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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시절 나는 북한에서 '꼬마 스파이'였다


입력 2014.09.21 10:06 수정 2014.09.23 23:10        데스크 (desk@dailian.co.kr)

<굿소사이어티 기고>조지 오웰 '1984'를 본 탈북여성의 외침

KAL기 폭파범 김현희는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죄와 벌'을 읽으며 심히 괴로웠다고 고백했다. 전당포 노인을 살해한 라스콜리니코프가 번민하는 걸 보면서 승객 115명을 죽인 자기 죄가 얼마나 큰가를 새삼 확인했기 때문이다.

김현희는 고백록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1991)에서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읽고 또 한 번 놀랐다는 말도 털어놓았다. 작품 속의 참담한 전체주의 모습이 북한과 너무도 닮았기 때문이다. '1984'를 탈북 3년차로 늦깎이 대학 입학을 준비 중인 박승희 씨가 읽었다. 그걸 보고 많은 걸 배웠다는 그는 뒤늦게 읽은 고전에 대한 느낌을 굿소사이어티 편집진에게 보내왔다. 다음은 진솔하면서도 깊이 있는 글의 전문(全文)이다. < 편집자 주 >


전체주의의 끔찍한 통제사회를 묘사한 '1984'. 조지 오웰 저 민음사 간. 전체주의의 끔찍한 통제사회를 묘사한 '1984'. 조지 오웰 저 민음사 간.
작가가 예언했던 상징적인 해인 1984년에 나는 갓 세 살짜리 어린아이로 북한에 살고 있었다. 조지 오웰은 미래의 인류에 닥칠 전체주의의 음울한 모습을 '오웰리안 소사이어티'란 이름으로 작품에 담았지만, 그런 세계를 나는 탈북 직전까지 30년 동안이나 살아야 했다. 저쪽에서 살 때 조지 오웰이란 작가의 이름을 들어본 적 없었고, 이 작품이 인류의 고전인지도 알 리 없었지만 올 여름 내내 이 작품을 붙잡고 읽었다.

다른 독자들과는 느낌이 또 달랐다. 서유럽과 미국 등 자유세계에서 많은 이들이 이 작품을 '동물농장'과 같은 풍자소설 혹은 미래를 예언한 소설로 설명하지만 내가 보기엔 섬뜩한 현실, 아직도 북한 땅에서 진행중인 최악의 지옥을 제대로 그려놓은 고발서였다. 이 책을 읽은 적지 않은 자유세계의 독자들이 작가가 말한 끔찍한 예언이 이미 지나갔거나, 작품이 제기한 경고는 끝내 현실화되지 않았다고 마음 편하게 이야기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 않다. 놀라운 사실은 그건 서유럽이 아닌, 우리의 반쪽인 북한에서 아직도 전체주의의 화석(化石)처럼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점이다. 그 참담한 현실을 살았고 부모형제가 아직도 갇혀있는 상황에서 나는 '1984'를 한가한 문학작품으로 읽을 수 없었고, 지난 삶 30년을 되비춰보는 거울로 읽어야 했다. 탈북한 것도 거대한 행운이지만, 이 책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 삶과 북한체제의 본질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 '동물농장'을 접한 것도 행운이었다.

소설 속의 빅 브라더는 김일성이고, 김일성은 빅 브라더

'1984'에 등장하는 빅 브라더, 그리고 '동물농장'의 주인공 돼지는 21세기의 현실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전체주의는 그 자체가 거짓과 파멸을 암시하는 대명사다. 아쉽게도 그것을 판단하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었다. 그 세계는 한마디로 “전쟁은 평화, 자유는 속박, 무지는 힘”이라고 가르치는 사회다. 다 아시듯 “전쟁은 평화, 자유는 속박, 무지는 힘”이란 당의 슬로건은 소설 주인공 윈스턴이 근무하는 진리부(眞理部)의 흰색건물에 붙어있다.

소설 '1984'에 등장하는 가상국가 오세아니아의 그런 슬로건은 오래 전 북한 땅에서 작동되고 있었다. 슬로건을 집행하는 건 따로 있다. 오세아니아도 그렇고, 북한도 빅 브라더 혹은 수령이라는 최고 지도자가 당이라는 통치기구를 통해 사람의 운명이 좌우지한다. 그런 통치 아래서는 최소한의 인간적 권리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게 상식이다.

