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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포이 신탁, 신의 계시인가 인간의 통찰인가


입력 2014.07.27 10:16 수정 2014.07.27 16:04        박경귀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 (kipeceo@gmail.com)

<박경귀의 ad Greece>그리스인의 운명관, 신탁의 해석에 국가의 명운과 인간의 운명 갈려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인간이 신을 찾는 이유

한때 ‘안녕들 하십니까?’ 제하의 대자보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이는 자고 나면 터지는 갖가지 재난과 사건 사고 소식에 주변의 안부를 챙겨보는 불안감의 표현이다.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이런 불확실성은 사회와 가정, 개인 모두에게 적용된다. 첨단과학과 문명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현대인도 이렇다. 만물의 이치가 소상히 밝혀지지 않은 고대 사회에서 인간의 삶은 늘 미지의 세계와 불안한 미래 속에 놓여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키르노스야, 어떤 사람도 그의 재난이나 피해에 책임이 없다.
그런 것들은 신들이 관장하는 일이란다.
어떤 사람도 자기가 하는 일이 좋은 결과를 낼지 나쁜 결과를 낼지 알지 못한다.
때로는 결과가 나쁘리라고 생각하지만 훨씬 좋은 결과가 나오고,
때로는 결과가 좋으리라 기대하지만 훨씬 나쁜 결과가 나온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속수무책이고, 미래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신에 의해 구속되어 있고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허망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일은 신들이 원하는 대로 결정될 뿐이란다.“

그리스 메가라 태생의 비가(悲歌) 시인 테오그니스(Theognis, BC 544?~BC 480)가 자신의 친구 폴리파오스의 아들인 키르노스에게 주는 ‘미래의 결과’라는 교훈시다. 테오그니스는 플라톤과 아테네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테오그니스의 시는 미래에 대해 알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인간의 일이 신의 뜻에 따라 결정된다는 운명론적 사고를 보여준다. 이 시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사유 방식의 일단을 잘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속에서 신의 결정의 수용함으로써 인간은 심리적 안정감을 되찾을 수 있다. 내 뜻대로 할 수 없다고 여기고 신의 뜻에 따라 행동한다면 좋은 결과이든 나쁜 결과이든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고대 사회에서는 이런 경향이 강했다.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기에 달렸다고 여기는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현대 사회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고 봐야 한다.

그리스 보이오티아 타나그라(Tanagra)에서 발견된 연회용 술잔인 킬릭스(kylix) 안쪽에 그려진 그림이다. 테오그니스의 시를 읊고 있다. BC 5세기 작품 추정, 1884년 작, 사진 Mitteilungen des Deutschen Archaologischen Instituts 그리스 보이오티아 타나그라(Tanagra)에서 발견된 연회용 술잔인 킬릭스(kylix) 안쪽에 그려진 그림이다. 테오그니스의 시를 읊고 있다. BC 5세기 작품 추정, 1884년 작, 사진 Mitteilungen des Deutschen Archaologischen Instituts

아무튼 신의 뜻에 따르려면 신의 뜻을 알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따라 신을 뜻을 묻는 관습이 자연스럽게 생겼다. 특히 고대 그리스인들은 국가나 가정, 개인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신의 뜻을 묻고 이에 따라 의사결정을 하는 관습을 중요시 했다. 이른바 신탁(神託)의 행위다.

그리스 세계의 여기저기 신전에 크고 작은 신탁소가 만들어졌다. 서북부 지방에 있는 도도나의 제우스 신전, 델포이 아폴론 신전,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는 에피다우로스의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포키스의 아폴론 신전, 테베의 아폴론 이스메니오스 신전 등이 대표적이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여사제를 통해 미래의 소망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 지 묻고 들을 수 있었다. 신탁의 행위는 신을 경배하는 종교적 성격과 결부되어 그리스인의 사고와 행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특히 신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진 신성한 예언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존중받았다.

도도나(Dodona) 고대 유적지, 제우스와 디오네(Dione) 신전의 건축 흔적만 남아있다. 사진 Jean Housen 도도나(Dodona) 고대 유적지, 제우스와 디오네(Dione) 신전의 건축 흔적만 남아있다. 사진 Jean Housen

델포이 아폴론 신전의 복원 상상도, 웅장함과 간결한 도리아식 기둥이 장엄하다. 지붕 꼭대기에 신탁을 상징하는 삼각대(Tripod)가 축조되어 있다. 신전을 둘러싼 기둥은 모두 38개다.  건물의 길이는 무려 60m, 폭은 23m나 된다. 안에는 대지의 배꼽을 상징하는 옴팔로스가 있었고, 신탁을 전해주는 피티아가 머무는 신비의 성소가 있었다. ⓒ박경귀 델포이 아폴론 신전의 복원 상상도, 웅장함과 간결한 도리아식 기둥이 장엄하다. 지붕 꼭대기에 신탁을 상징하는 삼각대(Tripod)가 축조되어 있다. 신전을 둘러싼 기둥은 모두 38개다. 건물의 길이는 무려 60m, 폭은 23m나 된다. 안에는 대지의 배꼽을 상징하는 옴팔로스가 있었고, 신탁을 전해주는 피티아가 머무는 신비의 성소가 있었다. ⓒ박경귀

아폴론 신전의 정면도 및 평면도, 왼쪽이 정문이고 앞에서부터 전실, 내실, 후실로 구분된다. ⓒ 박경귀 아폴론 신전의 정면도 및 평면도, 왼쪽이 정문이고 앞에서부터 전실, 내실, 후실로 구분된다. ⓒ 박경귀

