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페이스북
X
카카오톡
주소복사

헤라클레스가 서구인의 최고 영웅인 이유는...


입력 2014.12.14 10:13 수정 2014.12.14 10:17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박경귀의 ad Greece 34>고대 올림픽 4대 메이저 경기, 네메아 제전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 주 >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고대 그리스가 낳은 최고의 영웅은 당연 헤라클레스(Hercules)다. 그는 초인적 괴력과 용맹으로 험난한 도전과 역경을 극복한 영웅이다. 헤라클레스와 관련된 설화를 빼놓고 그리스 신화와 전설을 이야기하기 힘들 정도로 그는 숱한 일화를 만들어낸 스토리의 원천이다. 그는 올림포스 신들의 왕 제우스와 인간 알크메네 사이에서 태어났으니 반신반인(半神半人)이다. 헤라클레스는 반신(Demigod)이니 그가 겪는 모든 이야기는 신화가 되고, 설화가 된다.

헤라클레스 네메아에서 영웅의 길을 시작하다

고대 그리스 세계에는 ‘신의 아들’을 자처하는 영웅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신에 버금갈 힘과 지혜, 용기와 담력을 보여준 것은 아니다. 진정한 반신이 되기 위해서는 그에 부응할만한 영웅적 행적이 있어야 한다. 신의 가문을 자처한다고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웅적 업적이 있어야 진정한 영웅으로 칭송받을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헤라클레스가 그리스 최고의 영웅으로 등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하다. 헤라클레스에 주어진 12 과업은 바로 그가 영웅으로 등극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12가지의 장애물 경주와도 같았다. 목숨을 건 모험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영웅이 될 수 없었다. 헤라클레스의 최초의 업적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아르골리스(Argolis) 북부에 있는 네메아에서 이루어진다.

헤라클레스는 테베에서 태어났지만, 이곳 네메아에 와서 영웅의 길을 시작한다. 그 시작이 자의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헤라클레스의 본래 이름은 알케이데스였다. 그의 실부(實父)는 암피트리온이다. 그래서 헤라클레스는 어려서 ‘알카이오스의 손자’란 뜻의 알케이데스로 불린 것이다. 알카이오스의 아들인 암피트리온은 페르세우스 손자이니 헤라클레스는 페르세우스의 증손자가 된다. 이미 영웅의 피를 타고난 것이다.

거기에 더 극적인 신화가 붙어 헤라클레스가 신격화될 요건이 만들어진다. 이야기는 이렇다. 암피트리온이 원정 나간 사이 제우스가 남편으로 변신하여 알크메네와 동침한다. 마침 그날 밤 원정에서 돌아온 암피트리온도 아내와 동침한 후에 알크메네는 쌍둥이를 낳는다. 헤라클레스와 이피클레스이다.

하지만 두 남자와 동침한 결과로 형인 헤라클레스는 제우스신의 아들이고 이피클레스는 암피트리온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일이 과학적으로 가능한지 따지진 말자. 아무튼 암피트리온은 아내의 부정(不貞)의 상대가 제우스였는지라 어쩔 수 없이 수용했던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아들에게 신들의 제왕인 제우스의 아들로 각인시켜 그를 최고의 영웅으로 키울 속셈이었는지도 모른다.

헤라클레스는 이미 어릴 적부터 영웅의 싹이 보였다. 어린 아기였을 때 침실에 들어온 뱀을 놀래지 않고 졸라 죽여 주변을 놀라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앗의 아들인 헤라클레스에게 제우스의 아내 헤라의 미움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제우스의 부정한 행위로 태어난 헤라클레스는 헤라의 질투에 의해 잠시 정신착란을 일으켜 자기 자식들을 죽이는 패륜을 저지른다. 그 죄를 용서받기 위해 헤라클레스는 델포이의 신탁을 구한다. 이에 예언녀 피티아가 헤라클레스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죄를 용서받을 방법을 제시한다.

