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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피아 가도를 따라 베드로를 찾아 나서다


입력 2014.08.02 10:24 수정 2014.08.09 01:14        이석원 기자 (galamoi@dailian.co.kr)

<유럽에 미치다 17-로마①>초기 그리스도교로의 역사 여행

로마 중심부에서 부터 카타콤베가 있는 외곽으로 이어지는 지도. 구글맵 로마 중심부에서 부터 카타콤베가 있는 외곽으로 이어지는 지도. 구글맵

로마를 실제로 접해보지 못했을 때 로마를 상상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결코 낭만적인 것은 아니었다. 전화번호부 마냥 두꺼운 부담감마저 느껴지는 역사와 문화에 대한 압박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 펙이 누비던 로맨틱한 로마 시내를 생각하기도 하고, 또는 시오노 나나미가 그리는 스펙타클하고 위대한 역사의 현장을 상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로마의 휴일’의 낭만이나 ‘로마인 이야기’의 위대함도 현실감 없는 피상이고, 그건 동경일 수도 있지만 막연한 두려움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로마를 실제 경험하고 나면, 스페인 계단 위에서의 젤라또나 콜로세움에서의 웅대함, 또는 나보나 광장에서 느낄 수 있는 아기자기 하면서도 완성도 높은 문화의 향취보다 ‘지저분하다’거나 ‘무질서하다’ 또는 정체도 알 수 없이 여기저기 파헤쳐진 폐허의 ‘고리타분함’ 같은 것들이 먼저 머릿속을 채운다. 하지만 그것은 일주일 안쪽의 짧은 로마와의 만남일 경우다. 적어도 한 달, 또는 그 이상의 시간을 로마와 함께 보낸다면, 그 동안 보이지 않던 오드리 헵번도 보이고, 페데리코 팰리니 감독도 보이고, 심지어는 막시무스 장군도 보인다. 그래서 로마는 ‘어떻게 볼까?’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볼까?’도 적잖이 중요하다.

사실, 엄청나게 대단하고 장구한 것 같아도 로마의 역사는 고작 2800년 정도. 중국이나 이집트, 그리스는 물론 우리의 역사와 비교해도 미미한 수준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기원전 753년,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로물루스와 레무스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전해지는 로마(ROMA. 영어명 Rome)는 중의의 단어다. 현재 이탈리아의 수도를 뜻하면서도 거대한 제국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리고 로마는 그리스도교, 특히 가톨릭을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하면서 그리스와 더불어 유럽 문화와 역사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로마 곳곳에서 여행자의 발길을 막아서는 지하철 공사장. 땅을 파다가 고대 유적의 흔적 하나만 나오면 더 파지도, 그냥 덮지도 못하고 저대로 방치하기 일쑤다. 그런 것이 눈에 자주 들어오다뵤면 로마가 역사의 도시라기 보다 부숴진 폐허의 도시같다는 느낌도 강하게 든다. ⓒ이석원 로마 곳곳에서 여행자의 발길을 막아서는 지하철 공사장. 땅을 파다가 고대 유적의 흔적 하나만 나오면 더 파지도, 그냥 덮지도 못하고 저대로 방치하기 일쑤다. 그런 것이 눈에 자주 들어오다뵤면 로마가 역사의 도시라기 보다 부숴진 폐허의 도시같다는 느낌도 강하게 든다. ⓒ이석원

그렇기 때문에 로마로의 여행은 유럽 문명의 발상에 대한 여행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교의 역사로의 여행이기도 하다. 오늘은 로마의 많은 것 중 초기 그리스도교를 쫓아가는 여정이다.

로마가 지배한 예루살렘의 반체제 사상가이자 민중 지도자인 예수는, 그러나 로마 황제에게 굴복한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군중에게 배신당하고 마침내 정치범으로 체포돼 십자가 처형을 당한다. 그런 예수가 인간의 몸에서 신의 영혼으로 부활한 후 시작된 그리스도교는 당연히 로마에 대해 저항적이었고, 로마 제국 또한 그리스도교의 확산을 저어했다. 그런데 오히려 초기 그리스도교는 자신들을 핍박하고 탄압하는 로마를 향해 교세를 넓혀갔고, 숱한 박해와 순교 속에서 마침내 서기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로부터 공인받기에 이른다.