서쪽에서 바라본 델포이 아폴론 신전의 모습, 신전의 지하에 피티아 여사제가 신탁을 구하던 아디톤(Adyton) 성소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 박경귀 서쪽에서 바라본 델포이 아폴론 신전의 모습, 신전의 지하에 피티아 여사제가 신탁을 구하던 아디톤(Adyton) 성소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 박경귀

북쪽에서 남쪽으로 바라본 아폴론 신전, 심산유곡에 둘러싸인 델포이의 신비로운 지세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박경귀 북쪽에서 남쪽으로 바라본 아폴론 신전, 심산유곡에 둘러싸인 델포이의 신비로운 지세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박경귀

델포이 아폴론 신전의 입구인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기둥 6개의 일부만 남아있다. ⓒ박경귀 델포이 아폴론 신전의 입구인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기둥 6개의 일부만 남아있다. ⓒ박경귀

델포이의 신성한 길, 아폴론을 만나러 가는 길

신탁소의 명성은 신탁의 예언이 얼마나 적중하는지에 달렸다. 델포이 신탁은 당대 그리스와 유럽뿐만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에까지 최고의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신탁을 묻는 사절단이 줄을 서게 만들었던 것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안에 대해 영험한 계시를 내려준 적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다. 신탁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거나 개인의 운명을 좌우했다.

델포이 성역의 중앙에 위치한 아폴론 신전에 이르는 길은 ‘신성한 길(Sacred Way)'로 불렸다. 수많은 그리스인들이 신성한 이 길을 통해 전승의 봉헌물을 갖고 가슴 벅차게 올랐다. 때론 국가의 위기와 개인적 불운을 막기 위해 노심초사하며 올랐을 것이다. 신성한 길 양 옆에는 각국에서 봉헌한 3,000여개의 보물을 보관하는 보물창고와 기념 조형물이 가득했다. 입구에서부터 지그재그로 10여분 올라간다. 아폴론을 만나기 위해선 의심과 욕망을 모두 내려놓고 빈 마음으로 올라야 한다.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된다.

델포이 성역의 아폴론 신전으로 올라가는 신성한 길 ⓒ박경귀 델포이 성역의 아폴론 신전으로 올라가는 신성한 길 ⓒ박경귀

신성한 길옆에 놓인 옴파로스 모조품, 진품은 델피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델포이 성역 여기저기에 대지의 배꼽을 상징하는 옴파로스가 여럿 놓여 있었다. ⓒ박경귀 신성한 길옆에 놓인 옴파로스 모조품, 진품은 델피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델포이 성역 여기저기에 대지의 배꼽을 상징하는 옴파로스가 여럿 놓여 있었다. ⓒ박경귀

신성한 길옆에 있던 한 보물창고 건물의 기둥 일부, 이오니아식 기둥머리 양식과 기둥 윗부분의 아칸서스 잎 문양 부조가 섬세하고 아름답다. ⓒ박경귀 신성한 길옆에 있던 한 보물창고 건물의 기둥 일부, 이오니아식 기둥머리 양식과 기둥 윗부분의 아칸서스 잎 문양 부조가 섬세하고 아름답다. ⓒ박경귀

맛살리안(현재의 프랑스 마르세이유)의 보물창고의 기둥 일부, 맛살리안 보물창고는 델포이 성역에서 조금 아래에 떨어져 있던 아테나 프로나이아 성역에 있었다. 델포이에서 가장 큰 규모의 보물 창고였다. 델포이에 대한 봉헌이 그리스 본토 뿐 아니라 지중해 연안의 그리스 식민도시 전역에 걸쳐 있었음을 말해준다. 델피 고고학 박물관 소장 ⓒ박경귀 맛살리안(현재의 프랑스 마르세이유)의 보물창고의 기둥 일부, 맛살리안 보물창고는 델포이 성역에서 조금 아래에 떨어져 있던 아테나 프로나이아 성역에 있었다. 델포이에서 가장 큰 규모의 보물 창고였다. 델포이에 대한 봉헌이 그리스 본토 뿐 아니라 지중해 연안의 그리스 식민도시 전역에 걸쳐 있었음을 말해준다. 델피 고고학 박물관 소장 ⓒ박경귀


델포이 성역에서 가장 온전한 형태로 복원된 아테네 보물창고, ⓒ박경귀 델포이 성역에서 가장 온전한 형태로 복원된 아테네 보물창고, ⓒ박경귀

신성한 길 초입 왼쪽에 있는 테베 보물창고 터, ⓒ박경귀 신성한 길 초입 왼쪽에 있는 테베 보물창고 터, ⓒ박경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스파르타 인근에 있던 아르고스 왕의 봉헌 보물창고, 반원형의 벽체가 아직도 튼튼하게 남아있다. 보통의 건물이 장방형인데 비해 이 건물은 특이한 구조로 건축되었다. 신성한 길 초입의 오른쪽에 있다. ⓒ박경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스파르타 인근에 있던 아르고스 왕의 봉헌 보물창고, 반원형의 벽체가 아직도 튼튼하게 남아있다. 보통의 건물이 장방형인데 비해 이 건물은 특이한 구조로 건축되었다. 신성한 길 초입의 오른쪽에 있다. ⓒ박경귀

신성한 길 오른쪽에 있는 보물창고의 일부 남아있는 기단, 원형건물, 즉 톨로스(Tholos)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경귀 신성한 길 오른쪽에 있는 보물창고의 일부 남아있는 기단, 원형건물, 즉 톨로스(Tholos)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경귀

자신의 왕국을 멸망시킨 크로이소스의 신탁의 오판

델포이 신탁이 가장 널리 알려지게 된 일화 몇 가지만 소개한다. 먼저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나오는 지금의 터키 지방에 위치했던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Kroisos, BC 560?∼BC 546)의 일화부터 살펴보자. 리디아는 페르시아가 부상하기 이전에 아시아에서 매우 강대하고 부유한 제국이었다. 크로이소스는 날로 세력이 커지는 페르시아에 대해 불안해하면서 이들의 국력이 더 커지기 전에 제압할 방도를 찾고자 했다.

