톤 해안에 상륙했다. 아테네는 이곳의 상륙을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떠한 제지도 할 수 없었다. 힙피아스는 조국 아테네를 배신하고 페르시아에 부역하면서 아테네를 함락하고 나면 자신이 다시 권력을 차지할 것을 바랐다.

그러나 배신자 힙피아스의 말로는 그의 희망을 비껴나겠다. 그는 페르시아 함대의 마라톤에 상륙을 지휘했지만, 노쇠한 탓인지 갑자기 심한 재채기와 기침을 일으켰다. 그 와중에 이가 하나 흔들려 빠져나와 모래 속에 파묻혀 버렸다. 그는 빠진 이를 찾으려 애쓰다 도저히 찾을 수가 없게 되자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나라는 우리 것이 아니며, 우리는 결코 이 나라를 정복하지 못할 것이오. 이 땅 가운데 내 몫은 지금 내 이가 차지하고 있소.”

힙피아스는 마라톤 전투의 패배의 전조를 느꼈던 것이다. 실제 힙피아스는 마라톤 전투의 와중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진다. 자신의 권력욕 때문에 조국을 배신한 자의 최후를 전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테네가 다시 참주의 가혹한 통치 아래 들어가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수성이냐, 맞대결이냐

그러던 차 적군이 마라톤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아테네는 그때까지도 아크로폴리스에서 수성전(守城戰)전을 벌인 것인가, 들판으로 나가 맞서 싸울 것인가 의견이 분분하게 갈려 있었다. 그러나 수적으로 열세인 만큼 맞서 싸우지 말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일단 스파르테에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전령 필립피데스를 급파했다.

군대의 지휘를 맡은 10명의 스트라테고스Strategos 가운데 한 명이던 밀티아데스는 마라톤 평원까지 나가서 교전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특히 밀티아데스는 장군들과 동등한 투표권을 갖고 있는 아르콘(archon) 중의 한 명인 국방장관 격인 폴레마르코스(polemarchos)에게 도움을 청했다. 당시 군정 업무를 맡고 있는 폴레마르코스는 칼리마코스였다.

“아테네는 지금 건국 이래 최대 위기에 봉착했소. 그들이 페르시아인들에게 질 경우, 힙피아스에게 넘겨져 어떤 고통을 당할지는 이미 결정돼 있소. 그러나 우리 도시가 싸워 이긴다면, 헬라스의 도시들 가운데 으뜸가는 도시가 될 것이오.”

밀티아데스는 싸움을 늦출 경우 아테네군과 민심이 동요해 내분이 일어날 수 있고, 페르시아에 부역하는 사람들이 생길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게다가 배신자 힙피아스가 페르시아군을 인도하고 있는 만큼, 아테네 시민 가운데 참주파들이 힙피아스에게 내응하는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했던 것 같다.

밀티아데스의 설득에 칼리마코스가 동조하여 페르시아에 맞서 싸우기로 결정되었다. 밀티아데스에 동조한 장군들은 자신들의 지휘권을 밀티아데스에게 이양했다. 10명의 장군들은 매일 순번제로 군대의 통솔권을 행사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작전 지휘에서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지휘권을 밀키아데스에게 이양하는 것은 그에게 일관적 전투 지휘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협력이었다. 그만큼 밀티아데스는 동료 장군들로부터 신임을 받고 있었다는 의미다. 그러나 밀티아데스는 동료 장군들이 총사령관직을 자신에게 양도해도 곧바로 지휘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차례가 돌아왔을 때에 비로소 전투에 나아갔다.

밀티아데스는 아테네군 1만명과 지원에 나선 플라타이아군 1천명으로 진영을 짰다. 아테네측의 지휘는 밀티아데스와 칼리마코스가 맡았다. 페르시아측의 지휘는 총사령관은 메디아의 태수였던 다티스(Datis)가 맡고 아르타페르네스(Artaphernes)는 기병대를 통솔했다. 스파르테군은 원군을 파견하지 않았다. 일단 참전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보름달이 뜨는 날에 출전하는 관습을 어길 수 없어서였다. 스파르테군은 보름날까지 기다리다 마라톤 전투가 다 끝난 다음 도착했다.