국민을 지킨다는 보위부가 사상범을 만들어내 죽이는 처형부이고, 평화를 부르짖는 국방위원회는 핵무기를 만들어 세계를 위협하는 핵무기위원회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 내가 금세 공감한 것은 서로를 감시하고 반목 질시하는 오세아니아의 분위기가 3년 전 북한 삶과 완전히 같았기 때문이다. '1984'에는 주민감시를 위한 텔레스크린이란 전자기기가 등장하지만 북한에서는 5호담당선전원제도, 인민반장통제제도, 학생 민견 소조활동 등 인적 감시시스템이 발달했다.

그게 저쪽의 일상이고, 생활리듬이다. 어릴 적 내 삶도 그랬다. 몽당연필을 잡고 숙제를 해야 하는 나이에 나는 남을 감시하고 그걸 안전부에 보고하는 것부터 배웠다는 걸 고백해야겠다. 중학교 1학년 학급의 사상부위원장으로 활동하던 나를 어느 날 학교 소년단지도원 선생님이 사무실로 찾으셨다. 방에는 이미 몇 명의 학생이 먼저 와 있었다. 잠시 뒤에 군 보안서의 보안원이 6명의 학생을 향하여 입을 열었다.

10대 시절 북한에서 나는 '꼬마 스파이'로 활동했다

"동무들은 가정환경으로 볼 때 '당'에서 제일 믿는 학생들이고 학교에서 학업과 생활에서 모범이라고 학교 소년단에서 특별히 추천했다. 오늘부터 동무들은 '안전소조'원으로서 '당'에 죽을 때까지 충성 다해야 한다. 우리의 회의내용, 소조원들에 대하여 누구와도 이야기하면 안 된다. 매주 1회씩 모임을 가지며, 우리의 당면과업은 학생 동향, 학부모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당의 원칙에 어긋나는 행위를 할 때는 언제든 신고해야 한다. "

당시 나는 특별히 선택 받았다는 기쁨 반, 친구들을 감시해야 한다는 걱정 반이었다. 이후 "당"을 위해 남의 집 창문 아래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몰래 엿들어야만 했고, 때로는 거짓 보고서를 적어낸 다른 소조원들 때문에 친구들의 부모님들이 "보안서"에 끌려가 고초를 겪는 모습도 지켜봤다.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이게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잠시 했었지만 그때뿐이었다. 다른 모든 국가, 모든 사회가 이렇겠거니 하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경험을 했던 나는 '1984'가 묘사하는 학생 스b>파이활동 부분을 읽으면서 간담이 서늘했다. 어찌 내가 이 책을 TV드라마 보듯 가볍게 읽을 수가 있겠는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북쪽에서의 내 삶을 되새김질해야 했다. 처음엔 쇼킹했다가 조금 뒤에는 그게 모든 게 비밀이자 음모인 전체주의 사회고유의 메커니즘이라는 걸 알아채고는 무언가 큰 깨달음을 얻은 듯해서 지금은 마음이 좀 개운해졌다.

<무고한 주검의 거대한 피라미드, 전체주의

이 책을 읽으며 북한정치사와 현대사를 새롭게 보는 안목이 생겼다. 오세아니아의 일상인 숙청, 추방, 행방불명은 1945년 이후 북한에서도 실제로 일어났다. 자세한 건 알리 없었지만 어마어마하게 큰 죄를 저지른 반당(反黨) 종파분자들이란 정말 흉악한 사람들이라며 어릴 적부터 나는 적개심부터 키웠다. 그게 얼마나 잘못된 교육이었던가를 이제야 알게 됐다.

서울에 정착한 뒤 내가 내 삶의 주체로 살아가야 한다는 각성도 하고 있다. 사실 많은 탈북자들이 자기 의사표현을 잘 못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점이다. 어려서부터 진실보다 거짓을 믿어왔고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당"에서 바라는 대로 살아야 했다. 전체주의 교육이 그렇게 시키기 때문에, 당이 심어주는 공포감이 질려있기 때문에 북한주민은 모두가 그렇게 산다.

