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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타 섬의 풍요롭던 남쪽 왕국 페이스토스


입력 2014.06.01 10:05 수정 2014.06.01 10:09        박경귀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 (kipeceo@gmail.com)

<박경귀의 ad Greece!>제우스가 살던 이다 산과 메사라 평원이 만든 요람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 편집자 주 >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바다. 가을의 따사로움. 빛에 씻긴 섬, 영원한 나신(裸身) 그리스 위에 투명한 너울처럼 내리는 상쾌한 비, 나는 생각했다. 죽기 전에 에게 해를 여행할 행운을 누리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여자, 과일, 이상 ……, 이 세상에 기쁨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따사로운 가을날 낯익은 섬의 이름을 외며 바다를 헤쳐 나가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쉬 천국에다 데려다 놓을 수 있는 것이어서 나는 좋아한다. 그곳만큼 쉽게 사람의 마음을 현실에서 꿈의 세계로 옮겨 가게 하는 곳은 없으리라.“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자신의 고향 크레타를 향하는 뱃머리에서 쓴 소회다. 그는 조르바와 함께 갈탄 광산 사업을 위해 크레타로 귀향하던 중이었다. 카잔차키스는 100여 년 전에 그렇게 에게 해를 건넜다.

2500년 전엔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가 일주일이나 걸려 건너던 그 에게 해다. 나는 두 번째 그리스 여행의 첫 행선지인 크레타 섬을 향해 비행기로 에게 해를 건넜다. 짧은 50분간의 비행이면 크레타 섬에 도착한다. 아테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국내선 에게항공으로 갈아탔다. 2014년 1월 26일 일요일 오후. 비가 자주 내리는 우기인 겨울 날씨치고는 그리 쌀쌀하지 않았다.

크레타 행 비행기를 갈아타면서부터 그리스 안의 또 다른 그리스로 가는 느낌을 받았다. 150여명의 탑승객 중에 배낭 하나 달랑 맨 나만 유일한 동양인이다. 관광 비수기인지라 관광객도 별로 눈에 띄지 않았고 대부분 크레타 주민들 같았다.

여권과 탑승권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보니 크레타 사람들은 여권이 아닌 우리나라의 주민등록증과 비슷한 것을 내민다. 옆 사람에 신분증이 특이하다며 살펴보자고 했더니 자세히 보여준다. 미려하고 견고하게 만든 것도 아니다. 가볍게 비닐 코팅을 한 정도라 주변이 쉽게 닳아 부풀어 있었다. 국내선 이용 시 이들은 주민증을 사용하는 셈이다.

비행기는 아름다운 에메랄드 빛 에게 해 위를 스치며 날아간다. 크레타 미궁에 갇혀 있던 이카로스도 아버지 다이달로스와 함께 그가 달아준 날개를 펄럭이며 에게 해를 훨훨 날아 조국 아테네로 돌아가고자 했으리라. 하늘 끝까지 오르고 싶었던 과욕이 파멸을 불렀지만,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무한 비상(飛上)하려던 그의 꿈만은 가상하다. 크레타 섬은 제우스가 태어난 신화의 고향이다. 기원전 3000년경부터 그리스 최초로 미노아 문명을 꽃피워낸 서양 문명의 원천이다.

그래서 크레타에선 만나야 할 이들도 많고 봐야 할 것도 풍부하다. 제우스도 만나야 하고, 테세우스의 발자취도 찾아봐야 한다. 크레타에선 눈의 정확성보다 신화 속에 뛰어들 상상력과 섬세한 감성이 더 필요하다. 소설로만 접해오던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꼭 해후하리라. 이들을 만나려면 먼저 크노소스의 미궁 라비린토스 (Labyrinthos)에서 길을 잃지 말아야 한다. 나에겐 아리아드네(Ariadne)가 준 실 꾸러미도 없으니 정신 바짝 차려야한다.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 본 크레타 섬 주도 헤라클리온(이라클리온) 전경이다. 에게 해를 감싸듯 바라보고 있는 북쪽 연안의 모습이다. ⓒ박경귀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 본 크레타 섬 주도 헤라클리온(이라클리온) 전경이다. 에게 해를 감싸듯 바라보고 있는 북쪽 연안의 모습이다. ⓒ박경귀

