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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우스의 고향, 미케네 문명의 배꼽, 아르고스


입력 2014.11.23 10:21 수정 2014.11.23 14:11        박경귀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 (kipeceo@gmail.com)

<박경귀의 ad Greece 31>거석(巨石)문화의 보고, 티린스 성채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 주 >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미케네 문명의 3대 도시는 미케네와 아르고스(Argos), 그리고 티린스(Tiryns)였다. 이 3강이 융성하던 미케네 지역은 신화의 고장이자 영웅들의 고장이다. 특히 아르고스는 풍요로운 아르고스 평원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고 가장 먼저 도시를 일군 미케네문명의 배꼽이다. 미케네 문명은 두 가문의 경쟁 속에서 성장했다. 펠롭스 가문과 페르세우스 가문이 이 지역을 이끌었다. 아트레우스와 아가멤논으로 이어지는 펠롭스 가문이 미케네 왕성을 중심으로 미케네 문명의 전성기와 쇠망기를 이끌었다면, 페르세우스 가문은 이에 앞서 아르고스 왕국과 티린스 왕국을 부흥시켰다.

페르세우스는 제우스신과 아르고스의 공주 다나에(Danae)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 탄생 비화는 매우 신비로워서 후세의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숱한 회화 및 조각 작품의 단골 소재가 된 이유다. 아르고스의 왕 아크리시우스(Acrisius)는 외손자의 손에 죽게 되리라는 예언이 걱정되어 딸 다나에가 외간 남자를 접촉하지 못하도록 청동 방에 가둔다.

하지만 다나에의 미모에 반한 제우스가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제우스는 궁리 끝에 황금 빗물로 변신하여 다나에가 갇힌 청동 방안으로 스며들었다. 결국 다나에는 이 청동 빗물을 맞고 임신하여 페르세우스를 낳게 된다. 하지만 아크리시우스 왕은 다나에의 처녀 잉태를 믿을 수 없었다. 더구나 아이의 아버지가 제우스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나에가 청동 방안에 갇힌 채 황금 빗물로 변신하여 스며들어오는 제우스를 받아들이고 있다. 에로스신이 천으로 황금 빗물을 받아내고 있다. 다나에, 오라치오 젠틸레스키(Orazio Gentileschi, 1563~1639)의 1623년 작, Cleveland Museum of Art, 사진 Art Knowledge Daily 다나에가 청동 방안에 갇힌 채 황금 빗물로 변신하여 스며들어오는 제우스를 받아들이고 있다. 에로스신이 천으로 황금 빗물을 받아내고 있다. 다나에, 오라치오 젠틸레스키(Orazio Gentileschi, 1563~1639)의 1623년 작, Cleveland Museum of Art, 사진 Art Knowledge Daily

아크리시우스는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다나에와 페르세우스를 상자에 넣어 바닷물에 던져버린다. 이들은 에게 해의 작은 섬 세리포스(Seriphos)에 당도하게 되고, 그곳에서 딕티스라는 어부에게 구조되어 보호받게 된다. 훗날 이 곳의 왕 폴리덱테스가 다나에를 겁탈하려 하자 페르세우스가 어머니를 보호한다. 왕은 눈엣가시인 페르세우스를 제거한 후 다나에를 차지하기 위해 페르세우스에게 그것을 보는 순간 본 사람을 돌로 만들어 버리는 괴물 메두사(Medusa)의 머리를 가져 올 것을 명령한다.

인간으로선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이 과업을 페르세우스는 성공적으로 해낸다. 제우스의 아들인 덕분에 여러 신의 도움을 흔쾌히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신의 가문의 영광이 위대하긴 한 모양이다. 지하 세계의 신 하데스는 그것을 쓰면 타인에게 보이지 않는 투구를 주었다. 제우스의 전령 헤르메스는 날아다닐 수 있도록 날개 달린 샌들을 준다. 또 아테나 여신은 번쩍이는 청동 방패를, 요정들은 메두사 머리를 담아올 바랑을 주었다. 제우스신족들이 각각 자신의 비기(秘器)들을 내어준 것이다. 페르세우스는 메두사를 직접 보지 않고 청동방패에 비친 메두사의 모습을 보고 그녀의 목을 칠 수 있었다.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 옆 로자 데이 란치(Loggia dei Lanzi) 회랑에 있는 페르세우스 청동상이다. 메두사의 머리를 번쩍 들어보이고 있다.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 1500~1571)의 1554년 작의 복제품이다. ⓒ박경귀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 옆 로자 데이 란치(Loggia dei Lanzi) 회랑에 있는 페르세우스 청동상이다. 메두사의 머리를 번쩍 들어보이고 있다.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 1500~1571)의 1554년 작의 복제품이다. ⓒ박경귀

