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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의 영욕 지켜 본 필로파포스 언덕에 올라보니...


입력 2015.05.17 10:30 수정 2015.05.19 12:11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박경귀의 ad Greece 53>소크라테스의 학교 아고라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 주 >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소크라테스의 학교, 아고라

아고라는 거리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배움터이자 가르침을 전파할 수 있는 아테네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이었다. 아테네의 아고라는 소크라테스(기원전 470~399)의 야외 학교였다. 그는 아테네 교외의 체육관을 찾아다니며 청년들과 만났다. 또 아고라 여기저기를 거닐며 청년들과 시민들을 만나 끈질긴 질문을 퍼부으며 올바른 삶과 지혜를 깨우쳤다. 청년들은 소크라테스가 나타나면 그를 둘러싸고 갖가지 철학적 대화를 나눴을 것이다. 하지만 적지 않은 시민들은 자신들의 방종과 나태, 부정의(不正義)를 꼬집으며 아름다운 영혼을 가꾸라고 촉구하는 소크라테스가 귀찮은 존재였을 듯싶다.

기원전 5세기에서 4세기에 아테네에는 돈을 받고 청년들에게 변론술을 가르치는 소피스트들이 넘쳤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누구에게도 가르침을 베풀어 주겠다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또 자신과의 대담에 대해서도 일체의 사례금을 받지 않았다.

소크라테스 두상, 르부르 박물관 ⓒ박경귀 소크라테스 두상, 르부르 박물관 ⓒ박경귀

소크라테스는 최소한의 물자로써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했다. 아버지의 직업이 석공이었으므로 소크라테스 역시 간간히 석공의 일거리로 끼니를 때웠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가정을 윤택하게 살찌우는 일보다 아테네 시민들의 영혼을 어떻게 아름답게 가꿀 것인가를 더 고민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크세노폰이 쓴 '소크라테스 회상'에는 소크라테스의 삶이 어떠했는지 생생하게 묘사한 대목이 있다. 소크라테스의 친구 안티폰은 이렇게 말한다.

“소크라테스, 나는 애지자(애지자, philosophos)는 행복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네. 그런데 자네를 보면, 바로 애지자 때문에 정반대의 결과를 얻고 있는 것 같네. 여하튼 자네는 노예일지라도 주인에게 이러한 취급을 받으면 도망하고 말 것 같은 생활을 하고 있네.

음식은 더 이상 할 수 없을 만큼 검소하고, 의복은 단지 검소할 뿐만이 아니라 여름이나 겨울이나 단벌 신세로 신발, 내의 없이 지내고 있네. 그리고 또 돈이란 받아서 기쁘고, 또 받으면 한층 생활이 넉넉해지는 법인데, 자네는 돈도 받지 않네. 여하튼 다른 선생들은 자기의 제자를 자신의 모방자로 만들어 내는데, 자네의 경우를 볼 것 같으면, 제자들에게 불행을 가르치는 선생이라고 생각하게 하네.”


이런 안티폰의 우려와 핀잔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담담하게 응답한다.

“안티폰, 자네는 행복이란 사치와 호사인줄 알고 있는 모양이네. 나는 욕심이 없으면 신과 똑같다고 생각하네. 그리고 욕심을 내는 것이 최소한으로 적을 경우가 신에 가까운 법이네. 그리고 신과 같은 것은 최대의 선이지만, 신에 가까운 것은 최대의 선에 가장 가까운 것이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지켜 본 아고라

소크라테스는 시대의 목탁과 같은 철학자였다. 그는 매일 아고라를 거닐며 시민들과의 대화를 즐겼다. 뜨거운 여름날에는 시원한 제우스 주랑이나 중앙 주랑의 그늘에서 시민들을 만났을 것이다. 청년들이 그를 따라 다니며 그와의 철학적 담론을 즐겼을 것이다. 시민들의 영혼을 각성시키려던 그의 집요한 노력은 아테네의 황금시대였던 5세기 중엽에는 어느 정도 수용되었다.

하지만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에 시달려 국력이 소진되다가, 결국 기원전 404년 스파르타에게 항복하며 굴욕적으로 종전이 되자 상황은 크게 악화되었다. 시민의 덕성이 쇠퇴하면서 소크라테스와 같은 영혼의 교사들을 귀찮아하게 된 것이다. 전쟁으로 시민의 삶이 피폐해지자 고귀한 철학의 가르침에 귀 기울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성찰하라고 촉구하는 소크라테스를 자신들을 괴롭히는 ‘등에’ 같은 존재로 여기게 된 것 같다.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는 시민법정 헬리아이아(Heliaea)에 섰고, 배심원들의 투표를 통해 사형이 결정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신을 부정하고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고발당하고 독배를 마시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영혼의 교사였던 소크라테스는 시민들의 타락한 영혼과 불화하면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소크라테스는 결국 그가 평소에 경계하고 질타했던 민주주의의 방종과 타락에 의해 세상을 떠나야 했다.

