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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가 이미 깨달은 '바다에로의 창조경제' 비밀은


입력 2015.01.27 08:50 수정 2015.01.27 08:58        데스크 (desk@dailian.co.kr)

<특별기고>미국 과학이 못깨달은 '바다밑 우주'

산에 앉아 물을 생각해야하듯 물의 비밀은 산에

김지하 시인.ⓒ연합뉴스 김지하 시인.ⓒ연합뉴스
왜 바다이야기인가?

어째서 바다의 창조경제인가?

오늘 우리에게 '바다'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곳에서의 '창조경제'는 무엇인가?

나는 바닷가에서 태어났다. 이미 70여년 전 일이다.

나는 지금 산그늘에서 살고 있다. 벌써 수십년전 부터다.

예전엔 바다에 미쳐 있었다. 지금은 산에 미쳐있다.

어제 큰 물곁에 있는 큰 산에 다녀왔다. 강원도 정선군 동강(東江, 桐江) ‘연포’ 끝 '거북이 마을'에 다녀왔다.

나는 이미 여러 해 전 이 동강과 정선아리랑을 탐구하기 위해 강원도 산악을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년 초 바로 이 연포와 거북이 마을을 발견했다.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 산과 물은 바로 오늘 나의 주제인 '바다에로의 창조경제를 위하여'의 아주 핵심적인 선생님 노릇을 할 것 같다.

왜 그럴까?

바다공부의 알짬은 본디 산에서 하는 법이다. “풍수(風水)는 산과 물의 학문인데 먼저 풍(風) 즉 ‘산’에서 수(水) 즉 ‘물'과 ’바다‘를 배우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산, 즉 대륙과 물, 즉 바다를 제대로 다 잘 알 수 없는 법이다.

그 치밀하고 정확한 ‘무불통지(無不通知)’의 서양학문, 서양과학, 그 중에도 가장 출중한 미국의 그것이 아직까지도 ‘우주’와 ‘바다’를 잘 알지 못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풍수'를 모르는 것이다.

'풍수'가 완벽하다는 말이 아니다.

그 공부방법의 지혜가 놀랍다는 말이다.

아이슈타인과 스티븐 호킹의 똑같은 다음과 같은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

“인류의 미래는 바다, 바다밑 새우주다.”

'바다'는 어떤 의미에서 종말적 맥락에 이르른 인류중심의 세계사, 즉 대륙중심의 세계사에 있어서 분명한 미래다.

즉, 알 수 없는 곳이다.

완전무결할 것 같은 유럽과 미국 과학이 아직도 '바다의 90%를 모르고 있다'

‘90%밖에 모른다’가 아니라 그대로 ‘90%를 모른다’

어찌할 것이냐?

그럼에도 미국은 뉴욕의 대규모 금융사태이후 '1% 대 99% 대결'이라는 전 세계적인 반년동안의 경제소동 가운데에서 이른바 '국가정보위원회'의 세계언론에 대한 공식 브리핑을 통해 '태평양 해양경제 개척'이 세계경제의 이제부터의 중심임을 선포한 바 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TPP(환태평양동맹국 자유무역체제)인 것이다.

그런데 그 미국이 '바다'를 모른다.

미국은 알다시피 한 민족에 의해 지지돼온 민족국가가 아니다. 여러 민족의 여러 사람들이 '함께 모여사는 한 삶의 방식'에 속하는 독특한 국가체제다. 이것은 우선 '바다'를 닮았다. 그리고 TPP를 닮았다. 결국 불교의 최고단계인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의 압축인 '해인'(海印)을 닮은 것이다.

이것은 기이하게도 아인슈타인과 스티븐 호킹의 그 똑같은 말, '인류의 미래는 바다, 바다밑 새 우주다'에 그대로 닮았다.

물론 그 조그마한 싹으로서의 닮은 꼴이란 뜻이다.

내 말은 어떤 의미에서 저 유명한 카톨릭 신부인 진화론자 테이야르 드 샤르뎅의 다음과 같은 말을 닮았다.

“내가 지적하는 산(山)의 특징들은 그대로 미국이라는 이 신사회를 닮았다. 미국은 로키의 중추부인 그랜드 캐니언을 닮았다. 왜? 그곳은 기이하게도 '방속의 마당'이요 '마당 속의 방'이기 때문이다. 그 속엔 연못도 있고 숲도 있고 창고도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산이 신생(新生)의 대륙이라는 점이다. 그 신성성이 바로 그 이상한 '방', 그 신사회를 오래 유지시킨 것이란 것을 말하고 싶다.”