크로이소스는 국가의 미래를 좌우할 중차대한 이 사안을 보다 정확하게 예언해 줄 수 있는 신탁소를 가려낸 후 그 신탁의 결정에 따르기로 작정했다. 이전의 부왕(父王)이던 알리앗테스는 소아시아의 그리스인 도시 밀레토스를 자주 침공하기도 했지만, 크로이소스 시대에는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배후에 있는 에게 해 연안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감히 리디아를 공격할 염려가 없다는 점도 페르시아 공략을 유혹하는 요인이 되었다.

리디아 백성으로부터 봉헌을 받는 리디아의 크로이소스, 봉헌 기록을 펼쳐 보는 그의 표정에서 넘치는 부에 대한 흡족해 하는 태도가 물씬 느껴진다. 프랑스 화가 Claude Vignon(1593-1670) 1629년 작 리디아 백성으로부터 봉헌을 받는 리디아의 크로이소스, 봉헌 기록을 펼쳐 보는 그의 표정에서 넘치는 부에 대한 흡족해 하는 태도가 물씬 느껴진다. 프랑스 화가 Claude Vignon(1593-1670) 1629년 작

크로이소스는 먼저 유명한 신탁소 여러 곳에 사절단을 보내 어느 곳의 신탁이 영험한 지 시험해 보기로 한다. 도도나, 델포이, 포키스의 신탁소는 물론, 리비에, 이집트의 암몬 신탁소까지 사절을 보내 신탁의 효험을 떠보았다. 그는 사절단을 떠나보낸 날로부터 100일째 되는 날에 크로이소스 왕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사제들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수 천리 떨어진 곳에 있는 리디아 왕의 행동을 어떻게 예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여러 나라의 신탁소에 파견되었던 사절단이 오는 대로 신탁의 응답을 개봉해보았지만 크로이소스의 그날의 행적을 정확하게 맞춘 것이 없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델포이의 신탁은 이렇게 적혀있었다.

“나는 바닷가 모래알의 수도 알고 바다의 너비도 알며,
벙어리의 마음도 알고 침묵하는 자의 말도 알아듣는다네.
내 코에는 등껍질이 딱딱한 거북을 청동 솥 안에서
새끼 양의 살코기와 함께 삶은 냄새가 솔솔 나는구나,
솥은 바닥이 청동이고, 뚜껑도 청동이구나.“(Ⅰ47)

크로이소스는 깜짝 놀랐다. 그는 그 때 실제로 거북과 새끼 양 요리를 했었다. 결코 맞출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델포이의 신탁만이 진정한 신탁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는 델포이의 영험한 신탁에 감사하며 가축 3천 마리를 제물로 바치고 숱한 금박 침상과 황금 잔 등 엄청난 보물을 불태우며 아폴론 신의 호감을 받기를 바랐다. 그는 보물들을 녹여 황금사자상을 만들어 델포이 아폴론 신전에 봉헌했다. 또 은제 대야와 황금 여인상도 바쳤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자신이 방문했을 당시만 해도 그 봉헌물들이 신성한 길옆의 보물창고에 있었다고 전했다.

'델피의 여사제', 아폴론 신전의 여사제 피티아(Pythia)는 아폴론 신전의 지하에 있는 성소 아디톤에서 삼각대 위에 앉아 지하에서 스며나오는 성령(聖靈)의 기운을 받아 신들린 상태에서 신탁을 전했다고 한다. 한 손에 월계수 가지를 들고 있고, 한 손에 신성한 무언가를 담은 접시를 들고 있다. 황홀경에 빠진 듯한 눈동자가 인상적이다. Artist John Collier(1850-1934)의 1891년 작, Art Gallery of South Australia 소장, 사진 Art Gallery of South Australia '델피의 여사제', 아폴론 신전의 여사제 피티아(Pythia)는 아폴론 신전의 지하에 있는 성소 아디톤에서 삼각대 위에 앉아 지하에서 스며나오는 성령(聖靈)의 기운을 받아 신들린 상태에서 신탁을 전했다고 한다. 한 손에 월계수 가지를 들고 있고, 한 손에 신성한 무언가를 담은 접시를 들고 있다. 황홀경에 빠진 듯한 눈동자가 인상적이다. Artist John Collier(1850-1934)의 1891년 작, Art Gallery of South Australia 소장, 사진 Art Gallery of South Australia

델피 성역에서 발굴된 삼각대(Tripod), 이 삼각대가 여사제 피티아가 앉았던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삼각대 위의 용기의 크기나 모양으로 보아 착석용으로 보기에 무리가 있다. 아마 기름이나 곡식 등 무언가를 담는 용기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해 본다. 델피 고고학 박물관 소장, ⓒ박경귀 델피 성역에서 발굴된 삼각대(Tripod), 이 삼각대가 여사제 피티아가 앉았던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삼각대 위의 용기의 크기나 모양으로 보아 착석용으로 보기에 무리가 있다. 아마 기름이나 곡식 등 무언가를 담는 용기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해 본다. 델피 고고학 박물관 소장, ⓒ박경귀