아테네 시민법정에서 사용된 청동 투표용구이다. 배심원들은 투표함에 이 용구를 넣었다. 유죄라고 생각할 때는 가운데에 구멍이 나 있는 원반을, 무죄로 판단할 경우에는 구멍이 막힌 용구를 투입했다. 아고라 박물관 ⓒ박경귀 아테네 시민법정에서 사용된 청동 투표용구이다. 배심원들은 투표함에 이 용구를 넣었다. 유죄라고 생각할 때는 가운데에 구멍이 나 있는 원반을, 무죄로 판단할 경우에는 구멍이 막힌 용구를 투입했다. 아고라 박물관 ⓒ박경귀

시민법정에 참여할 배심원들을 뽑는 데 활용한 돌로 만들어진 추첨기이다. 클레로테리온이라 불렸다. 시민들은 각 가로 틈에 자신의 신분증을 끼워 넣고 추첨에 의해 배심원 조(組)로 선택되었다. 왼쪽에 흰 구슬과 검은 구슬을 넣어 흰 구슬이 걸린 열의 조는 그날의 배심원으로 선정되었다. 이런 무작위 방식은 배심원의 사전 매수나 특정인을 뽑는 것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아테네 시민 누구나 균등한 기회를 제공한 민주적 사고의 산물이다. 아고라 박물관, ⓒ박경귀 시민법정에 참여할 배심원들을 뽑는 데 활용한 돌로 만들어진 추첨기이다. 클레로테리온이라 불렸다. 시민들은 각 가로 틈에 자신의 신분증을 끼워 넣고 추첨에 의해 배심원 조(組)로 선택되었다. 왼쪽에 흰 구슬과 검은 구슬을 넣어 흰 구슬이 걸린 열의 조는 그날의 배심원으로 선정되었다. 이런 무작위 방식은 배심원의 사전 매수나 특정인을 뽑는 것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아테네 시민 누구나 균등한 기회를 제공한 민주적 사고의 산물이다. 아고라 박물관, ⓒ박경귀

‘소크라테스의 죽음’, 감옥에서 독배를 마시는 소크라테스, Jacques-Louis David(1748·1825)의 1787년 작,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박경귀 ‘소크라테스의 죽음’, 감옥에서 독배를 마시는 소크라테스, Jacques-Louis David(1748·1825)의 1787년 작,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박경귀

소크라테스가 갇혔던 감옥은 아크로폴리스와 인접한 아고라의 남서쪽에 있었다.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있다. 따라서 오늘날 아고라를 찾는 관광객이 소크라테스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아테네 당국은 이런 점을 의식해서인지 아고라 건너편의 필로파포스 언덕으로 가는 숲 속의 한 동굴 감옥 유적을 소크라테스가 투옥되었던 감옥이라고 안내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소크라테스는 아고라 안에서 시민법정과 인접한 곳에 위치한 감옥에 갇혔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소크라테스의 감옥이 어디였는지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후세인들에게 소크라테스를 추억하게 만들고 그의 사상과 철학을 되새기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소크라테스 감옥 터를 지나며 우리는 그의 삶을 반주할 수 있지 않는가.

필로파포스 언덕으로 가는 숲 한편에 있는 동굴, 유적 표지판에는 이곳이 소크라테스 감옥이었다고 씌어있다. ⓒ박경귀 필로파포스 언덕으로 가는 숲 한편에 있는 동굴, 유적 표지판에는 이곳이 소크라테스 감옥이었다고 씌어있다. ⓒ박경귀

선정 베푼 로마의 총독 필로파포스

소크라테스 감옥 터라는 곳을 지나 언덕 꼭대기에 오르면 필로파포스 기념물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아크로폴리스, 리카비토스 언덕과 함께 아테네 시내에서 가장 높은 세 개의 언덕 가운데 하나이다. 전설에는 이곳에 시인 모우사이오스(mousaios)가 살았다고 하며, 뮤즈 여신의 신전도 있었다고 한다. 이곳이 뮤즈의 언덕으로 불린 것도 이 때문이다. 언덕으로 오르는 숲에는 바위벽을 이용에 조성된 모우사이오스의 예배소가 아직도 남아 있다. 주변과 언덕 아래로 올리브 나무와 소나무 등 여러 수목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한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어 시민들이 쉬거나 산책하는 곳으로 애용되고 있다.

