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페이스북
X
카카오톡
주소복사

낯선 유럽 낯선 골목 낯선 건물 '낯설음을 사랑하다'


입력 2014.05.03 10:01 수정 2014.06.07 11:33        이석원 기자 (galamoi@dailian.co.kr)

<유럽에 미치다⑦-라트비아 리가>피지배의 처참한 역사에서 핀 유럽 문화의 꽃

라트비아 리가로 가는 실야라인의 선데크에서 맞이하는 백야의 일몰은 여느 일몰과는 전혀 다른 신비로움이 있다. ⓒ이석원 라트비아 리가로 가는 실야라인의 선데크에서 맞이하는 백야의 일몰은 여느 일몰과는 전혀 다른 신비로움이 있다. ⓒ이석원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오후 5시에 출발한 크루즈 실야라인은 두세 시간 스톡홀름 인근 2만 여개의 섬 사이를 돈다. 그리고 저녁을 먹을 시간 즈음 마침내 호수처럼 잔잔한 발트해로 들어서 동남쪽으로 뱃길을 잡는다. 5월 중순이면 시작하는 백야의 바다는 바람 한 점 없이 평화롭고, 파도의 일렁임조차 전혀 느낄 수 없다.

백야는 신비롭다. 6월의 발트해는 밤 11시가 넘어도 해가 지지 않는다. 배 뒤편에서 해가 지는 수평선 쪽을 바라보노라면 시간은 이미 의미를 상실한다. 시간이 지니고 있는 고유 이미지를 망각한 것이다. 그렇게 밤 11시하고도 30분을 지날 무렵 서쪽 발트해의 수평선에는 절대로 지지 않을 것 같았던 태양이 겨우 내려앉기 시작한다. 그렇게 북구 백야의 태양은 하루를 힘겹게 마감하는 것이다.

스웨덴과 러시아, 그리고 같은 발트 3국 멤버인 에스토니아와 리투아니아에 둘러싸인 라트비아 (구글 맵) 스웨덴과 러시아, 그리고 같은 발트 3국 멤버인 에스토니아와 리투아니아에 둘러싸인 라트비아 (구글 맵)

스톡홀름에서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Riga)까지는 뱃길로 530여 km. 16시간 정도 밤을 달려 오전 9시 쯤 되면 이름도 생경한 라트비아의 입구이자 발트 3국의 대표적인 항구 도시 리가에 도착한다.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와 함께 1991년 구 소련에서 독립한 라트비아의 정식명칭은 라트비아 공화국(Republic of Latvia). 북쪽으로는 에스토니아, 남쪽으로는 리투아니아, 그리고 동쪽으로는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남동쪽으로 벨라루스와도 접하고 있다.

라트비아의 수도인 리가가 도시로 건설되기 시작한 기록은 1201년. 독일 뤼베크를 중심으로 한 12, 13세기의 한자동맹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로 따지면 보따리 장수, 좀 더 규모를 갖춰 말하자면 보부상 조직인 한자(Hansa)가 발트해 연안으로 상권을 확장시키며 이른바 도시 연합체를 만든 것을 한자동맹이라고 하는데, 리가는 바로 그 한자동맹의 비독일권 중심지로 발돋움하기 시작한 것이다. 독일 브레멘의 대주교였던 알베르트가 리가에 배를 댄 1201년을 리가는 공식적인 도시의 탄생으로 여기고 있다.

리가 구시가 역사지구 (구글 맵) 리가 구시가 역사지구 (구글 맵)

독일인들이 세운 나라나 다름없는 라트비아 피지배의 역사는 길다. 독일은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를 통합해 라보니아 공국을 세웠다. 16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폴란드가 라트비아를 점령했고, 1629년에 스웨덴의 구스타프 2세가 폴란드로부터 다시 라트비아를 빼앗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채 100년이 되기 전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한 스웨덴은 라트비아를 내줘 1721년부터 제정 러시아의 지배 아래 들어간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부터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한다. 당시 리가를 ‘유럽으로 향한 러시아의 창’으로 여긴 제정 러시아의 황제들은 리가를 발전시켜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 이어 제3의 도시로 키운 것이다.

