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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의도 금배지들중엔 '정신 나간 스워드'가 없나


입력 2015.03.28 10:30 수정 2015.03.28 10:35        데스크 (desk@dailian.co.kr)

<굿소사이어티 칼럼>온갖 비난 뚫고 알래스카 매입한 소신의 정치인

알래스카를 온갖 비난에도 매입해서 미국에 엄청난 이득을 보게 한 윌리엄 스워드. 사진 it.wikipedia.org 알래스카를 온갖 비난에도 매입해서 미국에 엄청난 이득을 보게 한 윌리엄 스워드. 사진 it.wikipedia.org
알래스카에서는 ’Seward Harbor’, ‘Seward Highway’, ‘Seward Peninsula’ 등 ‘스워드(Seward)’라는 단어가 곳곳에서 눈에 띈다. 알래스카뿐 아니라 미국의 다른 주(州)들에서도 ‘Seward Square’, ‘Seward Park’ 등의 지명을 볼 수 있다. 1867년 제정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입하는데 앞장섰던 당시의 미국 국무장관 월리엄 스워드(William H. Seward, 1801~1872)의 이름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알래스카 매입에 앞장섰던 윌리엄 스워드 국무장관

당시 미 의회와 언론은 윌리엄 스워드 국무장관이 알래스카 땅을 720만 달러에 사들인 것을 두고 ‘Seward's folly’(스워드의 바보짓), ‘Seward's icebox’(스워드의 아이스박스), ‘polar bear garden’(북극곰 정원) 등 미친 짓이라고 조롱했다. 스워드는 알래스카의 영토적 가치를 인식하고 사면초가의 난관을 무릅쓰고 러시아 땅 알래스카 매입에 진력했다.

미국의 알래스카 매입은 북미대륙에서 러시아를 몰아냈다는 역사적, 정치적, 군사적 의의가 실로 지대할 뿐만 아니라, 매입 30년 후인 1897년 대규모 금광이 발견되고, 20세기에 들어 대형 유전까지 발견되면서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렸다. 당시 스워드의 혜안과 소신이 없었더라면 지금 알래스카는 러시아 영토로 남아 미국 본토를 코 앞에서 위협하는 러시아의 핵미사일기지가 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

윌리엄 스워드는 뉴욕주 변호사(1821~), 뉴욕주지사 (1839·1842), 연방상원의원(1849·1861) 등을 역임한 후 아브라함 링컨과 앤드류 존슨 정부의 국무장관(1861·1869)을 지낸 정치인이다. 링컨에 비해 월등한 경력을 지닌 스워드는 1860년 미국대통령선거 당시 공화당의 유력한 대통령후보로 지목되었었으나 결국 링컨이 후보가 되자 그는 전국을 돌며 링컨을 적극 지원했고, 그 후 링컨 정부에 충성을 다했다. 그는 링컨의 참모로 남북전쟁 초기 외국의 개입을 막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그 후 앤드류 존슨 정부의 국무장관을 맡아 1867년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입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여론의 눈치를 보지 않고 여론을 선도해 가는 정치인

반노예주의자이자 흑인인권 옹호자였던 스워드는 주위의 만류를 무릅쓰고 1846년 변호사 시절 4명의 백인 가족을 살해한 23세의 흑인청년의 변호를 맡았다. 그가 변호했던 흑인청년은 결국 사형선고를 면치 못했지만, 스워드의 변론은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져서 당시 북부의 진보성향 유권자들의 갈채를 받았다. 뉴욕주지사 시절, 그는 도망쳐 나온 노예들에게 재판을 받을 권리를 부여하고 이민자에 대한 시민권 부여를 옹호하는 주법(州法)을 통과시켜 반이민(anti-immigrant), 반가톨릭(anti-Catholic) 세력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스워드와 그의 부인은 도망쳐 나온 노예들을 자기 집에 숨겨주기까지 하면서 “노예제도는 도덕적으로 부당하며 현행 헌법으로는 합법적이지만 헌법이 노예제도를 인정하거나 옹호하는 것이 아님”을 역설했다. 그는 “헌법보다 상위의 법이 있다”는 연설로 “상위법 스워드(‘Higher Law’ Seward)”라는 별명까지 얻었으며, “여론의 눈치를 보지 않고 여론을 선도해 가는 정치인”으로 평가 받았다.