모우사이오스의 예배소(Heroon)이다. ⓒ박경귀 모우사이오스의 예배소(Heroon)이다. ⓒ박경귀

필로파포스 언덕에서 북동쪽으로 바라본 모습, 아크로폴리스가 한 눈에 들어오며 파르테논 신전, 프로필라이아, 에렉테이온 신전이 보인다. ⓒ박경귀 필로파포스 언덕에서 북동쪽으로 바라본 모습, 아크로폴리스가 한 눈에 들어오며 파르테논 신전, 프로필라이아, 에렉테이온 신전이 보인다. ⓒ박경귀

필로파포스 언덕에서 남동쪽 아래로 내려다 본 아테네 시내 모습, 언덕 정상 주변의 소나무 숲이 인상적이다. ⓒ박경귀 필로파포스 언덕에서 남동쪽 아래로 내려다 본 아테네 시내 모습, 언덕 정상 주변의 소나무 숲이 인상적이다. ⓒ박경귀

아크로폴리스와의 사이에 우거진 숲은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다. 테세우스 시대에 아마존 여인족의 침략 시 이곳은 중요한 전투 지역이 되기도 했고, 이후에 계속 군사용 성채가 구축되었던 것 같다. 기원전 5세기에 테미스토클레스의 성채가 만들어졌고, 기원전 4세기에는 ‘긴 장벽’이란 뜻의 디아테이키스마(Diateichisma)가 구축되었다.

기원전 2세기에 필로파포스 무덤 기념물이 조성되었다. 필로파포스(Gaius Julius Philopappos)는 아테네를 통치한 총독이었는데 선정을 베풀어 아테네인들의 칭송을 받았다. 그가 죽은 후아테네인들이 그를 기려 기원전 116년에서 114년에 걸쳐 이 기념물을 축조했다. 높이 12미터에 이르는 대리석 기념물은 위아래 두 개의 부분으로 나뉘어 역사적 인물들을 부조했다. 위에 홀로 의자에 앉은 모습으로 조상된 부조가 필로파포스 상이다. 두상 부분이 모든 훼손되었고 몸통과 무릎 등 일부만 남아있다. 아래 부분에는 필로파포스의 조부 등 조상들이 새겨져 있다.

이 기념물 뒤편에 필로파포스의 석관이 있었다고 한다. 15세기까지 이 기념물은 존재했지만 그 후에 파괴되었다가 1904년 발라노스(Balanos)에 의해 오늘날의 모습으로 부분적인 복원이 이뤄졌다.

필로파포스 기념물이다. 상부의 좌대에 앉은 부조가 필로파포스이다. 두상이 망실되었다. 하부는 그의 조상들이 부조되어 있다. ⓒ박경귀 필로파포스 기념물이다. 상부의 좌대에 앉은 부조가 필로파포스이다. 두상이 망실되었다. 하부는 그의 조상들이 부조되어 있다. ⓒ박경귀

필로파포스 언덕에서 동북쪽으로 바라본 모습, 아크로폴리스와 리카비토스 언덕이 보인다.  ⓒ박경귀 필로파포스 언덕에서 동북쪽으로 바라본 모습, 아크로폴리스와 리카비토스 언덕이 보인다. ⓒ박경귀

‘긴 벽’이라는 뜻의 디아테이키스마(diateichisma)로 불린 아테네의 외성 서쪽 산위의 성벽유적이다. 900미터에 이르는 긴 성벽이었지만 지금은 기단석만 남았다. 이 성은 아테네 도시 방어의 중요한 보루 역할을 했다. 언덕 위에 필로파포스 기념물이 보인다. ⓒ박경귀 ‘긴 벽’이라는 뜻의 디아테이키스마(diateichisma)로 불린 아테네의 외성 서쪽 산위의 성벽유적이다. 900미터에 이르는 긴 성벽이었지만 지금은 기단석만 남았다. 이 성은 아테네 도시 방어의 중요한 보루 역할을 했다. 언덕 위에 필로파포스 기념물이 보인다. ⓒ박경귀

아테네의 영욕을 지켜 본 리카비토스

아크로폴리스를 가운데 두고 필리파포스 언덕과 리카비토스(Lycabettus) 언덕이 마주보고 있다. 동쪽에 있는 리카비토스 언덕은 높이가 295미터에 이른다. 아테네 시내에 있는 세 개의 우뚝한 지형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곳이다. 정상 전망대에 오르면 아크로폴리스와 필로파포스 언덕, 그리고 남쪽으로 멀리 피레우스 항구와 에게 해까지 시원스럽게 한 눈에 들어온다.

정상에는 아기오스 조르기오스(Agios Georgios)라는 작고 예쁜 교회와 벽면에 낙서가 가득한 종탑이 있다. 바로 아래에는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식사와 휴식을 즐길 수 있는 레스토랑 두 곳이 자리 잡고 있다. 지난 5월 3일에 이곳을 방문했다. 이곳에서 즐기는 황혼의 풍광이 유명하다고 해서 저녁 무렵 시간을 맞춰 들렀다.