그런 그리스도교의 핍박의 역사는 로마 곳곳에 있지만 카타콤베는 좀 더 특별한 의미에서 초기 그리스도교의 로마 전파의 역사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카타콤베로 행하는 여정 또한 로마 테르미니 역에서 시작한다. 메트로 A선을 타고 세 정거장을 가면 산 죠반니(San Giovanni) 역에 이른다. 이곳은 로마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가 나뉘는 곳. 도시 전체가 온통 고대의 유적인 로마에도 따로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뉘나 하며 의아해 할 수 있지만 산 죠반니 역에서 내려 조금 걸어가면 로마 성곽의 출입문 하나를 통과하게 된다. 19km를 빙 둘러 쳐진 로마 성곽의 안쪽이 과거 고대 로마의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인 구 로마, 즉 구시가지이다.

로마의 구시가와 신시가를 나누는 로마 성문. 서울의 경우도 그렇지만 저 성문 밖은 과거 로마의 외곽지역으로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살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성문 밖이 더 윤택한 로마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곳으로 바뀌었다. 서울의 4대문 밖, 예컨대 강남처럼. ⓒ이석원 로마의 구시가와 신시가를 나누는 로마 성문. 서울의 경우도 그렇지만 저 성문 밖은 과거 로마의 외곽지역으로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살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성문 밖이 더 윤택한 로마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곳으로 바뀌었다. 서울의 4대문 밖, 예컨대 강남처럼. ⓒ이석원

사실 로마는 무척 작은 도시였다. 테베레 강 하류에 위치한 로마는 270만 명 정도의 인구가 좁은 도시에 모여 사는 편이다. 주요한 행정영역 안의 로마를 따지면 서울의 2~3개 구 정도의 넓이 밖에 되지 않아 상당수 여행자는 대중교통도 이용하지 않고 걸어서 다니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구 로마 지역과 새로 개발된 로마 시내를 합치면 그 넓이는 상당히 커진다. 서울보다는 2배가량 넓고, 프랑스 파리보다는 무려 12배나 넓다.

로마 성벽을 통과하면 산 죠반니 광장(Piazza S.Giovanni)이 나온다. 이 광장 한 켠에는 ‘가난한 자들의 성인’으로 통하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동상이 서 있다. 가톨릭이나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평화의 기도’로도 유명하지만,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 때문에 더욱 유명해진 가톨릭의 대표적인 성인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1182년 무렵 이탈리아 중부 옴무리아 주 아시시에서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 무모할 정도로 낭비를 하면서 방탕한 생활을 영위하던 인물이다. 게다가 전쟁을 통해 영웅이 되려는 욕심도 강했던지라 전쟁에 참가했는데 오히려 감옥에 갇혀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인 동상. 초기 그리스도교의 흔적을 따라가는 여행의 시작점에서 만나기에 적절한 조합이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 대해서 일부 경솔한 사람들은 '제2의 예수 그리스도'라고도 하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그리스도교 역사에 있어 가장 위대한 성인 중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이석원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인 동상. 초기 그리스도교의 흔적을 따라가는 여행의 시작점에서 만나기에 적절한 조합이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 대해서 일부 경솔한 사람들은 '제2의 예수 그리스도'라고도 하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그리스도교 역사에 있어 가장 위대한 성인 중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이석원

감옥 생활의 후유증으로 큰 병을 앓은 후 성 프란치스코는 어느 날 갑자기 심경의 변화를 경험하고는 농부의 허름한 옷을 입고 그를 추종하는 11명의 친구들과 함께 극도로 가난한 삶을 살며 자신의 삶을 통회한다. 가톨릭의 대표적인 수도회 중 하나인 프란치스코회의 시작이다.

소유하지 않는 삶의 평화롭고 아름다움을 보여준 우리나라의 성직자도 있다. 법정 스님이다. “장례식을 하지 마라. 관도 짜지 마라. 평소 입던 무명옷을 입혀라. 내가 살던 강원도 오두막에 대나무로 만든 평상이 있다. 그 위에 내 몸을 올리고 다비해라. 그리고 재는 평소 가꾸던 오두막 뜰의 꽃밭에다 뿌려라”라는 유언과 함께 370만부가 팔린 수필집 ‘무소유’를 비롯해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되는 모든 책을 출간하지 말라는 유언까지 덧붙였던 법정 스님. 성 프란치스코의 동상 앞에서 법정 스님의 쇳덩어리 같은 얼굴이 떠오르는 것은 왜 일까?