정치인의 리더십과 파트너십

대통령 후보에서 탈락한 스워드가 링컨의 당선을 위해 적극 나서고, 링컨은 비중 있는 경력의 경쟁자인 스워드를 국무장관으로 임명하여 남북전쟁의 혼란기의 미국을 합심하여 이끌어 간 것은 정치인으로서의 진정한 파트너십(partnership)이며 리더십(leadership)이었다.

정치인 링컨과 스워드의 모습을 되새기면서 우리나라 정치판의 현실을 돌아보면 한숨이 앞선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선거 이래 우리나라 대통령 후보들의 처신을 살펴보면 정치인으로서의 ‘리더십과 파트너십’ 정신은 찾아볼 수 없다.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패배한 이인제는 신한국당을 탈당하고 선거를 한 달 여 앞두고 국민신당을 창당하여 대통령후보로 나섰다. 당시 이회창 신한국당 후보는 38.7%를 득표하여 40.3%를 득표한 김대중 후보에게 근소한 차이로 석패했다. 이인제 후보는 19.2%를 득표하면서 결국 김대중 후보 당선에 결정적 공헌을 하였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선거에서도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후보 1순위였던 이인제는 노무현이 후보 자리를 차지하자 다시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여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자신이 고배(苦杯)를 안겨줬던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이인제는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대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 양자 대결 판세에 이회창 후보가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제17대 대통령선거에도 민주당 후보로 나서 고작 0.7%를 득표했다. 이러한 전력과 함께 김대중 정부 탄생의 일등공신인 사람이 현재 새누리당 최고의원직을 차지하고 있는 사실이 몰염치한 우리 정치판의 현주소 아닌가?

2007년 한나라당의 제17대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패배한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의원은 2010년 신행정수도(세종특별시) 건설 문제에 있어서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의 입장에 맞서 ‘세종시 수정안’ 반대에 앞장서서 신행정수도 건설을 밀어붙였다. 행정수도 이전 결정은 후일 역사의 평가를 받겠지만, 대통령의 리더십과 대통령후보 낙선자의 파트너십을 논하기에 앞서 정당정치 체제에서 당시의 박 의원의 처신을 합당한 소신이라 할 수 있는지 혼란스럽다. 그 후 2012년 새누리당의 제18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어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은 총리임명조차 뜻대로 하지 못하며 고군분투하면서 “소통 부재”라는 비난을 사고 있다.

정부가 전면전 대상인 우리나라 야당

지난 2월 새정치민주연합 새 당대표에 당선된 문재인 대표는 대표직 수락 연설에서 “박근혜 정권에 경고합니다. 민주주의, 서민경제를 계속 파탄낸다면, 저는 박근혜 정부와 전면전(全面戰)을 시작할 것입니다…… 동지들과 함께 민주주의를 지켜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문 대표가 국민에게 민주주의를 얘기하려면 그의 전면전 대상은 박근혜 정권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면서 북한의 시대착오적인 세습독재 체제를 추종하는 종북세력이어야 할 것 아닌가? 문 대표가 우리 정치판의 고질병인 ‘반대를 위한 반대, 투쟁을 위한 투쟁’을 위해 전열(戰列)을 재정비하겠다는 것인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염려스럽다.

당대표 당선 후 문 대표는 국립현충원을 방문해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역을 참배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일부 최고위원들은 이에 반발하며 참배에 불참했다. 정청래 최고의원은 “가해자들이 용서를 구하지 않고 사과를 제대로 하지 않는 마당에서 (참배는) 부적절하다”는 막말도 서슴지 않았다. 전당대회 투표에서 3.5% 포인트의 근소한 차이로 석패한 후 "패자는 할 말이 없다. 당분간 쉬고 싶다"고 말했던 박지원 후보는 최근 "문 대표가 인사 등에서 상의한다고 해놓고 정작 협의하지 않았다."라며 불만을 토로했고, 4월 보선에 대한 당 지도부의 목표와 전략에 대해서는 “패배주의적인 발상”이라고 비난했다. 지도자의 리더십이나 동반자들의 파트너십과 팔로워십(followership)이 엇박자인 조직이 오로지 ‘집권’만을 꿈꾸는 것인가?