크레타 섬의 헤라클리온 시가지가 멀리까지 내려다보인다. 도시화가 상당히 진전되어 주거지가 넓게 분포된 모습이다. ⓒ박경귀 크레타 섬의 헤라클리온 시가지가 멀리까지 내려다보인다. 도시화가 상당히 진전되어 주거지가 넓게 분포된 모습이다. ⓒ박경귀

크레타 섬의 황금 빛 광명

크레타에 거의 이르러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다. 푸른 하늘을 뒤로 하고 먹구름이 낮게 깔리더니 햇살이 먹구름 사이로 찬연한 빛줄기를 내리쏟는다. 제우스가 태어난 이다(Ida) 산의 높은 산줄기에서 뿜어내는 듯 순식간에 신비한 하늘의 풍광을 만들어 낸다. 먹구름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이 대비를 이룬다. 아직 해 질 녘도 아니건만 갑작스레 어둑해진 하늘 사이를 뚫고 황금 빛 광명을 비춘다. ‘신들의 신’인 제우스의 고향에 들어오는 이들을 축복해주는 듯하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공항에서 착륙하여 트랩을 내리려하자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한다. 역시 비가 잦은 겨울 우기가 맞는가 보다. 우선 당장 오늘 저녁 일정부터 은근히 걱정이 들었다.

특별한 검색 없이 공항을 나오니 인터넷으로 예약해 놓은 렌트 카 회사 직원이 내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들고 마중 나왔다. 공항 내 회사 사무실이 입주해 있지 않은 걸 보니 소형업체인 듯싶다. 주차 구역에 있는 연합사무실을 내가 찾아오지 못할까봐 날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섬세한 배려가 고맙다. 임차 계약서를 쓴 후 도요타 소형차를 인계받아 공항을 빠져나왔다. 10분이 채 안 걸려 시내로 들어갈 수 있으니 해가 지기 전에 해변의 베네치아 성채와 시내 몇 곳이라도 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크레타의 이다 산줄기 사이의 먹구름을 뚫고 햇살을 쏟아내는 장관이 만들어졌다. 먹구름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이 신비로운 대비를 이룬다. ⓒ박경귀 크레타의 이다 산줄기 사이의 먹구름을 뚫고 햇살을 쏟아내는 장관이 만들어졌다. 먹구름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이 신비로운 대비를 이룬다. ⓒ박경귀

갑자기 몰려온 먹구름 사이를 뚫고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는 크레타 섬의 니코스 카잔차키스 공항이다. ⓒ박경귀 갑자기 몰려온 먹구름 사이를 뚫고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는 크레타 섬의 니코스 카잔차키스 공항이다. ⓒ박경귀

차량의 낯가림 해프닝

공항을 빠져나와 시내로 들어가는 큰 길을 기분 좋게 5분 정도 달리니 벌써 시내 초입이다. 시내 T자형 삼거리에서 정지 신호에 따라 정차했다. 그런데 갑자기 시동이 툭 꺼진다. 20년 만에 잡아본 수동 변속기 조작이 서툴렀기 때문이다. 클러치를 밟고 시동키를 돌렸지만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뒤에는 신호 대기 중인 차들이 몇 대 서있다. 진땀을 빼며 몇 번을 시도해도 소용없었다. 오랜 세월 운전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 겪는다. 할 수 없이 차에서 내려 밀려있는 뒤차들에 양해를 구하고 도움을 청했다. 한 청년이 내려와 자기가 한번 해 보겠다고 한다. 그 역시 실패했다. 아마 배터리가 방전된 것 같다는 그의 말에 당혹스러웠다. 차를 인계받을 때 외관을 함께 점검했을 뿐 배터리 상태까지는 미처 확인하지 않았으니 내 잘못이다.

배낭여행 첫 날부터 황당한 일이 벌어지니 갑자기 불안감이 밀려왔다. 계약서에 쓰인 연락처로 전화하니 이마저 불통이다. 아마 마지막 고객인 날 보내고 퇴근한 모양이다. 도움을 주던 청년이 렌트 카 회사 어딘가로 전화를 여러 번 한 끝에 간신히 연결이 됐다.