침실에 침입한 뱀을 무서워하지 않고 목을 죄는 아기 헤라클레스, 오히려 보모가 크게 놀라고 있다. Bernardino Mei(1612/15~1676) 1676 작 침실에 침입한 뱀을 무서워하지 않고 목을 죄는 아기 헤라클레스, 오히려 보모가 크게 놀라고 있다. Bernardino Mei(1612/15~1676) 1676 작

헤라클레스는 ‘헤라의 영광’이란 뜻이다. 우선 피티아는 헤라클레스가 평생 헤라를 영예롭게 해 줄 것이란 점을 인식시켜 그녀의 질시를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려 보려 했던 것 같다. 하기는 헤라클레스는 한때 헤라의 젖을 먹고 자랐으니, 헤라의 기른 정을 받을 만도 했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헤라클레스를 달갑지 않던 여기던 헤라가 헤라클레스에게 조금이라도 모정을 느끼도록 만들려던 제우스의 깊은 배려였을 것이다. 하지만 효과는 별로 없었던 듯하다. 헤라가 시앗의 아들에게 애정을 갖고 젖을 물렸을 리 만무하다. 젖을 빨려는 헤라클레스를 뿌리치면서 뿜어 나온 헤라의 젖이 은하수가 되었다는 신화도 그래서 나온 게 아닐까. 헤라는 평생 헤라클레스를 곤경에 처하게 만든다.

헤라클레스에게 젖을 물리는 헤라, 한편에서 제우스가 이들의 모습을 근심스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헤라클레스를 뿌리치면 뿜어 나온 헤라의 젖은 은하수(milky way)가 된다. Peter Paul Rubens(1577~1640) 1636년 작, 프라도 미술관 소장 헤라클레스에게 젖을 물리는 헤라, 한편에서 제우스가 이들의 모습을 근심스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헤라클레스를 뿌리치면 뿜어 나온 헤라의 젖은 은하수(milky way)가 된다. Peter Paul Rubens(1577~1640) 1636년 작, 프라도 미술관 소장

헤라클레스의 첫 번째 과업, 네메아의 사자를 죽여라

델포이의 피티아가 헤라클레스에게 내린 또다른 해법은 아르골리스 지방의 티린스 왕국에 가서 에우리스테우스 왕에게 12년 동안 봉사하며 그가 부과하는 10가지 고역을 완수하라는 것이었다. 그가 그 과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면 불멸의 존재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10가지의 고역은 나중에 에우리스테우스가 2가지의 성공을 인정하지 않고 2가지 과업을 추가되면서 12 과업이 되었다.

티린스의 왕 에우리스테우스가 내린 첫 번째 과업은 네메아 지방의 계곡에 사는 난폭한 사자의 가죽을 가져오는 일이었다. 네메아의 사자는 여러 괴물을 낳았던 에키드나가 낳았고 제우스의 아내 헤라가 기른 후 인간들에게 고통을 안겨주기 위해 네메아로 보냈다. 네메아의 사자는 칼이나 화살이나 불에도 부상당하지 않는 괴물이었다. 게다가 사람을 해쳐 인근 지방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헤시오드스는 ‘신들의 계보’에서 네메아의 사자가 탄생하게 된 배경과 죽게 되는 과정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에키드나는 또 제압할 수 없는 불을 내뿜고 무섭고 크고
발 빠르고 강력한 키마이라를 낳으니,
키마이라는 머리가 셋이고, 하나는 눈을 부라리는 사자의 머리고,
하나는 암염소의 머리고, 하나는 강력한 용의 머리였다.
그러나 키마이라를 페가소스와 고귀한 벨레로폰테스가 죽였다.
에키드나는 또 오르토스에게 눌려 카드모스의 백성들에게
재앙이 되도록 파멸을 가져다주는 스핑크스를 낳고
네메아의 사자도 낳으니, 이것을 제우스의 영광스런 아내 헤라가
길러 인간들에게 고통이 되도록 네메아의 언덕에 살게 했다.
그곳에 살며 사자는 인간들의 부족들을 습격했고,
네메아의 트레토스 산과 아페사스 산을 지배했다.
그러나 강력한 헤라클레스의 힘이 사자를 제압했다. (319~332)


