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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있어야 개인이 있다" 페리클레스를 만나다


입력 2015.05.03 10:26 수정 2015.05.03 10:32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박경귀의 ad Greece 52>아테네 민주주의의 성지 프닉스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 주 >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참주의 저택 위에 세워진 영빈관

아고라 서쪽 관청 가에는 중요한 건축물이 있었다. 톨로스(Tholos)였다. 톨로스는 원형 건물로 기원전 6세기 중반 혹은 6세기 말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다. 이 건물은 10개 부족의 대표로 이루어진 500인 평의회의 본부 사무실용으로 사용되었다. 평의회의 집행위원회에 해당되는 50명의 프리타네이스(prytaneis)는 매일 주간 및 야간 근무를 해야 했다. 톨로스는 이들이 공무를 보고 식사를 하거나 숙직을 하는 용도로 쓰였다. 나아가 외국의 사절이 방문할 경우 영빈관으로도 활용되었다.

톨로스의 정문은 동쪽으로 나 있었고, 내부에는 6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었다. 기원전 1세기에는 톨로스 앞에 별도의 정문 기능을 한 프로필론(propylon)이 증축되었다. 또 이 건물 안에 국가의 표준 도량형과 인장 그리고 불을 보관했다. 이 톨로스는 기원후 400년까지 활용되었다.

영빈관 역할을 한 둥근 건물 톨로스가 있던 자리이다. 둥근 지반 흔적만 남았다. ⓒ박경귀 영빈관 역할을 한 둥근 건물 톨로스가 있던 자리이다. 둥근 지반 흔적만 남았다. ⓒ박경귀

톨로스의 추정 복원도, 아고라 유적 표지판 ⓒ박경귀 ⓒ 톨로스의 추정 복원도, 아고라 유적 표지판 ⓒ박경귀 ⓒ

인간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을 지우기 위해 하는 첫 번째 일은 관련된 건축물이나 형상을 제거하는 것이다. 새 왕조가 들어설 때 전 왕조가 세운 건축이나 유물들을 파괴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이와 함께 새로운 상징을 각인시키기 위한 색다른 건물이나 상징물을 만들기도 한다. 한국이 일제의 잔재를 일소하기 위해 1996년 중앙청이라 불리던 경복궁 내의 구 일본 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경복궁의 원형을 재복원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기원전 6세기 아테나이인들에게도 지우고 싶은 과거가 있었다.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 기원전 600년?~528)의 지배시대를 지우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참주가 죽자, 아고라의 관청 가 중심에 있던 그의 저택을 철거하고 평의회 의원들의 상설 활동을 위한 공간을 새롭게 건축했다. 톨로스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톨로스는 페이시스트라토스 사후 대를 이어 참주에 오른 장남 힙피아스의 17년 지배가 끝난 후에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참주의 저택 자리에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기구의 청사를 건축했다는 것은 참주정에서 민주정으로 전환되었음을 대내외에 과시하는 분명한 메시지였을 것이다. 외국의 사절을 이곳에서 맞은 것에도 자연스럽게 아테나이의 민주정을 알리고자 한 의도가 내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테나이에서는 올림피아 제전에서 우승을 하거나 국가에 큰 공헌을 한 사람에게 국비로 식사를 제공하는 제도가 있었다. 플라톤의 저서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자신은 죄가 없다며 오히려 시민들을 일깨우고 있는 자신이야말로 국가에 공헌한 사람이므로 국가의 무료식사 제공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 공공식사 장소는 어디였을까? 아마 공무를 상시적으로 집행하는 중심 건물이었던 톨로스였을 가능성이 높다. 톨로스에서는 집행위원에 해당하는 프리타네이스나 외국의 사절에게 식사를 제공했다. 따라서 명예로운 시민에 대한 식사도 각 부족대표인 프리타네이스와 함께 주어졌을 것이다. 톨로스에서 공무를 보고 있던 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국가에 공헌한 자긍심을 한껏 높일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테나이 민주주의를 세운 현인 솔론

