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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을 바보 만든 '십만양병설'이나 '다이빙벨'이나...


입력 2014.11.02 10:09 수정 2014.11.03 08:47        데스크 (desk@dailian.co.kr)

<굿소사이어티 칼럼>선동언론을 버리고‘제대로 된’뉴스로 세상을 바꿀 때

이종인 알파잠수기술공사 대표가 지난 4월 25일 오전 전남 진도군 팽목항에서 바지선에 다이빙벨을 싣고 세월호 침몰 현장으로 나서기 전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고 있다. ⓒ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이종인 알파잠수기술공사 대표가 지난 4월 25일 오전 전남 진도군 팽목항에서 바지선에 다이빙벨을 싣고 세월호 침몰 현장으로 나서기 전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고 있다. ⓒ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얼마 전 책을 읽다 깜짝 놀랐다. 이율곡은 십만 양병설을 주장한 적이 없다는 내용 때문이다. 이건 거의 ‘산타는 없다’ 수준의 충격이었다. 작가 김남의 '노컷 조선왕조실록'에서 처음 접한 이 내용은 연세대 송복 명예교수의 근사한 단행본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에서 한 번 더 등장했다.

요점은 이렇다. 율곡은 10만을 양병하자는 말은커녕 그런 발상도 한 적이 없다. 이 내용은 오로지 율곡의 제자들이 쓴 ‘율곡비문’과, 제자의 제자가 쓴 ‘율곡연보’에만 있다. 본인 입으로는 말한 적이 없고 비문과 연보에만 있는 건 무슨 경우일까? 그 곡절을 놓고 송복 교수는 “특정 당파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작되었다”고 본다.

좀 더 자세히 따져 보자. 우리는 은연중에 조선의 인구가 1000만 명쯤은 됐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니다. 많아야 400만 명 이하였다. 여기에서 10만을 차출한다는 발상은 당연히 비현실적이다. 10만을 모은들 그들을 먹일 군량이 있는 상황도 전혀 못 되었다. 결국 율곡이 10만 양병을 주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율곡의 현실감각을 우습게 만들어버리는 아이러니가 도출된다.

율곡 10만 양병설이 후대의 조작이 정말 맞다면…

상황이 이러함에도 율곡의 제자들은 왜 사실을 왜곡해가면서까지 스승을 ‘현실 모르는 바보’로 만들었을까. 자존심, 그 놈의 자존심 때문 아닌가? 세상 모든 바보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왜놈들에게 국토를 유린당하던 그 순간에도 우리의 스승님만은 달랐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말이다. 노무현이 친노(親盧) 때문에 요란하기만 하지 실제로 더 저평가되듯 이율곡도 후임 양성에는 실패한 것이 아닌지.

슬픈 사실은 21세기의 대한민국이 율곡의 제자들을 비판할 계제가 전혀 못 된다는 데 있다. 많은 한국인들의 사고구조가 여전히 ‘그 수준’에 머물러 있기에 그렇다. 다시 이 얘길 꺼내려니 착잡하지만 세월호 참사는 이제 꼼짝없이 정치 이슈가 돼버린 모양새다.

이 사건의 모든 책임이 대통령으로 귀결된다는 발상부터가 그 얼마나 정파적인가 말이다. 세월호 정치공세가 동력을 상실한 것마저 김현 의원의 폭행 논란 때문이었다. 공격하는 쪽이나 방어하는 쪽이나 이게 정치 이슈에 불과해졌다는 걸 알고 있다. ‘벌거벗은 임금님’을 외칠 수 있는 사람은 있는가? 모두 거짓말쟁이들뿐이다.

얼마 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이상호 기자의 다큐멘터리 영화(?) ‘다이빙벨’은 거대한 사기극이나 다름없는 십만 양병설의 재판(再版)이다. 몸소 부산까지 가서 이 영화를 관람한 입장에서 가장 크게 놀란 포인트는 무엇보다도 사실 그 자체를 부정하는 이 영화의 대담함이었다.

영화는 다이빙벨이 실패하지 ‘않았다’는 뉘앙스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있지도 않았던 십만 양병설을 창작해낸 제자들이나 이미 무위로 결론 난 다이빙벨이 실패하지 않았다는 정신승리 식의 억지나 실은 오십 보 백 보가 아닌지. 이런 이상호 기자를 ‘스타 언론인’ 취급해주는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다.

심지어 이상호 기자는 이 작품의 개봉을 반대하는 유가족들에 대해 “경황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단언컨대 다이빙벨 논란이야말로 세월호 정국을 통틀어 가장 경황없고 소모적이었다. 누구든 영화 한 편 만들면 이 사실도 바꿀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5‧18이 폭동이라는 영화 한 편 만들면 그날로 광주는 폭동이 되는 건가?

명백한‘사실’도 입맛에 따라 마음대로 바꿔버리는 대한민국

매사를 정파적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아무것도 바꿔놓지 못한다. 판교 환풍구 참사는 세월호라는 비극을 겪고서도 대한민국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그 누구도 ‘내 탓’을 말하지 않았다. 오로지 ‘네 탓’ ‘대통령 탓’만을 말했을 뿐이다.

‘네 탓’의 장점(?)은 원래 살던 대로 살아도 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는 데 있다. 어차피 모든 건 대통령 탓이니까 나는 살던 대로 살아도 된다. 가만 보면 대한민국의 모든 여론이 그런 식으로 돌아간다. 언론 또한 딱 그 수준으로밖에 세상을 해설해주지 못하고 있다. 보편적 복지는 하고 싶지만 세금은 나보다 부자인 사람들에게 걷으면 되고 나는 살던 대로 살겠다는 나라. 안전한 나라는 만들고 싶지만 실질적인 고민은 딴 사람들이 하고 나는 살던 대로 살겠다는 사람들.