로마의 버스는 그 나름의 악명을 떨치고 있다. 남들 무임승차 하는 것 보고 엉겁결에 따라하다가는 영어조차 거의 못하는 버스 운전사나 로마 경찰을 만나게 된다. 경찰서로 끌려가는 일이야 거의 없지만 그 자리에서 벌금을 뜯기고 나면 영수증도 받지 못한다. 하지만 넓은 창을 가지고 있는 218번 버스는 로마의 또 다른 풍경을 감상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이석원 로마의 버스는 그 나름의 악명을 떨치고 있다. 남들 무임승차 하는 것 보고 엉겁결에 따라하다가는 영어조차 거의 못하는 버스 운전사나 로마 경찰을 만나게 된다. 경찰서로 끌려가는 일이야 거의 없지만 그 자리에서 벌금을 뜯기고 나면 영수증도 받지 못한다. 하지만 넓은 창을 가지고 있는 218번 버스는 로마의 또 다른 풍경을 감상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이석원

산 죠반니 광장에서 218번 시내버스를 타면 카타콤베로 갈 수 있다. 로마의 대중교통은 메트로와 버스, 그리고 트램이 주를 이룬다. 역 등에 있는 담배가게(Tabacchi)에서 티켓을 구입하는데 이들 세 가지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는 티켓은 하나로 통일돼 있다. 이 티켓을 구입하면 당일 자정까지는 마음대로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로마 시민들은 검표가 확실한 메트로나 트램 보다 버스를 즐기는데 무임승차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부로 따라했다가는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웃기지도 않는 로마 경찰은 주로 외국 관광객을 불시에 검사한다. 티켓이 없을 경우 무려 50유로가 넘는 벌금을 뜯어낸다. 덤으로 특유의 시끄럽고 요란한 목소리로 욕인지 훈계인지 한 바가지를 보태서.

카이사르의 양자이면서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삼두정치를 시작했고, 후일 로마의 초대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가 이집트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제압한 후 로마로 돌아오면서 축조한 로마 성곽의 일부. 아피아 가도를 끼고 서 있다. ⓒ이석원 카이사르의 양자이면서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삼두정치를 시작했고, 후일 로마의 초대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가 이집트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제압한 후 로마로 돌아오면서 축조한 로마 성곽의 일부. 아피아 가도를 끼고 서 있다. ⓒ이석원

버스로 로마 성 밖 외곽 도로를 달리다보면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만들어진지 2000년이 훨씬 넘은 도로를 달리는 것이다. 아피아 가도(Apia Antica)다.

아피아 가도는 폭 8m, 총연장길이 50km의 돌바닥 도로. 기원전 312년 로마의 감찰관인 아피우스 클라디우스 카이쿠스가 처음 건설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따 아피아 가도라고 부른다. 이 도로는 로마에서 시작해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로 이어진다. 고대 로마인들은 이 길을 통해 그리스와 이집트까지 진출했다. 고대 로마의 가장 위대한 황제로 꼽히는 아우구스투스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를 멸망시킨 후 이 길을 통해서 로마로 개선하기도 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길인 아피아 가도. 말과 전차가 달리던 길이 지금은 자동차로 가득차 있다. ⓒ이석원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길인 아피아 가도. 말과 전차가 달리던 길이 지금은 자동차로 가득차 있다. ⓒ이석원

아피아 가도는 고대 로마제국이 유럽 뿐 아니라 그리스와 아프리카까지 세력을 확장할 때 그 중심에 있던 길이다. ⓒ이석원 아피아 가도는 고대 로마제국이 유럽 뿐 아니라 그리스와 아프리카까지 세력을 확장할 때 그 중심에 있던 길이다. ⓒ이석원

버스가 아피아 가도를 달릴 때면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로마 근교의 전원이 멋지게 다가온다. 이탈리아의 상징처럼 인식되는 사이프러스 나무의 행렬도 멋지다. ⓒ이석원 버스가 아피아 가도를 달릴 때면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로마 근교의 전원이 멋지게 다가온다. 이탈리아의 상징처럼 인식되는 사이프러스 나무의 행렬도 멋지다. ⓒ이석원

24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아피아 가도는 마치 시간이 정지된 공간같다. 고층에 현대적인 건물은 볼 수 없고, 낡고 작지만 나름의 운치가 빛나는 그런 건물들이 눈을 지루하지 않게 해 준다. ⓒ이석원 24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아피아 가도는 마치 시간이 정지된 공간같다. 고층에 현대적인 건물은 볼 수 없고, 낡고 작지만 나름의 운치가 빛나는 그런 건물들이 눈을 지루하지 않게 해 준다. ⓒ이석원

아피아 가도는 그냥 오래된 길이 아니다. 비록 같은 지역은 아니지만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영화 ‘시네마 천국’이나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마이클 래드포드 감독의 영화 ‘일 포스티노’ 같은 영화들에서 본 이탈리아의 전원이 고스란히 눈 속으로 빨려들어온다. 비현실적으로 줄지어 선 사이프러스 나무며, 지은 지 족히 300년은 돼 보이는 낡지만 정겨운 건물, 로마의 근교이면서도 개발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촌구석’, 그런 말할 수 없이 정겨운 풍경이 가슴 깊은 곳까지 힘차게 밀고 들어온다.