톨로스는 아테나이의 민주주의가 한 단계 진화했던 징표로 볼 수 있다. 물론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죽은 뒤 곧바로 민주정이 회복된 것 아니었다. 그의 장남 힙피아스(Hippias, 재위 기원전 527~510)가 대를 이어 참주에 오르고 17년 동안 더 횡포를 부린 후에야 민주정이 재건될 수 있었을 것이다. 아테나이의 민주주의는 거저 얻어진 게 아니다. 왕정에서 참주정으로, 참주정에서 민주정으로 진화하는 과정에 아테나이인들의 소중한 피와 땀이 요구되었다. 진보와 반동으로 인한 퇴행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그 험난한 과정을 살펴보려면 잠시 아테나이 민주정의 기틀을 만든 솔론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기원전 594년 현인 솔론이 집정관인 아르콘(archon)으로 선출되자, 귀족과 민중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면서 민주적 제도들을 하나하나 만들기 시작한다. 그는 우선 부자들의 탐욕과 오만을 경계하면서 억압 받던 민중들의 마음을 달랬다. 그의 시 구절이 부자들을 향한 그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가슴속에 있는 극단의 마음을 억제하시오.
당신들은 많은 재물을 신물 나게 향유하였소.
중용을 중히 여기시오. 우리들도 극단은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당신들에게도 그런 것은 도움이 안 될 것이오.“


솔론은 부채로 자유를 상실한 민중들을 제자리로 돌리려고 했다. 인간의 몸을 담보로 돈을 빌리지 못하게 하는 법률을 만들고, 상당한 사채와 공채를 삭감했다. 그는 100년 동안 변치 않을 법을 만들었다. 아르콘이 만일 이 법을 어기면 사람 크기의 황금상을 바치기로 맹서하게 했다. 리쿠르고스가 스파르타의 과두 지배체계를 정립했다면, 솔론의 아테나이 민주정의 초석을 놓은 것이다.

솔론의 흉상,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솔론의 흉상,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솔론은 시민들을 4가지 계층으로 나누고 각기 재산 보유 정도에 따라 관직을 맡도록 했다. 그 대신 서민 계층인 테티스 계층에게 민회와 재판정에 관여할 수 있도록 해서 귀족과 민중의 권한과 책임을 균형 있게 하려고 애썼다. 사실 민중이 가진 재판권은 막강한 것이었다. 민중이 재판권을 가짐으로써 아테나이 정치체제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솔론은 자신의 민주개혁을 이렇게 자평했다.

“민중에게 충분한 은혜를 베풀었다.
명예를 줄이지도 않았고 과도하게 주지도 않았다.
힘이 있고 돈이 있는 사람들
그들도 아무런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하였다.
나는 양편 모두를 위해 강한 방패를 들고 서서
어느 편도 부당한 승리를 거두지 않도록 하였다.“


솔론은 민중의 권한을 확대하면서도 방종과 자만으로 흐르지 않도록 경계했다.

“민중은 이렇게 지도자를 따를 때 최선의 상태가 된다.
너무 자유로워도 안 되고 너무 억압받아도 안 된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에게
부가 많이 생길 때는 충족이 자만을 낳는다.“


하지만 솔론의 개혁 입법과 현명한 충고에도 불구하고 그가 5년 만에 아르콘에서 물러나자 귀족과 민중 모두 불만을 터트리며 갈등과 불화가 심화되었고 거의 무정부 상태에까지 이른다. 귀족과 민중 모두를 위한 솔론의 중용의 정책은 자신만의 탐욕에 눈이 어두워진 귀족이나 민중 그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참주 암살한 민주 투사? 자유의 상징?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참주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추방과 복귀를 반복하며 33년간 권좌에 있었고, 그의 아들 힙피아스와 힙파르코스(Hipparchos)가 참주를 이어받았다. 이들 형제의 독재와 횡포에 대한 원성이 높아지면서 우연한 계기로 힙파르코스가 암살된다.