이후에 크로이소스는 델포이 아폴론 신전과 테베의 아폴론 이스메니오스 신전에 황금 방패와 황금 창 등 많은 봉헌물을 사절단편에 보내며 페르시아와 전쟁을 해야 할 지, 그럴 경우 동맹군을 구해야 할지를 물게 했다. 묘하게도 두 신탁소의 응답은 똑같았다. “만약 크로이소스가 페르시아인들과 전쟁을 하면 대국(大國)을 멸하게 될 것이라며, 가장 강력한 헬라스 국가를 찾아내어 동맹을 맺으라고 권고했다.”

크로이소스는 델포이의 신탁에 크게 기뻐했다. 자신이 페르시아를 멸망시킬 것으로 계시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는 통 크게 사례했다. 델피의 전 시민 각자에게 황금 2스타테르(stater, 36g)씩 주도록 했다. 1인당 10돈에 가까운 수준이니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수 백 억원은 되었을 듯싶다. 과연 그는 당대 최고로 부유한 왕이었음을 만방에 과시했다. 델포이인들은 모든 리디아인들에게 면세 특권과 델포이 시민권을 주었다. 특히 신탁 대기 순번에 관계없이 우선권을 주어 보답했다. 여기까지는 행복한 전개다. 하지만 결말이 비극적이다.

크로이소스는 페르시아의 키로스 2세와 전쟁을 벌여 패배하고 자신의 제국을 멸망하게 만든다. 그는 “대국을 멸하게 될 것”만 믿었지, 그 대국이 리디아일지, 페르시아일지에 대해 숙고하지 않았던 것이다. 신탁의 내용보다 신탁의 해석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솔론에게 자신의 보물들을 보여주는 크로이소스, 그가 얼마나 부유한 왕이었는지 잘 보여준다. 크로이소스는 이후에 솔론에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 당연히 엄청난 부를 가진 자신을 부러워하며 지상 최고의 행복한 인간이라고 말해줄 줄 알았다. 하지만 솔론은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반석에 올린 사람답게 지혜로웠다. 그는 노년에 평범하지만 행복하게 사는 자기가 아는 주변의 보통 사람을 예로 들었다. Gaspar van den Hoecke(1603-1641)의 1630년대 작품, 폴란드 바르샤바 국립 미술관 소장, 사진 www.zlotywiek.mnw.art 솔론에게 자신의 보물들을 보여주는 크로이소스, 그가 얼마나 부유한 왕이었는지 잘 보여준다. 크로이소스는 이후에 솔론에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 당연히 엄청난 부를 가진 자신을 부러워하며 지상 최고의 행복한 인간이라고 말해줄 줄 알았다. 하지만 솔론은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반석에 올린 사람답게 지혜로웠다. 그는 노년에 평범하지만 행복하게 사는 자기가 아는 주변의 보통 사람을 예로 들었다. Gaspar van den Hoecke(1603-1641)의 1630년대 작품, 폴란드 바르샤바 국립 미술관 소장, 사진 www.zlotywiek.mnw.art

장작더미 위의 크로이소스, 그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해 키로스 2세에게서 장작더미 위의 화형을 선고받았다. 죽으려는 순간 아테네의 솔론이 자신에게 일깨워준 행복의 의미를 생각하며 솔론을 부르며 탄식한다. 키로스 2세가 전말을 듣고 그를 살려준다. 그는 키로스 2세의 참모가 되어 페르시아가 대제국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한다. 그는 리디아의 왕으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던 자신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아테네의 현인 솔론이 사람이 죽기 전 까지는 행복한 삶인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자신을 가벼이 여긴다고 생각한 그는 솔론을 내쫓았다. 하지만 그는 죽기 직전에야 비로소 솔론이 준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쳤던 것이다. 화가 Myson이 BC 500~490년 간 그린 작품으로 추정, 높이 59.5 cm, 루브르 박물관 소장, 사진 Bibi Saint-Pol  장작더미 위의 크로이소스, 그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해 키로스 2세에게서 장작더미 위의 화형을 선고받았다. 죽으려는 순간 아테네의 솔론이 자신에게 일깨워준 행복의 의미를 생각하며 솔론을 부르며 탄식한다. 키로스 2세가 전말을 듣고 그를 살려준다. 그는 키로스 2세의 참모가 되어 페르시아가 대제국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한다. 그는 리디아의 왕으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던 자신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아테네의 현인 솔론이 사람이 죽기 전 까지는 행복한 삶인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자신을 가벼이 여긴다고 생각한 그는 솔론을 내쫓았다. 하지만 그는 죽기 직전에야 비로소 솔론이 준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쳤던 것이다. 화가 Myson이 BC 500~490년 간 그린 작품으로 추정, 높이 59.5 cm, 루브르 박물관 소장, 사진 Bibi Saint-Pol

스파르타의 패배 부른 신탁의 오판

국가의 명운이 달린 전쟁의 예언에서 신탁을 잘못 해석해서 빚어진 또 다른 사례가 있다. 스파르타는 리쿠르고스의 개혁이후 BC 6세기경에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계속 세력을 팽창했다. 하지만 반도 중앙부에 위치한 테게아(Tegea)와 부딪혀 번번이 졌다. 스파르타가 그리스 최강의 군대가 되기 이전의 일이다. 스파르타인들은 테게아는 물론 아르카디아 지역 전체를 장악할 수 없겠는지 델포이의 신탁에 물었다. 스파르타는 과욕을 부렸다. 신의 계시는 이러했다. “아르카디아를 요구하는가? 큰 것을 요구하는구나. 나는 그것을 그대에게 주지 않으리라. 나는 그대에게 주지 않으리라. 아르카디아에서는 도토리를 먹는 남자들이 많아 그들이 그대를 제지하리라. 그러나 나는 그대에게 인색하고 싶지 않아, 테게아의 무도장을 그대에게 주겠노라. 그러면 그대는 그곳을 돌아다니며 밧줄로 아름다운 들판을 측량할 수 있으리라.”

