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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의 '충견'이 경호실장 엉덩이를 물자마자...


입력 2014.09.07 09:42 수정 2014.09.07 12:44        데스크 (desk@dailian.co.kr)

<그리운 나라, 박정희>육 여사 서거후 진돗개 애지중지

차지철 물자 신당동 집으로 유배 그때 세게 물었더라면

박정희 대통령의 청와대 시절, 대통령 지킴이 둘의 충성 경쟁이 있었다. 하나는 경호실장 차지철이요, 그 상대로 진도 출신의 사나이가 있었다. 대통령 경호를 담당한 두 지킴이의 충성 경쟁이 볼 만했다. 차지철이야 굳이 설명이 필요치 아니하고, 그 경쟁 상대라는 진도 사나이가 과연 누군가 대중이 궁금해할 터이므로 인사 소개를 하자면 이러하다.

우선, 박근혜 대통령이 예전에 한 말이 있다.

“우리 집에 진돗개가 한마리 있는데 그 개가 아버지만 보면 그렇게 반갑다고 어깨까지 뛰어오르고 그래요. 그 개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우리가 옆에서 막 소동을 부리고 반갑다고 하면 우리 집엔 진돗개가 두 마리 있다고 흐뭇해하세요.” (1977년 12월 29일 KBS, TBC, MBC 3개 TV와의 송년회견)

그렇다. 그는 육영수 여사 서거 이듬해인 1975년에 진도군수의 추천으로 청와대 근무 발령을 받은 대통령 충견(忠犬)이다. 이름은 진도. 고향 이름을 그대로 가지고 왔다. 차지철은 거무튀튀한 낯빛이지만 그는 진도 토종에다 백의민족의 후예인 양 황구가 아닌 백구(白狗)인데 그를 진도 사나이라 함은 경호 임무에 충실함은 물론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과 의협심이 강해 차지철과 쌍벽을 이루고도 넘어설 정도인지라 의인화(擬人化)해 줄 만한 존재로 보는 일컬음이다.

차지철은 본관에서 저만치 떨어진 경호실에서 거들먹거리고 유난을 떨지만 진도 사나이는 대통령이 일하고 먹고 잠자는 본관에 근무하는 어엿한 최측근에다, 대통령과의 독대 기회는 어느 인간도 그를 따를 수가 없었다.

돌아보면, 부인을 잃은 대통령이 눈을 뜨는 외로운 새벽이면 어김없이 독대를 해 위로해 드리는 것이 무릇 기하(幾何)이며, 청와대 뒤뜰과 그 너머 북악산 자락을 모시고 산책하는 날이 또한 무릇 기하이던가.

그는 대통령을 모시는 전석영 총무비서관과 박학봉 부속실장 등 부속실 직원들을 식사당번으로 두고 있었고, 목욕할 때는 그들의 때밀이 봉사를 받았다. 식사당번이 있었지만 그들을 젖혀두고 대통령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는 날도 꽤 있었다.

서울대 음대에 다니던 대통령의 둘쨋딸 근영 양의 생일인 1976년 6월 30일, 그는 본관 1층 식당에서 대통령 가족과 함께 식사를 했다. 그날 생일잔치를 함께 하고 대통령이 직접 그의 이빨 사이에 낀 고기 찌끼를 이쑤시개로 고루고루 빼주는 양치질까지 해주는 것을 보고 중앙고등학교 졸업반이던 지만 군이 놀란 듯 입을 딱 벌리고 웃음을 머금는 사진이 그 증거로 남아 있다.

1976년 6월 30일 근영양의 생일날 대통령 가족의 모습. ⓒ국가기록원 1976년 6월 30일 근영양의 생일날 대통령 가족의 모습. ⓒ국가기록원

그렇게 박 대통령 가족 대접을 받는 진도 사나이에 시샘이 났음인지 박학봉은 동료들 앞에서 그를 ‘박진도’라고 인격화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일명 ‘박진도’ 그는 진도 출신답게 주인인 대통령에게는 절대적으로 충성했으나 본관 외부 다른 사람들에게는 매우 사나웠다. 경호와 경계에 눈곱만큼의 빈틈도 없었다. 그래서 본관 식구들끼리만 있을 때는 아래위층을 자유롭게 오르내리며 지냈지만, 바깥 사람들이 대통령을 만나러 올 때는 줄에 매달리는 긴급조치가 불가피했다.

그래도 그는 대통령 지킴이로 그를 알 만한 청와대 안팎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는데 차지철은 그렇지가 못했다.