헤라클레스는 네메아의 사자가 입구가 두 개인 동굴로 달아나자 한 곳을 막고 한 곳으로 들어가 사자를 목 졸라 죽인다. 헤라의 질시를 받던 헤라클레스에 의해 헤라가 세상에 보낸 괴수를 죽였다는 점에서 헤라와 헤라클레스의 운명적 대결이 얄궂기만 하다. 헤라클레스는 사자를 죽여 가죽을 벗긴 후 에우리스테우스에게 가져갔지만, 정작 명령을 내린 그는 두려워 숨어 버렸다. 그리곤 전령을 시켜 헤라클레스에게 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성문 앞에서 임무 완수의 증거를 보이도록 했다.

네메아의 사자를 죽인 사실은 그리스 세계에 빠르게 전파되고 그의 초인적 영웅담은 그리스인들에게 경외감을 심어주었다. 그리스 역사상 최고 영웅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이후 사자 머리 가죽은 몽둥이와 함께 헤라클레스의 트레이드마크가 된다. 그는 언제나 사자머리 가죽을 머리에 투구처럼 쓰고 다녔다. 이 모습은 고대 그리스의 도기 그림이나 대리석 또는 청동 조각으로 묘사되고, 헤라클레스의 용맹을 상징하게 된다. 헤라클레스는 유럽 여러 나라에서 영웅의 대표적 상징으로 다양한 문화적 콘텐츠가 되었다. 헤라클레스의 아폴로도로스의 ‘비블리오테카(Biblioteca)'는 헤라클레스의 12 과업을 자세히 전하고 있다.

네메아의 사자의 목을 조르고 있는 헤라클레스, 사자가 혀를 내밀고 숨가빠하고 있다. Francisco de Zurbaran(1598~1664) 1634년 작, 프라도 미술관 소장 네메아의 사자의 목을 조르고 있는 헤라클레스, 사자가 혀를 내밀고 숨가빠하고 있다. Francisco de Zurbaran(1598~1664) 1634년 작, 프라도 미술관 소장

사자의 목을 조르는 헤라클레스, 테라코타 작품, 작자 미상, Rubenshuis 소장, 사진 Rvalette 사자의 목을 조르는 헤라클레스, 테라코타 작품, 작자 미상, Rubenshuis 소장, 사진 Rvalette

네메아의 사자와 싸우는 헤라클레스의 모습이 담긴 도기, BC 581~ BC 500년경 작품으로 추정, 아테네 키클라데스 미술관 소장, 사진 Mountain 네메아의 사자와 싸우는 헤라클레스의 모습이 담긴 도기, BC 581~ BC 500년경 작품으로 추정, 아테네 키클라데스 미술관 소장, 사진 Mountain

그리스 도기에 그려진 헤라클레스의 모습, 머리에 사자의 머리 가죽을 쓰고 있다. 사진 Wiseworm 그리스 도기에 그려진 헤라클레스의 모습, 머리에 사자의 머리 가죽을 쓰고 있다. 사진 Wiseworm

헤라클레스 청동상, 사자 머리 가죽을 벗어 자신의 몽둥이에 걸치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헤라클레스의 모습이다. 르부르 박물관, ⓒ박경귀 헤라클레스 청동상, 사자 머리 가죽을 벗어 자신의 몽둥이에 걸치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헤라클레스의 모습이다. 르부르 박물관, ⓒ박경귀

서구인에게 최고 영웅의 모델이 된 헤라클레스

헤라클레스는 자신의 위업을 아버지인 제우스신의 영광으로 돌렸다. 헤라클레스는 네메아 계곡 근처에 있던 제우스신전에 제물을 바치고 신의 가호에 보답했다고 한다. ‘헤라의 영광’을 위해 헌신해야(?) 할 그가 의붓어머니인 헤라에게도 그 영광을 돌렸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그렇지 않았을 듯싶다. 헤라클레스는 헤라에 눈치를 보거나 아부하기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험난한 고역에 과감히 도전하고 이를 극복해 나감으로서 불멸의 길을 스스로 열려 했을 것 같다.