페르세우스는 메두사를 처치하고 날아서 돌아오는 길에 아이티오피아(지금의 이디오피아)에서 바위에 묶인 채 바다 괴물에 바쳐진 안드로메다를 발견한다. 그녀는 케페우스(Cepheus) 왕의 딸이었는데 어머니가 한 말의 죗값을 대신 받기 위해 암몬 신전의 신탁에 의해 억울하게 죽을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페르세우스는 자신이 안드로메다를 구출할 경우 자신에게 보상으로 줄 것을 약조 받은 후 괴물을 처치하는 데 성공한다. 페르세우스는 왕 케페우스와 왕비 카시오페(Cassiopee)의 환대를 받고 안드로메다와 결혼하게 된다.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피에르 퓌제(Pierre Puget, 1620~1694), 높이 3.20 m, 너비 1.06 m, 르부르 박물관, 사진 Jastrow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피에르 퓌제(Pierre Puget, 1620~1694), 높이 3.20 m, 너비 1.06 m, 르부르 박물관, 사진 Jastrow

페르세우스가 안드로메다를 구하기 위해 괴물을 물리치고 있다.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티치아노(Titian, 1490~1576)의 1554~1556년 작, 높이 185 cm, 너비 199 cm, 런던 Wallace Collection, 사진 Web Gallery of Art 페르세우스가 안드로메다를 구하기 위해 괴물을 물리치고 있다.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티치아노(Titian, 1490~1576)의 1554~1556년 작, 높이 185 cm, 너비 199 cm, 런던 Wallace Collection, 사진 Web Gallery of Art

하지만 페르세우스의 결혼식장은 안드로메다의 약혼자였던 피네우스(Phineus)와 그의 동료들이 침입하는 바람에 난장판이 되었다. 약혼자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피네우스의 격렬한 공격에 페르세우스는 수세에 몰리지만, 결국 메두사의 머리를 이들에게 보여주면서 200여명을 돌로 만들어버렸다. 용감한 자만이 미인을 차지할 수 있다. 피네우스는 자신의 약혼녀가 죽을 상황에 내몰렸는데도 구하려하지 않았다. 괴물 앞에서 작아졌던 그의 용기는, 약혼녀를 빼앗기자 그때서야 질투심에 충동받아 용기를 발휘했던 것 같다. 용맹이 효력을 발휘하는 것도 다 때가 있는 법이다.

페르세우스가 자기를 공격하는 피네우스에게 메두사의 머리를 보이고 있다. 메두사의 머리를 본 피네우스와 그의 동료들은 모두 돌로 변했다. 피네우스(Phineus)와 그의 동료들과 싸우는 페르세우스, Luca Giordano(1632~1705)의 1632년 작, 높이 285 cm, 너비 366 cm, 런던 대영박물관 소장, 사진 Web Gallery of Art 페르세우스가 자기를 공격하는 피네우스에게 메두사의 머리를 보이고 있다. 메두사의 머리를 본 피네우스와 그의 동료들은 모두 돌로 변했다. 피네우스(Phineus)와 그의 동료들과 싸우는 페르세우스, Luca Giordano(1632~1705)의 1632년 작, 높이 285 cm, 너비 366 cm, 런던 대영박물관 소장, 사진 Web Gallery of Art

페르세우스는 메두사 머리를 잘라오라고 한 폴리덱테스 왕이 자신의 과업 수행을 인정하지 않자 그마저 돌로 만들어버리고 고향 아르고스에 돌아온다. 하지만 운동경기 중에 페르세우스가 던진 원반에 공교롭게도 아르고스의 왕 아크리시우스가 맞아 죽게 된다. 손자에게 목숨을 잃게 되리라는 예언이 적중한 셈이 되었다. 이에 페르세우스는 아르고스를 떠나 티린스로 가서 왕이 된다.

외조부인 아크리시우스가 죽은 후 아르고스의 왕위가 비게 되었지만, 페르세우스는 자신의 실책으로 돌아가신 외조부의 자리를 차마 이어받을 수 없었다. 그는 아크리시우스의 형제인 프로이토스(Proetos)가 창건하고 대를 이어 아들 메가펜테스가 다스리고 있던 티린스를 찾아간다. 페르세우스는 메가펜테스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고 아르고스와 티린스 왕국을 서로 바꿔 다스리기로 했던 것이다. 메가펜테스가 왕국을 맞교환하자는 것에 흔쾌히 동의한 것을 보면, 아르고스가 티린스보다 강성한 국가였음에 틀림없다. 아마 정반대의 상황이었다면 페르세우스의 사정이 딱하다고 하여도 쉽게 왕국을 맞바꾸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아르고스 평원을 중심으로 한 세 개의 왕국인 미케네, 아르고스, 티린스 건설에 페르세우스가 관계된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아르고스 사람들은 헤라클레스 또한 티린스에서 태어났다고 믿었다. 하지만 헤라클레스는 미케네에서 테베로 망명한 암피트리온의 아내 알크메네와 제우스 사이에 태어난 신의 자손이다. 테베인들은 당연히 헤라클레스는 테베 출신의 영웅이라고 여긴다.

