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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정청 관계는 영원히 개선되지 말아야한다


입력 2014.07.19 09:56 수정 2014.07.19 09:58        데스크 (desk@dailian.co.kr)

<자유경제스쿨>여당도 정부 견제해야 진정한 대통령제 삼권분립

국회의사당 전경. ⓒ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국회의사당 전경. ⓒ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국회의사당 전경. ⓒ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국회의사당 전경. ⓒ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Why Nations Fail)(2012)에서 대런 애스모글루(Daron Acemoglu)와 제임스 로빈슨(James A. Robinson)은 번영으로 이끄는 국가의 특징을 ‘포용적 정치·경제 제도’의 존재에서 찾았다. 사유재산권을 보장하고, 공정한 경쟁의 장을 마련하며, 신기술과 기능에 대한 투자를 장려하는 ‘포용적 경제제도’가 존재하는 경우 번영했다. 반면에 실패한 국가는 소수가 다수로부터 자원을 착취하기 위해 고안되고, 사유재산권을 보장해주지 못하거나 경제활동에 대한 인센티브를 제공하지 못하는 ‘착취적 경제제도’를 가졌음을 밝혔다.

예를 들어 베네치아(Venice)는 중세시기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로 성장하여 1330년 즈음 파리에 견주고, 런던에 비해 세 배는 큰 도시로 부상했다. 베네치아 경제가 확대될 수 있었던 토대 중 하나는 포용적 방향의 경제제도를 이끈 코멘다(commenda)라는 초기 형태의 합자회사였다. 코멘다는 두 명의 파트너가 참여하는데 그중 한명은 베네치아에 머물러 있고 다른 한명은 무역을 하러 여행을 떠나 물품을 옮기고 거래했다. 무역을 하던 도중에 발생한 손실은 출자한 자본 비율에 따라 부담하였고, 이익이 나는 경우 계약된 내용에 따라 분배를 하였다.

따라서 돈이 없는 젊은 사업가들이 투자자를 모집하여 성공하는 경우 신분 상승을 노릴 수 있는 개방적인 계약제도가 존재했던 것이다. 경제 제도를 포용적으로 만들면서 무역을 통해 부를 이룩한 신흥 가문의 등장으로 정치제도는 더욱 개방적이고 민주적으로 바뀌었다. 때문에 베네치아의 번영이 가능했다. ‘포용적 정치제도’란 정치권력이 사회 전반에 고르게 분배되는 다원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광범위한 사회계층의 권한 강화(empowerment)가 이루어지는 제도를 의미한다.

애스모글루와 로빈슨에 따르면 베네치아의 몰락은 1314년 정부가 무역을 장악해 국유화하고 개인이 무역을 하려면 높은 세금을 물리면서 시작되었다. 장거리 무역은 귀족의 전유물이 되었고 경제는 폐쇄적으로 바뀌었고, 마침내 베네치아 번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베네치아는 ‘포용적 정치·경제 제도’ 하에서 경제 대국이 되었으나 정부 개입과 규제로 ‘폐쇄적·착취적 정치·경제 제도’를 가짐에 따라 박물관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오늘날 베네치아는 가진 경제라고는 어업과 관광객을 위해 피자 굽고, 아이스크림 팔고, 입으로 색유리를 부는 유리공예가 전부가 되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사회에서 ‘국가개조’가 논의되고 있다. 최근 정부는 일제 강점기에 일제가 조선을 개조하려는 목적으로 ‘국가개조’라는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적절한 용어가 아니라는 지적을 받아들여 ‘국가개조’에서 ‘국가개혁’으로 용어를 바꾸었지만 이미 한국 사회의 정치와 경제는 ‘선진국’ 진입을 위한 국가개혁 추진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거기에 한국사회가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 ‘안전’이라는 기본이 추가적으로 필요함을 세월호 참사는 알려 주었을 뿐이다.

