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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버덕이 상업적이면 뭐가 문제지?


입력 2014.10.22 10:37 수정 2014.10.22 10:45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

<김헌식의 문화 꼬기>대중의 지지 받는 예술품 상업성 띠는게 당연

네덜란드 설치미술가 플로렌타인 호프만이 21일 오전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 에비뉴엘 아트홀에서 열린 러버덕 프로젝트 기자간담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네덜란드 설치미술가 플로렌타인 호프만이 21일 오전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 에비뉴엘 아트홀에서 열린 러버덕 프로젝트 기자간담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앤디 워홀은 살아생전에 부와 명성을 얻은 몇 안되는 예술가였다. 그는 평소에 자신의 작품이 상품이라고 말했으며, 자신의 작품이 가격으로 평가되는 것을 부정적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아예 자신의 작업공간을 팩토리라고 불렀다.

인디 아트를 지향한다는 사람들이 이런 팩토리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야말로 러버덕이 처한 모순과 딜레마를 드러내주기도 하겠다. 최근 러버덕의 작가 호프만이 자신의 작품은 상업적인 것과 무관하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공공미술을 명분 삼아 이익을 추구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 반응을 보인 것이다. 정말 러버덕은 상업적이지 않을까. 아니 상업적인 것은 나쁜 것일까.

예술사를 비쳐볼 때,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경제적인 빈곤함을 해결하는데 어려움이 많았고, 사후에 시간이 오래지나서 작품의 가치를 인정받으면 다행이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다가 삶을 빚어낸 것에 만족하는 것이 마음 편한 지 몰랐다. 예술가들이 이렇게 가난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난을 모범으로 생각하기 때문이기도하다.

꼭 가난한 예술가가 모범적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바람직할 수만은 없다. 꼭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려야 하는 것만이 예술가의 본분은 아니며, 최소한 인간이 유지해야할 경제적 조건 즉 밥은 먹고 살아야 하는 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돈을 밝히지 않는 예술 행위, 흔히 예술혼을 강조할수록 이런 경제적 빈곤은 심화될수 밖에 없다. 그 빈곤은 누군가 성실히 일하는 사람들의 노동의 결과물을 편취하는 행태로 이어질 수 있다.

이렇게 돈을 예술적 행위와 연결짓는 것을 우리는 상업성이라는 이름으로 백안시하거나 부정적으로 대하는 경우가 있다. 세상에 돈에서 자유로운 작가도 없으며 그러한 작품도 없다. 돈은 다른 게 아니라 인간이 경제적 활동을 통해 삶을 영위하는 재화의 집합적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돈과 예술의 관계를 무시하거나 백안시하는 태도는 오히려 그 작가와 작품의 상품성을 높이는 기제로 활용되기 일쑤이다. 사람들의 선호를 받아 혹은 사람들이 원하는 작품을 창작하고, 경제적인 요건을 갖추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자신의 작품에 사람들의 기호를 맞추라고 요구하는 태도가 더 문제다. 그것은 문화적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업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자, 작가 호프만은 러버덕이 대형 미술관이나 박물관, 전시관의 공간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공공의 공간속 설치미술작품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공공미술가들이 항상 강조하는 부분이고 러버덕도 이런 사유에서 출발한 셈이다. 또한 러버덕 자체가 작품이라기보다는 그 작품을 둘러싼 주변 공간은 물론 사람들의 반응이나 행동도 작품의 구성요인이 되는 것이다.

특히, 호프만은 러버덕을 통해 사람들이 상처를 치유하고 행복한 느낌을 받으면 그것으로 족하기 때문에 상업성과 별개라는 입장이다. 실제로 러버덕을 통해 많은 시민들이 즐거운 느낌을 갖는 게 사실이다. 그 모양은 장난감 같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오리풍선을 크게 만든 것에 불과 해보이기 때문이다. 백남준은 예술은 사기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예술의 가치 부여라는 속성을 크게 강조한 말이다. 현실의 소소한 오브제라도 창작자가 어떻게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예슬작품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물론 이를 보는 사람들이 의미와 가치에 동의해야 한다.

러버덕이라는 거대한 오리가 석촌호수에 미소지은 모습으로 앉아 있는 것은 일단 평온한 모습을 보인다. 마치 오랜 여행을 하다가 지쳐서 잠시 쉬는 모습같다. 이는 바쁜 일상 노동의 나날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싶은 도시인들의 마음을 대변하려는 듯 싶다. 물론 이는 해석의 영역일 뿐이다.

세계 많은 국가 수천만의 사람들이 이 작품에 주목한 것은 작가의 의도에 동의와 공감을 보내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귀여운 오리는 어른들애게는 키덜트 코드를 불러내고, 아이들에게는 동심을 일으키며, 젊은 층들에게는 이벤트의 면모를 갖고 있다. 여기에 사회적 화제에 목마른 언론 미디어에게는 이슈를 제공한다.

작은 오리는 사적 소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간의 오리는 공적인 의미를 확장하기가 용이하다. 이런 점에 집중한 러버덕은 예술의 공공성에 잘 착안한 작가의 기획과 노력의 산물이다. 누가 그런 황당한 짓(?)을 할 수 있을까. 처음에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작업이라고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돈을 벌려면 하지 말아야할 짓이다.

그런 황당하고 유치하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가치를 부여하는 작업, 그것은 오로지 예술가만이 할 수 있다. 이런 배경에서 처음 출발부터 러버덕이 상업성만 내세웠다면, 그 가치에 대해서 평가절하를 받았을 것이다.

최소한 러버덕은 공공적 가치를 더 우선했다. 하지만 자본주의 국가에서 상업적인 특징이 없다면 존립이 불가능하며 이는 예술에도 예외가 아니다. 다만, 오로지 상업성이라는 외연적인 요소가 더 우선하고 본질적인 가치나 의미, 효용이 간과된다면 비난 받아 마땅할 수 있다. 그러나 러버덕처럼 대중의 지지를 받는 예술품이 상업성인 특징을 갖는 것이 비난의 핵심이 되는 일은 적절하지 못하다.

다만,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거나 다른 잘못이나 치부를 감추기 위한 은폐의 공작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은 비난의 대상이 될만하다. 그것은 예술의 영역을 벗어나 인위적으로 누군가의 의도대로 진실이 조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공공미술이 갖는 공공적인 가치를 소수나 개인들의 의도대로 사적 소유화하는 것과 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러버덕 설치에 제2 롯데월드 문제를 덮기 위한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상업성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성의 문제인 셈이다.

글/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동아방송예술대학교 교수

김헌식 기자 (codess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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