그가 올 동안 수신호로 대기차들을 보내야 했다. 도와주던 청년에게는 감사의 인사를 하고 보냈다. 렌트 카 회사 직원이 20분여 만에 달려왔다. 아마 공항 인근 어딘가에 머물고 있었던 것 같다. 구세주를 만난 듯 기뻤다. 그가 몇 번을 작동하더니 부르릉 시동이 걸리는 것이 아닌가? 어찌된 일이냐 자초지종을 물었다. 배터리가 이상이 없었다니 천만다행이다.

클러치와 시동키 작동에 문제가 있었다. 우선 클러치를 차 바닥에 닿게 아주 깊게 밟은 상태에서 시동을 걸어야 했다. 그런데 렌트 카 업체에서 차량 바닥 매트를 규격에 맞지 않는 것을 깔아 놓아 클러치 부분에 공간이 떠 있던 것도 문제였다. 깊게 밟아도 매트가 왼쪽 바닥의 불룩한 곳에 조금 걸려 떠 있는 간격으로 인해 작동이 안 되었던 것이다. 매트를 치우고 끝까지 깊게 밟고 시동을 거니 제대로 작동이 됐다.

차량부터 이렇게 낯가림을 하는 걸 보니 크노소스 왕궁의 입성이 녹록지 않을 모양이다. 크레타 방문의 첫날 한바탕 차량 구동 정지 해프닝으로 해가 졌다. 저녁 한두 가지 일정은 물 건너갔다. 그래도 다행이다 싶었다. 밤새 연락이 안 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일단 예약해 둔 호텔로 직행해서 여장을 풀었다. 작은 방이다. 그래도 혼자 자기엔 충분하다. 방 벽을 크레타의 유명 유적과 풍경 사진으로 장식해 놓았다. 벌써 기대를 부풀게 한다. 호텔 앞 엘레프테리아스 광장 인근의 레스토랑에서 좋아하는 수블라끼로 저녁을 들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방 벽을 크레타의 유명 유적과 풍경 사진으로 장식했다. ⓒ박경귀 방 벽을 크레타의 유명 유적과 풍경 사진으로 장식했다. ⓒ박경귀

페이스토스를 향해 이다 산정을 넘다

이튿날 새벽 5시에 일어났다. 크레타 섬 남쪽으로 넘어가기 위해선 서둘러야 했다. 무리한 일정이긴 하다. 하지만 페이스토스(페스토스, phaistos, Festos)를 꼭 보고 싶었다. 페이스토스는 기원전 2000년 경 크노소스 궁전이 조성될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유서 깊은 곳이기 때문이다. 크레타 섬에는 널리 알려진 크노소스 왕궁보다 규모가 작은 3개의 궁전이 더 있었다.

크레타 중남부에 위치한 페이스토스(phaistos)와 고르티스(Gortys), 그리고 헤라클레온에서 서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틸리소스(tilisos)가 있다. 크레타의 미노아 문명을 꽃피우던 여러 왕궁은 BC 1700년경의 대지진으로 대부분 파괴되었다가 재건되었다. 이후 다시 전성기를 구가하다 BC 1450년경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도리아인들이 침입하자 이들에게 여러 왕궁들이 파괴되고 지중해의 패자(覇者)자리마저 내주게 된다.

새벽 5시 40분경 호텔을 나와 헤라클리온 시내를 벗어나니 크레타 남부 지방으로 넘어가는 고속도로가 나왔다. 2천 미터가 넘는 산맥의 중간을 타고 넘는 길을 시원스럽게 뚫어놓았다. 고속도로 오른편으론 이다 산맥의 산정이 하얀 눈으로 덮여 있어 장관을 이룬다. 이 봉우리 너머에 루바(Ruva) 숲이라는 흥미로운 지형이 있다고 한다. 페이스토스까지는 조심스레 운전해도 2시간이 채 안 걸리는 것 같았다

오르막길은 4차선으로 잘 포장되어 있었지만, 산맥 중간의 고비를 넘어 내려가는 길은 무척 험했다. 주행거리는 짧았지만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이유다. 차선 구분도 없는 2차선폭의 꾸불꾸불한 길이 이어졌다. 산 정상 부근의 도로 결빙 현상으로 인한 교통사고의 위험을 줄이려는 듯 아스팔트 포장이 아니라, 고르지 않은 자갈 포장이었다.