이후 더욱 포악해진 힙피아스는 결국 시민들의 봉기로 축출되고 페르시아로 망명하면서 참주정이 붕괴 된다. 이후 힙피아스는 아테나이의 추악한 배신자가 된다. 기원전 490년 다레이오스 1세가 그리스 침공을 할 때, 길잡이가 되어 마라톤 전투를 이끌었던 것이다. 개인의 정치적 부활을 위해 조국을 배신했던 그는 전투의 패전과 함께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힙파르코스를 살해한 사람은 하르모디오스(Harmodios)와 아리스토게이톤(Aristogeiton)이었다. 하르모디오스는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척살되고, 아리스토게이톤은 붙잡혀 고문을 당한 후 죽게 된다. 기원전 514년에 일어난 일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참주정이 붕괴하자 훗날 이 두 사람은 아테나이인들 사이에서 졸지에 영웅으로 떠올랐다. 아테나이인들이 이 두사람을 민주정을 회복시킨 민주 투사로 떠받든 것이다. 이 청동상은 아테나이인들에게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 같은 상징물로 추념(追念)되었을 것이다.

아마 아고라에서 가장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아테나이 시조 영웅 상이 있던 곳 옆이나, 또는 평의회 회관이나 톨로스 앞 대로에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청동상은 얽힌 사연을 차치하더라도 탁월한 예술미를 보여주는 걸작이다. 원래 '참주 살해자'(The Tyrannicides)라는 이름이 붙은 이 청동상은 기원전 510년 경 아테나이의 조각가 안테노르(Antenor)에 의해 청동으로 제작 설치되었지만 유실되었다. 지금 보는 작품은 기원전 2세기에 로마인이 대리석으로 복제한 작품으로 로마 인근 티볼리에 있던 하드리안 황제의 빌라에서 발굴되었다. 필자는 이 작품이 이탈리아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에 있다는 것을 알고 2015년 2월에 이탈리아 답사여행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어렵게 시간을 내어 찾아 간 보람이 있었다.

'참주 살해자', 참주 힙피아스의 동생 힙파르코스를 살해한 아리스토게이톤(왼쪽)과 하르모디오스의 대리석상,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참주 살해자', 참주 힙피아스의 동생 힙파르코스를 살해한 아리스토게이톤(왼쪽)과 하르모디오스의 대리석상,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힙파르코스를 살해한 아리스토게이톤의 대리석 상이다. 왼손은 방패를 들었고 오른손에 칼이 들려 있었다.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힙파르코스를 살해한 아리스토게이톤의 대리석 상이다. 왼손은 방패를 들었고 오른손에 칼이 들려 있었다.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참주 힙피아스의 동생 힙파르코스를 살해한 아리스토게이톤(왼쪽)과 하르모디오스의 대리석상, 하르모디오스가 오른손에 칼을 높이 들고 내리치려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참주 힙피아스의 동생 힙파르코스를 살해한 아리스토게이톤(왼쪽)과 하르모디오스의 대리석상, 하르모디오스가 오른손에 칼을 높이 들고 내리치려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아테나이인들은 아리스토게이톤과 하르모디오스의 영웅적 행동을 기리기 위해 아고라에 이들의 청동상을 건립했다. 이들을 자유를 지킨 민주투사이자 진정한 애국심을 보여준 열사라고 여겼던 것이다. 이 청동상은 아고라에 설치된 시조 영웅 못지않은 인기를 얻었을 것이다.

이들은 아테나이의 민주정을 회복시킨 진정한 영웅이었을까?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보면, 이들의 행동을 순수한 애국심이 발로(發露)로만 보기에는 어쩐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투키디데스가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것도 일리가 있다고 여겨진다.

아리스토게이톤과 하르모디오스는 애인 관계였다. 그런데 힙파르코스가 하르모디오스를 자꾸 유혹하려하자 질투가 난 아리스토게이톤은 권력자에게 자신의 애인을 빼앗길 것을 염려했다. 게다가 힙파르코스는 자신의 유혹을 하르모디오스가 받아주지 않자 앙심을 품고 분풀이를 한다. 하르모디오스의 여동생을 축제 행렬에서 바구니를 들라고 초청해놓고는 그녀가 오자 초청한 적이 없다고 돌려보냈던 것이다. 그의 치졸한 행동은 하르모디오스를 더욱 분개하게 만들었다.