마라톤 전투 배치 상황

마라톤 전투의 전개 상황을 살펴보자.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전반적인 전투 상황을 잘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양군의 진지 배치 등에 대해서는 세밀하게 언급하지 않았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일부 연구자들은 페르시아군이 해변을 등지고 전열을 세우고, 그리스군은 북서쪽의 산을 등지고 야영지를 세운 후 페르시아군과 대치한 것으로 추정했다. 아래 추정도 1의 모습이다. 붉은 색이 페르시아군 진영이고, 청색이 그리스군 진영이다. 물론 이런 전열 배치의 가능성도 있다.

마라톤 전투 대치 상황 추정도(1) 마라톤 전투 대치 상황 추정도(1)

하지만 과연 페르시아군이 이렇게 배수진을 쳤을까? 이는 분명 잘못된 추정 같다. 만약 페르시아군이 기병전까지 고려했다면 이렇게 전진 동선이 짧은 전투 진형을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또 해안선 옆으로 남서쪽으로 길게 뻗은 들판을 굳이 제켜두고 위와 같이 해안을 등지고 배치한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말에게 먹일 물이 마라톤 들판의 북동쪽 끝 부분에 있었고, 키노수아 곶에 의지해서 그 부근 해변에 함대를 정박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양 군의 진지 배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관건이 되는 것은 그리스군 진영의 위치이다. 헤로도토스는 아테네군이 분명히 헤라클레스의 성역에 진을 쳤다고 기술했다. 그런데 이 헤라클레스의 성역은 어디에 있었는지가 명확하지 않다. 위에서 언급한 진지 상황으로 본다면 그리스군은 해변에서 먼 북서쪽 산기슭에 헤라클레스 성역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헤라클레스 성역은 마라톤 평원의 남쪽 초입 부근에 있었다고 보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아테네군은 이 성역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숲이 페르시아 기병의 습격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곳을 야영지로 선택한 것 같다. 니콜라스 세쿤다가 ‘마라톤 BC 490’에서 분석한 내용들이다.

마라톤 평원의 남쪽 끝 구역에 진지를 구축한 그리스군과 마라톤 평원의 북동쪽 끝 구역에 진지를 세운 페르시아군이 긴 평원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 형국이었을 것이다. 페르시아군 야영지는 키노수라 반도로 보호되어 함대가 정박한 가까운 해변을 중심으로 세워졌을 것이다. 결국 전투는 마라톤 평원의 북동쪽의 숲과 습지를 벗어난 들판의 중간 지점에서 벌어진 것 같다. 아래 그림이 최근 연구자들이 인정하는 전투 상황도이다. 페르시아군 함대의 정박 상황과 양군의 대치 형세가 잘 묘사되었다.

마라톤 전투 대치 상황 추정도(2) 마라톤 전투 대치 상황 추정도(2)

마라톤의 아테네군의 묘지가 있는 곳에 설치된 마라톤 평원의 지형도. ⓒ박경귀 마라톤의 아테네군의 묘지가 있는 곳에 설치된 마라톤 평원의 지형도. ⓒ박경귀

북동쪽으로 바라본 마라톤 해변의 8월 풍경이다. 멀리 직각으로 길게 뻗은 키노수라 반도가 보인다. 이 부근 해변에 페르시아군의 야영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경귀 북동쪽으로 바라본 마라톤 해변의 8월 풍경이다. 멀리 직각으로 길게 뻗은 키노수라 반도가 보인다. 이 부근 해변에 페르시아군의 야영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경귀

중장보병 밀집대형의 용맹

드디어 전투가 시작되었다. 밀티아데스는 칼리마코스를 오른쪽에, 플라타이아인들을 왼쪽에 세웠다. 중앙에는 아테네인들을 각 부족별로 배치했다. 병력이 많은 페르시아군과 마주 보는 전열의 길이를 같게 포진시키기 위해 그리스군의 대형은 양쪽의 전열은 두텁게 하고 중앙은 옅게 배치되었다. 양쪽이 강하고 중앙이 약한 구조였다.

반대로 페르시아군의 배치에서는 전통적으로 중앙군이 가장 강했다. 이번에도 예외가 없었다. 양쪽에는 여러 나라에서 징발한 군대를 배치하고, 중앙에는 최정예부대인 페르시아인 병사와 용맹하기로 유명한 사카이족이 배치되었다. 이런 대형이라면 그리스군의 중앙부분이 페르시아군에 괴멸될 가능성이 높았다. 밀티아데스는 왜 이런 위험한 포진을 했을까? 그러나 그의 이런 포진은 신묘한 작전으로 이어졌다.