헤라클리온에서 페스토스로 가기 위해선 이다 산 줄기를 가로 질러 넘어가야 한다. 오른편의 산 봉우리들이 하얀 눈으로 덮여있어 신비로운 느낌이 든다. ⓒ박경귀 헤라클리온에서 페스토스로 가기 위해선 이다 산 줄기를 가로 질러 넘어가야 한다. 오른편의 산 봉우리들이 하얀 눈으로 덮여있어 신비로운 느낌이 든다. ⓒ박경귀

무사히 산을 넘었다. 평지 도로로 들어서서 페이스토스 가는 도중에 숨을 돌릴 겸 유적 표지가 되어 있던 곳을 들렀다. 예정에 없던 곳이다. 칼리비아니(Kaliviani) 수도원이다. 꽤 많은 부속건물들이 넓은 부지에 펼쳐져 있었다. 본당의 건물이 특이했다. 오스만 투르크 지배기의 영향을 받은 듯 이슬람 풍의 아치와 기둥, 로마네스크 식의 창문과 문에 반원형 아치를 사용하는 등 복합적인 건축 양식을 띠고 있었다.

칼리비아니 수도원 정문 ⓒ 박경귀 칼리비아니 수도원 정문 ⓒ 박경귀

칼리비아니 수도원,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회랑에서 바라본본당의 모습 ⓒ 박경귀 칼리비아니 수도원,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회랑에서 바라본본당의 모습 ⓒ 박경귀

칼리비아니 수도원 정문 옆에 놓여 있는 아주 작은 정교회 상이 이채롭다. 그리스에는 이런 상을 일반 도로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리스인들의 깊은 신앙심의 한 단면이다. ⓒ 박경귀 칼리비아니 수도원 정문 옆에 놓여 있는 아주 작은 정교회 상이 이채롭다. 그리스에는 이런 상을 일반 도로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리스인들의 깊은 신앙심의 한 단면이다. ⓒ 박경귀

사후 세계의 심판관이 된 페이스토스의 왕 라다만티스

미노아 문명의 궁전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은 1900년대 초부터 시작되었다. 영국인들이 크노소스 궁전을, 이탈리아인들이 페이스토스와 하기아 트리아다(Hagia Triada)를 발굴했다. 미국인들은 크레타 섬 동부에 있는 구르니아 고대 마을 유적을 발굴하면서 후에 프랑스 고고학자들을 참여시켰다. 이탈리아인들이 페이스토스와 고르티스 발굴에 열성적이었던 것은 아마 기원전 66년에 로마의 속주가 되면서 페이스토스가 한때 크레타의 수도가 되고, 고르티스 역시 속주의 중심도시로 번성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세계의 제국이던 로마로서는 크노소스가 있는 지중해 북단에 위치한 도시보다 속주인 아프리카와 마주 바라보고 있어 해상 교통으로 연계하여 지배하기 수월한 크레타 중남부 지방을 더 중시했던 것 같다. 또한 메사라(messara) 대평원에서 나는 풍부한 올리브, 오렌지 등 농산물의 공출에도 유리했기 때문이었을 듯싶다.

나는 제일 먼 곳에 있는 페이스토스를 먼저 방문지로 선택했다. 드디어 네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 페이스토스에 도착했다. 오픈 시간 8시 전이다. 메사라 평원의 아래쪽 중간쯤의 약간 높은 언덕에 위치해 있었다. 찾아온 이가 아직 아무도 없다.

빈 주차장에 차를 대고 주변을 천천히 살피며 올라갔다. 주차장에서 150여 미터 올라가면 유적지가 나온다. 평화롭고 고적한 느낌이다. 안내원 보다 개가 먼저 짖으며 방문객을 맞는다. 워낙 찾는 이가 적어서 반가웠던지 복슬 강아지 세 마리는 유적지를 둘러보고 떠나는 나를 주차장까지 쫒아오며 배웅했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페이스토스는 제우스와 에우로페의 아들로 미노스 왕의 동생인 라다만티스(Rhadamanthys)에 의해 세워졌다고 한다. 기원전 1700년경 왕궁이 재건된 것으로 보아 훨씬 이전에 최초의 왕궁이 조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라다만티스는 현명하고 공정한 왕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가 사후 세계의 심판관이 되었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플라톤의 '고르기아스'에는 인간이 사후에 심판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524a).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죽고 나면 제우스가 정해 놓은 심판관의 심판에 의한 응보를 받게 된다고 말한다. 심판관은 세 명이다. 미노스와 라다만튀스, 그리고 아이아코스이다. 제우스는 아시아인들은 라다만튀스가 심판하고 유럽인들은 아이아코스가 심판하도록 했다. 또 두 심판관이 해결하기 곤란한 문제가 있을 경우, 연장자인 미노스가 확정 판결할 수 있도록 결정권(casting vote)을 주었다고 한다.