‘국가개혁’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한국 정치는 한마디로 국민에게 희망이 아니라 절망을 가져다주는 분야로 인식된다. 여야의 끊임없는 헐뜯기와 다툼이 있고, 거기에 여당은 당대표직을 둘러싸고 친이·친박·빕박 등으로 파벌싸움에 날을 지새우고 있다. 야당은 야당대로 다양한 여러 세력들이 당내 권력 다툼을 일상화 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국회는 공동 제안자도 모르는 법안을 수없이 통과시키며 규제들을 남발하고 있다. 그 정점이 2012년 대선 당시 뜨거웠던 ‘경제민주화’였다. 정치가 민주화 되었으니 경제도 민주화하고 사회는 평등화 되어야 국민 대다수가 즐거워한다는 논리였다. 실은 정치인들은 신념으로 경제 민주화나 경제 평등화를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표(票)가 되는 것이기에, 대중적 인기를 얻을 수 있어서, 지지율 상승을 가져올 수 있는 이슈라는 판단이 섰기에 추진하는 척 했던 것뿐이다. 표를 얻을 수만 있다면, 그리고 선거에서 승리를 가져올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아버릴 정치인들이고 그것이 정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치가 실패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최근 새누리당 대표로 당선된 김무성 의원은 언론 인터뷰에서 “젊은이들이 사회 진출하는 과정에서부터 좌절을 겪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분노의 시대에 진입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해답은 김무성 대표가 스스로 진단한 것처럼 정치가 ‘국민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어야지 젊은이들에게 결과의 평등을 약속하거나 제공하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정치가 결과적 평등을 향해 가기 시작한다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처럼 결과는 국민의 불신, 즉 정치실패일 것이다.

‘정치실패’ 다음의 한국 사회 문제는 ‘정부실패’이다. 세월호 참사 대응을 보면서 우리는 정부라는 조직이 창조경제는커녕 간단히 매뉴얼로 주어진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집단임을 알게 되었다. 급작스런 위기에 대한 대응은 그렇다 치더라도 ‘창조경제’든, ‘규제개혁’이든, ‘경제성장 3개년 계획’이든, ‘복지사회 건설’이든, ‘청년실업 완화’든, ‘고령화 대처’ 등 이미 잘 알려진 위기들에 대하여도 정부가 제대로 대처하고 있는지 또 대처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의심이다. 정확하게는 한국 경제의 많은 실패의 원인이 정부 개입과 규제 때문인데 정부는 실패의 원인이 정부실패인줄도 모르는 수준일 것이다.

이러한 ‘정치실패’와 ‘정부실패’를 종합하여 볼 때 결국은 ‘국가실패’에 이를 것을 예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알뜰 주유소’의 실패는 명백한 정부의 경제정책 실패이다. 정부가 유가와 석유 유통 시장에 개입하는 것은 시장 혼란만 가져올 뿐이고 결국은 실패할 것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는 자신 있게 개입했다. 이제까지 수백억의 세금이 알뜰주유소 창업지원금 등 각종 지원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알뜰주유소’는 전혀 ‘알뜰’하지 않았고, 최근에는 주변 주유소보다 비싸게 기름을 팔거나, 가짜 석유를 팔아 소비자에게 피해를 주고, 주유소 공급과잉을 초래해 2013년에만 300여개의 주유소의 몰락을 가져왔다. 정부 세금을 투입하여 국민에게 불편과 피해를 가져다주고, 국가적 낭비를 초래한 최근의 대표적인 정부실패이다. 하지만 ‘알뜰주유소’ 정책을 입안한 당시 상공부 장관과 공직자들은 어느 누구도 책임을 인정하지도 실패를 언급하지도 않고 있다.

또 다른 예로 최근 정부의 대표적인 두 부처인 산업자원부와 국토부가 자동차 연비 관련 규제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모습이다. 자동차 연비 관할권을 둘러싼 부처 간의 ‘밥그릇 다툼’은 우리나라가 결국 ‘착취적 경제제도‘로 진입해 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알짜’ 규제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정부 부처의 모습에서 대한민국이 ‘국가실패’로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한국의 경제성장을 이끌었다는 정부의 논리는 터무니없는 것이요, 정부 만능은 환상임을 보여주는 명징한 사례이다.