물론 알크메네가 미케네 왕 엘렉트리온과 아낙소의 딸이었으니 아르고스 인들이 헤라클레스가 티린스에서 태어났다고 믿는 것도 전혀 엉뚱한 것은 아니다. 또 헤라클레스가 테베 출신이라고 해도 자신의 죄를 정화받기 위해 미케네와 티린스의 왕을 겸하고 있던 막강한 권력자인 에우리스테우스(Eurysteus)의 종살이를 했다. 이 때 그 유명한 12과업을 부과 받고 헤라클레스가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전 그리스의 최고 영웅으로 등극했으니 아르고스가 신화와 영웅들의 고장임에 틀림없다.

이런 아르고스 지방을 여행하는 일은 유적 답사를 넘어 신화 기행의 의미까지 덧붙여진다. 필자는 2014년 2월에 미케네 왕성을 답사한 후 시간이 부족하여 인접해 있는 아르고스와 티린스를 답사하지 못했다. 8월 중순에 아르골리스(Argolis) 지방을 다시 방문하게 된 이유다. 미케네 왕성과 아르고스, 티린스는 인접해 있다. 북쪽에서 아르고스 평원이 시작되는 근방에 미케네가 있고, 평원의 중간쯤인 남서쪽에 아르고스가, 그리고 아르골리스 만 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티린스가 위치해 있다.

미케네에서 평지를 달려 내려가면 아르고스 성채가 멀리서도 뚜렷하게 보인다. 아르고스 아크로폴리스는 해발 289미터의 산 위에 우뚝 솟아있다. 지금은 라리사 성채(Larisa Castle)로 불린다. 아르고스의 왕 펠라스고스의 딸 라리사의 이름을 딴 것이다. 미케네 문명 시기에 키클롭스 성채가 축조된 이래 BC 6세기에서 5세기 동안 아르고스 인들이 새롭게 성벽을 재건했다. 이후 동로마 제국 시기인 10세기경에 개축되고 14세기경에 베네치아 공화국의 성채로 보수되었다. 15세기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는 등 19세기에 그리스가 되찾을 때까지 이곳은 외세의 시달림을 받은 곳이다.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어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1821년에 입실란티스(Ypsilantis) 형제가 군사를 일으켜 투르크 지배에 저항하는 독립 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라리사 성채도 군사적으로 중요한 기지 역할을 하게 된다. 한 때 이곳에 아르고스 지방의 독립군 700여명이 웅거하기도 했다고 한다.

미케네에서 아르고스로 가는 길에 멀리 보이는 아르고스 성채, ⓒ박경귀 미케네에서 아르고스로 가는 길에 멀리 보이는 아르고스 성채, ⓒ박경귀

아르고스 시내에서 보이는 아르고스 성채, ⓒ박경귀 아르고스 시내에서 보이는 아르고스 성채, ⓒ박경귀

아르고스 시내에서 차로 우회하여 7km 정도 굽이굽이 산을 올라가면 라리사 성채 앞에 이른다. 현재 보수 중이어서 성채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지만 성곽 주변을 둘러 볼 수는 있다. 무엇보다도 산정에서 바라보는 아르골리스 만(灣)까지 탁 트인 전망이 장관이다. 아르고스 평원이 한 눈에 들어오고 티린스와 아르골리스 만 왼쪽에 위치한 아름다운 항구도시 나프폴리오까지 훤히 보인다.

페르세우스 시대에는 라리사 성채가 현재의 미케네 왕성과 티린스 왕성과 비슷하게 거대한 돌로 세워졌을 것이다. 현재 북쪽의 성벽 일부에 미케네식 성벽이 남아있다. 라리사 성채는 미케네 성벽과 로마 시대의 튼튼한 돌벽, 그리고 작은 잡석과 돌을 혼용한 중세 성벽 양식 등이 여기 저기 혼합되어 있다. 로마, 비잔틴, 프랑크, 투르크 양식의 다양한 성벽 축조 방법이 층층이 섞여있는 것이다. 아르고스의 3천여 년의 수난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다. 고대 성벽의 잔재 위에 세월이 흐르면서 지배자의 교체에 따라 당대의 성벽 축조방식대로 보수되고 재건되었기 때문이다.

성채로 오르는 북쪽 산허리에서 바라본 라리사 성채(Larissa Castle), 하단의 중앙 부분의 성벽은 미케네 성벽과 같은 거대한 돌로 이루어져 있다. 3500여 년 전에 쌓았던 키클롭스 성채의 일부이다. ⓒ박경귀 성채로 오르는 북쪽 산허리에서 바라본 라리사 성채(Larissa Castle), 하단의 중앙 부분의 성벽은 미케네 성벽과 같은 거대한 돌로 이루어져 있다. 3500여 년 전에 쌓았던 키클롭스 성채의 일부이다. ⓒ박경귀

아르고스 성채는 사방을 완전히 제압하는 탁월한 위치에 건설되었다. 3천여 년 전부터 크레타와 이집트 등과의 원활한 문물 교류를 가능하게 했던 아르골리스 만을 안고 있다는 것도 그리스 본토에서 이곳이 가장 먼저 문명이 발달하게 된 요인을 알게 해준다. 3면이 평지로 둘러싸여 적의 접근과 이동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점도 군사적 성채로서 뛰어난 입지다.

