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페이스북
X
카카오톡
주소복사

'불 붙은' 이정협이 끄집어 낸 불편한 진실


입력 2015.01.30 09:31 수정 2015.01.31 00:27        데일리안 스포츠 = 이준목 기자

A매치 경험 전무한 풋내기 발탁 ‘신의 한 수’로 돌아와

제로베이스 어려운 국내파 감독이었다면 어려운 결정

이정협의 신데렐라 스토리는 한국축구에 많은 것을 시사한다. ⓒ 연합뉴스 이정협의 신데렐라 스토리는 한국축구에 많은 것을 시사한다. ⓒ 연합뉴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이정협(24·상주 상무)이라는 이름은 축구팬들에게도 생소했다.

또래의 흔한 유망주들처럼 크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도 없었고 연령대별 대표팀에 발탁된 경험은 전무했다. 한마디로 아는 사람만 아는 정도의 평범한 선수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정협의 운명이 요동치기 시작한 것은 지난 겨울 슈틸리케 감독이 ‘2015 아시안컵’ 최종엔트리에 전격적으로 발탁하면서부터. 이정협의 발탁이 더욱 놀라움을 자아낸 것은 그와 경쟁상대가 '뜨거운 감자' 박주영이었기 때문이다.

브라질월드컵에서의 부진으로 국민적 비난을 받았지만, 이동국-김신욱이 부상으로 모두 빠진 상황에서 박주영은 사실상 몇 안 남은 카드였다. 박주영이 소속팀과 대표팀에서 장기간 골을 못 넣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중동진출 이후 무적 신분에서 벗어나 최소한 경기감각에는 문제가 없었다.

국내 감독이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박주영 카드를 배제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실제로 박주영을 두고 A매치 경험이 전무한 ‘풋내기’ 이정협을 발탁한 슈틸리케 감독의 선택을 '도박'이라고 우려하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정확히 한 달 후, 슈틸리케 감독의 선택은 '신의 한 수'로 되돌아왔다.

이정협은 A매치 데뷔전이었던 사우디와의 평가전에서 교체 출전해 자신의 대표팀 첫 골을 신고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아시안컵에서도 5경기 출전해 2골을 터뜨리며 손흥민과 팀내 득점 공동선두에 올랐다. 한 달 전만 해도 축구팬들조차 잘 모르던 무명 선수가 2015년 들어 치른 6번의 A매치에서 3골을 터뜨리는 깜짝 활약으로 일약 '신데렐라'가 되는 순간이다.

이근호-조영철 등을 앞세운 제로톱 전술이 기대에 못 미쳤던 슈틸리케 감독은 이정협을 내세운 정통 원톱 전술로 회귀했다. 이정협이 포스트플레이와 수비가담에서 활발한 움직임을 나타내면서 대표팀의 공수밸런스가 제자리를 찾는데 기여했다. 이정협의 드라마틱한 인생역전과 더불어 저평가 받던 슈틸리케호는 일약 27년 만의 결승 진출에 성공, 이제는 우승을 넘보고 있다(31일 오후 6시 한국-호주 아시안컵 결승).

이정협의 신데렐라 스토리는 한국축구에 많은 것을 시사한다. 첫 번째는 음지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무명 선수들이다. 특히, K리거에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다. 이정협이 대표팀에 처음 이름을 올리는 과정은 마치 박지성의 과거를 연상케 한다. 지금은 한국축구의 전설로 꼽히지만 스무 살 때만 하더라도 프로 지명도 받지 못한 철저한 무명에 불과했다.

박지성은 올림픽팀 연습경기에서 당시 허정무 감독의 눈에 띄어 시드니올림픽과 아시안컵에 승선했고, 이후 히딩크 감독에 이어 2002 한일월드컵 4강신화의 주역으로 거듭나는 인생역전에 성공했다. 이정협과 박지성의 공통점은 시작이 화려하지 않아도 준비된 자에게는 언젠가 기회가 돌아온다는 교훈이다.

최근 대표팀에서는 해외파 비중이 큰 게 일반적이다. 이번 아시안컵 대표팀만 하더라도 K리거는 총 5명, 그나마 필드 플레이어는 이정협 포함 3명(차두리, 한교원)에 불과하다. 그런 가운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철저한 무명에 가깝던 이정협이 아시안컵에서 쟁쟁한 해외파 선수들을 제치고 당당히 한국의 최전방을 책임지며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축구에 많은 상처를 안겼던 브라질월드컵에서도 손흥민과 함께 그나마 좋은 활약을 보여준 선수들은 이근호, 김신욱, 김승규 등 과소평가받던 K리거들이었다. 특히, 이근호는 지금의 이정협처럼 월드컵 당시 군인 신분으로 골을 넣었다.

선수의 진정한 가치란, 몸값이나 이름값이 아닌 그라운드에서 보여주는 경기력에 달렸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속팀에서 꾸준히 좋은 모습을 보여준 선수들. 대표팀에 대한 열정과 성실함이 있는 선수들은 K리거라도 충분히 해외파 못지않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좋은 예다.

한편으로 이는 한국축구 내부에 남아있는 낡은 고정관념과 선입견을 왜 깨야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슈틸리케 감독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번 아시안컵에서 이정협의 활약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정협은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선수가 아니다. 그러나 슈틸리케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이정협 같은 선수를 주목하지 않았다.

한국축구에 대해 전혀 모르던, 정식으로 취임한지 불과 3개월 남짓밖에 되지 않은 외국인 감독이 이정협 같은 '흙속의 진주'를 발굴하는 동안, 축구계나 역대 대표팀 감독들은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자기 반성도 필요하다.

'제로 베이스'에서의 경쟁과 '플랜B 발굴'이라는 확실한 초심을 지켰기에, 슈틸리케 감독은 주전 공격수들의 부상이라는 최대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바꿔냈다. 이정협의 신데렐라 스토리 뒤에 가려진 또 다른 불편한 진실은 '우리가 바로 이래서 외국인 감독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준목 기자
기사 모아 보기 >
0
0
이준목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댓글 0

0 / 150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