그러면 ‘정치실패’, ‘정부실패’, ‘국가실패’를 막기 위하여 최우선으로 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가? 먼저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개방적 정치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경쟁 선거’는 불가피하며, 정치인이 표를 얻고자 하는 행동 역시 막을 수 있는 방안을 찾기란 쉽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첫째, 개인이 정부와 정치인보다 먼저 변하는 수밖에 없다. 국민이 득표만을 위한 정책인지, 아니면 국가의 미래를 위한 정책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인지 능력을 갖추고 이기적이고 썩은 정부와 정치인을 골라내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유력한 방법이 될 것이다.

둘째, 국회와 정부를 개방적이고 경쟁 지향적 기관으로 만들어야 한다. 즉, 국회와 행정부가 정책 개발에 집중하고, 모든 기관이 정책으로 경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국회가 정책을 행정부에 의존하지 않고 행정부와 정책으로 경쟁하게 된다면 국회와 행정부 사이에는 진정한 ‘견제와 균형’의 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다. 나아가 행정부와 여당과 야당이 정책으로 경쟁한다면 여당 역시 대통령과의 상하 관계를 벗어나게 되고 당(黨)·정(政)·청(靑)의 관계는 동등해지며, 야당도 국정협조 해야 한다는 여론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다.

과거 권위주의 시절에는 대통령이 여당의 총재(總裁)직을 수행하면서 대통령이 여당의 국회의원들을 장악하고, 정부의 정책을 밀어 붙이기 위해 여당의 지원과 야당의 국정 협조를 요구했다. 하지만 1987년 민주화 이후 대통령제에서 대통령과 국회의 대등한 관계를 정립한다는 측면에서 대통령의 총재직 수행 관행을 없앴다. 당 총재직을 없앴더니 이제는 대통령이 ‘친이’나 ‘친박’ 등 자신의 계파를 통해 당을 장악하고 나아가 국회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하지만 행정부와 국회가 정책으로 경쟁한다면 여당은 청와대와 정부에 더 나은 정책으로 할 말을 할 수 있게 되고, 당과 청와대가 대등한 관계가 되며, 의회와 행정부의 ‘견제와 균형’이라는 삼권분립(三權分立)의 원칙이 정착될 수 있게 된다. 반대로 정부는 국회에서 여당이 항시 지지해줄 것을 기대하지 않아야 자신들의 정책 능력을 제고시킬 수 있다. 그리고 국회의 비판을 견뎌내고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정책을 만들게 될 것이다.

또 정부와 여당이 정책으로 경쟁하게 되면 ‘당·정·청 관계 개선’이라는 용어도 불필요한 용어가 되고 말 것이다. 정책으로 경쟁하는 대등한 당·정·청 관계가 되어야만 과거 여당이 정부의 정책에 대하여 포퓰리즘적 요구를 하는 것도 정부는 뿌리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정책으로 경쟁한다면 정부는 정부의 재정 효율성과 건전성 원칙을 가지고 여야를 설득하게 되고, 같은 편 ‘여당의 편들기’와 그에 반대하는 야당의 ‘무조건 반대’ 관행이 없어지게 된다. 즉, 국회와 정당, 행정부가 더 나은 정책을 향해 경쟁해야 선거 때에 집중적으로 등장하는 포퓰리즘 입법, 포퓰리즘 정책도 줄어들 수 있게 된다.

셋째, 사회 전반에 준법(遵法) 문화를 정착시키는 개혁이 추진되어야 한다. 법을 싫어하는 이들은 권력을 가지고 자의적으로 권력을 사용하고 싶어 하는 독재 권력자들이 대부분이다. 준법은 권력자들이 아니라 시민 나아가 전체 국민을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인과 정부 공무원을 포함하여 전체 국민이 “어떠한 한 상황에서도 법 지키기”로 준법 문화를 정착시키는 것이 국가 개혁 내지는 선진국으로의 첫 걸음일 것이다.

넷째, 대통령제 본연의 권력 구조로 돌아가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권력 구조는 잘 알려진 바대로 대통령제이다. 하지만 현실 정치는 대통령제와 내각제가 혼합되어 운용되고 있다. 대한민국 정치의 많은 문제가 내각제적 요소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이러한 우리의 대통령-내각제 혼합 대통령제에서 내각제를 제거하고 순수한 본래의 대통령제에 충실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통령제에서의 본래의 국회의 임무인 정부를 견제하고 균형을 이루는 일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국회가 정책으로 정부를 견제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 국회의 ‘비정상의 정상화’이다.

