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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의 설 맞이 선물을 받아든 그녀들은...


입력 2015.02.18 10:17 수정 2015.02.18 14:10        데스크 (desk@dailian.co.kr)

<그리운 나라, 박정희>1978년 2월 버스안내양에 방한복

10.26후 국장때 중앙청 분향소에 스스로 조문객 안내

우리의 전통 명절인 음력 설날이 공휴일로 지정된 것은 30년 전인 1985년의 일. 그해 음력 정월 초하루를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공휴일로 지정했고, 1989년에 이르러 설날 전후 이틀을 포함하는 3일 연휴가 이루어졌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도 구정(舊正)인 음력설을 공휴일로 하자는 얘기가 있긴 있었다. 이에 대해 박 대통령은 “구정에는 선조를 모시고 쉬는 곳은 괜찮지만 공식적인 휴무일로 하여 1년에 신정과 구정 두번을 지내기는 무리가 있다”고 하여, 조상을 모시는 명절로서의 의미는 지키되 공휴일로 지정해 이중과세를 지낼 이유가 없다고 했었다.

그렇긴 해도 구정 날이면 전래의 명절 풍습이 돌아와 한복 차림의 나들이 행렬과 선물꾸러미를 든 모습들이 이어졌다.

박 대통령은 1978년 그해 구정을 앞둔 2월 4일, 서울을 제외한 지방의 버스안내양 1만5천여명에게 방한복 선물을 보냈다. 방한복은 도지사, 시장들을 통해 버스업체에 전달되었다.

이는 앞서 1977년 연말에 서울시내의 버스안내양 1만여명에게 방한복을 보내고 다음 차례로 이어진 것이었는데 구정 선물로 때맞추어 받아들여졌다.

연말연시와 명절이면 으레 서로간에 선물이 오가고 지체 높은 사람들은 의례적으로 보내기도 하는데, 박 대통령의 ‘하사품’이라는 이름으로 보내지는 선물에는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 있다. 국군장병과 산업전선의 일꾼들 외에 연말연시가 즐겁지 않은 사람들, 명절이면 더욱 외롭고 우울한 사람들, 생활전선의 밑바닥에서 가장 고생을 많이 하는 불우한 이웃들에게 두루두루 보내진다는 사실과, 그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선물을 골라서 보낸다는 사실이다.

버스안내양의 경우는 추운 날씨에 따뜻한 옷이 제격이라서 방한복으로 했고 디자인도 대통령이 직접 골랐다고 한다. 어리고 젊은 나이에 열악한 환경에서 고생하면서 고향집에 생활비를 보내고 그 자신은 공부를 제대로 못했어도 동생들 학비를 보태는 버스안내양들에 대한 박 대통령의 관심은 결코 높은 사람들의 의례적인 그것이 아니었다.

그 시절 책자와 월간지 등에 실린 버스안내양들의 수기를 보면 이런 내용이 눈에 띈다.

박 대통령 국장 때인 1979년 10월 30일 서울의 버스안내양 대표들이 청와대 빈소를 찾아 분향, 애도하고 있다. ⓒ 국가기록원 / 오른쪽 상단 작은 사진은 10월 28일 중앙청 분향소에서 버스안내양들이 울고 있는 모습. 대한뉴스 캡처 박 대통령 국장 때인 1979년 10월 30일 서울의 버스안내양 대표들이 청와대 빈소를 찾아 분향, 애도하고 있다. ⓒ 국가기록원 / 오른쪽 상단 작은 사진은 10월 28일 중앙청 분향소에서 버스안내양들이 울고 있는 모습. 대한뉴스 캡처

-어린 꼬마가 자기 엄마에게 이런 말을 했다. “엄마, 나도 크면 안내양 언니 될래” 그러자 갑자기 그 아줌마는 표독스런 눈으로 금세 내 눈치를 보면서 딸을 꼬집었다. 필사적으로 그 아이의 다음 말을 막으려는 듯이.

-삥땅 혐의를 받고 매를 맞을 때는 당장 그만두고 싶었지만 병석(病席)의 어머니 모습이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손님들의 욕지거리를 들을 때마다 고학하는 어린 동생을 생각하고 이를 악물었습니다.…우리는 마구 밟히는 잡초입니다.…아아 하느님, 저에게도 햇볕을 주실 날은 언제입니까.

고달픔과 설움이 갈마드는 나날에 뜻밖으로 누군가 선물을 보내왔는데, 그것도 다른 사람 아닌 이 나라의 대통령이라니 놀랍고 고마움을 무엇에 비길 것인가. 버스안내양들의 인권과 복지에 대한 박 대통령의 남다른 관심은 여러 차례 행정상의 지시와 당부로 운수업계에 전달되고 일반사회에도 익히 알려진 바 있지만, 추운 날씨에 따뜻한 방한복도 그렇거니와 그 어떤 값비싼 귀중품이 아니어도 ‘대통령의 마음이 담긴 선물’이라는 점과 ‘대통령이 우리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믿음만으로도 뜨겁게 위로와 격려가 가슴에 젖어드는 것이었다.

“대통령께서 베풀어주신 각별한 관심과 후의를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당시 신문보도는 버스안내양들의 말을 이렇게 전했다.

그런데 무정막심한 세상에 하고많은 불행 중 대통령이 졸지에 세상을 떠나 국장(國葬)을 치르게 될 줄 어찌 알았으랴.

1979년 10월 26일 이후 국장 기간에 서울시내 버스업체들은 자발적으로 뜻을 모아 청와대 분향소로 가는 버스를 무료로 운행했다. 중앙청 분향소에는 버스안내양 40여명이 나와 청와대 비서실과 정부 각 부처에서 나온 2백여명의 공직자들과 함께 조문객들을 안내했고, 또 다른 버스안내양들은 청와대 신관에 마련된 빈소를 찾아 분향하고 울음을 터뜨렸으며, 부산에서도 1천여명이 시청에 마련된 분향소를 찾는 등 전국 곳곳의 분향소에 버스안내양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그로부터 30여년 세월이 지나, 그때 그 시절 버스문을 탕탕 두드리며 “오라이!”를 외치던 그녀들도 이제는 대부분 50줄의 인생행로에 들어서 있을 오늘이다.

이 여성들이 세상사에 가장 민감한 청춘 시절에 받았던 대통령의 선물은 아마도 지난 세월의 풍상을 헤치고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는 추억일 것이로되, 그것을 되새겨 봄직한 의미를 간과할 수는 없을 터이다. 곧 그 시절 대통령의 위로와 격려는 그녀들에게 국가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이라는 존재감을 주었고, 역경에 굴하지 않고 일어서게 하는 힘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민대중을 향한 대통령의 그러한 지도력이 총체적인 삶의 의욕을 불어넣어 그것이 국가 동력으로 작용했다는 관점에 이르게 되고, 따라서 대통령과의 그러한 인연은 저마다의 추억이나 그리움을 넘어 현대사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글/김인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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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좋아하는 모임(http://www.516.or.kr/)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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