결국 아리스토게이톤은 질투심 때문에, 하르모디오스는 자존심이 상해서 판아테나이 축제의 행렬에 참가한 힙파르코스를 찔러 죽였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거사가 들통 날 것을 염려한 나머지 급하게 공격하느라 정작 동행하던 참주 힙피아스는 살해하지도 못했다. 절반의 성공에 그친 셈이다.

아무튼 이들의 행동이 참주를 징벌하려던 의거였는지, 사랑싸움에 따른 치정(癡情) 사건인지 알 수 없다. 물론 힙파르코스의 죽음이 결과적으로 참주정의 붕괴를 가져오는데 기여했던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참주 힙피아스가 동생을 잃자 더욱 횡포해졌고, 이로 인해 자신의 정치적 수명을 더욱 단축시켰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보면, 참주정이 종말을 맞게 된 결정적인 요인으로 알크메오니다이 가의 클레이스테네스의 공로를 기술하고 있다. 그는 델포이의 예언녀 퓌티아를 매수하여 스파르테인들에게 아테나이를 참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촉구하게 했다고 한다. 퓌티아의 신탁에 늘 신경이 쓰이던 스파르테는 결국 클레오메네스 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아테나이의 민주파들을 지원하여 힙피아스를 몰아냈던 것이다. 클레이스테네스의 작전이 성공했던 셈이다.

아무튼 아테나이의 민주정의 회복에 누구 더 큰 기여를 했는지 역사의 진실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투키디데스와 헤로도토스의 언급을 곱씹어 보면, 아리스토게이톤과 하르모디오스의 거사의 진정성이 약간은 퇴색되는 느낌이다. 하지만 자유의 소중함을 시민들에게 환기시키고, 참주에 저항하는 애국적 행동을 기리기 위해서 두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 시대적 필요성은 충분히 이해된다. 아테나이인들이 새로운 상징물을 통해 자유와 민주정의 소중함을 시민들에게 각인시키고 싶었던 충정은 기억할 만하다.

그리스 민주주의의 성지, 프닉스 언덕

아고라의 시조 영웅상의 거리나 참주 살해자의 청동상은 아테나이인들에게 정체성과 연대감, 민주정에 대한 애착을 보여주지만, 실제 아테나이를 역동적으로 만들고 융성하게 만들었던 원동력은 전 시민이 참여하는 민회(ecclesia)였다. 아고라는 정치적 경제적 공간이었지만, 대규모 시민이 참여하는 민회를 개최하는 장소로는 비좁고 부적합했다. 아고라보다는 좀 더 넓고 주변이 쾌적하고 평온한 곳이 필요했다. 그 장소로 선택된 곳은 아고라의 남서쪽에 있는 프닉스(Pnyx) 언덕이었다.

민회가 열리던 프닉스 언덕, 6천여 명의 시민들이 붐볐을 이곳에 지금은 들꽃만 무성하다 ⓒ박경귀 민회가 열리던 프닉스 언덕, 6천여 명의 시민들이 붐볐을 이곳에 지금은 들꽃만 무성하다 ⓒ박경귀

프닉스 언덕은 남동쪽으로 필로파포스(Philopappos) 언덕과 님프의 언덕과 이어져 있는 나지막한 언덕이다. 이곳에 6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고 이곳에서 민회가 열렸다. 프닉스 언덕에 서면 아크로폴리스가 마주 올려다 보이고, 아고라가 눈 아래에 들어온다. 주변은 울창한 나무들로 가득 차 있고 새 소리가 들린다. 인파가 붐비는 아크로폴리스와 아고라에 비해 찾는 이가 거의 없어 고적한 느낌이 들 정도다.

필자가 2014년 8월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에도 이곳을 둘러보는 이는 혼자였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 문명의 진수를 느껴 보려는 사람이라면 민주주의의 성지인 이곳 프닉스를 반드시 답사해 보길 권한다. 이곳에서 국가의 중대사를 놓고 벌어진 숱한 논쟁과 열정어린 연설들을 차분히 상기해 보는 것도 그리스 문명의 진수를 재확인하는 일이 될 터이다.