테이야르 신부는 또한 유명한 산악학자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미국인들은 이제 자기나라의 산과 사회로부터 바다를 배워야 한다.

물론 그 신선한 산 로키의 미국에도 여러 가지 사태가 나고 질병이 발생한다. '대개벽'(大開闢)이다.

더군다나 '선후천융합대개벽'(先後天融合大開闢)이다. 신선한 산이라고 조용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제 한가지 좋은 계책을 미국인과 광범위한 TPP 식구들에게 제시하고 싶다.

“한국에서 바다를 배우라!”

이것이다.

물론 그들에게도 테이야르와 같은 산악학자, 신부, 진화론자의 신선한 산 로키가 있으나 한국과 같은 '백두대간'이 없고 그 대간에 밀착한 “풍수”가 없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문제는 있다.

풍수는 있으나 바로 그 백두대간에 참으로 밀착한 '동방풍수'가 없다.

물론 지금 시작되고 있다.

그 방향을 따라 배우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당장 배울 것은 또 이것이다.

이미 1000년 전 바로 그러한 풍수와 연관된 동방학과 화엄경의 해인에 직결된 '법화경'(法華經)의 청해진 해양무역 역사에서 배우라는 것이다.

지난번 ‘세월호 사태 때’ 진도 앞바다 맹골수도(바로 여기가 ‘청해진’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 장보고의 지혜를 배우라고 정부에 다섯차례나 진언했으나 꿩 구어먹은 자리다.

왜? 왜 그랬을까?

미국이 제안한 TPP에의 적극참가를 결정하지 못한 탓이 아니었을까?

지금은 어떤가?

또 여러분은 어떠신가?

그리고 TPP 주동자인 미국은 어떠하신가?

지금 지구의 현실은 대개벽이라고 말했다. 올해 2015년부터 시작해서 꼭 5년간 이 요동과 소란과 혼란은 계속될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지난 뉴욕 금융사태, '1% 대 99% 대결', 에볼라, 대기혼돈 등이 다종 다양하게 악화되고 격렬해질 것이다.

나는 이 기간이 곧 해인(海印)이라는 말로 압축된 대화엄개벽이 전 지구적으로 그 실질적 성숙을 달성하는 기간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 외피형태로서 김일부(金一夫) 정역(正易)이 예언한 '춘분 추분 중심의 4천년 유리세계'(琉璃世界)가 온다고 믿는다.

해인과 마찬가지로 유리에서 물과 바다의 '새 우주'일 것이다.

나는 카이스트 동문회로부터 '바다에로의 창조경제' 부탁을 받으면서부터 바로 이 해인과 유리 두 마디가 내내 입에서 맴돌았다.

내 할말은 다 끝났다.

다만 이제 중요한 매듭 매듭만 짚어나가자.

장보고의 해상활동.ⓒ장보고 박물관 장보고의 해상활동.ⓒ장보고 박물관
바다는 산에서 배운다고 했다. 나는 강원도 정선군 동강 고성리에 있는 '연포'의 '거북이 마을' 이야기를 했다.

거북이마을은 정선에서 평창으로 동강물이 빙 돌아나가는 절벽 모퉁이 길, 2.7Km의 이름이다. 그 길은 기가 막힌 산과 물의 절경으로 '거북이 민박'이라는 쬐끄만 밥집에서 끝난다.

그리고 그 너머 '문희마을'로 해서 평창을 지나 동강과 남한강, 그리고 서해 바다로 해서 태평양에 이른다.

내가 중요시하는 것은 이 거북이마을의 “풍수미학(風水美學)적 핵심”인 '흰 그늘'(白闇·백암)이다.

흰 그늘은 우리 민족의 전통민예미학의 핵심인 '시김새'(발효·醱酵)의 예술적 표현이다.

주의하자!