미케네 멸망 이후에 아르고스가 오랫동안 이 지역에서 중심 국가의 위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아르고스 평원을 장악한 입지적 탁월성에 기인한 것 같다. 아르고스는 그리스를 선도하던 미케네 문명의 영광을 자부심으로 삼았다. 옛날에 패권을 누리던 역사적 기억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늘 스파르타와 권력을 분점하기 위해 경쟁하고 다투게 한 원동력이 된 것 같다.

아르고스 인들은 유난히 스파르타 인들을 적대시 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기에 여러 나라들 간에 동맹과 동맹 파기를 밥 먹듯 할 때, 아르고스는 한 때 스파르타와 평화조약을 맺은 적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기 동안 아테네와 동맹을 맺고 스파르타와 적대적으로 맞섰다. 페르시아 전쟁 시기에도 페르시아 보다 스파르타의 위협을 더 심각하게 여길 정도로 스파르타에 대해 감정의 골이 깊었다. 아마 미케네 문명의 영광에 대한 추억이 신흥 강국 스파르타에 대한 질시와 견제 의식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또 아르고스는 민주정체였고, 스파르타는 과두정체로 정치체제가 달라 서로 상대방을 정치체계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생각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아르고스 라리사 성채에서 바라다 본 전경, 아르고스 평원과 아르골리스 만, 나프폴리오가 한 눈에 보인다. ⓒ박경귀 아르고스 라리사 성채에서 바라다 본 전경, 아르고스 평원과 아르골리스 만, 나프폴리오가 한 눈에 보인다. ⓒ박경귀

아르고스 라리사 성채에서 바라다 본 전경, 아르고스 시내와 평원과 아르골리스 만, 왼쪽 끝에 항구도시 나프폴리오가 한 눈에 보인다. ⓒ박경귀 아르고스 라리사 성채에서 바라다 본 전경, 아르고스 시내와 평원과 아르골리스 만, 왼쪽 끝에 항구도시 나프폴리오가 한 눈에 보인다. ⓒ박경귀

아르고스 시내는 바로 성채 아래를 둘러싸고 있다. 아고라와 주거지의 유적은 기단 정도만 남았지만 고대 원형 극장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특히 아르고스의 극장은 합창단이 서는 오케스트라와 청중이 앉는 좌석 사이에 방벽이 없다. 대부분의 그리스 극장이 로마 시대에 와서 검투 시합을 위해 개조되었는데 이곳은 고대 그리스 극장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곳은 입장료를 받지 않아 시민 누구나 공원처럼 자유롭게 드나든다.

아르고스의 원형극장, 합창단이 서는 오케스트라와 청중이 앉는 좌석 사이에 방벽이 없는 고대 그리스 극장의 원형의 모습대로 남아있다. ⓒ박경귀 아르고스의 원형극장, 합창단이 서는 오케스트라와 청중이 앉는 좌석 사이에 방벽이 없는 고대 그리스 극장의 원형의 모습대로 남아있다. ⓒ박경귀

고대 극장으로 오르는 길 왼편에 있는 중세 교회 건물의 유적이다. 이 건물 너머에 아고라가 있었다. ⓒ박경귀 고대 극장으로 오르는 길 왼편에 있는 중세 교회 건물의 유적이다. 이 건물 너머에 아고라가 있었다. ⓒ박경귀

아르고스에서는 헤라 신전이 유명했다. 헤라 신전은 아르고스 성채가 있는 산봉우리에서 왼쪽으로 내려다보이는 조금 작은 산등성이에 있었다. 하지만 BC 4세기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기에 소실되었다. 약탈이나 방화가 아니었다. 여사제 타크리시스가 불 켜진 램프를 화환들 옆에 두고 잠드는 바람에 그녀가 모르는 사이 화환들에 불이 옮겨 붙어 신전 전체가 불타버렸던 것이다. 아르고스 인들이 지중해 지역의 토착신인 헤라 여신을 주신(主神)으로 섬긴 것은 그리스 본토에서 이집트와 크레타 문명의 영향을 가장 먼저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르고스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보기 위해 시내에 있는 고고학 박물관에 들렀다. 박물관의 크기는 작아 보였다. 하지만 리모델링 공사로 인해 휴관 중이었다. 안내 글이 게시되어 있기는 하나 언제 다시 개관하는지 정확한 기간 명시가 없었다. 혹 페르세우스나 헤라클레스와 관련된 유물들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확인할 수 없어 아쉬웠다.