스파르타인들은 아르카디아 전체를 장악하려던 야심은 접어야 했지만, 한 도시를 점령할 수는 있다는 예견으로 받아들였다. 테게아의 들판을 스파르타가 마음껏 장악할 수 있으리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 군대는 사기충천했다. 아르카디아 전 지역 정복은 포기하는 대신, 테게아 한 도시를 침공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승리를 기정사실로 믿고 출전하면서 아예 테게아인들을 채울 족쇄를 가져갔다. 그들을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스파르타는 이번에도 또 졌다. 그들은 테게아인들에 의해 자신들이 가져갔던 족쇄를 찬 채 테게아의 “들판을 측량”해야 했다. 델포이의 신탁은 누가 영광의 주체가 될 것인지를 명확하게 적시하지 않았었다. 결국은 스파르타가 해석을 자의적으로 한 것이다. 스파르타인들은 또 다시 델포이의 신탁을 받아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의 유골을 테게아에서 발굴하여 스파르타로 옮긴 이후부터 전쟁에서 우위에 서게 되었다.

아르카디아 지방의 테게아에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한 아테나 아레아(Athena Alea) 신전이 있었다. BC 394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재건축 되었다. 현재는 바닥 기단만 남아있다. 이곳에 그리스 조각가 엔도에우스(Endoeus)가 상아로 조상한 아테나 상이 있었다.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포럼을 장식하기 위해 옮겨갔다고 한다. 또 테게아의 아테나 신전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의 피난처로 활용되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테게아가 반도 중심에 위치한 강성한 국가였기 때문에 가능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Carole Raddato 아르카디아 지방의 테게아에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한 아테나 아레아(Athena Alea) 신전이 있었다. BC 394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재건축 되었다. 현재는 바닥 기단만 남아있다. 이곳에 그리스 조각가 엔도에우스(Endoeus)가 상아로 조상한 아테나 상이 있었다.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포럼을 장식하기 위해 옮겨갔다고 한다. 또 테게아의 아테나 신전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의 피난처로 활용되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테게아가 반도 중심에 위치한 강성한 국가였기 때문에 가능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Carole Raddato

애매모호한 델포이 신탁, 영감인가 정치적 판단인가

크로이소스와 스파르타의 두 사례를 보면, 공통적으로 주어진 신탁이 애매모호했다. 신탁을 물었던 당사자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면서, 자신들의 희망과 정반대의 나쁜 결과를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크로이소스는 자신의 제국을 멸망시켰고, 스파르타는 패전하여 참전 병사들은 적국의 테게아의 노예가 되었다.

그런데 신탁을 잘못 해석한 것이 크로이소스와 스파르타의 잘못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사실 신탁의 구절을 가만히 살펴보면, 신탁을 구한 쪽에게 유리하게도 보이기도 하고, 반대로 이들의 상대인 적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될 여지도 많았다. 그렇다면 결국 신탁을 주는 입장에서는 어느 한쪽에게 단정적으로 승리를 약속할 때 겪을 수 있는 위험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어느 쪽에서든 좋은 쪽으로 해석해도 괜찮을 그런 모호한 예언을 준 것은 아니었을까?

신탁 내용의 공통점은 애매모호했다. 또 중의성(重意性)을 갖는 어휘와 은유를 사용하고 있다. 그것도 산문이 아닌 운율을 갖춘 시적 표현을 썼다. 델포이의 신탁은 왜 이런 형식을 즐겨 썼을까. 이중적 의미를 가진 신탁이어야 적중할 확률이 높아진다. 신탁은 여사제 피티아가 신들린 듯 말을 하면, 나이가 지긋하고 경륜을 갖춘 남자 사제들이 이를 받아 적고 운율적 시어로 문장화해서 전달했다. 신탁은 아폴론 신과 접신(接神)한 여사제 피티아의 영감과 예지에서 나온 통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 델포이의 원로격인 남성사제들의 정치적 판단력과 지혜가 결합된 것이라고 보는 게 더 현실에 부합하는 것이 아닐까.

델포이는 그리스 세계에서 누구나 안전하게 드나들 수 있는 성역이었다. 따라서 델포이는 자연스럽게 전 세계의 온갖 정보가 집결되고 공유, 확산되는 허브 역할을 했을 것 같다. 따라서 남성사제들이 가진 정보력과 정무적 감각이 피티아로부터 받은 영감의 언어를 최종적인 신탁의 글로 정제해 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 같다. 나는 이런 요소들이 결합되어 신탁의 신통력이 높아졌을 것이라고 추정해 본다.

