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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 - 이헌재 강봉균, 그 때 과연 누가 옳았나


입력 2014.08.22 15:52 수정 2014.08.22 16:08        조진래 편집인

<칼럼>"대우 해체시킨 사람들" "신뢰 잃은 기업" 평행선

회고록 곧 출간…김 회장과 대우 대한 재평가 계기될까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지난 2013년 3월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부암동 AW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대우그룹 창립 46주년 기념행사'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연합뉴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지난 2013년 3월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부암동 AW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대우그룹 창립 46주년 기념행사'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연합뉴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회고록 ‘김우중과의 대화 - 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가 발간된다고 해 화제다. 국내 경제지 기자 출신인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와의 대담 형식으로 출간될 이 책에는 DJ(김대중) 정부 당시 경제각료들에 대한 김 회장의 사무친 원한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는 듯 하다.

실제로 기자가 만나 본 많은 대우 출신 CEO들은 김우중 회장이 “속았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증언해 주었다. 기업을 부도낸 원죄가 큰 것을 십분 인정하면서도, 그에 이르기 까지 정부 특히 일부 정책결정자들이 보여준 행보에 대해선 큰 응어리가 여전했다. 그것은 일반의 상상을 초월한 정도였다.

(주)대우의 마지막 대표이사이자 옛 대우인 모임인 대우세계경영연구회를 이끌며 김우중 전 회장의 대리인 역할을 맡고 있는 장병주 회장은 김 전 회장의 심중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그가 이끄는 대우세계경영연구회도 대우그룹과 김우중 회장의 명예회복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고 있다. 장 회장은 2년 전인 2012년에 기자와의 몇 차례 인터뷰를 통해 김 회장의 아픈 속내를 가감없이 전달해준 바 있다. 당시 인터뷰 내용은 지금 돌이켜 봐도, 곧 발간될 회고록의 수위에 결코 모자라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마침 당시에는 김대중 DJ 정부 때 초대 금융감독위원장으로 활약했던 이헌재 씨가 회고록 ‘위기를 쏘다’에서 “대우는 시장의 신뢰를 잃어 망했다”고 써 대우인들의 공분이 크게 높았을 때다. 대우인들은 지금도 “정책실패에는 정부도 책임을 져야 하는데 대우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썼다”고 말한다. “대우그룹의 몰락에는 대우인의 책임이 컸던 게 사실이지만, 그에 앞서 정부와 정치권의 오판과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는 게 한결같은 믿음이다.

김우중 회장 “강봉균 이헌재는 나쁜 사람들이야”

김 회장은 그룹 해체 당시 강봉균 이헌재 두 사람에 대해 자주 “나쁜 사람들”이라고 분통해 했다고 한다. DJ와의 만남을 가로막고 대우를 공중분해시킨 시나리오를 만든 사람들로 생각해 그랬을 것이다. 한편으론 약속을 지키지 않은 정부에 대한 불쾌함과 분함의 표시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김 회장과 생사를 같이 한 대우 전직 CEO들은 “부도를 막으려면 담보 넣어야 한다고 해 하라는 대로 다 해 주었는데 워크아웃으로 김 회장의 지분을 다 빼앗아 갔고 그것도 모자라 개인 집 까지 거둬갔다”고 말한다. 살던 집까지 빼앗긴 총수는 김 회장 밖에 없다며 분해 했다.

장병주 회장은 당시 기자와 만났을 때 “방배동 집과, 장남 선재 씨(사망) 묘가 있던 안산 농장은 빼주겠다고 해 재산목록에서 뺐는데, 나중에 검찰이 은닉재산 찾아냈다며 크게 창피를 주었다”고 전했다. 지금은 은퇴한 재계 고위임원들도 “대우의 무리한 확장형 드라이브가 파산을 불러온 큰 원인이긴 하지만 궁극적으로 외환위기의 희생양이 필요했던 때”라며 정부만 정책실패에 책임지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기업들이 분수도 모르고 미스매치를 간과한 채 단기자금을 마구 끌어다 쓴 탓에 외환위기가 초래됐다고 정부는 주장하지만 그런 정책을 만들고 독려한 게 당시 DJ 정부 였다고 항변한다.

장병주 회장 같은 이는 당시 대우의 특수한 상황을 감안해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대우그룹만 해도 무역 등 해외 사업 비중이 워낙 높아 부채비율이 높을 수 밖에 없었는데 그런 특수성은 제대로 인정 않고 법대로 하자니 해외차입이나 채권발행이 여의치 않았다는 것이다. 정부가 그런 상황을 만들어 놓으니 노무라증권이 ‘대우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보고서를 쓸 수 밖에 없었다는 게 김우중 회장을 비롯한 대우인들의 생각이다.