아르고스의 헤라신전이 있던 유적지이다. 완전히 폐허가 되어 신전의 영화를 추억하기 어렵다. 아주 좁은 산길을 힘들게 운전해 올라갔는데 조금은 허탈했다. ⓒ 박경귀 아르고스의 헤라신전이 있던 유적지이다. 완전히 폐허가 되어 신전의 영화를 추억하기 어렵다. 아주 좁은 산길을 힘들게 운전해 올라갔는데 조금은 허탈했다. ⓒ 박경귀

아르고스 고고학 박물관, 2014년 8월 현재 보수를 위해 휴관 중이었다. ⓒ박경귀 아르고스 고고학 박물관, 2014년 8월 현재 보수를 위해 휴관 중이었다. ⓒ박경귀

아르고스에서 더 별다른 유적이 없어 티린스로 향했다. 아르고스에서 일자로 쭉 뻗은 도로를 따라가면 20여분 만에 도달한다. 티린스는 페르세우스가 왕이 되기 이전부터 성채가 있었다. 티린스 성채는 미케네 성채와 마찬가지로 고대 그리스 유적 가운데 대표적인 거석(巨石) 유적지이다. 거인족 키클롭스가 쌓았다는 거대한 돌로 이루어진 성채는 지금도 그 위용의 일부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티린스는 이미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했고 청동기 시대인 BC 2700~2200년경에는 이 지역 거주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키클롭스 성벽(Cyclopean walls)’은 BC 14세기 후반에서 13세기 중반에 축조되었다. 페르세우스가 대대적으로 개축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폴로도로스가 지은 『비블리오테케( Bibliotheke)』를 보면 페르세우스가 티린스를 다스리게 되면서, “미데아(Midea)와 미케네도 성벽으로 둘렀다”고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티린스 성벽을 보수한 후 인근 도시의 성벽까지 축성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티린스 성채는 특이한 거석 성벽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고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매우 높은 성채다. 1999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 받고 있다. 거대한 성벽은 미케네 성벽과 너무나 유사하다. 바위 위에 거대한 돌을 쌓았다. 인간이 쌓았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큰 돌들로 이루어졌다. 성 안으로 들어가는 북쪽 출입문에는 3미터가 넘는 하나의 돌로 된 거대한 문설주가 있다. 동일한 미케네 양식이다. 티린스 성문에도 미케네 왕성의 사자문과 동일한 거대한 상인방(上引枋)이 얹어져 있었을 것이다. 또 미케네의 사자문과 같이 사자를 부조한 조각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동일한 양식을 사용한 공유한 미케네 문명의 왕조라는 점에서 이런 추정이 가능하다.

서쪽 도로에서 바라본 티린스 성벽, 바위 위에 거대한 돌로 두꺼운 벽을 쌓았다. ⓒ박경귀 서쪽 도로에서 바라본 티린스 성벽, 바위 위에 거대한 돌로 두꺼운 벽을 쌓았다. ⓒ박경귀

동남쪽에서 바라본 티린스 성벽, 엄청나게 큰 돌로 성벽을 쌓았다. ⓒ박경귀 동남쪽에서 바라본 티린스 성벽, 엄청나게 큰 돌로 성벽을 쌓았다. ⓒ박경귀

티린스 성 안에서 서쪽을 바라본 전경, 아르고스 평원이 한 눈에 들어온다. ⓒ박경귀 티린스 성 안에서 서쪽을 바라본 전경, 아르고스 평원이 한 눈에 들어온다. ⓒ박경귀

동쪽 성벽의 모습이다. 성벽 중간에 만들어진 아치형 공간이 독특하다. 성채의 상부로 올라가는 아치형 돌 진입로의 바깥벽에 공간을 만들었다. 비상문이나 공격용 공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경귀 동쪽 성벽의 모습이다. 성벽 중간에 만들어진 아치형 공간이 독특하다. 성채의 상부로 올라가는 아치형 돌 진입로의 바깥벽에 공간을 만들었다. 비상문이나 공격용 공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경귀

성 밖에서 바라본 티린스 성채의 동쪽이다. 바위 위에 거대한 돌을 쌓았다. ⓒ박경귀 성 밖에서 바라본 티린스 성채의 동쪽이다. 바위 위에 거대한 돌을 쌓았다. ⓒ박경귀

티린스 성채의 거석(巨石)들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2세기 그리스 여행가 파우사니아스는 자신의 여행기에 이렇게 묘사했다.

“티린스의 유일한 유물인 주벽(主壁)은 키클롭스 족이 쌓은 것이다. 그것은 거석으로 만들어졌는데, 가장 작은 돌조차 2마리의 당나귀가 끌어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다.”

필자는 북쪽의 입구에서부터 주문(主門)을 오르며 파우사니아스가 묘사했던 거석(巨石)들이 과장이 아닌 사실임을 확인했다. 주벽에 쌓은 돌은 대부분 세로가 1미터가 넘고 가로가 2미터에 가까운 것도 상당히 많았다. 티린스의 성벽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거석문화(megalithic culture)의 기념물이다.