헤라클레스는 제우스신전에 봉헌하고 감사를 표함으로써 자신이 제우스 신의 아들임을 세상에 각인시키고, 제우스신의 가호를 받는 최고의 영웅이라는 점을 자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후세 사람들 역시 가공할만한 힘과 용맹을 보여준 헤라클레스가 제우스 신의 아들임을 부인하기도 어려웠을 법하다. 도저히 인간이 해 낼 수 없는 12과업을 그는 거뜬히 완수해 냈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스는 자연스럽게 그리스인들에게 닮고 싶은 영웅의 최고 모델이 될 수 있었다. 엘리스 사람들이 올림피아의 제우스신전 프리즈에 헤라클레스의 12 과업을 부조로 새겨 넣은 것도 늘 헤라클레스를 표상을 삼고 싶었던 때문이리라.

네메아의 사자를 처치하는 헤라클레스의 모습, 올림피아의 제우스신전 프리즈에 새겨진 헤라클레스의 12 고역을 묘사한 부조 가운데 하나이다. 올림피아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네메아의 사자를 처치하는 헤라클레스의 모습, 올림피아의 제우스신전 프리즈에 새겨진 헤라클레스의 12 고역을 묘사한 부조 가운데 하나이다. 올림피아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최대도시인 팔레르모에 가도 헤라클레스 숭배의 현장을 확인할 수 있다. 12세기에 지은 노르만 왕궁에 가면 아예 ‘헤라클레스의 방’이 거대한 성당 규모로 조성되어 있다. 방의 벽면 전체를 12과업과 헤라클레스의 생애를 그린 거대한 그림으로 채우고 있다. 서양인들에게 헤라클레스가 얼마나 존숭되는지 알게 해준다.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성에 가도 헤라클레스를 만날 수 있다. 어디 이 뿐인가. 아마 유럽 여러 나라에서 그림이나 조각의 모습으로 헤라클레스를 볼 수 있는 기회는 무수히 많을 듯싶다.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팔레르모에 있는 노르만 궁전의 헤라클레스 방이다. 노르만 궁전은 노르만 족이 12세기에 건축했다. 이 방의 벽면은 헤라클레스의 12과업을 그린 대형 그림으로 채워져 있다. 가장 왼쪽의 그림이 네메아의 사자와 싸우는 헤라클레스의 모습이다. 이곳은 현재 지방자치단체 의원들의 회의 장소로 사용되고 있고 관광객은 더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박경귀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팔레르모에 있는 노르만 궁전의 헤라클레스 방이다. 노르만 궁전은 노르만 족이 12세기에 건축했다. 이 방의 벽면은 헤라클레스의 12과업을 그린 대형 그림으로 채워져 있다. 가장 왼쪽의 그림이 네메아의 사자와 싸우는 헤라클레스의 모습이다. 이곳은 현재 지방자치단체 의원들의 회의 장소로 사용되고 있고 관광객은 더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박경귀

독일 하이델베르크 성 내의 한 건물에 있는 헤라클레스 대리석상, 머리에 사자머리 가죽을 쓰고 있고, 왼팔에 몽둥이를 끼고 있다. 오른쪽 다리 뒤로 사자의 발 가죽이 보인다. 현재 이 건물 지하는 약학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박경귀 독일 하이델베르크 성 내의 한 건물에 있는 헤라클레스 대리석상, 머리에 사자머리 가죽을 쓰고 있고, 왼팔에 몽둥이를 끼고 있다. 오른쪽 다리 뒤로 사자의 발 가죽이 보인다. 현재 이 건물 지하는 약학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박경귀

고대 올림픽 4대 메이저 경기, 네메아 제전

걸출한 영웅 헤라클레스의 첫 영웅담이 탄생한 네메아에서 또 하나의 고대 올림픽 경기가 시작된 것도 헤라클레스를 기리는 일로 자연스러웠다. 네메아 인들은 2년마다 네메아 스타디온에서 전 그리스 인들이 겨루는 스포츠 경기를 창설했다. 올림피아 제전(올림피아), 피티아 제전(델포이), 이스트모스 제전(코린트)과 함께 고대 올림픽의 4대 메이저 대회인 네메아 제전을 만든 것이다. 일설에는 네메아의 왕 리쿠르구스(Lycurgus)의 아들 오펠테스(Opheltes)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창설되었다고 한다. 네메아 제전에서는 단순히 체육 경기뿐만 아니라 연극제와 음악제가 동시에 열렸다고 하니 종합 페스티벌이었던 셈이다.