죽은 자들을 심판하는 사후의 심판관들, 가운데가 미노스, 그의 오른쪽이 라다만티스, 그의 왼쪽에 앉은 이가 아이아코스이다. Ludwig Mack(1799-1831), 1829 작 죽은 자들을 심판하는 사후의 심판관들, 가운데가 미노스, 그의 오른쪽이 라다만티스, 그의 왼쪽에 앉은 이가 아이아코스이다. Ludwig Mack(1799-1831), 1829 작

아무튼 라다만티스가 생전에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람으로 널리 인정받았고 사후에 그의 공정한 인성이 더욱 신격화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다스렸을 페이스토스가 호메로스가 '일리아스'에서 말하듯 크레타에 산재한 90여개의 도시 가운데 ‘꽤 살기 좋은 도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2권, 648).

페이스토스는 1865년 영국인 스프래트(spratt)에 의해 처음으로 그 위치가 알려졌고, 1984년 이탈리아 고고학자 할프헤르(F. Halbherr)가 이를 확인했다. 1900년에 할프헤르의 감독 아래 페르니에르(Pernier)의 발굴에 의해 왕궁의 유적이 빛을 보게 되었다. 이후 1950년 이탈리아 고고학회의 도로 레비(Doro Levi)에 의해 구 왕궁의 중요한 터가 추가로 발굴되었다고 한다.

페이스토스 유적지 안내판 ⓒ박경귀 페이스토스 유적지 안내판 ⓒ박경귀

페이스토스 유적지로 오르는 돌길 ⓒ박경귀 페이스토스 유적지로 오르는 돌길 ⓒ박경귀

페이스토스의 역사와 발굴 과정에 대한 안내판 ⓒ 박경귀 페이스토스의 역사와 발굴 과정에 대한 안내판 ⓒ 박경귀

페이스토스 유적 관리사무소다. 방문객이 적어서 인지 고적하다. ⓒ박경귀 페이스토스 유적 관리사무소다. 방문객이 적어서 인지 고적하다. ⓒ박경귀

미노스 문명 최초의 신비한 그림문자

페이스토스 왕궁의 위용이나 규모를 짐작할 만큼의 유적이 기대했던 것만큼 남아있지는 않았다. 3000여년 가까운 세월에 건물의 대부분이 유실되고 주춧돌만 남았다. 우물, 계단, 저장 창고의 잔해는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남아있다. 언덕을 이용해 배수관로가 설치되고 여러 층에 걸쳐 계단과 통로가 적절하게 연결되어 있는 점 등은 탁월한 건축술을 짐작케 한다. 그나마 엄청난 세월을 이겨내고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도 석조물의 내구성 덕분이다. 크노소스에 비해 전체 면적도 적고, 건축물의 구조도 뚜렷하게 남아있지는 않다.

페이스토스 왕궁 유적의 남쪽 측면이다. 3000여년 가까운 세월에 건물의 대부분이 유실되고 주춧돌만 남았다. 우물, 계단, 저장 창고의 잔해는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남아있다. ⓒ박경귀 페이스토스 왕궁 유적의 남쪽 측면이다. 3000여년 가까운 세월에 건물의 대부분이 유실되고 주춧돌만 남았다. 우물, 계단, 저장 창고의 잔해는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남아있다. ⓒ박경귀

페이스토스 왕궁의 동쪽 측면이다. 약간 더 높은 지역이고 건물 터가 넓은 것으로 보아 왕궁의 주 건물이 입지했었을 가능성이 높다. ⓒ박경귀 페이스토스 왕궁의 동쪽 측면이다. 약간 더 높은 지역이고 건물 터가 넓은 것으로 보아 왕궁의 주 건물이 입지했었을 가능성이 높다. ⓒ박경귀

페이스토스 왕궁의 북쪽 측면이다. ⓒ 박경귀 
페이스토스 왕궁의 북쪽 측면이다. ⓒ 박경귀

이곳에서 발굴된 가장 유명한 유물은 점토로 만들어진 페이스토스 원반(Phaistos Disk)이다. 둥근 원반의 양면에 휘도는 모양의 나선형 선이 그려져 있고 그 둘레에 알 수 없는 그림문자가 빼곡히 채워져 있다. 모두 242개가 된다고 한다.