프닉스 언덕에서 내려다 본 아고라, 긴 회랑은 아고라 동쪽에 있는 아탈로스 주랑이다. ⓒ박경귀 프닉스 언덕에서 내려다 본 아고라, 긴 회랑은 아고라 동쪽에 있는 아탈로스 주랑이다. ⓒ박경귀

민회의 연단 베마(Bema), 페리클레스도 이 연단에 자주 섰을 것이다. ⓒ박경귀 민회의 연단 베마(Bema), 페리클레스도 이 연단에 자주 섰을 것이다. ⓒ박경귀

아테나이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페리클레스가 자주 연설하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아테나이 시민들이 스파르타와의 오랜 전쟁과 역병에 시달리며 용기를 잃어가고 있을 때 페리클레스가 시민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유명한 연설을 했던 곳도 이곳 프닉스 언덕이다. 페리클레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시작할 때 모두가 동의하고 열정에 넘쳤던 아테나이 시민들이 전쟁에 진력을 내면서, 페리클레스를 원망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자 그는 이렇게 사자후를 토해 여론을 반전시켰다.

“시민 개개인은 번영하지만 국가 전체가 넘어질 때보다는 국가 전체가 똑바로 서는 편이 개인에게도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한 개인이 아무리 잘나간다 해도 국가가 망하면 그도 총체적인 파국에 휩쓸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가 안전하다면 개인은 불행을 당해도 회복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렇듯 국가는 개인의 모든 고통을 감당할 수 있어도 개인은 국가의 고통을 감당할 수 없다면, 우리 모두 당연히 국가를 옹호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여러분처럼 행동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요? 여러분은 가정에서 오는 고통에 놀라 공동체의 구원을 포기하고, 전쟁을 권했다고 나를 공격하고, 전쟁을 하는 쪽에 투표했다고 해서 자책감에 사로잡혀 있으니 말입니다.

여러분은 내게 화를 내지만, 나야말로 누구 못지않게 무엇이 필요한지 볼 수 있는 식견이 있고, 본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조국을 사랑하고 돈에 초연한 사람이라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식견은 있으나 명료하게 설명할 수 없다면 아예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이 두 가지 자질은 갖고 있으나 애국심이 없다면 아마도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애국심이 있다 해도 뇌물에 약하다면 이 한 가지를 위해 무엇이든 다 팔아버릴 것입니다.“


민회에서 연설하는 페리클레스, Philipp Foltz(1805~1877) 민회에서 연설하는 페리클레스, Philipp Foltz(1805~1877)

궤변론자 소피스테스를 양산한 민주주의

민회에서 페리클레스처럼 시민들을 휘어잡는 연설을 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법안을 제안하면서 민중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연설 능력이 요구되었다. 민회의 연설대인 베마(Bema)에 선다는 것은 가슴 떨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누구나 연단에 설 수 있는 자격이 있었지만, 민중의 야유나 비판을 이겨내고 꿋꿋이 자신의 주장을 펼 수 있는 대담한 용기와 매끄러운 언변, 합리적 논리를 갖추지 않으면 가벼이 연단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말의 성찬의 시대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아테나이 민주주의는 민중을 설득하고 효과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정치지도자들을 요구했을 것이다. 식자층들이 연설술을 배우기 위해 소피스테스(Sophistes)들을 찾았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연설을 배우고자 하는 이들은 아테나이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스 도시 국가 어디에서나 민회가 있었고, 자신의 정견이나 의사를 명확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된 능력이었다. 하지만 대중을 휘어잡기 위해 기술이 강조되나 보니 자연스럽게 선동가(demagogue), 데마고그들이 등장했다. 데마고그들은 국가의 장기적 비전과 합리적 대안보다 우선 대중에 영합하는 달콤한 말과 궤변을 앞세우기 마련이었다. 아테나이 민주주의는 숱한 데마고그들을 낳기도 했다. 요즘 정치인들의 포퓰리즘(Populism)의 뿌리가 아테나이에 있었던 것이다.

말을 잘하는 것이 정치적 활동에서만 필요한 건 아니었다. 민주주의가 발달하면서 개인의 재산권과 자유를 지키려는 의식이 확산되었고, 이를 둘러싼 분쟁을 재판을 통해 해결하는 방식이 제도화되었다. 아테나이는 각종 고소와 재판이 끊이지 않았다. 자신의 재산권을 침해받지 않고 자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도 재판에서 스스로를 잘 변론할 수 있어야 했다.