아테네가 페르시아의 3차 침공을 당하여 멸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그들도 역시 델포이의 신탁을 구했었다. 그들은 “제우스께서는 그대에게 나무 성벽(teichos xylinon)을 주실 것인즉, 이 나무 성벽만이 파괴되지 않고 그대와 그대의 자식들을 도와주게 되리라.”는 신탁을 받는다. 그들은 격론 끝에 나무 성벽을 ‘함선’으로 해석하여 아테네를 비우고, 살라미스 해전에 온 국력을 쏟아 승전한 바 있다(이 신탁의 내용에 대해선 연재 5에서 이미 자세히 기술했다).

아무튼 크로이소스나 스파르타의 경우처럼 델포이의 신탁이 자신들의 예상과 맞아떨어지지 않았다하여 그들이 델포이의 신통력을 의심하거나 원망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신탁의 잘못이 아니라, 자신들의 교만과 무지, 아전인수식 해석에 원천적인 잘못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이런 까닭에 델포이 신탁의 위엄은 빛을 더해 갔다. 이와 함께 신의 계시에 보답하는 각국의 봉헌물이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델포이는 세계에서 가장 진기한 보물과 예술작품으로 뒤덮이게 되고 풍요로운 도시가 되었다.

모친살해자 오레스테스의 정화

델포이의 신탁은 국가의 명운이 아닌 개개인의 미래를 예언하고 이들의 고민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리스인의 중요한 삶의 결정은 신탁으로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신탁은 대부분의 시민들에게 일상화되었다. 그리스의 설화, 문학 작품, 역사에는 개개인의 신탁에 의해 만들어진 희로애락이 숱하게 담겨있다.

델포이 아폴론 신전의 신탁은 살인죄 등 중죄를 범한 사람들을 정화(淨化)시켜 주는 곳이기도 했다. 죄지은 자에게 신전은 치외법권(extraterritoriality, 治外法權) 지역이다. 여러 신전이 모두 그렇지만 델포이의 상징성은 더욱 컸다. 헤라클레스가 12고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그리스의 영웅이 되고, 사후에 신의 반열에 오르게 된 계기도 바로 신탁에서 비롯됐다. 헤라클레스 역시 잠시 광기에 빠져 아내와 자식들을 죽인 후 그 죄를 델포이에서 정화하면서 아폴론에게서 12가지 과업을 부여받았던 것이다.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 아이기스토스를 죽인 후 복수의 여신에 쫓기다 자신의 죄를 정화하기 위해 찾은 곳도 델포이 아폴론 신전이었다. 그는 자신의 범죄가 아폴론의 신탁을 이행한 것이라고 명분을 대었었기 때문에 더욱 이곳을 찾을 이유가 있었다.

종모양의 적색상 크라테르(bell-krater)에 그려진 델피의 오레스테스(Orestes). 오레스테스가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와서 자신의 정화를 요청했다. 왼쪽에 서 있는 아테나에게 눈빛을 나누며 자신의 정화를 호소하는 듯하다. 아테나 여신은 오레스테스가 델피에서 정화를 끝내자 그를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스 법정에 세운다. 배심원 심판에서 가부 동수 상황을 만든 후 최종적으로 무죄판결을 내린다. 오레스테스가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이 그가 어머니를 살해한 살인자임을 나타낸다. 몸에 여러 마리의 뱀을 끼고 삼각대 위에 있는 여인은 오레스테스에게 달려드는 복수의 여신이다. 복수심이 가득 찬 눈매가 매섭다. 오레스테스의 바로 오른쪽에 있는 남성은 그의 절친 필라데스다. 그는 이 살인극의 조력자다. 하지만 직접적 으로 살인을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죄가 크지 않다는 듯 복수의 여신의 눈을 피해 외면하고 있다. 그리스의 식민도시인 이탈리아 남부지방 파에스툼(Paestum)에서 발굴되었다. BC 330년 경 작품으로 추정된다. 화가 Python, 런던 대영박물관 소장, 사진 Jastrow 종모양의 적색상 크라테르(bell-krater)에 그려진 델피의 오레스테스(Orestes). 오레스테스가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와서 자신의 정화를 요청했다. 왼쪽에 서 있는 아테나에게 눈빛을 나누며 자신의 정화를 호소하는 듯하다. 아테나 여신은 오레스테스가 델피에서 정화를 끝내자 그를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스 법정에 세운다. 배심원 심판에서 가부 동수 상황을 만든 후 최종적으로 무죄판결을 내린다. 오레스테스가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이 그가 어머니를 살해한 살인자임을 나타낸다. 몸에 여러 마리의 뱀을 끼고 삼각대 위에 있는 여인은 오레스테스에게 달려드는 복수의 여신이다. 복수심이 가득 찬 눈매가 매섭다. 오레스테스의 바로 오른쪽에 있는 남성은 그의 절친 필라데스다. 그는 이 살인극의 조력자다. 하지만 직접적 으로 살인을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죄가 크지 않다는 듯 복수의 여신의 눈을 피해 외면하고 있다. 그리스의 식민도시인 이탈리아 남부지방 파에스툼(Paestum)에서 발굴되었다. BC 330년 경 작품으로 추정된다. 화가 Python, 런던 대영박물관 소장, 사진 Jastrow