국회의원들의 몰염치

국회인사청문회 모습을 지켜보면서 ‘X 묻은 개가 재 묻은 개 나무란다.’는 생각을 하는 국민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마는, 국회가 자신들의 권위를 과시하는 인사청문회 권리는 악착같이 챙기면서 국회의 고유 권한이자 책임인 입법권을 행사하는 모습을 보면 기가 찬다. 국회가 지난 3월 3일 '김영란법'(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 금지에 관한 법률) 처리 하루 만에 이 법의 개정 및 보완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5일 오후 변협(대한변호사협회) 등은 헌법재판소에 ‘김영란법’에 대한 헌법소원심판 청구서를 제출했다.

한 중앙일간지 정치부 기자는 지난 3월 3일 '김영란법'을 처리한 국회를 '봉숭아 학당'에 비유했다. 2년여 동안 내팽개쳐 놓았던 법안을 코미디처럼 졸속 처리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국회 법사위에서 여야 의원들이 이 법의 허술함과 위헌 요소 등을 지적하면서도 "국민과 약속했기 때문에 통과시킬 수밖에 없다"고 했듯이 국회의 몰염치나 무책임은 비난 받아 마땅하다. 변협을 위시한 관계단체들이 제기하는 문제점들을 살펴보기에 앞서, 이번에 통과된 법이 본래의 ‘김영란법’의 취지에 맞는 법인지부터 따져봐야 할 것이다. 특히, 법 적용 대상에 언론인과 사립학교 교원까지 포함시키면서도 막상 국회의원과 시민단체에 대해서는 ‘부정 청탁’에 관한 모호한 규정으로 예외를 적용한 것은 국민의 의혹과 분노를 사기에 충분하다.

정치인의 리더십- 혜안, 신념, 소신

1741년 러시아 탐험가 베링(Vitus Jonassen Bering, 1681~1741)이 알래스카 탐험으로 제정러시아의 북아메리카대륙 진출 거점을 마련한 이래 한 세기에 이르도록 알래스카는 고래사냥과 모피무역이 고작인 얼음땅덩어리였다. 1828년 미국과 유럽국가들간의 상호불간섭을 골자로 한 미국의 ‘먼로주의(Monroe Doctrine)’발표 이후 미국과 제정러시아간 적대관계가 없었던 상황에서, 크림전쟁(Crimean War, 1853~1856)으로 빚더미에 허덕이던 제정러시아는 재정 문제 해결을 위한 자금조달이 다급했다. 게다가 부동항(不凍港) 확보가 절실했던 제정러시아가 1860년 중국으로부터 블라디보스톡을 차지하면서 알래스카의 군사적 가치를 간과하였다. 이런 상황을 간파하고 러시아와 알래스카 매입협상을 벌이던 스워드 국무장관이 1867년 ‘알래스카 매입 법안’을 제출했을 때 미 의회와 언론에서 미친 짓이라고 난리가 났던 것이다.

당시 미래를 내다본 스워드 국무장관의 혜안과 신념, 소신이 없었더라면 지금 알래스카는 러시아 영토로 남아 석유를 비롯한 천연자원을 퍼 나르며 미국 본토를 코앞에서 위협하는 러시아의 군사요충지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 알래스카는 1959년에 미국의 49번째 주가 되었으며, 알래스카에서는 매년 3월 마지막 월요일을 ‘스워드의 날’로 지정하여 공휴일로 기념하고 있다. 서울 강남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대로의 ‘테헤란로’란 생뚱맞은 이름 대신 그 이름을 올려 기릴만한 정치인들이 우리에게는 없는 것인가? 우리가 정치인 스워드를 본받아야 할 이유이다.

글/이철영 (재)굿소사이어티 이사·전 경희대 객원교수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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