한 개 한 개마다 엄청난 무게가 나갔을 돌들을 어떻게 운반하고 또 높이 쌓을 수 있었을까. 수많은 사람과 가축이 동원되었을 것이다. 축성(築城) 기간도 상당히 오래 걸렸을 듯싶다. 티린스 성채는 주민이 함께 거주하는 성곽도시는 아니었다. 오로지 왕과 일부 귀족 측근이 거주하는 왕성이었다. 엄청난 크기의 돌로 절대로 무너질 수 없는 튼튼한 성을 축성하면서 왕국의 영원한 번영을 기원했을 것이다. 절대적 권력을 가진 전제군주만이 이런 거대한 건축 사업에 필요한 군중을 동원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인류 역사상 축성의 형태를 보면 선사시대와 고대에는 주로 거석 축성 문화가 나타난다. 하지만 후대로 내려올수록 인간이 다루기 쉽도록 점점 작은 돌을 사용한다. 또 나중에는 돌이 아닌 인공의 벽돌을 만들어 쌓는 방식으로 변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미케네 문명의 거석 성벽은 특별하다. 아마 견고한 건축적 기능 이외에도 거대한 돌을 신성하게 여긴 종교적 의미도 가미된 것 같다. 이들이 엄청난 고통이 요구되는 거석 축성을 열정적으로 수행했던 이유를 오로지 전제 군주의 힘의 과시만을 위한 것이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외적에 맞서 공동체의 생존을 담보하기 위한 기원(祈願)과 의지의 표현은 아니었을까.

북쪽에서 성 안으로 들어가는 주 출입문이다. 3미터가 넘는 거대한 문설주가 남아있다. 두 문설주 위에 얹는 상인방은 소실되었다. 양쪽의 벽이 파우사니아스가 묘사한 주벽(主壁)이다. 사람과 비교해 벽의 돌 크기를 가늠해 보라. ⓒ박경귀 북쪽에서 성 안으로 들어가는 주 출입문이다. 3미터가 넘는 거대한 문설주가 남아있다. 두 문설주 위에 얹는 상인방은 소실되었다. 양쪽의 벽이 파우사니아스가 묘사한 주벽(主壁)이다. 사람과 비교해 벽의 돌 크기를 가늠해 보라. ⓒ박경귀

티린스의 성채 북쪽에 있는 주문(主門) 성 안쪽의 주벽(主壁)의 모습이다. 양쪽의 벽이 파우사니아스가 묘사한 주벽(主壁)이다. 얼마나 거대한 돌인지 한 눈에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성벽 중 가장 큰 돌로 이루어진 성벽이다. 사람과 비교해 벽의 돌 크기를 가늠해 보라. ⓒ박경귀 티린스의 성채 북쪽에 있는 주문(主門) 성 안쪽의 주벽(主壁)의 모습이다. 양쪽의 벽이 파우사니아스가 묘사한 주벽(主壁)이다. 얼마나 거대한 돌인지 한 눈에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성벽 중 가장 큰 돌로 이루어진 성벽이다. 사람과 비교해 벽의 돌 크기를 가늠해 보라. ⓒ박경귀

북쪽에서 들어가는 성의 주 출입구이다. 성벽의 두께가 3미터가 넘을 정도로 두껍고 견고하게 축조되었다. 현재도 계속 복원 보수 작업이 계속 되고 있다. ⓒ 박경귀 북쪽에서 들어가는 성의 주 출입구이다. 성벽의 두께가 3미터가 넘을 정도로 두껍고 견고하게 축조되었다. 현재도 계속 복원 보수 작업이 계속 되고 있다. ⓒ 박경귀

티린스 성벽의 구조물 중 가장 원형이 잘 보존되었고, 구조와 형태가 독특한 시설물은 동쪽 성벽에 설치된 터널식 진입로이다. 높이는 3미터 가까이 되는데 폭은 두 사람이 간신히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좁다. 이 거대한 돌의 터널은 무려 47미터에 이른다. 성채의 상부로 올라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출입구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성채의 주 출입구는 북쪽에 있다. 북쪽의 성문은 인마(人馬)가 함께 다닐 수 있도록 폭이 5미터 정도가 된다. 이곳은 성채 위병대가 주둔하던 장소이자 두꺼운 주벽 내부에 만들어 놓은 창고로 통하는 출입구이기도 했다. 아무튼 요즘 이 터널은 티린스 성채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것 같다. 티린스의 유적의 홍보 자료에 단골로 등장한다.