흰 그늘은 지금 우리 민족에게 요구되고 있는 '네오 르네상스'의 미학적 테마에 속한다. 이른바 '창조경제'에 속하는 영역이다. 독일 미학자 야코브 브룩하르트의 14세기 피렌체 르네상스의 집약개념인 'invienttament liche Ausbrach-theit'(어둑어둑한 저녁 강물 위에 문득 하얗게 반짝이는 흰 물결 하나)에 비교되는 주요개념이다. 이것은 전라도 판소리, 경상도 탈춤, 그리고 강원도 정선아리랑의 지배미학이자 민족미학의 핵심이며 싸이의 '말춤'의 근원이기도 하다.

또 더 들어가면 카오스모스(chaosmos·혼돈적 질서),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정역의 기본원리, 그늘이 우주를 바꾼다) '불연기연'(不然其然, 아니다 그렇다-동학의 기본원리) 그리고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의 근원적 수양원리인 '자행동녀의 무승당해탈'(無勝幢解脫)의 원리 즉 '중생춤과 여래춤이 애당초 하나인 춤'의 원리이니 다름아닌 미륵(彌勒)부처의 진리 즉, 일반적 표현으로서는 용화회상, 바다요 해인인 것이다.

흰 그늘 또는 시김새는 절벽으로 완전히 끝난 정선군 쪽의 연포의 강물흐름이 절벽을 타고 쬐그만 2.7km의 길을 따라 평창군쪽으로 큰 동강으로, 남한강으로, 서해안으로, 태평양으로 나아가는가의 의미심장한 '모순률'의 상징적 표현이기도 한 것이다.

산은 바로 이러한 미학만 아니라 풍수의 묘미를, 또 바다의 비밀을 깊이 안고 있는 것이다.

우선 거북이 마을이란 쬐그만 산마을 이름부터가 기이하다.

러시아의 푸틴이 방한하여 부산에 유라시아 연속철도의 목표항 즉 동로텔담(EAST Rotteldam)을 건설한다는 정치적 협약을 맺기 직전부터 나와 한 풍수학자와 부산 상공회의소 및 해운대 구청장이 합의한 부산항구의 현대적 풍수원리가 바로 '영구망해'(靈龜望海· 영험한 거북이 머언 바다를 노려본다)였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렇다.

거북은 바다에 속한 영물이다.

그런데 왜 강원도 산골짜기 한 가운데 무시무시한 동강 바위들 사이에 끼어있는 것인가?

부산의 경우 '영험한 거북'의 첫째 뜻은 "바닷속에서 오랜 병을 앓고 올라와 신령해진 새 거북이의 혼"을 뜻한다. 그 거북이 '머언 바다' 즉 태평양과 같은 큰 바다를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노려본다'(望)는 것. 심상치 않다.

자! 생각해보자.

연포의 거북이 마을이 돌아나가는 평창방향이 여전히 정선의 동강과 같은 그저 그런 감자바위 시골구석일 뿐인가? 아니지 않는가! '평창 겨울올림픽'이 작은 일인가? 세계적, 전 지구적 사태 아닌가? 상징적 의미를 못 읽겠는가?

그 물길의 돌아감이 왜 '백암'(白闇)이요 흰 그늘이겠는가? 어둠속에서 스스로 솟아오르는 흰 빛이 그저 우연의 돌발사일 뿐인가?

우연인듯 한 그 속에 어떤 기막힌 '솟아오름' 즉 '복승'(復勝)이 있는 것!

바로 이것이 '창조경제'의 참뜻 아니던가!

옛 오운육기론(五運六氣論)은 다시 살아나야 한다. 엉터리 변증법, 삼진법 따위로 음(陰)과 양(陽)의 운명을 진단하는 시대는 끝나야 한다.

그야말로 대개벽이다.

아아 그렇다.

그래서 바로 그 연포 입구의 산꼭대기 마을 이름이 '새나루'요 '선창마을'이다. 왜?

그 동네사람들이 바보들인가?

아니다.

그래서 동강이 동녘 동자(東)만 아니라 오동나무동 자(桐)를 쓴다.

왜?

이 동강이 아우라지(餘糧面·여량면)에 동천과 북천이 합하여 강을 만들고, 옛 조선풍수 위삼성(魏三星)이 말한 세계 삼대수력산(三山水力源)인 곤륜, 하랄루루, 삽당령(揷唐嶺)이 세계의 큰 바다를 결정하는 해양촉수(海洋觸手)의 산인 것이다. 그 중 삽당령이 바로 정선아리랑의 고향인 '아우라지'의 뒷산으로서 그 물의 비밀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 비밀은 무엇일까?