소송은 피고와 원고 모두 당사자가 직접 해야만 했다. 그러니 말 주변이 없는 사람들은 소송에서 이기기 어려웠다. 그래서 재판의 변론을 대신 써주는 사람들이 등장하게 된다. 오늘날 변호사의 역할을 한 사람들도 바로 소피스테스였다. 오늘날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리스의 법정에서의 변론은 당사자가 직접 해야 했다는 점이다. 변론에 자신이 없는 사람은 소피스테스가 써준 변론문을 달달 외워서 변론을 해야 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소피스테스들은 그리스 전역을 누비며 전성기를 누렸다. 기원전 5세기에서 4세기 때가 그 절정이었다.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고르기아스(Gorgias), 트라시마코스(Thrasymachus) 등이 대중의 인기를 얻었던 대표적 소피스테스였다. 이들은 철학을 대중화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억지 논리나 교묘한 언술로 상대를 이기는 기술을 가르치는 데 치중하여 많은 이들로부터 궤변론자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특히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 같은 진지한 철학자들은 소피스테스들의 폐해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아테네 학술원 앞에 세워진 소크라테스 좌상, 왼쪽 높은 좌대에 세워진 석상은 음악의 신이자 지혜의 신인 아폴론이다. ⓒ박경귀 아테네 학술원 앞에 세워진 소크라테스 좌상, 왼쪽 높은 좌대에 세워진 석상은 음악의 신이자 지혜의 신인 아폴론이다. ⓒ박경귀

민주주의 성공은 시민 참여에 달렸다

프닉스에서 민회가 열리는 날에는 아티케 전역에서 시민들이 아침 일찍부터 몰려들었을 것이다. 아티케 반도의 최남단인 수니온 곶에 사는 시민들이 프닉스까지 걸어서 오려면 거의 12시간 정도 걸린다. 여유 있는 사람들은 전날 아테나이 시내에 있는 친지 집에 머물고 이튿날 민회에 참석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날 밤새 걸어서 아침나절에야 프닉스에 도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티케의 북쪽과 동남쪽 멀리 떨어진 농촌 지역 시민들이 민회에 참석하는 일은 시민적 열정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테나이인들이 정치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것을 시민적 덕목으로 권장했던 이유도 직접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해 시민의 참여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테나이인들은 국가적 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잘 참여하지 않으면서 사적인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을 ‘이디오테스(idiotes)’라고 불렀다. 바보, 천치란 조롱이 담긴 뜻으로 영어 ‘idiot’의 어원이 되었다. 오늘날 대의민주주의가 위기에 봉착한 것도 이디오테스가 많아진 때문이다. 물론 선동가가 판치는 정치권에 대한 환멸과 무관심에서 비롯된 자업자득이기도 하다.

아테나이의 직접민주주의를 꽃피웠던 피닉스 언덕에 서서 민중들의 연설과 고함, 야유와 환호로 가득 채웠을 그 열기를 상상해 본다. 피닉스 언덕은 자유와 평등을 구가했던 아테나이인들의 이상과 현실이 부딪히던 곳이다. 이젠 텅 빈 공간이지만, 피닉스 언덕을 보호하던 거대한 석벽은 2500여년을 견디고 지금도 견고하게 남아있다.

2미터 정도에 이르는 거대한 돌들이 가지런히 쌓였다. 인간이 다룰 수 없는 거대한 돌로 성벽을 쌓아 ‘키클롭스 성벽(Cyclopean walls)‘으로 불린 티린스의 성벽을 다시 보는 것 같다. 피닉스의 견고한 석벽은 현대 민주주의의 씨앗이 된 아테나이 민주주의의 든든한 토대를 상징하는 듯하다.