페이스토스 왕궁 유적에서 발굴된 원반에 새겨진 그림문자는 전형적인 선문자 A보다 복잡한 그림형태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선문자 A도 아직도 해독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관련이 있다고 보이는 페이스토스 원반의 그림 형상은 전혀 해독하지 못한 상태다. 특정한 표의문자(表意文字)의 초기 형태일 수도 있다.

혹시 이 원반의 글은 페이스토스의 왕족과 원로원의원들이 정의로운 도시 국가 운영을 다짐한 서약은 아니었을까? 라다만티스가 정의와 공정한 통치자의 대명사로 불리었다면 그는 분명 귀족들의 적극적인 호응과 협력을 받았을 것이다. 이 원반이 그들의 합의의 맹서(盟誓)를 담은 연판장(連判狀) 같은 기능을 했을 것으로 추정해보는 것은 어떨까? 크노소스 궁전을 발굴했던 아서 에번스(Arthur John Evans, 1851~1941)는 혹시 승리의 찬가나 신을 찬양하는 노래일 것으로 추측하기도 했다. 하지만 공인되지는 못했다.

페이스토스 원반(Phaistos Disk)의 앞면과 뒷면에 알 수 없는 그림문자가 새겨져 있다. Luigi Pernier (1874-1937), 1909년 발굴 페이스토스 원반(Phaistos Disk)의 앞면과 뒷면에 알 수 없는 그림문자가 새겨져 있다. Luigi Pernier (1874-1937), 1909년 발굴

아무튼 학자들은 이 원반에 쓰인 형상이나 문자, 그리고 그 용도를 정확히 해독하지 못하고 있다. 고대 크레타인들은 그림문자로 선문자(線文字, Linear ideogram) A와 B를 사용했다. 선문자 A의 창안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마 BC 1700년 이전에 창안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페이스토스 원반에 쓰인 그림문자는 선문자 A 보다 훨씬 이전에 쓰인 크레타의 초기 문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많이 닮았다는 점에서 고대 크레타와 이집트 사이의 문명 교류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선문자 B는 미노아 문명의 절정기인 BC 1450년경 창안된 것으로 알려진다. 선문자 B는 1952년 영국의 천재 학자 마이클 벤트리스(Michael George Francis Ventris, 1922~1956)에 의해 해독되었다. 이로써 크레타 문명의 실체를 규명하는데 결정적인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선문자 B는 BC 8세기경에 그리스 본토에 전해진 페니키아의 문자(Phoenician alphabet)와 함께 그리스 문자의 모체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BC 600-550년경 신전 혹은 공공건물에 새겨져 있던 아르카익 기 크레타 알파벳(Archaic Cretan alphabet)은 그리스 알파벳의 발전된 모습을 뚜렷이 보여준다.

선문자 A 문자이다. 각각 ‘Ma', ’QE'를 의미한다. 출처: Wikimedia Commons에서 필자가 여러 문자 중 발췌 구성, 만든 이 Berlinhistoryⓒ 선문자 A 문자이다. 각각 ‘Ma', ’QE'를 의미한다. 출처: Wikimedia Commons에서 필자가 여러 문자 중 발췌 구성, 만든 이 Berlinhistoryⓒ

선문자 B 가운데 몇 개의 문자다. 출처: Wikimedia Commons에서 필자가 여러 문자 중 발췌 구성, 만든 이 Ch1902 선문자 B 가운데 몇 개의 문자다. 출처: Wikimedia Commons에서 필자가 여러 문자 중 발췌 구성, 만든 이 Ch1902

기원전 600-550년경 신전 혹은 공공건물에 새겨져 있던 아르카익기 크레타 알파벳(Archaic Cretan alphabet)이다. 크레타 남부 도시 고르티나(Gortyna)에서 발굴되었다. 유명한 고르티나의 법전이다. 크레타 헤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 소장 ⓒ박경귀 기원전 600-550년경 신전 혹은 공공건물에 새겨져 있던 아르카익기 크레타 알파벳(Archaic Cretan alphabet)이다. 크레타 남부 도시 고르티나(Gortyna)에서 발굴되었다. 유명한 고르티나의 법전이다. 크레타 헤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 소장 ⓒ박경귀

