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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서 만난 '세월호 선장' 오늘도 그냥 보낸 당신


입력 2014.05.25 10:14 수정 2014.05.26 09:10        데스크 (desk@dailian.co.kr)

<신성대의 이제는 품격>전철 안 한국의 글로벌 매너

선진시민 없는 선진국, 국민개조 없는 국가개조 없다

출근길 많은 시민들이 지하철을 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연합뉴스 출근길 많은 시민들이 지하철을 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연합뉴스
관광객 차림으로 각자 륙색을 맨 두 외국인 남자가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을 보고 친구가 “저 두 사람 중 키가 큰 사람은 분명 탈 때 제 륙색을 벗을 거다”라고 했다. 드디어 전동차가 도착하자 키가 큰 그 외국인은 과연 륙색을 벗어 들고 맨 나중에 탔다. 어떻게 알았냐? “키가 큰 사람의 선 자세가 바르고 고개까지 똑바르다. 신사임에 분명하니까.” 승용차는 물론 버스, 전동차, 사무실, 집, 빌딩 안으로 들어갈 땐 등에 맨 륙색을 벗는 것이 매너다.

어느 날 전철에 북구의 어느 나라 사람으로 짐작되는 젊은 여성이 탔다. 한손으로 출입문 가까이 기둥을 잡고 작은 책을 보는데 특이하게도 두 다리를 모으고 간다. 흔들리는 지하철에 서서 책을 보는 데도 발에서부터 머리까지 똑바르다. 하여 그다지 큰 키가 아님에도 늘씬해 보였는데 분명 점잖은 집안 처녀일 것으로 짐작된다. 필자도 그 여성을 따라 두 발을 모아 바로 서보았지만 균형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것들

유럽 사람들은 평소 여간해서 아무 데나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지 않는다. 주말 파리 지하철은 야외로 빠져 나가는 승객들로 붐빈다. 헌데 한국에서처럼 어린 아이들이 안 보여 의아했다. 하여 건너편 승강장에 선 승객들을 자세히 살폈더니 그제야 드물지만 중간중간에 아이들이 보였다. 모두 어른들과 똑같이 바른 자세로 서 있어 얼른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아차 싶어 나도 모르게 벌렸던 한쪽 다리를 당겨 모았던 적이 있다.

요즘 한국의 전철에서 두 무릎을 붙이고 앉은 여성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앉은 남성들 중에도 제 앞에 선 사람이 없으면 자동적으로 엉덩이와 다리를 앞으로 내밀어 영토(?)를 넓힌다. 입석 승객들 중에도 똑바로 선사람 극히 드물다. 하나같이 구부정하게 한쪽으로 치우친 자세다.

출입문이나 기둥, 끝 벽면과 문짝을 차지한 승객은 예외 없이 기대고 서 있다. 선진국 전철에선 기댄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기둥은 손으로 잡으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지 엉덩이나 등을 기대라고 세워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상당수 승객은 기둥이나 손잡이를 잡지 않고 두 다리만으로 균형을 잡고 간다. 그러다가 급정거라도 하게 되면? 기관사보고 욕을 해댄다.

고민하기 싫어하는 하인 근성?

동방예의지국의 전철에는 노약자석(경로석)과 임신부석이 지정되어 있다. 젊은이들이 간혹 이 경로석 빈자리에 앉았다가 노인에게서 혼이 나거나 노인들끼리 자리다툼으로 주민번호 끗발 싸움하는 일도 가끔 벌어진다. 어쨌든 이 노약자석 때문에 다른 일반 승객들은 중간에 불쑥 들어오는 노인들에게 자리를 뺏길 염려 안 하고 편히 앉아서 간다.

한데 몸이 심히 불편하지도 않은 어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게 반드시 동방예의지국의 미덕일까? 무작정 나이 많다는 이유로 공경 받아야 하고 앉아서 가야한다는 발상이 옳은 것일까? 반대로 한창 공부해야 할 학생이나 일하러 가는 젊은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게 이치적으로 옳지 않은가? 판단은 각자의 양식에 맡길 일이겠다.

노약자석, 임신부석 구분이 과연 주인의식에서 나온 진심어린 배려심일까 하는 데서 의문이 든다. 누군가에게 자리를 양보하든 말든 하든 그건 전적으로 본인이 판단하고 결정할 문제가 아닌가? 누가 곁에서 강요할 성질이 아니지 않은가? 양보나 배려의 매너까지 규제나 규정으로 강제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불특정 대중에 대한 인격모독이라면 지나친 편견일까?

중고등학교 무시험 입학 전형, 빈부 상관없는 무상급식과 노인수당 지급 등등 행정적 편의주의와 평등주의의 저변에 귀찮은 고민을 하기 싫어하는 나태가 깔려있는 것은 아닌지? 습한 토양에서 곰팡이와 독버섯이 번창하듯 그런 사소한 데서 무책임하고 몰염치한 하인근성이 시작되는 건 아닌지?

한국인들이 유독 좋아하는 ‘객관적 기준’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하인근성의 발로가 아닌지. 객관식 교육만 받아온 한국인들이 과연 객관과 주관, 객체와 주체를 구분할 능력이 있을지. 차라리 노약자석을 따로 구분하지 않았을 때처럼 앞에 선 어른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게 오히려 더 주체적이고 주관적이지 않은가?

그런 사소한 고민마저 규정에다 떠넘겨버리는 편의주의적 발상이 주인의식을 희미하게 만드는 구실이 될 수 있겠기에 하는 말이다. 하여 젊은이들은 모두 양심과 염치는 노약자석 자리 밑에 묻어버리고 영혼은 스마트폰 단말기에 꿰인 채 좀비처럼 어두운 지하 굴을 달리고 있는 것이겠다.