마라톤 전투의 영웅, 밀키아데스의 동상, 아테네병사들의 무덤 인근에 있다. ⓒ박경귀 마라톤 전투의 영웅, 밀키아데스의 동상, 아테네병사들의 무덤 인근에 있다. ⓒ박경귀

그리스군은 기병과 궁수병이 전혀 없었다. 오로지 중장보병의 밀집대형에 승패를 걸었다. 중앙에 배치된 아테네 전사들이 페르시아군을 향해 돌진했다. “페르시아인들은 아테네인들이 뛰어오는 것을 보자 받을 준비를 하며 그들이 전멸하고 싶어 발광하는 줄 알았다.” 헤도로토스의 묘사다. 그동안 승승장구해왔던 페르시아군이 아테네군을 얕보는 건 당연했다.

최정예부대로 구성된 중앙의 페르시아군은 중앙에 종심이 얕게 배치된 아테네군을 이겼다. 도망치는 아테군을 몰아붙이며 내륙 쪽으로 추격했다. 그러나 전력이 강한 그리스군의 양쪽에서는 페르시아군을 돌파했다. 연이어 양쪽 날개를 오무린 다음 중앙에서 대열을 돌파한 페르시아군을 포위 공격했다. 페르시아군은 그리스군의 예상 밖의 작전에 모두 패주하여 바닷가에 정박한 함선으로 달아났다. 그리스군은 적선까지 추적하며 일부 함선에 불을 지르고 7척의 적선을 나포했다.

제2차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군의 승리로 끝났다. 페르시아군은 6,400명이 전사하고, 그리스군은 192명만이 전사했다. 그리스의 완승이었다. 마라톤에서 물러난 페르시아군대는 함선으로 수니온 곶을 돌아 아테네의 외항인 팔레론 앞바다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며칠을 정박하며 전세를 관망하다 돌연 아시아로 돌아갔다. 아테네군이 마라톤 지역에서 재빠르게 회군하여 아테네 도성으로 들어왔음을 알고 더 이상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마라톤 전투의 원동력은 자유의 열망

스파르타군이 아테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전투가 끝난 후였다. 그들은 마라톤 전투의 현장이 궁금했다. 굳이 그곳까지 행군하여 두 눈으로 확인했다. 그들은 적은 병력으로 대군을 물리친 그 역사적 현장을 직접 보고 싶었을 것이다. 특히 페르시아군의 전투 형세를 가늠해 보기 위한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스파르타군은 아테네인들의 업적을 칭찬하고 돌아갔다.

이전까지만 해도 페르시아군의 이름만 들어도 주눅이 들던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군을 괴멸시켰다. 마라톤 전투의 승리의 원동력은 여럿이 있다. 우선 밀티아데스 장군과 칼리마코스와 같은 정치지도자의 과감한 상황 판단과 작전 구사가 주효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백병전을 벌인 자유 시민들의 용맹한 전투력이었다. 바로 아테네와 플라타이아 중장보병의 혁혁한 공로였다. 이 전투의 영웅인 칼리마코스는 애석하게도 전투 중에 전사했다.

아울러 얻은 큰 소득은 페르시아인들을 왕에게 종속된 노예와 같다며 경멸하던 그리스인들의 자유정신과 자부심을 다시 확인한 점이었다. 그리스인들에게 문명의 우월감과 자신감을 안겨준 한판 승부였다.

전술적으로는 페르시아군의 자만이 부른 패배였는지도 모른다. 청동 투구와 갑옷, 청동 방패로 몸을 감싼 그리스군에 비해, 대부분 투구를 쓰지 않고 나무방패를 든 페르시아군이 백병전에서 그리스군을 이기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특히 그리스군이 재빠르게 돌진하는 것을 예상치 못했던 까닭에 화살 공격을 제대로 퍼붓지 못했다. 또 기마병이 활약하지 못했던 점도 페르시아의 패인이었다.

자유의 열망이 일군 마라톤 전투의 승전보는 아테네의 전령 필립페데스에 의해 아테네로 전해졌다. 그는 쉬지 않고 달려가 기쁜 소식을 전하고 쓰러져 숨을 거둔다. 그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서 아테네까지 42.195km를 달리는 마라톤 경주가 시작되었다. 1896년 제1회 근대올림픽인 아테네대회 때부터 마라톤경주가 실시되었다. 마라톤 평원에 가면 아테네 병사의 무덤 옆으로 마라톤 경주 코스를 알리는 도로표시판이 경주로를 세워져 있다.