네메아는 아르골리스 지방의 북부에 있다. 미케네에서 북쪽으로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네메아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들은 해로로 올 경우에는 아르골리스 지방의 관문인 나프플리온 항구로 입항하여 아르고스 평원을 지나 이곳으로 쉽게 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의 북동쪽에서 육로로 오는 길도 코린트를 거쳐 오는 데 수월했을 것 같다. 현대의 네메아는 작은 마을이다. 고대기에 4대 메이저 대회 개최지답게 흥성거렸을 큰 도시의 모습을 연상하긴 어렵다. 3500년 전처럼 사자가 살 만큼 울창한 숲도 주변에 없다. 그리스 어디에서나 보듯 석회암 산이 뼈대만 드러내고 관목이 듬성듬성 있을 뿐이다.

하지만 고대기에 이곳은 그리스 전역에서 몰려든 선수와 관중들로 붐볐을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네메아 스타디온은 BC 330년에서 BC 320년 사이에 새로 건립한 것이다. 스타디온은 남쪽에 대리석을 바닥에 박아 표시한 스타트 라인이 있었고, 서쪽의 일부에 대리석 관중석이 마련되었다. 나머지 관중석은 비스듬한 잔디 언덕에 조성되었다. 올림피아의 스타디온처럼 따로 좌석을 만들지 않고 자연 지세를 이용했던 것이다.

경기장 입구에는 아포디테이리온(Apoditeirion)이라 불리던 라커룸(locker room)이 있었다. 이곳에서 트랙이 있는 경기장으로 들어가는 길은 크립테 에이소도스(Krypte eisodos)라는 터널로 보호되어 있었다. 선수의 입장과 퇴장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이를 통해 관중과 선수를 격리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또 때로 격렬한 경쟁 과정에서 생길 불상사를 막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36미터 길이의 터널은 23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 시설은 4대 메이저 경기장 가운데 온전하게 현존하는 유일한 시설물이다. 특히 그리스 고대기에 널리 쓰이지 않던 아치 공법으로 축조된 것도 주목할 만하다.

네메아 스타디온 입구 쪽에서 바라본 네메아 마을의 모습, 이곳에서 동북쪽에 제우스 신전이 있다. ⓒ박경귀 네메아 스타디온 입구 쪽에서 바라본 네메아 마을의 모습, 이곳에서 동북쪽에 제우스 신전이 있다. ⓒ박경귀

네메데 스타디온 평면도, 1. 트랙, 2. 출발선, 3. 대리석 관중석, 4. 아포디테이리온, 5.  크립테 에이소도스(Krypte eisodos) ⓒ박경귀 네메데 스타디온 평면도, 1. 트랙, 2. 출발선, 3. 대리석 관중석, 4. 아포디테이리온, 5. 크립테 에이소도스(Krypte eisodos) ⓒ박경귀

네메아 스타디온 입구에 있는 아포디테이리온(Apoditeirion)이다. 라커룸(locker room) 기능을 했던 곳이다. ⓒ박경귀  네메아 스타디온 입구에 있는 아포디테이리온(Apoditeirion)이다. 라커룸(locker room) 기능을 했던 곳이다. ⓒ박경귀

경기장 입구에는 아포디테이리온(Apoditeirion)이라 불리던 라커룸(locker room)에서 트랙이 있는 경기장으로 들어가는 터널 크립테 에이소도스(Krypte eisodos)이다. ⓒ박경귀 경기장 입구에는 아포디테이리온(Apoditeirion)이라 불리던 라커룸(locker room)에서 트랙이 있는 경기장으로 들어가는 터널 크립테 에이소도스(Krypte eisodos)이다. ⓒ박경귀