티린스 성채 동쪽의 출입 터널, 거대한 돌을 아치 형태로 쌓아 통로를 만들었다. ⓒ박경귀 티린스 성채 동쪽의 출입 터널, 거대한 돌을 아치 형태로 쌓아 통로를 만들었다. ⓒ박경귀

티린스 성채 동쪽에 위치한 터널식 통로의 입구 쪽 벽에 쌓은 거대한 돌, 너무나 커서 감탄하고 있었더니 그리스 관광객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한다. 홀로 다니는 배낭여행인지라 오로지 유적지 사진 찍기에만 몰입하게 된다. 또 필자가 담긴 유적 사진을 찍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번엔 독자들이 벽체의 돌 크기를 생생하게 가늠할 수 있도록 부득이 포즈를 취했다. ⓒ박경귀 티린스 성채 동쪽에 위치한 터널식 통로의 입구 쪽 벽에 쌓은 거대한 돌, 너무나 커서 감탄하고 있었더니 그리스 관광객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한다. 홀로 다니는 배낭여행인지라 오로지 유적지 사진 찍기에만 몰입하게 된다. 또 필자가 담긴 유적 사진을 찍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번엔 독자들이 벽체의 돌 크기를 생생하게 가늠할 수 있도록 부득이 포즈를 취했다. ⓒ박경귀

티린스 성채의 내부 건축물들은 크게 다소 낮은 북쪽 지역, 다소 높은 위치에 있는 중앙 지역, 다소 낮은 곳에 위치한 동남부 지역으로 나뉜다. 동남부 지역에는 여러 개의 방형(方形)으로 구획된 공간이 있었는데 주요 물자의 저장고로 쓰인 듯하다. 북쪽 구역에는 28개의 공간이 있었고, 그 가운데 지하의 우물과 연결되는 공간이 두 곳이 있었다고 한다. 아크로폴리스 중앙 구역에는 왕궁과 헤라와 아테나, 그리그 아폴론 신전과 부속건물들도 있었다고 한다. 왕궁이 붕괴되고 이곳이 종교적 중심지 기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신전들이 집적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거대한 돌로 축조된 티린스 성채가 붕괴되고 쇠락하게 된 것은 자연재해 때문이었다. BC 13세기에 대규모 지진이 발생하여 성벽과 아크로폴리스의 대부분의 건물을 붕괴시켰고 이어진 화재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로 인해 왕궁 통치체제가 무너진다. 이후에 성채 아래에 주거지를 건설하는 등 성채의 기능을 복원하려 했지만 티린스의 쇠락을 막을 수 없었다. 아마 재난을 입은 주민들이 흩어지는 바람에 왕국을 지탱할 힘을 잃었을 것이다.

그 이후 티린스는 아르고스와 경쟁하다 BC 5세기 초에 완전히 멸망한다. 주민들은 모두 추방되어 폐허가 되고 만다. 2세기에 그리스 여행가 파우사니아스가 이곳을 방문했을 땐 이미 아무도 살 지 않아 황폐하게 버려진 곳이었다고 한다.

티린스 성채 평면도, 빌헬름 되르프펠트(Wilhelm Dorpfeld, 1853~1940) 티린스 성채 평면도, 빌헬름 되르프펠트(Wilhelm Dorpfeld, 1853~1940)

티린스 성 안 북쪽에서 중앙 구역을 바라본 전경 ⓒ박경귀 티린스 성 안 북쪽에서 중앙 구역을 바라본 전경 ⓒ박경귀

티린스 아크로폴리스의 동남쪽이다. 원형 구조물의 기단이 남아있다. 곡식 등의 저장고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경귀 티린스 아크로폴리스의 동남쪽이다. 원형 구조물의 기단이 남아있다. 곡식 등의 저장고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경귀

티린스 아크로폴리스의 동남쪽이다. 방형(方形)의 여러 공간들의 유허가 남아있다. 각종 저장고 및 주거시설 등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경귀 티린스 아크로폴리스의 동남쪽이다. 방형(方形)의 여러 공간들의 유허가 남아있다. 각종 저장고 및 주거시설 등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경귀

티린스 성채의 중앙에 있던 왕궁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이곳을 발굴한 하인리히 슐리만의 자서전을 통해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 보자. 앞서 미케네를 발굴했던 슐리만은 티린스 왕궁의 발굴된 유허들의 형태에 미케네 왕성에서 드러난 특징들을 접목하여 티린스 왕궁의 모습을 재현해 보이고 있다.

“왕의 주거에 가기 위해서는 이 넓은 정원에서 문 앞 복도에 이르는 계단을 올라가서 문 뒤의 복도로 통하는 문을 지나가야 한다. 그러면 또다시 넓은 안뜰로 들어서게 되는데 그 곳의 아늑하고 화려한 장식으로 미루어 드디어 왕의 주거가 가깝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지면은 말끔한 석회 바닥으로 덮여 있고, 사방에는 나무 기둥으로 받쳐진 복도가 에워싸고 있었다. 또한 그 기둥들 위에는 채색된 중인방(中引枋)이 그림자를 드리우며 우뚝 솟아 있었다. 따라서 이 분리된 공간의 정적감은 마치 복도로 둘러싸인 수도원의 정원을 연상케 한다. 그 복도 앞, 궁정으로 통하는 문과 마주보는 곳에는 제단이 보인다.