산 칼리스토 카타콤베 입구. ⓒ이석원 산 칼리스토 카타콤베 입구. ⓒ이석원

산 칼리스토 카타콤베 안내소. 이곳에서 표를 사고 카타콤베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한국인 순례자들이 제법 많은 탓인지 유창한 한국말을 구사하는 직원이 인상적인 곳이다. ⓒ이석원 산 칼리스토 카타콤베 안내소. 이곳에서 표를 사고 카타콤베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한국인 순례자들이 제법 많은 탓인지 유창한 한국말을 구사하는 직원이 인상적인 곳이다. ⓒ이석원

그렇게 20여분을 달리면 카타콤베에 도착한다. 카타콤베는 로마 시민들의 공동묘지다. 고대 로마에서는 시내에 황제와 그의 일족들을 제외하고는 무덤을 만들 수 없었다. 그래서 로마 외곽에 넓은 무덤을 만들어 놓고 가족묘 등으로 사용했는데, 그게 카타콤베다. 그곳이 그리스도교인들의 무덤으로 잘못 알려지게 된 것은, 당시 박해 받던 그리스도교인들이 숨어서 신앙생활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로마엔 약 40여개의 카타콤베가 있고, 갱도 길이를 다 합치면 무려 900여 km가 된다. 지금은 그 중 산 칼리스토 카타콤베(Le Catacombe di San Calisto)와 산 세바스티아노 카타콤베(Le Catacombe di San Sebastiano) 정도가 개방돼 있다. 지하 5층 규모로 이뤄진 산 칼리스토 카타콤베는 총 면적 4만 5000평이 넘고 갱도 길이만 20km에 이른다. 그래서 반드시 가이드가 필요하다. 섣불리 혼자 들어갔다가는 미로에 갇혀 나오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 여러 해 전 가이드를 놓친 한 일본 여행객이 길을 잃어 헤매다가 일주일이 넘어서 구출된 적도 있다.

카타콤베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삼삼오오 모여 있는 순례객들. 이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숙련된 가이드의 안내다. ⓒ이석원 카타콤베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삼삼오오 모여 있는 순례객들. 이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숙련된 가이드의 안내다. ⓒ이석원

산 칼리스토 카타콤베 마당에 있는 건물. 쓰여진 글씨의 뜻은 알 수 없고, 기도소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정확한 이 건물의 용도도 확인이 안된다. ⓒ이석원 산 칼리스토 카타콤베 마당에 있는 건물. 쓰여진 글씨의 뜻은 알 수 없고, 기도소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정확한 이 건물의 용도도 확인이 안된다. ⓒ이석원

카타콤베 내부에서 발굴된 초기 그리스도교인들과 관련된 출토품들. 당시 그리스도교인이라는 표시인 물고기 모양의 그림도 보인다. ⓒ이석원 카타콤베 내부에서 발굴된 초기 그리스도교인들과 관련된 출토품들. 당시 그리스도교인이라는 표시인 물고기 모양의 그림도 보인다. ⓒ이석원

카타콤베가 과거 그리스도교인들의 은신처였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단 로마법상 카타콤베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고, 혹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좀처럼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인들을 잡으러 그곳에 들어갔던 로마 병사 중 상당수는 길을 찾지 못해 헤매다가 그리스도교인들에 의해 구출된 후 교인이 된 일이 많았다.

크고 작은 방 구조로 된 카타콤베 내부는 좁고 길고 방향을 전혀 알 수 없는 미로로 이뤄졌다. 신기한 것은 그 곳 토질. 처음 땅을 팔 때는 부드러운 흙이었지만 파 놓고 나면 바위처럼 단단해진다. 그래서 2000년이 됐는데도 카타콤베의 내부는 시멘트 보다 더 단단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산 칼리스토 카타콤베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성녀 세실리아의 무덤이다. 체칠리아라고도 불리는 세실리아(Cesilia)는 원래 로마 원로원 가문 출신이었다가 그리스도교인이 됐다. 세실리아는 하느님께 동정 서원을 하지만 부모님에 의해 강제로 결혼한다. 남편은 이교도 귀족이었던 발레리아노(Valeriano). 그러나 발레리아노는 세실리아의 숭고한 정신에 감복돼 자신도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세실리아의 동정을 지켜준다.