전쟁터에서 전사한 아테네인들은 유골을 수습하여 아테네로 돌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에 맞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 전투의 뛰어난 무훈 때문에 마라톤 참전자들은 영웅의 칭호를 받았다. 192명의 전사자가 이들이 싸운 마라톤 평원에 예외적으로 매장된 이유이다.

무덤은 큰 봉분 형태로 만들어졌다. 높이가 10여 미터 둘레가 185미터에 이른다. 이후 아테네인들은 이 무덤 앞에서 ‘자유를 위해 목숨을 잃은 자들을 대신하여’ 폴레마르크가 참석한 가운데 매년 제물을 바치고 추모했다. 또 아테네인들은 페르시아군이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한 지점에 승전비를 세워 승리를 후세에 전하고자 했다.

아테네 병사들의 무덤, 5월의 풍경  ⓒ박경귀 아테네 병사들의 무덤, 5월의 풍경 ⓒ박경귀

페르시아군과 아테네군이 맞붙어 싸우던 전장 터이다. 지금은 올리브 나무와 잡풀만 무성하다. 8월의 풍경이다. ⓒ박경귀 페르시아군과 아테네군이 맞붙어 싸우던 전장 터이다. 지금은 올리브 나무와 잡풀만 무성하다. 8월의 풍경이다. ⓒ박경귀

아테네군의 승전비의 일부, 중간의 기둥 부분이 거의 다 사라지고 상부 기단의 일부만 남았다. 마라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아테네군의 승전비의 일부, 중간의 기둥 부분이 거의 다 사라지고 상부 기단의 일부만 남았다. 마라톤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마라톤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생긴 마라톤 경주의 코스이다. 아테네 병사들의 무덤 옆을 지난다. ⓒ박경귀 마라톤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생긴 마라톤 경주의 코스이다. 아테네 병사들의 무덤 옆을 지난다. ⓒ박경귀

마라톤 전투의 승리는 굴종을 요구했던 페르시아의 다레이오스 대왕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명쾌한 응답이었다. 노예의 길이 아닌 자유민의 길을 택한 아테네인들과 플라타이아인들의 용기가 만들어낸 개가였다. 특히 그리스 최강의 전력을 갖고 있던 스파르타의 도움이 없이 아테네인들이 거의 독자적으로 수행한 전투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컸다. 아테네 중장보병의 위력을 분명하게 확인한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중장보병 위주의 전투 방식이 주된 전략으로 자리잡게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테네 중장보병은 청동 무구를 스스로 마련한 중산층이었다. 이들 자유시민이 자신을 목숨을 바쳐 아테네를 구한 것이다. 이들이 조국을 수호한 영웅으로 떠오르면서 당연히 자유시민의 권익을 확대하려는 목소리는 커질 수밖에 없었다. 마라톤 전투의 승리는 5세기 중반에 화려하게 만개할 민주주의라는 꽃의 움트는 꽃봉오리였던 것이다.

아테네 병사들의 무덤이 있는 곳에 설치된 마라톤 전투 상황 지형도 앞에서 당시의 전투 상황을 설명하는 그리스 고교 선생님과 경청하는 학생들, ⓒ박경귀 아테네 병사들의 무덤이 있는 곳에 설치된 마라톤 전투 상황 지형도 앞에서 당시의 전투 상황을 설명하는 그리스 고교 선생님과 경청하는 학생들, ⓒ박경귀

마라톤 지역의 북동쪽 교외에 있는 승리의 여신 니케상, 마라톤 전투에서 승리한 아테네 전사들에게 승리의 월계관을 씌워주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박경귀 마라톤 지역의 북동쪽 교외에 있는 승리의 여신 니케상, 마라톤 전투에서 승리한 아테네 전사들에게 승리의 월계관을 씌워주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박경귀

마라톤 지역의 북동쪽 교외에 있는 승리의 여신 니케상 기단에 조각된 마라톤 전투 참전 용사들의 모습 ⓒ박경귀 마라톤 지역의 북동쪽 교외에 있는 승리의 여신 니케상 기단에 조각된 마라톤 전투 참전 용사들의 모습 ⓒ박경귀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 고전읽기 이사장·국정책평가연구원장(kipeceo@gmail.com)

박경귀 기자 (kipec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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