1991년 이전 라트비아가 독립국으로 살아본 것은 1918년부터 1939년까지 21년 정도다. 볼셰비키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고 소련이 건국한 후 레닌은 라트비아의 독립을 인정해 준다. 나름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고, 의회를 구성한 후 헌법을 제정해 근대 국가로의 틀을 갖추지만 라트비아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 짧았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독일과 소련이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면서 소련은 사실상 라트비아의 지배에 들어간다. 이후 라트비아는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와 함께 발트 지역의 소비에트로 편입되고 소련의 붕괴와 함께 새로운 독립국가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배가 리가에 도착할 무렵 항구 주변은 고요하다. 이미 일과가 시작될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또 리가가 국제적인 무역항임에도 불구하고 잿빛 하늘처럼 리가항은 그저 평화롭다. ⓒ이석원 배가 리가에 도착할 무렵 항구 주변은 고요하다. 이미 일과가 시작될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또 리가가 국제적인 무역항임에도 불구하고 잿빛 하늘처럼 리가항은 그저 평화롭다. ⓒ이석원

리가 시내는 대중교통이 발달한 편이다. 트램을 이용하는 여행자들이 많은데, 리가 시내 지리에 익숙하다면 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더 좋다. 최근 리가의 버스는 완전 공짜다. 새로운 리가 시장이 시내 버스 완전 무료에 성공한 것이다. ⓒ이석원 리가 시내는 대중교통이 발달한 편이다. 트램을 이용하는 여행자들이 많은데, 리가 시내 지리에 익숙하다면 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더 좋다. 최근 리가의 버스는 완전 공짜다. 새로운 리가 시장이 시내 버스 완전 무료에 성공한 것이다. ⓒ이석원

리가항에서 배를 내려 버스나 트램을 타고 얼마 가지 않아 구시가(역사지구) 입구가 나온다. 리가에 대한 첫인상은 깨끗하고 아기자기 하다는 것이다. 물론 리가는 상업과 공업이 발달한 도시다. 그리고 소련 지배 시절 지어진 멋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크기만 한 건물들도 적지 않다. 삼성이나 LG 등 국내 내로라는 대기업들도 상당히 진출해 있어 그들이 입주해 있는 건물들은 대도시의 그것들 마냥 크고 우람하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리가는 다른 러시아권 국가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동화적 앙증맞음이 도시 여기저기에서 수줍은 고개를 들며 빼꼼하고 있었다.

리가의 구시가는 1994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세계문화유산이라는 고정관념이 없더라도 리가 구시가를 처음 본 느낌은, 마치 아기자기한 유럽의 오래된 동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거리의 건물들은 단 하나도 같은 모양이 없다. 게다가 형형색색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건물들에는 사람이 아닌 요정이 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리가 구시가 입구에 보무도 당당히 다우가바강을 바라보며 리가를 호위하는 듯한 소총수의 상. ⓒ이석원 리가 구시가 입구에 보무도 당당히 다우가바강을 바라보며 리가를 호위하는 듯한 소총수의 상. ⓒ이석원

물론 여행자들은 리가 구시가와의 첫 만남을 아기자기하고 예쁜 건물이 아닌 진한 사회주의풍의 거대한 동상인 ‘소총수의 상’으로 시작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라트비아 출신 소련군에 복무했던 소총수들이 소총 한 자루만으로 독일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그 공으로 모스크바로 전격 픽업돼 스탈린의 개인 경호원이 됐던 일들을 기린 동상이다. 이 동상들은 리가를 동서로 나눈 다우가바강을 바라보면서 리가를 지키는 초병 노릇을 수십년 째 하고 있는 셈이다.

‘소총수의 상’을 지나 구시가로 들어가는 길에 자그마한 광장에는 리가를 대표하는 건축물 하나가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블랙헤드 길드의 전당이다. 블랙헤드 길드는 특이하다. 주로 북아프리카를 활동 무대로 한 상인 조직인데, 이 길드의 회원은 모두가 미혼이라고 한다. 이들이 수호성인으로 삼은 이가 북아프리카 출신 로마의 전사였던 성 마우리티우스인데, 그러다보니 길드의 이름을 블랙헤드라고 정했다는 것이다. 이 전당은 상인들의 숙소와 연회장으로 주로 사용되던 곳으로 리가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리가의 화려함을 대변하는 시청 앞 블랙헤드 길드의 전당. 원형을 복원했다고는 하지만 지금 볼 수 있는 모습은 2001년 재건된 것이다. 독일과 러시아가 처참히 짓밟은 뼈아픈 역사의 상처이기도 하다. ⓒ이석원 리가의 화려함을 대변하는 시청 앞 블랙헤드 길드의 전당. 원형을 복원했다고는 하지만 지금 볼 수 있는 모습은 2001년 재건된 것이다. 독일과 러시아가 처참히 짓밟은 뼈아픈 역사의 상처이기도 하다. ⓒ이석원