복수의 여신에게 쫓기다 델피의 아폴론 신전으로 몸을 피신한 오레스테스. 크라테르(crater) 도기에 담의 그림을 일러스트레이션(illustration)으로 재현한 작품이다. 오레스테스는 대지의 중심인 옴파로스를 움켜쥐고 구원을 청하고 있다. 왼쪽의 검게 그린 여인상은 복수의 여신이다. 오레스테스의 오른쪽에는 그에게 우호적인 아테나가 서 있고, 왼쪽에는 아폴론이 복수의 여신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내고 있다. Karl Botticher(1806-89)의 1859년 작, 나폴리 국립고고학 박물관 소장 복수의 여신에게 쫓기다 델피의 아폴론 신전으로 몸을 피신한 오레스테스. 크라테르(crater) 도기에 담의 그림을 일러스트레이션(illustration)으로 재현한 작품이다. 오레스테스는 대지의 중심인 옴파로스를 움켜쥐고 구원을 청하고 있다. 왼쪽의 검게 그린 여인상은 복수의 여신이다. 오레스테스의 오른쪽에는 그에게 우호적인 아테나가 서 있고, 왼쪽에는 아폴론이 복수의 여신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내고 있다. Karl Botticher(1806-89)의 1859년 작, 나폴리 국립고고학 박물관 소장

소크라테스를 죽인 델포이의 신탁?

델포이 신탁은 개인의 운명을 바꾸고 인류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가장 중요한 사례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신탁이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플라톤의 저작 '소크라테스의 변론'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소크라테스는 신을 부정하고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죄목으로 아테네 법정에 서게 된다. 그는 자신이 아테네의 지혜로운 자들을 찾아다니며 대담을 나누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델포이의 아폴론 신을 증인으로 세우겠다며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친구인 카이레폰이 델포이를 찾아가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 있는 자가 있는지” 물었고, 여사제 피티아가 “소크라테스보다 지혜 있는 자가 아무도 없다”는 신탁을 내렸다는 것이다.

신이 거짓말을 할 까닭이 없겠지만, 소크라테스는 이 신탁을 통해 “신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대체 무슨 수수께끼를 내고 있는 것일까?” 숙고했다는 것이다. 분명 자신보다 지혜로운 사람들이 많을 것이기 때문에 자신은 지혜로운 사람을 찾아 문답하는 가운데 그들이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서 그들의 미움을 받게 된 것이라고 소명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은 결코 지혜롭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지혜로운 점이 있다면 역설적이게도 “나는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생각하는, 오직 그것만으로 내가 더 지혜가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즉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는 것이 지혜라면 지혜일 뿐 자신은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지혜롭다는 자들이 사실은 무지하면서도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지혜로운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그걸 지혜라고 한다면 지혜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소크라테스 좌상, 아테네 학술원 앞에 있다. ⓒ박경귀 소크라테스 좌상, 아테네 학술원 앞에 있다. ⓒ박경귀

어쨌든 델포의 신탁은 소크라테스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인가?’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의문했다. 스스로 무지하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결코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지혜로운 사람과의 대담을 통해 명확히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저명한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씩 만나가며 그들의 지혜를 탐색하고 그들의 지혜를 배우고자 했다. 하지만 누구에게서도 명쾌한 지혜를 얻지 못했다. 궁극적 지혜를 향해 집요하게 파고드는 소크라테스의 문답법, 즉 엘렝코스(elenchos)에 지혜롭다는 사람들이 진력을 내고 달아나려고 했다.

지식인들에게 자신들의 가식과 무지를 여지없이 드러내게 하고 깨부수는 소크라테스가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자신들을 망신주려는 것으로 오해하고 그를 기피하게 된다. 그가 시민법정에 서게 되고 사형 당하게 된 요인 중에 하나는 소크라테스가 지식인과 대중들의 ‘무지(無知)의 지(知)’를 각성시키려는 자신의 천명(天命)의 소임에 매진한 것이다.

델포이의 신탁은 소크라테스에게 신성한 소명을 일깨워주었다. ‘너 자신을 알라(Gnothi Sauton)!’ 이 말은 보통 소크라테스가 한 말로 알려져 있지만 잘못 알려진 것이다. 사실은 델포이의 신전 기둥에는 쓰인 문구였다. 아폴론 신전의 기둥에는 그리스인들을 교화하기 위한 짤막한 경구(警句)들이 여러 가지 씌어 있었다. ‘지나치지 말라(Meden Agan)!’도 이런 예다.

어쩌면 아폴론 신이 인간에게 당부하는 예지가 담긴 말인지도 모른다. ‘너 자신을 알라’나 ‘지나치지 말라’는 이야기는 모든 그리스인의 삶의 좌표가 될 만한 격언으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던 문구였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직접 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이 경구의 취지를 가장 우직하게 실천해 보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지식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소크라테스가 요구한 ‘너 자신을 알라’는 지혜 사랑의 철저함은 그들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아니 아테네 시민들 모두가 소크라테스를 힘겨워한 측면이 많다. 더구나 민중의 타락을 경고하며 민주정에 비판적이었던 소크라테스가 위험하게 보였을 수 있다.

아무튼 지식인들, 민중과의 불화는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그는 회피하지 않았다. 죽음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지혜 사랑을 향한 그의 철학적 삶은 자신을 일관되게 지탱하게 했고, 사후에 그를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그가 2400여년 가까이 인류의 스승이 될 수 있었던 첫 계기는 바로 델포이의 신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비극적 운명에 맞선 오이디푸스 왕

델포이의 신탁은 개인의 불행한 미래를 예견해주고 이를 회피해 나갈 수 있는 방책을 강구하도록 해주는 인생의 길라잡이 역할도 했다. 하지만 델포이의 불행한 신탁은 개인이 아무리 피해 달아나려 해도 결국 운명의 예정 경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보여주었다. 저주 받은 운명을 피하려는 몸부림이 오히려 운명의 굴레로 더 깊이 빠져 들어가는 만드는 상황이 되곤 하였다. 이런 점이 바로 신탁이 만드는 비극적 요소다. 대표적인 예가 오이디푸스의 신탁이다.