이다 산의 신비한 가호와 메사라 평원이 만든 풍요로운 왕국

페이스토스 왕궁에 올라서면 왜 이곳에 왕궁이 들어설 수밖에 없었는지 그 탁월한 입지의 선택에 놀라게 된다. 페이스토스 왕궁 주변을 살펴보면 왕궁이 언덕에 우뚝 솟아 주변에서 매우 현저하게 주목받는 건축물이었을 것으로 쉽게 알 수 있다.

페이스토스 왕궁의 전경이다. 언덕 아래로 드넓게 펼쳐진 들판이 메사라 평원이다. 왕궁의 탁월한 입지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박경귀 페이스토스 왕궁의 전경이다. 언덕 아래로 드넓게 펼쳐진 들판이 메사라 평원이다. 왕궁의 탁월한 입지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박경귀

북쪽으로는 신들의 신인 제우스가 탄생한 2456m의 높이로 우뚝 솟은 이다(Ida) 산의 만년설이 신비한 영기(靈氣)가 내뿜고 있다. 아프리카의 코 앞에 있는 남국의 섬에서 만년설을 보는 경이는 참으로 감동적이다. 크레타인이 이다 산을 제우스의 탄생지로 여기고 그 어머니 레아(Rhea)를 섬긴 이유가 절로 이해된다. 지금도 이다 산정의 신비스런 위엄이 눈에 어른거린다.

왕궁 남쪽으로 내려다보이는 탁 트인 메사라 평원도 장관이다. 길이 30여 km에 달하는 평원을 오렌지, 올리브 농원이 가득 메우고 있다. 북쪽의 매서운 바람을 이다 산정이 막아주고 남쪽의 건조한 해풍도 적당히 높은 산들이 막아주고 있다. 만년설을 이고 있는 이다 산에서 발원한 맑은 물들이 여러 줄기의 작은 강을 이뤄 메사라 평원으로 흘러들고 있다.

또 남쪽으로 둘러친 높고 낮은 산들의 계곡에서도 풍부한 물이 메사라 대평원으로 흘러들어간다. 이로 인해 천혜의 기름진 평원이 만들어지고 있다. 비옥한 평원에서 풍부하게 생산되는 농산물을 바탕으로 국가 재정이 넉넉했을 것이다. 페이스토스가 살기 좋은 도시였다는 것은 라다만티스의 정의로운 심성이 주효했겠지만, 물산이 풍부한 지역에 입지한 덕택에 만들어진 풍요로운 왕국의 살림살이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 ‘쌀독에서 인심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페이스토스 왕궁에서 바라보이는 이다 산의 신비로운 풍경이다. ⓒ박경귀 페이스토스 왕궁에서 바라보이는 이다 산의 신비로운 풍경이다. ⓒ박경귀

지도의 왼쪽 빨간 동그라미로 표시한 지역이 페이스토스 왕궁이 위치한 곳이다. 왼쪽 동그라미 표시한 곳은 고르티스 왕궁 유적지이다. 지도의 푸른색으로 표시된 동서로 길게 뻗은 구역이 메사라 대평원이다. 북쪽의 강한 바람을 이다 산정이 막아주고 남쪽의 해풍도 둘러싼 산들이 막아주고 있다. 이 두 높고 낮은 산들에서 발원한 풍부한 물이 메사라 대평원으로 흘러들어가는 지형이 한 눈에 파악된다. ⓒ박경귀 지도의 왼쪽 빨간 동그라미로 표시한 지역이 페이스토스 왕궁이 위치한 곳이다. 왼쪽 동그라미 표시한 곳은 고르티스 왕궁 유적지이다. 지도의 푸른색으로 표시된 동서로 길게 뻗은 구역이 메사라 대평원이다. 북쪽의 강한 바람을 이다 산정이 막아주고 남쪽의 해풍도 둘러싼 산들이 막아주고 있다. 이 두 높고 낮은 산들에서 발원한 풍부한 물이 메사라 대평원으로 흘러들어가는 지형이 한 눈에 파악된다. ⓒ박경귀