블랙헤드 길드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흑인을 수호성인으로 해서 그런지 전당의 안팎에는 흑인의 얼굴을 새긴 장식이 유난히 많다. ⓒ이석원 블랙헤드 길드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흑인을 수호성인으로 해서 그런지 전당의 안팎에는 흑인의 얼굴을 새긴 장식이 유난히 많다. ⓒ이석원

블랙헤드 전당의 전면은 화려함의 극치다. 특히 건물의 상단부에는 체코 프라하에 있는 오롤로이 천문시계와 비슷해 보이는 천문시계가 아름답게 달려있다. 시간과 월령을 조각한 아름다운 시계인데, 이 시계에 전해지는 전설도 프라하의 오롤로이와 비슷하다. 이 시계를 만든 시계공에 대한 다른 도시의 관심이 많아지다 보니 시계를 처음 주문한 길드의 수장이 이 시계공의 눈알을 빼버려 다시는 그와 같은 시계를 만들 수 없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일 뮌헨과 로텐부르크에도 비슷한 천문시계가 있는 것을 보면 전설은 그저 전설일 뿐인 것으로 보인다.

블랙헤드 전당의 천문시계도 프라하의 천문시계와 비슷한 15세기에 만들어졌다. 섬세한 면이나 크기에서는 프라하의 천문시계가 더 뛰어나다고 평가되지만 미적인 면에서는 이곳의 천문시계도 뒤지지 않다는 평이다. ⓒ이석원 블랙헤드 전당의 천문시계도 프라하의 천문시계와 비슷한 15세기에 만들어졌다. 섬세한 면이나 크기에서는 프라하의 천문시계가 더 뛰어나다고 평가되지만 미적인 면에서는 이곳의 천문시계도 뒤지지 않다는 평이다. ⓒ이석원

눈알이 뽑힌 시계공 만큼 이 블랙헤드 전당도 순탄치 않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의해 건물의 80%가 파괴된 것이다. 게다가 전쟁 이후에 소련은 이 건물이 독일의 잔재라며 아예 모조리 철거해 버렸다. 라트비아가 독립한 이후 2001년 리가가 생긴 지 800년을 기념해 이 건물을 재건했다. 그러고 보면 지금의 이름다움은 500년이 아닌 10여년짜리라는 아쉬움도 드는 대목이다.

블랙헤드 전당 앞에는 한 여름에도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대형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서울 시청 앞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이 조형물은, 이곳이 바로 크리스마스트리의 발상지라는 것을 알아달라는 간절한 외침이기도 하다. 1510년 리가의 길드 회원들은 이 자리에 커다란 전나무를 세워놓고 거기에 각양각색의 화려한 장식을 해 밤새 놀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것이 오늘날의 크리스마스트리가 되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블랙헤드 전당 앞 광장에는 1년 365일 크리스마스 트리가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크리스마스 트리가 자기들에게서부터 비롯됐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무척 강하다. ⓒ이석원 블랙헤드 전당 앞 광장에는 1년 365일 크리스마스 트리가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크리스마스 트리가 자기들에게서부터 비롯됐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무척 강하다. ⓒ이석원

크지 않은 이 광장은 늘 사람들로 붐빈다. 리가 구시가 여행의 시작점이자 마무리 장소이기 때문이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늘 바쁘지 않다. 벤치나 돌바닥에 그냥 주질러 앉아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눈에 띄는 몇 군데 기념품 가게에서 리가의 추억을 끌어 모으기도 한다. 1년 365일 거르지 않고 열리는 거리의 음악 공연을 한가로이 구경하기도 하고, 누군가를 기다리며 사방을 두리번거리기도 한다. 유럽의 구시가라는 곳이 늘 그렇듯, 거기엔 사람이 있고, 기억과 추억이 있고, 휴식이 있다. 대도시의 숨 막히는 분주함은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구시가는 삶의 공간이라기보다 휴식의 공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성 베드로 교회 첨탑 전망대로 올라가려다 보면 교회 뒷쪽에 다소 처참해 보이는 파괴의 모습이 전시돼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교회가 부서지고 불탄 것을 잊지 않겠다는 리가 시민들의 의지가 그대로 반영된 것들이다. ⓒ이석원 성 베드로 교회 첨탑 전망대로 올라가려다 보면 교회 뒷쪽에 다소 처참해 보이는 파괴의 모습이 전시돼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교회가 부서지고 불탄 것을 잊지 않겠다는 리가 시민들의 의지가 그대로 반영된 것들이다. ⓒ이석원