진도 사나이가 ‘박진도’로 인격화하는 반면에, 유정회 국회의원을 지낸 군(軍)의 원로이며 박 대통령과 특별한 관계를 가졌던 이종찬 장군은 차지철을 ‘청와대 셰퍼드’라고 부르며 이렇게 개탄했다.

“전에는 대통령과 가끔 만나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요즘은 청와대 셰퍼드가 너무 사나워 접근할 수 없더라.” (일요신문 2013-10-23)

그 시절을 회고하는 소리다.

대통령을 만나고 싶어도 차지철이 가로막아 못만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걸핏하면 명령하듯 경호실로 사람들을 불러놓고 안하무인으로 두눈 부릅뜨고 대통령에 대한 충성 강요 소란을 떨어대며 분열식 같은 행사를 벌여 괴롭히는 차지철인지라 그에 대한 악감정이 장마철 진구렁처럼 경호실 주변에 질펀했다.

그런 차지철에 대해 당시의 김두영 비서관은 “차 실장은 박 대통령 말년에 장관 등 고위인사를 초청, 배석시킨 가운데 분열식을 가졌다. 나는 지금도 왜 대통령이 그런 행동에 제동을 걸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그의 저서에 기술했다. (김두영 지음 〈가까이에서 본 인간 박정희 인간 육영수〉대양미디어 2014-06-10)

1977년 2월 26일 청와대 본관 앞에서 봄맞이 망중한의 한때를 즐기는 대통령 가족. ⓒ 국가기록원 1977년 2월 26일 청와대 본관 앞에서 봄맞이 망중한의 한때를 즐기는 대통령 가족. ⓒ 국가기록원

진도 사나이의 청와대 근무 3년째가 되는 1978년 어느날, 차지철이 본관으로 터벅터벅 들어서더니 대통령이 있는 2층 계단으로 발을 올려놓았다. 그것을 본 진도 사나이가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쏘아붙이듯 재빨리 몸을 날려 차지철의 엉덩이를 물었다.

차지철이 비명을 지르자 박학봉 부속실장이 달려와 뜯어말리는 게 아닌가.

그때 진도 사나이는 자기에게 ‘박진도’ 이름을 붙여준 식사당번 박학봉인지라 못이기는 체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차지철은 무사히 구출되었는데, 이 사건은 청와대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불상사로 받아들여져 또 누가 화를 당할지 모른다는 판단하에 진도 사나이는 대통령 경호 직책에서 해고당해 대통령의 신당동 옛집으로 좌천되고 말았다.

그것은 유배(流配)나 다름없었다. 뿐만 아니라 진도 사나이는 신당동 지킴이 박환영에게 쇠줄로 묶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는 신당동 집이건만 진도 출신들의 귀소본능, 주인과 헤어져 멀고먼 길을 달려 옛집을 찾아갔다는 얘기가 한둘이 아닌지라, 집안이라고 해서 그냥 풀어놓았다가는 언제 뛰쳐나가 광화문 네거리를 휘젓고 난리를 피울지 모를 것이었다.

그나마 쇠줄에서 해방되는 날은 대통령이 찾아올 때였다. 대통령은 자기를 빤히 쳐다보며 청와대 밖으로 끌려나가던 그의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혀 신당동을 찾아왔다. 그립고 그리웠던 대통령과의 해후는 감격 그 자체였지만, 돌아서는 대통령이 저 멀리 눈에 안보일 때까지 꼬리를 흔들고는 그 다음은 더욱 진한 그리움으로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모진 그리움은 상사병이 되고 홧병이 되었다. 그렇게 시름시름 앓다가 겨우 해를 넘겨 1979년 봄, 진도 사나이 그는 여섯살 한창 젊은 나이에 눈을 감고 말았던 것이다.

비보를 접한 대통령은 “잘 묻어주라”는 지시를 내렸고, 박환영은 그를 양지바른 북한산 기슭에 묻고 돌멩이로 표시를 해놓았다.

진도 사나이는 그렇게 묻혔어도 그냥 덮어지지 않는 여운을 남겼다. 역사의 여운이다.

만일 그가 차지철을 공격했을 때 박학봉이 뜯어말리지 않았다면 한번 물면 놓지 않는 진도 출신의 성깔대로 차지철의 엉덩이가 어떻게 되었을 것인지는 아주 선명하다. 차지철을 병상에서 오래도록 쉬게 하고 부득이 대통령이 다른 경호실장을 임명했다면?

그렇다. 역사 이정표가 달라졌을 것이다. 어떻게 달라질지 상상이 안되지만 분명히 달라지긴 했을 것이라는 여운을 대통령의 충견 저 진도 사나이는 남기고 있다.

글/김인만 작가('박정희 일화에서 신화까지'의 저자)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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