서울메트로 2호선 상왕십리역에서 2일 오후 발생해 승객 등 243명이 부상을 당한 지하철 추돌사고의 원인은 신호기의 고장으로 인해 열차 자동정지장치(ATS)가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드러났다. ⓒ연합뉴스 서울메트로 2호선 상왕십리역에서 2일 오후 발생해 승객 등 243명이 부상을 당한 지하철 추돌사고의 원인은 신호기의 고장으로 인해 열차 자동정지장치(ATS)가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드러났다. ⓒ연합뉴스
우리 모두 대형사고의 공범

일본인들은 재난으로 끔찍한 일을 당했을 적엔 한국인들처럼 울고불고 나뒹굴지 않는다. 그들도 인간인데 감정이 없을 리 없다. 다만 그런 일이 남에게 불편을 끼치기 때문에 참는 것이다. 그리고 강의 중 여간해서는 질문을 안 한다. 왜냐하면 자기로 인해 그 질문의 내용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이 피해를 볼까봐 안하는 것이다. 어렸을 적부터 항상 남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한국 전철에서 다이빙 승차로 인한 출입문 재개폐는 거의 일상적이다. 특히 환승역에서는 거의 매 전동차마다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나 하나쯤? 자기 하나 때문에 기관사는 물론 수백 명의 불특정 대중에게 불편을 주고, 그로 인해 발차 지연으로 열차 간 간격을 연이어 조정하는 바람에 수천 명을 불편케 하고 그들의 시간을 뺏은데 대한 미안함도 없다.

자신의 사소한 규정위반이 대형사고로 연결될 수 있음에 대한 시야가 열려있지 못한 탓이다. 당연히 자신의 무책임, 몰염치가 교통위반과 다를 바 없는 범죄행위이자 살인행위임을 인식조차 못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대형사고의 단초는 지극히 사소한 것들이나 그 매뉴얼상의 각각의 실수와 나태함이 직렬로 이어질 때 일어난다.

가령 '세월호' 참사에 이어 시민들을 놀라게 했던 서울 왕십리역 전동차 추돌 사고를 살펴보자. 이미 신호기가 며칠 째 고장 나 있었고 하필 그 전동차의 자동안전거리유지장치까지 고장 나 사고로 이어졌다지만 그 전동차가 그날 처음 운행한 건 아닐 것이다. 그 상태로 며칠 동안 수없이 그 구간을 운행했음에도 사고는 없었다는 말이다. 한데 왜 그날 그 시간에는 사고를 피하지 못했을까?

평소처럼 전동차간의 간격이 정상적으로 유지되었더라면 신호기나 자동안전거리유지장치의 고장과 상관없이 정상적으로 그 구간을 통과했을 것이다. 헌데 사고가 항상 그렇듯 하필 그 시간 그 곡선 구간에서 앞 전동차가 정해진 출발시간을 넘기는 바람에 일련의 누적된 실수와 나태 등 사고 발생 요건들이 일시에 터진 것이다.

물론 추돌한 앞 전동차의 지연발차가 그 앞 어느 전동차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렴 어느 전동차의 지연발차든 그것이 한 승객의 다이빙 승차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까 닫히는 문을 비집고 들어간 어느 한 얌체 시민이 추돌사고 발생의 초기(마지막) 방아쇠(trigerring)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시킨 것이다.

얌체족이 당긴 대형사고 초기 방아쇠

자기 혼자 굳이 다이빙 승차해서라도 먼저 가야겠다는 염치없는 시민이나 저 혼자 살겠다고 수백 명의 어린 학생들을 사지에 몰아넣고 탈출한 '세월호' 선장이나 다 같이 대형사고 시나리오의 시작과 끝이다. 그 중간에 직렬 퍼즐들이 채워지는 순간 터지는 것이다.

자기 한 사람의 사소한 부주의나 태만이 불특정 다수에게 불편을 주고 위험에 빠트릴 수 있음을, 언제든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 이 나라에서 끔찍한 후진적 사고는 언제든 또 일어날 것이다. 시민 개개인의 성숙된 매너 없인 선진사회로의 진입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선진국 되기를 바라기 전에 어떻게 하면 선진시민이 될 수 있는지부터 고민해야 한다.

사고가 날 때마다 불안하다며 관련기관이나 정부 탓만 하며 ‘닥치고 처벌’ ‘닥치고 대책’을 세우라고 팔뚝질해대는 것 또한 하인 혹은 식민근성이겠다. 진정한 주인이라면 남 탓하기 전에 나부터 뭘 해야 할지 고민하고 실천한다. 촛불 들고 몰려나가기 전에 당장 주변의 몰염치부터 나무라는 시민정신이 먼저다. 그런 게 곧 주인의식이다.

'세월호' 구조작업도 이제 한계에 도달한 것 같다. 남은 가족들의 애타는 심정이야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마는 잠수사들은 물론 현장에서 구조작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지칠 대로 지쳐 또 다른 사고위험 요소를 가중시키고 있다. 이젠 구조방법을 선체인양 등 장기전으로 전환해야 할 것 같다. 적당한 시기에 대통령은 아직 아이들의 시신을 찾지 못한 실종자 가족들을 위로하고 설득해야 한다.

그리고 그동안 고생한 잠수사, 현장근무자, 자원봉사자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자리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비록 해경을 해체하겠다고 했지만 이번 구조작업에 참여한 이들에 대해서는 특진이라도 시켰으면 한다. 아무쪼록 그들의 소중한 현장경험까지 수장시키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글/신성대 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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