스타디온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본 모습이다. ⓒ박경귀 스타디온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본 모습이다. ⓒ박경귀

출입구에서 왼쪽에 있는 관중석이 있던 비스듬한 언덕에서 바라본 스타디온, 지금은 잔디 대신 관목과 화초가 심어져 있다. ⓒ박경귀 출입구에서 왼쪽에 있는 관중석이 있던 비스듬한 언덕에서 바라본 스타디온, 지금은 잔디 대신 관목과 화초가 심어져 있다. ⓒ박경귀

스타디온 북쪽에 있는 석조물들, 제단으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박경귀 스타디온 북쪽에 있는 석조물들, 제단으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박경귀

출입구 바로 오른쪽에 있던 대리석으로 조성된 관중석이 있던 자리이다. 이곳만 석조 관중석이 있었고 나머지 관중석은 비스듬한 언덕으로 조성되었다. ⓒ 출입구 바로 오른쪽에 있던 대리석으로 조성된 관중석이 있던 자리이다. 이곳만 석조 관중석이 있었고 나머지 관중석은 비스듬한 언덕으로 조성되었다. ⓒ

네메아의 주신(主神) 제우스신전

네메아 인들은 제우스 신을 주신(主神)으로 모셨다. 올림피아 역시 제우스 신을 모셨다. 네메아 제전은 올림피아 제전이 그랬듯이 제우 스신에 대한 감사의 봉헌으로 열렸다. 따라서 네메아 성역은 제우스 신전을 중심으로 여러 건축물이 건립되었다. 올림피아의 성역과 비슷하다. 다만 이곳이 올림피아 보다 규모가 좀 작을 뿐이다. 초기에는 이 성역 안에 스타디온이 함께 있었지만, 경기장 쪽으로 강이 침범하면서 남서쪽에 현재 남아있는 더 넓은 스타디온을 새로 만든 것 같다.

네메아 성역의 평면도이다. 15번이 제우스신전이고, 16번은 제우스신전 제단이다. 9번 지역이 예전에 스타디온이 있던 자리이다. 이곳으로 강이 침범하면서 경기장으로 쓰기 어렵게 되자 현재의 새로운 스타디온을 건설한 것으로 보인다. 6번이 네메아의 왕 리쿠르구스(Lycurgus)의 아들 오펠테스(Opheltes)의 죽음을 추모하는 시설이 있던 곳이다. 4번 지역에는 목욕장이 있었다. ⓒ박경귀 네메아 성역의 평면도이다. 15번이 제우스신전이고, 16번은 제우스신전 제단이다. 9번 지역이 예전에 스타디온이 있던 자리이다. 이곳으로 강이 침범하면서 경기장으로 쓰기 어렵게 되자 현재의 새로운 스타디온을 건설한 것으로 보인다. 6번이 네메아의 왕 리쿠르구스(Lycurgus)의 아들 오펠테스(Opheltes)의 죽음을 추모하는 시설이 있던 곳이다. 4번 지역에는 목욕장이 있었다. ⓒ박경귀

네메아 성역의 모습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유적이 제우스신전이고 왼쪽에 지붕으로 보호하고 있는 구역이 목욕장 유적이다. ⓒ박경귀 네메아 성역의 모습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유적이 제우스신전이고 왼쪽에 지붕으로 보호하고 있는 구역이 목욕장 유적이다. ⓒ박경귀

네메아 성역의 동편 모습이다. 멀리 아페사스 산이 보인다. 네메아의 사자가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박경귀 네메아 성역의 동편 모습이다. 멀리 아페사스 산이 보인다. 네메아의 사자가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박경귀

현재 남아있는 제우스신전은 정면 6개, 측면 12개, 모두 32개의 도리아식 기둥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건축물이다. BC 330년에 네메아 제전과 세워졌다. 헤라클레스가 활약하던 3400년경에 있었다는 제우스신전이 동일한 장소에 있었는지는 알려진 것이 없다. 제우스 신전은 고대기의 말기에 지어진 까닭에 여러 건축 양식이 혼합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기둥은 도리아식이지만 기단은 코린트식이 섞었다. 지하의 공간은 신탁의 장소로 활용되었을 것이라 한다.