삽당령 바로 옆 노추산 곁 자그마한 이다산(移茶山)의 산시(山詩)가 '고개높이로 앞으로 들어올 재물의 광채의 높이를 결정한다'(以齊制燒峰財)

이상한가?

삽당령의 본산계(本山系)라 할 삼천 두타산 꼭대기의 박달재에는 가장 큰 교훈이 “산에 앉아 두가지를 생각말라! 반드시 한가지, 이제 가야할 물(海)만을 생각해라!” 두군데나 새겨져 있다.

평창과 방림(芳林) 사이의 수정산(水精山)은 예부터 바다와 강물 등 일체의 물을 그야말로 요액(妖液·이조기철학의 특수 물용어)으로 정화하는 신비로운 요인이 산속에 있는 것으로 소문이 나있다. 그래서 “수정산(水精山)”인 것이다.

이 수정산에 한 전설이 있다.

어느 한 나뭇꾼이 제 등에서 나뭇짐을 내려놓다가 큰 물방울 하나가 뚝하고 나뭇짐 대신 떨어지는 것을 보고 놀라 소리 지른다.

“어허야 집에 다 왔다!”

이것은 ‘정선아리랑’ 소리 속에도 여러 군데에 스며들어 있다.

그 밖에도 강원도의 백두대간 언저리 민중 설화 속에는 산과 바다에 연관된 “창조경제 스토리”가 많이 많이 있다.

왜 찾지 않는 것이냐?

이제 '찾지 않으면 돈 못번다' 그것, '찾는 것'이 “창조”요 "공부"다.

장보고는 맹골수도에서 수십명의 뱃꾼들이 물에 빠져 죽었을 때 “큰 좋은 일전에 반드시 안 좋은 일이 생긴다"(明前必業)”라고 했다.

이것은 산사람들 용어다. 새나루라는 산골짜기나 그 너머 '고림'(枯林)이라는 산마을 사람들이 두고 쓰는 문자다.

장보고의 진도, 완도, 해남의 팽목항 거점은 청해진이지만, 그의 해양개척의 지혜의 원천은 세가지, 일본 해적떼에 시달리는 남도 해변 여성들의 고통과 그 고통을 이겨내는 바다 '우툴꾀'가 하나, 산동성 적산(赤山)에 있던 그의 스님 친구들 본거지인 '법화원'(法華院)으로부터의 법화경의 지혜, 특히 법화경 맨 앞에 있는 '종지용출품'(從地涌出品)의 '땅속에서 솟아오르는 보살들의 지혜, 기적, 축제의 지혜들'이었다.

핵심은 바로 그 '땅'이 다분히 '산'이었고 그 '산'에서 '물과 바다'가 솟았다는 것, 그리고 그 '물'이 곧 보살들의 기적과 같은 부처님 지혜의 비밀이었다는 것, 그리고 장보고의 해양무역의 지혜의 핵심은 바로 그 '비밀'에 있었다는 것.

마지막으로 장보고의 별명인 '궁복'(弓福)의 바로 그 '궁弓'은 '궁궁弓弓' 또는 '弓S'로서, 이른바 동학의 부적 내용이기도 하고, 정감록의 핵심인 '이익은 弓弓에 있다. 利在弓弓'의 바로 그 “弓”인 것이다.

그리고 그 “弓”은 곧 산에 흐르는 두굽이 물길 즉 ‘연포 거북이 마을’과 ‘골덕내 제장마을’의 거듭된 굽이물길 '弓弓'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그 앞 백운산(伯雲山) 오봉(五峰)과 그 앞의 깊은 쏘(沼 그러나 이것은 冥이다) “나리소”를 내려다보는 '뒷터'의 천년묵은 지혜인 것이다.

궁복인 장보고는 바로 여기서 자기 중국에서의 장군노릇 군사기밀과 청해진에서의 해양무역의 바다 비밀을 알았다고 했다. 그의 측근 한량자(韓良子)의 '어해어안경'(於海於岸經)에 있는 말이라 한다.

분명 '바다에로의 창조경제의 비밀'은 '산'에 숨어있다.

산의 풍수용어가 '풍'(風·우주의 핵)이고 그 풍에서 '水' 물이 보이는 것 아닌가!

2015년 1월 22일


글/김지하 시인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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