헌법(憲法)과 법(法)은 국회가 행정 권력을 견제하는 방법으로 입법권과 정부예산심의권, 국정조사·감사권, 총리 임명동의권, 장관 및 주요직의 인사청문권을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언론에서는 ‘야당의 국정협조’와 ‘당·정·청 관계의 개선’을 주문하고 있다. 하지만 야당의 ‘국정협조’와 ‘당·정·청 관계의 개선’은 대통령제 하에서는 올바른 요구라고 할 수 없다.

‘야당의 국정협조’란 기본적으로 정부와 여당 대 야당의 구도를 상정하고 있는데, 이는 정부와 여당은 한편이고 야당은 다른 편인 내각제에서의 정치적 경쟁 구도를 반영한 것이다. 사실 여당이나 야당이라는 개념조차도 일본식 내각제에서만 사용되는 용어인데 우리 언론이 무분별하게 대통령제인 우리 정치에 적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단지 국회에는 다수당과 소수당이 있을 뿐이고 국회의 다수당과 대통령의 출신 정당이 동일 할 수도 있고 동일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각제 의회에서 다수당의 지도자가 총리를 비롯한 내각이 되고 나머지 의원들은 여당이 되므로 총리와 내각 및 여당은 한편이고 야당은 반대편이므로 야당의 정치적 반대는 당연한 정치행위이다.

따라서 국회가 대통령제의 기본에 충실한 구도인 대통령과 정부(government) 대(vs.) 국회(congress)의 ‘견제와 균형'(checks and balances)의 구도로 돌아가면 야당의 국정 발목 잡기의 문제는 상당히 해결 가능할 것으로 예측된다. 왜냐하면 국회에서 여당이 무조건적으로 대통령과 행정부를 감싸고돌지 않으니 행정부 비판의 부담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또 야당의 국정 발목 잡기와 함께 비판이 되는 사안은 여당이 청와대와 정부에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끌려 다닌다는 것인데, 이것도 국회가 행정부 견제라는 기본 기능에 충실 한다면 쉽게 해결될 문제이다. 여당이 국회에서 교섭단체를 구성하여 운영하지만 국회에 속하는 이상 대통령과 행정부 견제는 당연한 기본 기능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이지만 그 동안 한국 정치가 대통령제 하에서 내각제식 정국 운영을 해왔기 때문에 발생한 모순이었다.

그 동안 정부는 집권 여당의 지지 없이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해왔다. 여당의 지지 없이는 청와대와 행정부가 흔들려 어떠한 일도 하지 못해 왔기 때문에 여당은 문제가 있어도 울며 겨자 먹기로 청와대와 정부를 지지해 왔었다. 그리고 이제까지 대통령은 여당의 지지만 있으면 통치가 가능했기 때문에 야당의 지지와 협조는 구할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여야가 하나로 대통령과 행정부의 독주를 견제하기 시작한다면 대통령과 청와대는 여당에 지시를 내리지 못하고 여당의 협력뿐만 아니라 야당의 협조도 긴밀히 구하는 소통의 행보에 나설 것이다. 이것이 미국식 대통령제의 운용 방식이다. 미국의 대통령이 전화를 잡고 직접 야당 지도자들에게 협조를 구하고 만나서 토의하고, 백악관에 여야 정치 지도자들을 초대하여 농구와 풋볼을 함께 시청하며 격의 없이 지내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여당의 제자리 찾기와 국회의 기능 회복하기는 우리 정치에서 내각제적 요소를 제거하고 대통령제 권력 구조 본래의 운용 방식에 충실하면 된다.