이 신전은 건축된 후 약 70년 정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네메아에서 열리던 올림픽 제전이 아르고스 지방으로 옮겨 가면서부터 이곳이 급격하게 쇠락하게 된다. 신전과 대부분의 건물들이 이때부터 파괴되기 시작했다. 2세기의 그리스의 여행가인 파우사니아스가 이곳을 방문했을 땐 이미 네메아 성역이 방치되고 폐허가 되어 있다고 한다.

제우스신전이다. 지금도 보수 및 복원중이다. 보수중인 작업자가 쉬고 있다. 거대한 도리아식 기둥의 웅장한 건축물이다. ⓒ박경귀 제우스신전이다. 지금도 보수 및 복원중이다. 보수중인 작업자가 쉬고 있다. 거대한 도리아식 기둥의 웅장한 건축물이다. ⓒ박경귀

동쪽에서 바라본 제우스신전의 모습 ⓒ박경귀 동쪽에서 바라본 제우스신전의 모습 ⓒ박경귀

제우스신전의 평면도, 정면 6개, 측면 12개의 기둥, 모두 32개의 도리아식 기둥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건축물이다. ⓒ박경귀 제우스신전의 평면도, 정면 6개, 측면 12개의 기둥, 모두 32개의 도리아식 기둥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건축물이다. ⓒ박경귀

제우스 신전의 복원은 미국의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 캠퍼스와 그리스 문화성의 공동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스테펜 밀러(Stepen Miller) 교수와 김 쉘톤(Kim Shelton)가 이 작업을 주도했다. 1980년부터 3년간 건축 구조를 파악한 후 2012년까지 3차례에 걸쳐 시작된 복원 작업은 2012년까지 모두 7개의 기둥이 복원되었고, 현재 북쪽의 2개의 기둥이 복원 진행 중이다.

마침 한 명의 전문가가 기둥의 상태를 조사하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든 8월의 불볕더위 속에서도 기둥에 나타난 반점과 훼손된 부분을 모눈종이 위에 하나하나 정교하게 체크하고 있었다. 고고학자와 유적 복원자들의 이런 열정과 노고 덕분에 2300년 전의 신전의 윤곽이나마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감사하기 그지없다.

제우스신전 복원에 기여한 기관 단체와 인물들을 기록해 놓은 표지석이다. 상단에 어린 헤라클레스의 뱀의 부조가 이곳이 헤라클레스가 영웅으로 재탄생한 곳임을 말해주고 있다. ⓒ박경귀 제우스신전 복원에 기여한 기관 단체와 인물들을 기록해 놓은 표지석이다. 상단에 어린 헤라클레스의 뱀의 부조가 이곳이 헤라클레스가 영웅으로 재탄생한 곳임을 말해주고 있다. ⓒ박경귀

복원 전문가가 기둥의 상태를 정밀하게 조사 중이다. ⓒ박경귀   복원 전문가가 기둥의 상태를 정밀하게 조사 중이다. ⓒ박경귀

제우스신전이 무너지면서 쓰러진 거대한 기둥 조각들, 언제 다시 세워질 수 있을까 ⓒ박경귀 제우스신전이 무너지면서 쓰러진 거대한 기둥 조각들, 언제 다시 세워질 수 있을까 ⓒ박경귀

제우스신전이 무너지면서 쓰러진 거대한 기둥 조각들, 다시 세우기 위해선 보수와 건립에 엄청난 예산이 필요할 것 같다. ⓒ박경귀 제우스신전이 무너지면서 쓰러진 거대한 기둥 조각들, 다시 세우기 위해선 보수와 건립에 엄청난 예산이 필요할 것 같다. ⓒ박경귀

네메아 성역 대부분은 2천여 년 동안 흙과 나무로 덮여 2미터 아래로 묻혀 있었던 것 같다. 복원을 위해 흙을 파내고 걷어낸 부분이 나무 등걸 주변에서 확인된다. ⓒ박경귀 네메아 성역 대부분은 2천여 년 동안 흙과 나무로 덮여 2미터 아래로 묻혀 있었던 것 같다. 복원을 위해 흙을 파내고 걷어낸 부분이 나무 등걸 주변에서 확인된다. ⓒ박경귀