이를테면 우리 옆집에는 아주머니 혼자서 남매를 키우고 계셨다. 1978년인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주머니의 남편이 하룻밤 사이에 잡혀갔다고 한다. 이유는 어느 잡지사에서 일하던 그녀의 남편이 김일성에 대한 기사를 잘 못 인용했다는 것이란다. 북한사회에서는 김 부자에 대한 자그마한 언어, 표정, 몸짓의 실수도 예외가 되지 않는다. 과연 이 사회를 둘에 둘을 더하면 넷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저들은 둘에 둘을 더하면 셋이 되고, 다섯이 된다고 엉뚱한 답을 해야 하는 사회다. '1984'를 읽지 않았다면 북한주민의 삶이 김 부자의 탓으로만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전체주의 시스템 자체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짓밟아야 돌아간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해방 직후 그런 시스템을 끝내 거부한 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도입한 이승만 건국 대통령에 대한 나의 존경심은 너무도 당연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전체주의는 사유재산 폐지를 통해서 개인의 땅과 재산, 공장들, 광산들, 저택들 교통수단 등을 빼앗았다. 탈북 이후 공부하면서 안 사실이지만, 1946년 3월부터 실시된 북한의 토지개혁은 이를 증명해 준다. 철저한 계급사회를 유지하고 본인에 대한 우상화, 신격화는 “전체주의”의 통치와 지배의 수단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독재의 세습으로 이어졌다. 그 속에서 핍박 받고 왜곡된 사회가 바로 북한사회이고 조지 오웰이 고발하려 했던 사회였을 것이다.

자유민주 체제 도입한 이승만 건국 대통령이야말로 진정한 지도자

오세아니아에서 주인공 윈스턴은 존재하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전체를 위해 복무하기 때문이다. 존엄한 개인의 삶도 망가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넣으면서 자신의 구차한 생을 연장하고 싶어 하는 주인공의 처절한 몸부림도 그런 구조 때문이다. 아내를 살해했다는 허위자백에 이르기까지 그는 얼마나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을 받았을까?

죽음보다 더 두려웠던 “101호실”에서 그의 선택은 다른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야 하는 현실이었다. 결국에는 윈스턴도 자신이 부정하고 싶었던 “이중사고”를 깨닫게 되고 2+2=5라는 거짓을 택하게 된다. 사상전향으로 그의 삶은 행복했을까? 이중사고를 깨닫고 죽음의 문어귀에서 빅 브라더를 사랑한다고 고백한 그의 내면에 자그마한 진실도 없었다고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소설 속 주인공 윈스턴의 고문장면도 내 눈에는 예사롭게 읽히지 않았다. 술술 읽지 못했다. 기회에 북한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를 떠올려본다. 한 노동자가 북한 보위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다. 전선줄 몇 미터를 끊어다 시장에 팔았다는 죄로 온갖 고문을 당하다가 나중에 그가 진술한 한 마디 “나는 러시아에 가서 기차를 훔쳐서 운전하고 북한까지 왔다.” 얼마나 고문을 겪었으면 가당치도 않은 허위 진술을 했으랴?

지금도 북한의 수많은 정치범 수용소들에서는 윈스턴처럼, 그의 동료들처럼 형장의 이슬로, 이름도 없이 사라지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당초에 몇 통치자들을 위해서 만들어졌지만 “거짓 평등”과 “거짓 민주”라는 이름으로 도배된 것이 사회주의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전체를 대표하는 특정인물을 위해서 모든 개체의 존재가 허용될 수 없는 사회에 대해 알게 되었다.

더 많은 이들이 새로운 안목을 가지고 이 책을 봤으면 좋겠다. 비단 작가가 미래의 “전체주의”를 그려낸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휴전선 이북의 현실을 고발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 전체주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려는 용기가 없는 사회에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는 악몽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걸 일깨워준 게 '1984'다. 뛰어난 문학에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이 작품은 나에게 길고 강한 여운을 남겨준다.

지금도 가슴에 남아있는 이 작품을 떠올릴 때마다 드는 생각은 조지 오웰보다 더 리얼하게 그 체제를 경험한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수두룩한데, 왜 이런 뛰어난 문학을, 소설을 남기지 못했을까 하는 점이다. 실향민, 귀순용사, 귀순동포, 탈북자에 이르기 까지 그들에게서 조지 오웰의 작품과 같은 멋진 글이 나왔어야 했다. 그걸 생각해준 대한민국에 나는 항상 감사하는 마음이다. 지금도 저쪽에 살고 있다면, 여주인공 줄리아와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있다고 누가 감히 장담할 수 있을까.

고백하지만 한국의 TV를 통해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나는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 탈북 3년차인데도 여전히 변함없이 그러하다. 저들의 이름에 묻어있는 말로 못할 복잡한 감정과, 격심한 애증 탓이다. 분명한 건 그런 나에게 자유 대한민국은 새 생명을 안겨 주었다. 그 점 언제나 감사 드린다. 북한 동포들도 공포에서 벗어나 나와 같은 자유를 누리며 대한민국에 감사 드리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글/박승희 탈북여성(가명)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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