그동안 그리스 전역을 먼저 누비느라 정작 아테네 시내 한 가운데 있는 이곳을 맨 나중 일정으로 미루고 있었다. 아테네 그리스 배낭여행 네 번째 만에 유적지가 아닌 관광지에서 짧은 휴식을 가졌다. 고대 그리스 역사와 신화를 더듬을 수 있는 주요 도시를 거의 다 답사했으니 이제 당분간 그리스를 방문할 일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아테네 시가지를 내려다보면 건물들이 하나같이 흰색이나 연회색이다. 또 현대식 고층 건물이 없어 낮은 건물들이 넓게 퍼져 있다. 2500여년이 넘은 고대의 건축물이 도심의 한 가운데 우뚝 서 있고 현대식 건물로 채워진 시가지가 이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다.

건물들의 양식을 보면 고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가운데 중세가 부재한 느낌이 든다. 아테네나 그리스 대부분의 도시를 둘러보면, 이탈리아나 다른 서유럽 국가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백 년 된 중세의 석조건물들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유럽 각국은 중세에 화려한 고딕 건축문화를 꽃 피웠고, 현재까지 도시 건축물로 활용하고 있다. 반면에 그리스의 경우 대부분 2백년이 채 안 되는 근대의 건축물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유럽의 다른 도시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왜 그럴까?

그리스는 10여 년간 치열한 독립전쟁을 치르고 1832년에서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다. 그리스인들이 주류 세력이던 비잔틴 제국이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한 지 430년 만의 일이다. 그리스의 건축물에서 중세가 부재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오스만 제국의 오랜 식민지배 아래의 고단한 삶을 대변해 주는 건 아닐까? 석재를 다루는 데 있어 천재적 재능을 보였던 고대 그리스인들이 중세기에는 고유의 건축술을 선보이는 석조 건축 문화를 계승하지 못했던 것은 바로 식민지배의 영향 때문이 아니었을까?

리카비토스 언덕에서 바라 본 아테네 시가지 모습, 왼쪽 숲 가운데 제우스 신전이 보이고, 오른쪽에 아크로폴리스와 그 뒤로 필로파포스 언덕이 보인다. 멀리 피레우스 항구와 에게 해가 훤히 보인다. ⓒ박경귀 리카비토스 언덕에서 바라 본 아테네 시가지 모습, 왼쪽 숲 가운데 제우스 신전이 보이고, 오른쪽에 아크로폴리스와 그 뒤로 필로파포스 언덕이 보인다. 멀리 피레우스 항구와 에게 해가 훤히 보인다. ⓒ박경귀

리카비토스 언덕의 동쪽 중턱에는 고대 그리스 원형 극작을 본 뜬 극장이 있다. 그 오른쪽이 주차장이다. ⓒ박경귀 리카비토스 언덕의 동쪽 중턱에는 고대 그리스 원형 극작을 본 뜬 극장이 있다. 그 오른쪽이 주차장이다. ⓒ박경귀

리카비토스 언덕의 전망대에서 황혼의 풍광을 보기 위한 관광객들이 붐빈다. 아깝게도 필자가 방문한 날은 구름이 짙게 끼어 붉게 물든 황혼을 볼 수 없었다. ⓒ박경귀 리카비토스 언덕의 전망대에서 황혼의 풍광을 보기 위한 관광객들이 붐빈다. 아깝게도 필자가 방문한 날은 구름이 짙게 끼어 붉게 물든 황혼을 볼 수 없었다. ⓒ박경귀

리키바토스 언덕 정상에 있는 아기오스 조르기오스(Agios Georgios) 교회와 종탑, 종탑 벽면에 낙서가 가득하다. ⓒ박경귀 리키바토스 언덕 정상에 있는 아기오스 조르기오스(Agios Georgios) 교회와 종탑, 종탑 벽면에 낙서가 가득하다. ⓒ박경귀

리카비토스 언덕 정상에 있는 아기오스 조르기오스(Agios Georgios) 교회의 내부이다. 갓 결혼한 신랑 신부가 축복을 기원하거나 신의 가호와 일상의 행운을 비는 시민들이 많이 들르는 곳이다. ⓒ박경귀 리카비토스 언덕 정상에 있는 아기오스 조르기오스(Agios Georgios) 교회의 내부이다. 갓 결혼한 신랑 신부가 축복을 기원하거나 신의 가호와 일상의 행운을 비는 시민들이 많이 들르는 곳이다. ⓒ박경귀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kipeceo@gmail.com)

박경귀 기자 (kipec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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