프닉스 언덕에 있는 제우스 제단,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민회에서는 회의에 앞서 제우스의 가호를 비는 제례를 이곳에서 치렀던 것 같다. ⓒ박경귀 프닉스 언덕에 있는 제우스 제단,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민회에서는 회의에 앞서 제우스의 가호를 비는 제례를 이곳에서 치렀던 것 같다. ⓒ박경귀

프닉스 민회 회의장의 추정 복원도, 기원전 330~326년경의 프닉스 평면 계획도이다. 연단을 꼭지점으로 하여 부채꼴 모양의 공간이 펼쳐졌다. 연단의 맞은편에는 기념 관문인 프로필라이아(Propylaia)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프닉스 안내표지판, ⓒ박경귀 
프닉스 민회 회의장의 추정 복원도, 기원전 330~326년경의 프닉스 평면 계획도이다. 연단을 꼭지점으로 하여 부채꼴 모양의 공간이 펼쳐졌다. 연단의 맞은편에는 기념 관문인 프로필라이아(Propylaia)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프닉스 안내표지판, ⓒ박경귀

프닉스 민회 회의장의 추정 복원도, 상단의 보호 성곽 기능을 겸한 건축물이 프닉스 회의장을 외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단에는 석축과 관문인 프로필라이아(Propylaia)가 보인다. 프닉스 안내표지판, ⓒ박경귀 프닉스 민회 회의장의 추정 복원도, 상단의 보호 성곽 기능을 겸한 건축물이 프닉스 회의장을 외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단에는 석축과 관문인 프로필라이아(Propylaia)가 보인다. 프닉스 안내표지판, ⓒ박경귀

프닉스 민회 회의장 하단에 조성된 관문 프로필라이아(Propylaia)가 있던 자리이다. ⓒ박경귀 프닉스 민회 회의장 하단에 조성된 관문 프로필라이아(Propylaia)가 있던 자리이다. ⓒ박경귀

프닉스 민회 회의장 하단을 받치는 석벽이다. 2미터에 가까운 거대한 돌들로 쌓았다. 2500여년의 세월을 견딘 옛 모습 그대로이다. ⓒ박경귀 프닉스 민회 회의장 하단을 받치는 석벽이다. 2미터에 가까운 거대한 돌들로 쌓았다. 2500여년의 세월을 견딘 옛 모습 그대로이다. ⓒ박경귀

프닉스 민회 회의장 하단을 받치는 석벽이다. 바위 위에 거대한 돌을 쌓아 만든 미케네 왕성의 성벽을 연상시킨다.  ⓒ박경귀 프닉스 민회 회의장 하단을 받치는 석벽이다. 바위 위에 거대한 돌을 쌓아 만든 미케네 왕성의 성벽을 연상시킨다. ⓒ박경귀

아테나이 직접 민주주의는 시민적 열정에 의해 꽃을 피웠고, 시민의 무관심에 서서히 그 빛을 잃어갔다. 아리스토파네스(기원전 445?~385?)의 희극 ‘여인들의 민회’에는 아테나이 시민들의 민회 참석률이 점차 저조해지자 참석자에게 일당을 지급하게 된 당시의 상황을 풍자하는 대목이 나온다.

민회 참석 수당은 3오볼로스였다. 당시 노동자 하루 일당이 1드라크마 정도였으니 오늘날 우리 돈으로 치면 약 5~6만원 정도였을 것이다. 따라서 3오볼로스라면 대략 1만5천원 내지 2만원에 상당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참석 수당을 누구나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선착순으로 6천 명에게만 지급했다.

“고귀한 뮈로니데스(기원전 5세기 중반 활동)가 장군이었을 때는 이러지 않았소. 그때는 도시를 위해 수고했다고 해서 돈을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소. 사람들은 저마다 가죽부대에 담은 약간의 포도주와 빵과 양파 두 알과 올리브 세 알을 가져왔지요. 그러나 지금 그들은 공익을 위해 봉사하면 3오볼로스를 받기를 원해요. 점토를 운반하는 노동자처럼.”

참석 수당이 얼마였든지 간에 시민의 신성한 참정권 행사에 일당을 지급하게 되었다는 것은 아테나이 시민들의 공공 활동에 대한 열정이 어느 정도 식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오랜 동안의 전쟁에 지친 아테나이 시민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과 희망도 점차 줄어들었던 것 같다. 이는 아테나이가 최전성기를 지나 쇠퇴기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kipeceo@gmail.com)

박경귀 기자 (kipec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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