별 바쁜 생각 없이 광장을 둘러보다보면 까마득히 높고 뽀족한 첨탑이 인상적인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성 베드로 교회다. 13세기 길드 회원들의 헌금으로 이 교회가 처음 지어졌을 때는 분명 가톨릭 성당이었다. 하지만 라트비아가 16세기 종교개혁 때 루터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면서 이 교회는 루터교의 성당이 되었다. 지금은 리가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다. 성 베드로 교회 첨탑의 높이가 123m에 이르니 이곳에 오르면 리가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리가는 아르누보 건축의 보고라고 불린다. 구시가 골목골목 양편에 늘어선 건물들은 섬세하고 아름다운 조각들로 치장한 아르누보 양식의 건물들이 여행자의 눈을 즐겁게 해 준다. ⓒ이석원 리가는 아르누보 건축의 보고라고 불린다. 구시가 골목골목 양편에 늘어선 건물들은 섬세하고 아름다운 조각들로 치장한 아르누보 양식의 건물들이 여행자의 눈을 즐겁게 해 준다. ⓒ이석원

아르누보 양식 건물에서 가장 신경 써 치장한 것은 창문틀의 조각이다. 아름다운 조각들은 주로 그리스 신화에서 차용한 것들이 가장 많다. ⓒ이석원 아르누보 양식 건물에서 가장 신경 써 치장한 것은 창문틀의 조각이다. 아름다운 조각들은 주로 그리스 신화에서 차용한 것들이 가장 많다. ⓒ이석원

리가를 대표하는 아르누보 건축가 미하일 에이젠슈타인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진 건물이다. ⓒ이석원 리가를 대표하는 아르누보 건축가 미하일 에이젠슈타인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진 건물이다. ⓒ이석원

구시가 안쪽으로 들어가는 리가의 골목들은 아름답다. 길 양 옆에서 여행자들의 방문을 환영하는 아르누보 양식의 건물들은, 건물이 아니라 하나의 조각품처럼 보인다. 자우니엘라 거리는 1899년부터 1914년 사이에 조성된 거리다. 아르누보 건축 양식이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에 전성기를 이룬 것을 생각하면 자우리엘라 거리는 바로 아르누보의 전성기에 조성된 거리다. 그러니 이 거리가 유럽 아르누보 양식의 보고라고 불릴 만도 하다.

'리가 돔'으로도 불리는 대성당은 리가의 건설과 역사를 같이 한다. 1211년 리가 건설자인 알베르트 대주교가 건설을 시작했지만 18세기까지 증개축이 계속 이뤄졌다. ⓒ이석원 '리가 돔'으로도 불리는 대성당은 리가의 건설과 역사를 같이 한다. 1211년 리가 건설자인 알베르트 대주교가 건설을 시작했지만 18세기까지 증개축이 계속 이뤄졌다. ⓒ이석원

리가 구시가를 남북으로 나누는 카라츄 거리를 걷다가 북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제법 큰 광장이 나온다. 이 광장의 서남쪽엔 라트비아 루터교의 중심인 대성당이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다. 알베르트 대주교가 1201년 리가를 건설하기 시작한 후 10년 뒤에 공사를 시작한 대성당은 처음엔 고딕양식으로 지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18세기까지 증개축을 이어오면서 바로크 양식이 더해졌고, 또 다시 바실리카 양식이 더해지면서 지금은 세 가지 건축 양식이 동시에 존재한다. 이 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6768개의 파이프를 가진 오르간이다. 1884년 제작될 당시만 해도 이 파이프 오르간은 세계에서 가장 큰 것이었다. 지금은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크다고 한다. 여름에 운 좋은 여행자는 이 성당에서 웅장함이 온몸에 그대로 전해지는 파이프 오르간 연주를 들을 수 있다.