오이디푸스(Oedipus)는 코린토스의 왕 폴뤼보스의 아들로 자랐다. 성장한 후 연회 자리에서 어떤 취객에게 오이디푸스가 왕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말을 듣게 된다. 그는 왕과 왕비에게 진실을 알려달라고 했지만 그들이 부인하자 마음이 놓였지만, 불안한 마음에 델포이를 찾아 신탁을 구한다.

그는 비극적인 운명이 자신에게 내려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가 묻기도 전에 신탁이 내려졌다. 그가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와 살을 섞을 운명”이고, “아버지를 죽이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청천벽력이다. 그의 부모인 테베의 왕 라이오스와 어머니 이오카스테는 자식의 이런 운명을 알고 그를 낳자마자 들판에 버렸고, 그는 폴뤼보스의 아들로 자라게 되었던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저주 받은 운명을 알게 되면서 그 운명을 회피하기 위해, 그 잔혹한 운명을 막아보려고 부모의 곁을 떠나 세상을 방황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선한 의도와는 정반대로 그는 방랑의 과정에서 자신의 운명처럼 우연히 길 다툼을 하다가 누군지도 모르고 진짜 아버지를 죽이게 된다. 이어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테베를 위기에서 구한 그는 이 공로로 테베의 왕이 되어 홀로 된 왕비인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다.

오이디푸스와 테베의 스핑크스, 그리스 도기에 그려진 그림이다. 제작연대 미상, 오이디푸스는 코린토스를 떠나 방랑하던 중 테베에 이르러 길손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어 풀지 못하면 잡아먹었던 괴물 스핑크스를 만나 그가 낸 수수께끼를 풀었다. 널리 알려졌듯 ‘아침에 네 발로 걷고, 점심엔 두발로 저녁에 세발로 걷는 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오이디푸스는 ‘그것은 사람이다’이라고 맞춘다. 스핑크스는 분을 참지 못하고 바위에서 떨어져 죽게 된다.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두통거리를 해결한 영웅으로 테베의 시민들에게 환대받고 자신이 우연히 왕이던 아버지를 누군지도 모른 채 죽여 비게 된 바로 왕좌에 왕으로 추대된다. 스핑크스의 난제를 해결한 그의 지혜가 비극의 시작이 되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바티칸 박물관 소장, 사진 Carole Raddato 오이디푸스와 테베의 스핑크스, 그리스 도기에 그려진 그림이다. 제작연대 미상, 오이디푸스는 코린토스를 떠나 방랑하던 중 테베에 이르러 길손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어 풀지 못하면 잡아먹었던 괴물 스핑크스를 만나 그가 낸 수수께끼를 풀었다. 널리 알려졌듯 ‘아침에 네 발로 걷고, 점심엔 두발로 저녁에 세발로 걷는 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오이디푸스는 ‘그것은 사람이다’이라고 맞춘다. 스핑크스는 분을 참지 못하고 바위에서 떨어져 죽게 된다.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두통거리를 해결한 영웅으로 테베의 시민들에게 환대받고 자신이 우연히 왕이던 아버지를 누군지도 모른 채 죽여 비게 된 바로 왕좌에 왕으로 추대된다. 스핑크스의 난제를 해결한 그의 지혜가 비극의 시작이 되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바티칸 박물관 소장, 사진 Carole Raddato

테베의 왕을 살해한 자를 잡아 정의를 세우겠다는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그 살인자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두 딸과 두 아들을 낳아준 자신의 아내가 어머니였다는 참담한 전말을 모두 알게 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두 눈을 찔러 장님이 되고 세상을 떠돌다 죽게 된다. 결과가 어찌되었든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운명에 도전하는 불굴의 인간 정신을 보여주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죄악을 모두 알게 되고 나서 두 눈을 찔러 스스로 장님이 된 후 방랑하게 된다. 그의 딸 안티고네의 부축을 받고 있다. Aleksander Kokular의 1825-1828년 작, 폴란드 바르샤바 국립 미술관 소장, 사진 www.culture.pl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죄악을 모두 알게 되고 나서 두 눈을 찔러 스스로 장님이 된 후 방랑하게 된다. 그의 딸 안티고네의 부축을 받고 있다. Aleksander Kokular의 1825-1828년 작, 폴란드 바르샤바 국립 미술관 소장, 사진 www.culture.pl

델포이의 신탁은 이 이외에도 숱한 설화들을 만들어냈다. 그 이야기들은 어떤 이에겐 희망과 용기를, 어떤 이에겐 좌절과 고통을 안겨줬다. 신탁의 좋고 나쁨을 떠나 신탁은 그리스 문명의 중요한 영감이자, 그리스인의 삶을 역동적으로 만드는 동인이 되었다. 또 이런 이야기들이 축적되고 공유될수록 그리스인들의 델포이 아폴론 신전에 대한 신성한 숭배와 신탁에 대한 믿음이 굳세어졌다. 기독교 문명에 의해 파괴되기 전까지 델포이의 신화가 계속될 수 있었던 이유다.

(다음 호에는 여사제 피티아가 신탁을 전하는 비밀과 델포이에 봉헌된 세계 최고 수준의 예술작품 및 보물, 건축물 등을 소개합니다.)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박경귀 기자 (kipec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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