여당과 야당은 국회에서 대통령과 행정부를 견제하면서 국민의 복리에 긍정적인 바람직한 정부 정책인 경우 여야가 함께 지지하고 협력해주고 그렇지 않은 경우 여야가 함께 정부를 견제하는 것이 바른 대통령제 정국 운영이다. 때문에 ‘야당의 국정 협조’란 요구는 대통령제 권력 구조에서 바람직한 행정부의 모습이 아니다. 대통령과 정부는 야당의 국정 협조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는 세련되고 현명한 정책을 만들어 내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면서 정부는 야당의 정책을 듣고 서로 더 나은 정책으로 설득하고 승부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국회의 대통령 견제 기능인 인사청문회가 능력을 검증하는 자리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국회가 행정부와 정책으로 경쟁하고 있기 때문에 국회는 대통령이 임명하려는 장관이 어떤 정책을 가지고 있는지 판단하고 싶어 하고, 대통령의 국정 철학과 정책에 동의하고 대통령의 뜻을 받아 일을 할 사람이므로 어지간한 흠집이 아니라면 대통령의 사람으로 인정해 능력과 정책을 위주로 검증하게 인사청문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바뀔 것이다.

국회와 대통령이 정책으로 경쟁한다면 총리의 임명동의도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미국의 인사청문회도 과거 발언을 문제 삼는 것은 대법원 판사의 임명의 경우뿐이다. 우리 사회와 정치권이 요구하고 있는 ‘책임총리’도 올바른 대통령제의 제도가 아니다. 나아가 우리나라의 헌법과 법에 ‘책임총리’라는 용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법치 국가에서 법에도 없는 초헌법적인 내지는 초법적인 요구를 언론은 해왔던 것이다.

대통령제 권력 구조란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 국정을 장악하고 국민에게 위임 받은 정책을 수행하는 제도인데 그런 대통령제 하에서 임명직 총리가 굳이 필요하지 않음에도 우리의 대통령제 권력 구조는 남북 대치 상황에서 대통령의 유고 상황을 대비하여 대통령이 임명하는 총리를 계속 두고 있는 대통령제와 내각제 혼합의 권력 구조가 문제의 시작이었다. 임명되는 총리이기에 총리의 권한은 대통령이 인정하는 범위에 한하는 것이고 대통령이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의 책임에 한정된다.

최근 홍준표 경남지사는 “(지금까지) 책임총리를 못한 것은 대통령이 그 만큼의 권한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 당시 청와대 비서실만큼 총리실이 비대했던 이유는 대통령이 이해찬 총리에게 그 만큼의 권한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흔히 우리나라 대통령의 권한을 ‘제왕적 대통령’에 비유하는데 요즘은 국회의 동의 없이는 법안 하나, 아니면 총리는커녕 장관 한 명 임명하기 어려운 정치 현실에서는 과장된 표현이다.

여당이 대통령의 인사라고 무조건 감싸고도는 것 역시 고쳐져야 할 관행이다. 하지만 국회 전체가 여야를 초월하여 행정부를 견제하는 차원에서 장관의 정책과 능력을 검증하는 권력 구도가 된다면 야당의 무조건 반대나 흠집잡기는 점차로 없어질 것이다.

나아가 국회의 행정부 견제 기능을 올바로 수행하기 위해서 국회의원과 국무위원 겸직 금지가 실현되어야 한다. 국회의원이 국무위원으로 차출되는 것을 영전으로 언론이 보도하는 것은 결국 국회의원이 대통령의 눈치를 보고 국회의원의 직무를 수행하게 하는 것이 되고 국회의 대통령과 행정부 견제가 무뎌지게 되는 중요 원인이 되고 있다. 또 다른 내각제적 요소로서 국회가 국무위원 해임건의안으로 국무위원을 협박하고, 부당하게 행정부의 권리를 침해하는 관행을 대통령제 권력 구조의 도입으로 막아야 한다.

‘정치실패’와 ‘정부실패’, 그리고 그 당연한 결과로서의 ‘국가실패’를 극복하는 방안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국회, 정당, 정부가 포용적이고 개방적인 제도로의 변화, 즉 정책으로 승부하고 법을 지키는 문화를 정착시키는데 있다. 그리고 선거 때마다 불어 닥치는 선거 포퓰리즘 정책을 구분해 내고 포퓰리즘 정책을 약속하는 정치인을 떨어뜨리는 교양 있는 시민의 존재는 기본이고 필수적이다. 시민이 깨어 있어야 대한민국 정치가 살고, 기업이 잘 해주어야 대한민국 경제가 산다.

글/김인영 한림대 정치행정학 교수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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