한국교통연구원이 30살 이상 성인 1,014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를 보자. 응답자의 70.5%가 정부의 정책이 성장보다 안전을 더 중요시해야 한다고 답했다. 여기까진 그렇다 치자. 안전을 위한 정부의 증세에는 70.4%가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안전관리비용 마련을 위한 대중교통 요금 인상에도 68.6%가 반대했다. 자신의 문제에는 한없이 관대하다. 남의 문제에는 한없이 옹졸하다.

이런 나라가 어떤 문제에 봉착한들 그것을 스스로 해결할 힘을 가질 수 있을까. 대한민국 언론의 수준과 현주소는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언론의 미래는 결국 ‘똑똑한 소비자’가 결정 지을 것

누구를 탓할까? 언론이든 정치든 시장(市長)의 논리를 따른다. 유권자며 독자들의 수준과 관심사를 추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언론 수준이 낮다고 말하지만 딱 하나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하고 있는 매체가 있다. 연예매체 ‘디스패치’다. 연예인 A와 연예인 B가 사귀느냐 아니냐가 전 국민적인 관심을 획득하는 대한민국의 풍토는 연예매체 ‘디스패치’를 대한민국 최고의 탐사보도 매체로 만들어줬다.

빈말이 아니다. 디스패치는 세월호 사건 직후 대한민국의 수많은 언론이 ‘오보 퍼레이드’를 벌이며 헤매고 있을 때 진도 팽목항 현장으로 내려가 다른 어떤 기성언론보다 차분하고 치밀한 어조로 상황을 ‘정리’해준 바 있다(참고기사: “불신은 어떻게 시작됐나?” … 실종자 가족의 48시간 http://www.dispatch.co.kr/r.dp?idx=100698&category=5&subcategory=14).

연예인들의 가십을 다루는 디스패치의 태도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잠시 제쳐두자. 연예매체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신뢰를 얻고 있는 현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언론 시장에도 수요와 공급의 법칙은 작용한다. 즉 디스패치의 등장과 성숙, 그리고 성장은 언론 소비자들이 바로 그러한 뉴스를 ‘원하고’ 있었다는 배경에서 기인한다. 한국인들은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궁금해 한다. 그래서 누구보다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제대로 취재해 주는 매체가 등장한 것이다. 경쟁은 기업을 움직이게 만든다.

결국 대한민국 언론사들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하락하고 있는 이유는 현재의 독자들이 깊이 있는 정보를 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마치 언론과 정치권이 국민들을 분열시키는 것처럼 표현하지만 실은 그 반대가 진실이다. 분열된 것은 유권자들이고 독자들이며 네티즌들이다. 언론 역시 그 일원으로서 함께 하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사실(fact)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 ‘그럴듯해 보이는’ 명제가 어떠한 정치적 결과를 배태하느냐. 그것만이 중요하다.

세월호 참사는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그 사건을 보도하는 언론들의 태도 면에서도 ‘참사’였다. 너무 많은 정보들이 한꺼번에 유통되는 상황에서 하나의 언론이 오보를 내면 그걸 경쟁적으로 베껴 쓰는 구조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예술가의 아이디어, 연구자의 성실함

언론들에게 ‘진정성’이 없어서 이 모양 이 꼴이 됐을까? 아니다. 치열한 경쟁이 모든 언론사들의 등을 떠밀고 있는 이 상황 속에서 자사의 기사를 포털 사이트에 노출시키고자 하는, 한 사람의 독자에게라도 읽히고자 하는 마음이 지금처럼 ‘진정성’ 있었던 때는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경쟁 그 자체가 아니다. 그 경쟁이 향하고 있는 방향이 문제다.

지금의 언론들은 지나치게 현재의 이슈에만 천착한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뿐이다. 당장 눈에 보기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으면 비판한다. 당장 눈에 보기에 장점이 있어 보이면 찬양한다. 그렇다 보니 ‘결국 우리는 모두 죽는다(In the long run, we are all dead)’라고 선언하며 현재의 가치를 지나치게 부풀렸던 케인즈식 세계관과 처방이 진리인 듯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지금처럼 눈앞의 일에만 몰입하는 보도 행태로는 언론이 선동에 이용되는 구조를 바꾸기 힘들다. ‘중소기업 살리기’ ‘재래시장 살리기’ ‘남양유업 밀어내기 비판’ 등의 근시안적 담론도 마찬가지다. 중소기업과 재래시장을 살리려고 국내 대기업을 규제했더니 해외 대기업들이 들어온다. 남양유업 밀어내기 관행이 보기에 너무 흉해 금지시켰더니 우유가 남아돌아도 가격이 떨어지지 않는 기형적인 현실이 도출됐다.

당시로서는 맞는 것처럼 보였던 그 담론의 형성을 주도했던 언론들은 스스로 출현시킨 ‘현재의 부조리’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다만 오늘의 새로운 논란거리를 찾고 있을 뿐이다. 그래야 독자들이 읽어주니까.

언론의 소비자들이 현재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 한 악순환 구조는 결코 깨지지 않는다. 이제 발상을 바꿔보자. 모두가 카메라 하나씩을 들고 다니는 21세기에 속보(速報) 경쟁은 이미 끝났다. 빠른 보도보다 중요한 것은 느리고 깊은 보도다.

언론은 새로운 시장을 만들겠다는 각오를 품고 ‘예술가의 아이디어’와 ‘연구자의 성실함’을 동시에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며 넓은 시야로 독자들을 새롭게 매혹시키겠다는 그 마음이 곧 진정성이고 경쟁력임을 믿고, 십만 양병이 아니라 좋은 언론(인)을 양병할 때다.

글/이원우 미래한국 편집장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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