카타콤베 내부는 5층의 층층으로 돼 있는데, 시신을 그냥 안치하는 경우도 있고 작은 석관에 담아 안치하는 경우도 있다. 내부는 일년 내내 15도 내외의 기온을 유지하고 있고, 늘 건조한 상태라 당시 시신들이 자연스럽게 미라가 되기에 적합한 구조였다. ⓒ이석원 카타콤베 내부는 5층의 층층으로 돼 있는데, 시신을 그냥 안치하는 경우도 있고 작은 석관에 담아 안치하는 경우도 있다. 내부는 일년 내내 15도 내외의 기온을 유지하고 있고, 늘 건조한 상태라 당시 시신들이 자연스럽게 미라가 되기에 적합한 구조였다. ⓒ이석원

산 칼리스토 카타콤베서 가장 많은 순례객들의 발길을 잡는 성녀 세실리아의 무덤. 물론 지금 누워있는 형상은 발굴 당시 성녀의 모습을 본떠 모형을 만든 것이다. ⓒ이석원 산 칼리스토 카타콤베서 가장 많은 순례객들의 발길을 잡는 성녀 세실리아의 무덤. 물론 지금 누워있는 형상은 발굴 당시 성녀의 모습을 본떠 모형을 만든 것이다. ⓒ이석원

그러던 중 로마의 행정관에게 미움을 산 발레리아노가 먼저 순교를 하고 세실리아도 배교를 강요당한다. 하지만 세실리아는 완강히 신앙을 지켰고, 결국 사형을 선고받는다. 로마는 세실리아에게 증살(蒸殺 : 증기의 열로 쪄 죽임) 선고를 한다. 그런데 세실리아가 뜨거운 욕실에서 24시간을 버티고 죽지 않자 다시 참수를 명한다.

산 칼리스토 카타콤베에서 나와 아피아 가도를 따라 걷다보면 유명한 교회 하나가 나온다. 예수의 수제자이자 가톨릭에서 초대 교황으로 추앙받는 베드로 사도의 이야기가 얽혀 있는 쿼바디스 교회(Basilica di Quo vadis)다.

아피아 가도에 접한 곳에 보이는 쿼바디스 교회. ⓒ이석원 아피아 가도에 접한 곳에 보이는 쿼바디스 교회. ⓒ이석원

폭군 네로 황제 시절, 그리스도교인들을 잡아다가 콜로세움에서 사자의 밥이 되게 하는 등 최악의 탄압이 자행되고 있을 때 로마 카타콤베에 머물던 베드로가 로마를 벗어나려고 했다. 아피아 가도를 통해 도망치려던 베드로 앞에 홀연히 십자가를 진 예수가 나타난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를 향해 “Quo vadis, Domine(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하고 묻자 예수는 “네가 나의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치니 내가 너 대신 십자가에 다시 못 박히러 간다”고 대답했다. 이에 자신의 비겁함을 뉘우친 베드로는 로마로 돌아가 십자가형을 받게 된다. 그런데 로마의 법정에서 베드로는 “나는 감히 나의 주님과 같은 모양으로 죽을 수 없다”며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한다. 베드로의 시신은 네로의 경기장 언덕에 매장됐는데, 나중에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베드로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 성당을 세우고, 후일 이 성당 자리에 산 피에트로 대성당이 세워진다.

쿼바디스 교회는 그리스도교 역사에 있어서 대단히 유의미한 곳이지만 소박하고 단아한 아름다움이 뭍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이석원 쿼바디스 교회는 그리스도교 역사에 있어서 대단히 유의미한 곳이지만 소박하고 단아한 아름다움이 뭍어나는 곳이기도 하다. ⓒ이석원

쿼바디스 교회는 도망치던 베드로가 예수를 만난 자리에 세워진 것. 교회 내부에는 당시 예수의 발자국이라고 전해지는 흔적이 남겨져 있다. 교회의 전체적인 크기는 유럽의 성당들에게서 보이는 웅장함은 전혀 없다. 차라리 한국의 어느 시골 마을에 있는 예쁘장한 교회 건물처럼 단아하면서 소박하다. 하지만 예수의 발자국이 보존돼 있다는 것 때문에 이곳도 전 세계의 그리스도교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할리우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오래전 KBS ‘명화극장’이었는지, MBC ‘주말의 명화’였는지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늦은 밤 온 가족이 모여 봤던 영화가 떠올랐다. 머빈 르로리가 연출하고 로버트 테일러와 데보라 카가 주연했던 1951년 작 ‘쿼바디스’가 그 영화다. 이 영화의 결말 부분에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그 자리에 세워진 교회를 직접 불 수 있다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 된다.

글/이석원 여행작가·기자

이석원 기자 (galamoi@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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