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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돕겠다"며 세월호 올랐던 '알바생'의 죽음은...


입력 2015.04.13 10:38 수정 2015.04.13 10:53        목용재 기자

<침몰 1년 세월호가 남긴 것은①>배보상 등에 늘 소외

"학비 스스로 내겠다며 나간 아들...언론도 외면 섭섭"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지 어느덧 1년. 1년이라는 시점이 지났음에도 세월호가 대한민국에 남긴 깊은 상처는 상흔으로 남아 여전히 사회 갈등의 씨앗으로 자리 잡고 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언론의 무분별하고 부정확한 보도행태로 많은 이들이 상처를 입었고 여전히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은 정부를 향해 ‘불신’을 이야기하고 있다. ‘데일리안’은 세월호 1주기를 맞이해 여전히 고통 받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아픔과 세월호 참사 당시의 보도 행태, 그리고 그들의 곁을 지켰던 자원봉사자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되돌아보고자 한다. < 편집자 주 >

지난해 4월 아르바이트를 위해 세월호에 승선했다가 세상을 떠난 방현수 씨의 사진들이 그의 아버지 방기삼(51) 씨의 자택 서재 한켠에 진열돼 있다. 방기삼 씨 제공 지난해 4월 아르바이트를 위해 세월호에 승선했다가 세상을 떠난 방현수 씨의 사진들이 그의 아버지 방기삼(51) 씨의 자택 서재 한켠에 진열돼 있다. 방기삼 씨 제공

"한 푼 더 벌어서 보태겠다고 세월호에 올라탄 우리 기웅이, 동네에서도 알아주는 효자였는데 어떡해요. 기웅이 다니던 인천대학교에서 세월호 1주기 맞이해 여는 토론회에 초청했는데, 가면 아들 생각날까봐 집에 있어요."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지 1주기를 맞이했지만 여전히 희생자들을 가슴에 묻은 유가족들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고 있다.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용돈 벌이를 위해 세월호에 승선했던 김기웅 씨의 어머니인 김광숙 씨(62)도 여전히 아들의 빈자리를 메우지 못하고 아들을 그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김기웅 씨는 세월호에 불꽃놀이 진행요원으로 승선했다가 세월호 침몰 당시 승객들을 대피시키다가 정작 자신은 탈출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세월호 침몰 당시 김 씨는 동료들을 깨워 탈출시키고 여자 친구인 정현선 씨를 찾으러 다시 세월호로 들어갔다가 다시 빠져나오지 못했다.

김 씨는 갖가지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자신의 학비를 마련하고 어머니인 김광숙 씨에게 용돈까지 주는 효자였다.

지난해 4월 아르바이트를 위해 세월호에 승선했다가 세상을 떠난 방현수 씨의 사진들이 그의 아버지 방기삼(51) 씨의 자택 서재 한켠에 진열돼 있다. 방기삼 씨 제공 지난해 4월 아르바이트를 위해 세월호에 승선했다가 세상을 떠난 방현수 씨의 사진들이 그의 아버지 방기삼(51) 씨의 자택 서재 한켠에 진열돼 있다. 방기삼 씨 제공

김광숙 씨는 ‘데일리안’에 “기웅이가 다니던 학교에서 세월호 1주기 된다고 토론회에 초청했는데, 기웅이 친구들 보면 기웅이 생각날까봐 못 갔다”라면서 “몸이 계속 안 좋아서 밖에는 나가지 못하고 집에만 있다”고 토로했다.

김 씨는 “우리 기웅이는 고등학교, 대학교 내내 아르바이트 잘해서 그 돈으로 나한테 용돈까지 줬다”면서 “학비도 자기가 벌고 그러면서 장학금까지 받았다. 동네에서 알아주는 효자였다”면서 울먹였다.

이어 김 씨는 “기웅이는 자기 엄마 돕겠다고, 한푼이라도 더 벌겠다고 아르바이트를 뛰다가 그렇게 됐다”면서 “여론이나 사람들의 관심은 단원고 유족들에게 많이 쏠려있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점에서 이해는 가지만 저도 아들 대학까지 키워서 보냈는데, 아들을 잃고 나니 병이 나서 이곳 저곳 돌아다니지를 못하겠다”고 덧붙였다.

사촌형인 김기웅 씨를 따라 세월호에 올랐다가 돌아오지 못한 방현수 씨의 유가족들도 아직 아픔을 치유하지 못한 채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이했다.

방 씨는 세월호에서 단원고 학생들에게 배식을 해주거나 학생들이 갑판 난간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학생들의 안전을 담당하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매점의 물건 진열도 도맡았다. 미대 진학을 꿈꾸던 방 씨는 밤에는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고 낮에는 미술공부를 하는 근면 성실한 재수생이었다.

방 씨의 아버지인 방기삼 씨(51)는 본보에 “불꽃놀이 담당은 현수 사촌형인 기웅이가 맡았고, 현수는 배식이라든가 위험한 갑판에 아이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이였다. 매점 같은 곳의 물건 진열도 현수의 몫이였다”면서 “(아들의 죽음 때문에) 항상 힘들고 밥맛도 없다. 아이들을 잃은 모든 세월호 유족들의 심정일 것”이라고 토로했다.

김기웅 씨의 어머니인 김광숙 씨와 방현수 씨의 아버지인 방기삼 씨는 희생된 자식이 아르바이트생이라는 이유로 참사 초기 사태 수습에 대한 제대로 된 안내를 받지 못해 혼란을 겪은 바 있다.

이들 아르바이트생 유족들은 다수인 단원고 학생 유족도 아니였고, 그렇다고 청해진해운의 정직원 희생자 유족도 아니였기 때문에 이들에 구체적인 사태 수습 방안, 배보상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없어 남들이 모르는 속앓이를 하기도 했다.

김광숙 씨는 여전히 그러한 '차별' 대우에 대해 섭섭함을 토로하기도 한다. 김 씨는 "솔직히 알바생이라고 차별하고 그러는게 못마땅했었다"면서 "단원고 아이들은 워낙 어린 나이에 그렇게 됐으니까 부모들의 마음을 이해하지만 나도 아들 잃은 심정은 똑같다"고 말했다.

김 씨는 "일반인들이 희생당한 것은 예사로 보니까 서운했다"면서 "제 아들도 제대로 피지 못한 아이였다"고 울먹였다.

김광숙 씨와 방현수 씨는 세월호 참사 이후 세월호 일반인유가족협의회에서 사태를 수습하다가 지난해 12월 27일 인천 남동구 인천시청 앞 미래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들의 합동 영결식을 계기로 단원고 유가족 측으로 옮겼다. 아직 아들들을 떠나보내기에 마음의 준비가 돼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일반인유가족대책협의회에 있던 고(故) 구춘미, 김기웅, 방현수, 권재근, 권혁규 씨의 유가족들은 단원고 유가족 측으로 자리를 옮겨 세월호 인양을 위한 여론 형성에 나서고 있다.

방기삼 씨는 "정부에서 배보상안을 내놨는데 그것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고 유가족끼리도 그것에 대해서는 얘기를 안 한다"면서 "정부에서 세월호 사태 수습과 관련해 믿음이나 신뢰를 주지 않는 것 같아 실망스럽다. 특히 유가족들에 대한 배보상문제를 거론하면서 유가족들은 나쁜사람 만드는 것이 문제라고 본다"고 지적했다.

목용재 기자 (morkka@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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