대우가 잘못돼 노무라 보고서가 나온 게 아니라 정부가 만든 최악의 상황 때문에 노무라 보고서가 나왔다는 얘기다. 정부가 그룹의 자금조달 길을 막아버리지 않았다면 그렇게 대우가 급작스럽게 몰락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김 회장은 생각하는 듯 하다. 금융감독기관의 수장이 “대우그룹은 시장의 신뢰를 잃었다”고 하는데 누가 돈을 대 주겠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헌재 전 위원장은 김정태 당시 주택은행장에게 대우 지원 건을 간접적으로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본인의 회고록에 쓴 바 있다.

김우중 회장, 급히 DJ를 만나려 했으나...

당시 김 회장과 경제관료들의 시각 차는 너무 분명했다. 관료들은 더 이상 확산시키면 안되겠으니 대우라는 가지를 쳐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도 결국 그들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러나 김 회장 생각에 대우의 어려움은 일시적인 외화 유동성 부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평소와 같은 적절한 지원만 이뤄진다면 문제될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장했던 것이 당시의 원화 고환율을 십분 활용한 경상수지 극대화 전략이었다.

김 회장은 외환위기로 원화 가치가 크게 떨어질 것이므로 수출을 계속 늘려 이익을 내야 한다고 DJ에게 진언했다. 나름 관료들과의 토론회까지 거쳤지만 강봉균 당시 경제수석이 DJ에게 틀린 정보를 주어 틀어지게 했다는 게 김 회장의 판단이다. 김 회장은 특히 강봉균 수석에 대해 강한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강 수석이 DJ와 자신 사이를 가로막고 계속 왜곡된 정보를 올렸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DJ로 통하는 라인은 상당히 제한적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헌재 당시 금감위원장도 DJ와 독대를 한 번밖에 못했다고 회고록에 적고 있을 정도니까.

어쨌든 대우를 위해서도 ‘신의 한 수’ 일 수 있었던 수출확대 지원 요청이 묵살되면서 대우는 연불수출 길 마저 막히게 되고 결국 유동성 악화에 직면해야 했다. 그러나 그 해 대우만 140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올렸으며 대한민국도 400억 달러가 넘는 기록적인 흑자를 기록했다. 이는 정부가 당초 예상했던 20억 달러대와 너무 큰 차이였다. 이를 근거로 대우인들은 당시 경제관료들의 실정을 강력히 비판해 왔다.

대우만 불이익을 당했다?

대우 전직 CEO들이 음모론을 얘기하는 근거 중의 하나가 현대그룹이다. 대우 사태 직후 현대그룹에도 자금 문제가 생겼는데 그 때는 정부가 ‘채권신속인수제’라는 듣도 보도 못한 제도를 만들어 살려주었다는 것이다. 장병주 회장은 워크아웃 때라도 그룹에 유동성을 적기에 지원해 주었다면 대우가 그렇게 허무하게 역사 뒤로 사라지진 않았을 것이라 믿고 있다. 그는 “이헌재 당시 금감위원장이 ㈜대우에서 무역부문을 떼어 없애라”고까지 했다“며 섭섭함을 토로했다.

그룹의 분식 규모를 뻥튀기 한 것도 대우 죽이기의 일환이었다고 한다. 정부가 이미 전년도 분이 합산되어 있는 분식을 발표하지 않고 두 해 분식 규모를 단순합산해 고의로 40조원이라고 발표했다는 것이다. 이런 왜곡된 정보가 위로 올라가니 정상적인 지침이 내려올 수 있었겠냐는 하소연이다. “회장이 안 들어와 어쩔 수 없었다”며 대통령에 대우 파산을 보고했지만, “잠시 나가 있으라”고 한 것도 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대우도 잘못한 것 많지만.... 역사의 평가가 궁금하다

김우중 회장에게는 추징금이라는 족쇄가 따라 다닌다. 그는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무려 23조원을 추징당했었다.당시 해외에서 싸게 돈을 빌리려면 본사의 지급보증이 필요했는데 이게 여의치 않자 편법으로 본사에서 돈을 빼 쓴 것이 화근이었다. 이것이 해외 재산도피로 걸렸다. 물론 김 회장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제 능력이 없다. 그래서 국내외에서 사업도 할 수 없다.

김우중 회장과 대우가 원하는 것은 한 가지다. 명예회복이다. 잘못 알려진 것들을 바로잡고 김우중과 대우가 ‘IMF 외환위기의 원흉’이라는 극단의 평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반인들이 아는 것 이상으로 당시 대우그룹의 조선과 건설 등에 투입된 공적자금보다 이후 회수액이 더 많다. 그리고 지금도 대우라는 이름은 적지 않은 브랜드 파워를 유지하고 있다.

총수 시절 그 흔한 온천 한 번 가본 적이 없을 정도로 평생을 쉬지 않고 일만하고 달려왔기에, 최소한의 명예회복은 말년의 그에게 유일한 기원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제 김 회장 회고록을 계기로 대우와 김 회장의 공과 과에 대한 역사의 평가가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대우 사태는 아직 끝나지 않은 듯 하다.

조진래 기자 (jjr2014@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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