페이스토스 남동쪽으로 넓게 트인 메사라 평원이다. 올리브 농원으로 가득 차 있다. ⓒ박경귀 페이스토스 남동쪽으로 넓게 트인 메사라 평원이다. 올리브 농원으로 가득 차 있다. ⓒ박경귀

페이스토스 왕궁 북서쪽으로 이어진 메사라 평원이다. 오렌지 농장이 가득하다. 멀리 이다 산정들이 보인다. 이 산의 만년설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물들이 메사라 평원을 기름지게 만들고 있다. ⓒ박경귀 페이스토스 왕궁 북서쪽으로 이어진 메사라 평원이다. 오렌지 농장이 가득하다. 멀리 이다 산정들이 보인다. 이 산의 만년설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물들이 메사라 평원을 기름지게 만들고 있다. ⓒ박경귀

메사라 평원에 가득한 올리브 농원이다. ⓒ 박경귀 메사라 평원에 가득한 올리브 농원이다. ⓒ 박경귀

페이스토스 왕궁에서 4km 정도 떨어진 산비탈에 하기아 트리아다(Hagia Triada) 유적이 남아 있다. 미노스 시대의 집단 가옥이 있던 곳이다. 아마 페이스토스의 귀족 저택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을 찾아가기 위해 페이스토스 왕궁에서 시계 방향으로 산등성이를 타고 차를 몰았다. 하지만 전혀 포장되어 있지 않은 1차선 도로인데다 산비탈을 내려가는 길이 경사가 너무 심하고 울퉁불퉁한 흙길이어서 소형 승용차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위험한 길이었다. 안전을 위해 차를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꼭 가보려면 페이스토스 왕궁 언덕에서 내려와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 서쪽으로 뻗은 메사라 평원의 저지대부터 도보로 등산하듯 올라가야만 접근이 가능할 것 같았다. 물론 주춧돌만 남아있는 곳이기도 했지만 다음 일정을 고려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그곳에서 발견된 유일한 유물을 헤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바로 유명한 제단의 남녀를 그린 프레스코화다. 크노소스 궁전에서 발견된 당시의 인물과 풍속을 묘사한 생생한 프레스코화와 동일한 유형이다. 그리스 본토에서는 대개 희생 제물을 메고 가거나 끌고 가는 역할을 남성이 맡았다. 반면 이 유물은 남녀가 함께 제물을 이끄는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미노스 문명기의 크레타에선 여성의 역할이 보다 폭넓게 주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귀로의 중간 지점에 있는 고르티스 왕궁 터 역시 시간에 쫒겨 스쳐 지나쳐야 했던 점이 아쉬웠다. 하지만 마음은 한시라도 빨리 무궁한 유적과 보물이 쏟아졌던 크로노스 궁전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수없이 눈앞에 그리던 미노스 왕의 미궁(迷宮)을 생각하며 이다 산정을 다시 넘었다(다음 호는 크노소스 왕궁을 찾는다).

페이스토스 왕궁 인근에 있는 하기아 트리아다(Hagia Triada) 유적 전경, 만든 이 Olaf Tausch 페이스토스 왕궁 인근에 있는 하기아 트리아다(Hagia Triada) 유적 전경, 만든 이 Olaf Tausch

페이스토스 왕궁 인근에 있는 하기아 트리아다(Agia Triada) 유적에서 발굴된 프레스코화이다. BC 1450-1350년경 작품으로 추정된다. 크레타 헤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 소장 ⓒ 박경귀 페이스토스 왕궁 인근에 있는 하기아 트리아다(Agia Triada) 유적에서 발굴된 프레스코화이다. BC 1450-1350년경 작품으로 추정된다. 크레타 헤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 소장 ⓒ 박경귀

하기아 트리아다(Hagia Triada) 유적에서 발굴된 프레스코화이다. 제단으로 희생 염소를 끌고 가고 있는 남녀를 묘사한 프레스코화를 복원했다. BC1450-1350년경 작품으로 추정된다. 크레타 헤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 소장 ⓒ 박경귀 하기아 트리아다(Hagia Triada) 유적에서 발굴된 프레스코화이다. 제단으로 희생 염소를 끌고 가고 있는 남녀를 묘사한 프레스코화를 복원했다. BC1450-1350년경 작품으로 추정된다. 크레타 헤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 소장 ⓒ 박경귀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박경귀 기자 (kipec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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