네메아 성역에 있는 원형 바닥이다. 원형건물인 톨로스(Tolos)가 있던 기단으로 보인다. 올림피아 성역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부왕 필리포스 2세를 기리기 위해 세운 톨로스 필리페이온(Philippeion)이 있었다. 이곳의 톨로스는 어떤 건물이었는지 알려진 것이 없다. ⓒ박경귀 네메아 성역에 있는 원형 바닥이다. 원형건물인 톨로스(Tolos)가 있던 기단으로 보인다. 올림피아 성역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부왕 필리포스 2세를 기리기 위해 세운 톨로스 필리페이온(Philippeion)이 있었다. 이곳의 톨로스는 어떤 건물이었는지 알려진 것이 없다. ⓒ박경귀

올림픽 제전과 목욕장

고대 올림픽 제전이 있던 곳마다 갖추어야 했던 필수 시설은 목욕장이다. 올림피아 성역에도 대규모 목욕장이 여러 개 있었다. 이곳 역시 배수시설이 정교하게 시설된 대규모 공동 목욕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경기장에서 다양한 경기를 하면서 땀과 먼지로 뒤덮였을 나체를 이곳에서 깨끗한 물로 씻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스타디온 남쪽에 있던 대목욕장 유적이다. ⓒ박경귀 스타디온 남쪽에 있던 대목욕장 유적이다. ⓒ박경귀

대욕장의 복원 추정도이다. ⓒ박경귀 대욕장의 복원 추정도이다. ⓒ박경귀

목욕장의 수조(水槽)이다. ⓒ박경귀 목욕장의 수조(水槽)이다. ⓒ박경귀

목욕장의 수조(水槽)가 있는 공간에서 목욕을 하는 모습을 추정한 그림이다. ⓒ박경귀 목욕장의 수조(水槽)가 있는 공간에서 목욕을 하는 모습을 추정한 그림이다. ⓒ박경귀

목욕장의 정교한 배수시설을 볼 수 있다. ⓒ박경귀 목욕장의 정교한 배수시설을 볼 수 있다. ⓒ박경귀

과거 고대 올림픽이 열리던 영광의 도시 네메아를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다. 요즘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최고의 건각(健脚)이나 레슬링 선수, 또는 전차 경기 선수가 아니다. 와인을 즐기려는 낭만파들이다. 이곳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 생산지이기 때문이다. 이곳을 지나는 길을 와인 로드가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곳에는 직접 와인을 만드는 농장을 찾아 직접 시음하고 쇼핑도 하는 와이너리(Winery) 투어로 이름난 곳이다.

낮은 구릉과 햇볕이 잘 드는 탁 트인 지세가 포도 재배에 적합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다면 아마 고대 올림픽이 성황이던 2300년 전에도 이곳에서 포도가 재배되고 와인이 생산되지 않았을까. 음악제와 연극제가 함께 열렸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곳은 올림픽 제전의 승리자들이 즐길 수 있는 술과 음악, 연극이 넘치던 곳이었지 않았을까. 와인의 고장에 와서 와이너리 한 곳도 가볼 수 없다니 갈 길 바쁜 답사의 일정이 아쉽기만 하다.

와인 로드 표지판이다. 네메아 지방은 와인 생산지로 유명하다. 중간에 있는 표지판을 따라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네메아 성역이다. ⓒ박경귀 와인 로드 표지판이다. 네메아 지방은 와인 생산지로 유명하다. 중간에 있는 표지판을 따라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네메아 성역이다. ⓒ박경귀

포도밭이 펼쳐져 있는 네메아 마을이다. ⓒ박경귀 포도밭이 펼쳐져 있는 네메아 마을이다. ⓒ박경귀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kipeceo@gmail.com)

박경귀 기자 (kipeceo@gmail.com)
기사 모아 보기 >
0
0
관련기사
박경귀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댓글 0

0 / 150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