이 제단에는 왕은 가문의 수호신으로부터 제례용 도끼를 받아 제물로 바치는 소를 죽인 뒤 구멍 안으로 피를 흘려 넣었던 것이다. 하지만 왕이 이처럼 폐쇄된 공간에 있으니 평민이나 국토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고, 다만 남국의 밝은 하늘빛만 바라보였을 것이다.“

또 슐리만은 티린스 왕의 주거 공간인 메가론(megaron)의 화려함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왕궁의 내실 모습은 크레타 문명의 영향을 받은 미케네의 특징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슐리만의 묘사가 당대의 실제 모습을 얼마나 복원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당대의 정경을 가늠하기엔 충분할 것 같다.

“위로 올라갈수록 굵어지는 둥근 기둥에는 온통 장식 무늬가 새겨지고 벽기둥을 감싼 진기한 목재에는 줄지어 아름다운 청동제 꽃장식이 되어 있다. 벽 아래에는 설화 석고가 투명하게 빛날 뿐만 아니라 거기에 새겨진 율동적인 무늬에서는 보석을 모조한 푸른 유리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벽 자체도 다채로운 벽화(여러 상상의 동물 사이에서 소 사냥이나 왕들의 전투 장면을 그린 것)로 뒤덮여 있었다“

슐리만이 티린스 발굴 과정을 담은 저서 『티린스』와 자서전에 담은 내용처럼 티린스 성채의 유물들이 크레타 문명의 영향을 받았음은 틀림없는 것 같다. 티린스 성채에서 발굴된 프레스코 역시 크레타 문명이 미케네, 티린스, 아르고스를 포함한 미케네 문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크레타의 크노소스 궁전 벽을 장식하던 숱한 프레스코와 닮은꼴이다.

투우경기의 모습이다. 티린스에서 발굴된 프레스코화의 복원품,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 1822~1890) 투우경기의 모습이다. 티린스에서 발굴된 프레스코화의 복원품,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 1822~1890)

황소의 등을 타 넘는 곡예를 부리고 있는 모습이 담긴 프레스코화, 크레타 크노소스 궁전 ⓒ 박경귀 황소의 등을 타 넘는 곡예를 부리고 있는 모습이 담긴 프레스코화, 크레타 크노소스 궁전 ⓒ 박경귀

미케네 문명의 유산을 확인하기 위해 한 곳을 더 답사했다. 티린스 성채에서 동남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티린스의 무덤이다. 티린스의 왕족이나 귀족의 무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케네의 ‘아트레우스의 보고(寶庫)’와 동일한 톨로스(Tholos) 무덤 양식을 보여준다. 작은 산자락에 자리한 오렌지 농장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방문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인지 한 사람이 지날 정도의 작은 길에 풀이 다복하다. 하지만 미케네 문명의 산물인 궁륭식 무덤 양식의 또 다른 사례로 비교해 볼 가치가 있는 곳이다.

티린스의 무덤은 ‘아트레우스의 보고’와 달리 원형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석벽 사이의 천장을 거대한 돌로 덮었다. 미케네 문명의 거석(巨石) 문화를 여기서도 재확인할 수 있다. 또 무덤 내부로 들어가면 미케네의 ‘아트레우스 보고’와 동일하게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동심원을 만드는 방식의 궁륭형 무덤 양식을 볼 수 있다. 다만 아트레우스의 보고처럼 축석의 돌을 고르게 다듬어 정교하게 쌓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미케네 문명의 고유한 특징인 원형무덤 양식이 아르고스 지방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점을 확인한 점이 소득이다.

티린스의 톨로스(원형 무덤) 양식의 무덤의 외관이다. ⓒ박경귀 티린스의 톨로스(원형 무덤) 양식의 무덤의 외관이다. ⓒ박경귀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천장을 거대한 돌로 덮었다. 미케네 문명의 거석(巨石) 문화를 여기서도 재확인할 수 있다. ⓒ박경귀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천장을 거대한 돌로 덮었다. 미케네 문명의 거석(巨石) 문화를 여기서도 재확인할 수 있다. ⓒ박경귀

미케네의 ‘아트레우스 보고’와 동일하게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동심원을 만드는 방식의 궁륭형 무덤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박경귀 미케네의 ‘아트레우스 보고’와 동일하게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동심원을 만드는 방식의 궁륭형 무덤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박경귀

아르고스 지방의 고대 유적지를 답사하면서 유허의 현장만 살피고 출토된 유물들을 확인할 수 없었던 점이 많이 아쉽다. 아르고스 박물관은 보수 중이어서 볼 수 없었다. 티린스 출토 유적과 나프폴리오 및 인근 아르고스 지방의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는 나프폴리오 고고학 박물관은 정기 휴관하는 월요일에 걸려 볼 수 없었다. 아르고스 지방에 두 번째 방문했는데 여전히 또 아쉬움을 남기게 됐다. 또 다음을 기약해야겠다.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kipeceo@gmail.com)

박경귀 기자 (kipec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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