슬픈 사랑의 이야기가 서려있는 스웨덴 문. 그 바람에 지금도 연인 여행자들은 이곳에서 자신들의 사랑을 확인하려 애쓰는 걸 볼 수 있다. 스웨덴 문의 한쪽은 스웨덴 병영이 있던 곳이고, 반대쪽은 리가 주민들의 거주지이면서 스웨덴 군인들을 상대하던 사창가가 잇었다. 하지만 지금은 리가에서도 가장 아름다움 골목으로 인기가 높다. ⓒ이석원 슬픈 사랑의 이야기가 서려있는 스웨덴 문. 그 바람에 지금도 연인 여행자들은 이곳에서 자신들의 사랑을 확인하려 애쓰는 걸 볼 수 있다. 스웨덴 문의 한쪽은 스웨덴 병영이 있던 곳이고, 반대쪽은 리가 주민들의 거주지이면서 스웨덴 군인들을 상대하던 사창가가 잇었다. 하지만 지금은 리가에서도 가장 아름다움 골목으로 인기가 높다. ⓒ이석원

대성당 광장에서 북쪽으로 난 작은 골목은 리가의 또 다른 아름다움이 진한 향기를 내는 곳이다. 그 골목의 끝에서 나타나는 아치형 출입문은 또 하나의 전설을 지니고 있다. 스웨덴이 리가를 점령하던 시절 한 여인이 리가 주민들의 금기를 깨고 스웨덴 병사를 사랑했다. 이들은 남들의 눈을 피해 매일 늦은 밤 이 문에서 만났는데, 어느 날 잡히고 만 것이다. 이 여인은 리가의 법에 따라 죽임을 당했고, 이후 이 문을 지나갈 때마다 흐느껴 우는 여인의 소리가 들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이 문을 지나는 연인이 진실한 사랑이라면 남녀의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단다. 이 문을 지나는 커플마다 잠시 걸음을 멈춰 귀를 기울이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리가는 원래 성벽 도시다. 하지만 숱한 전쟁을 통해 성벽들은 거의 다 파괴됐다. 지금은 국립 전쟁박물관에서 스웨덴 문으로 이어진 구간에만 일부가 복원돼 있다. 리가 시민들은 크로아티아의 성벽이 완벽힌 복원된 것에 고무돼 과거의 성벽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석원 리가는 원래 성벽 도시다. 하지만 숱한 전쟁을 통해 성벽들은 거의 다 파괴됐다. 지금은 국립 전쟁박물관에서 스웨덴 문으로 이어진 구간에만 일부가 복원돼 있다. 리가 시민들은 크로아티아의 성벽이 완벽힌 복원된 것에 고무돼 과거의 성벽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석원

라트비아 국립 전쟁박물관. 리가에서 대성당과 함께 대표적인 붉은 벽돌 건물이다. ⓒ이석원 라트비아 국립 전쟁박물관. 리가에서 대성당과 함께 대표적인 붉은 벽돌 건물이다. ⓒ이석원

스웨덴 문이라고 불리는 이 문은 원래 성벽 도시인 리가를 둘러싼 성벽에 난 25개의 문 중 하나다. 13세기부터 18세기까지 성벽으로 둘러싸인 리가에는 25개의 출입문과 28개의 감시탑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스웨덴-러시아 전쟁, 제2차 세계대전 등을 겪으며 모두 파괴됐고, 스웨덴 문이 연결된 일부의 성벽은 나중에 일부 복구가 된 것이다.

다시 구시가의 중심부로 들어가면 리부 광장이 나온다. 한자동맹 시대 길드의 중심지역이다. 당시 길드는 대길드와 소길드로 나뉘는데, 대길드는 부유한 독일 상인들의 길드다. 라트비아의 소상인과 장인들의 조직인 소길드보다 우월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고, 자연히 차별이 형성됐다. 그래서 생긴 재밌는 이야기도 있다.

라트비아 상안과 독일 상인 사이의 차별에 대한 재밌는 얘기가 전해지는 '고양이의 집' ⓒ이석원 라트비아 상안과 독일 상인 사이의 차별에 대한 재밌는 얘기가 전해지는 '고양이의 집' ⓒ이석원

대길드 건물 앞에 또 다른 건물을 가지고 있던 라트비아의 부유한 상인이 있었다. 그는 대길드에 속하고 싶어 애를 썼다. 하지만 대길드의 독일인들은 그가 라트비아인이라는 이유로 받아주지 않았다. 화간 난 라트비아 상인은 자신의 건물 꼭대기에 대길드 건물을 향해 엉덩이를 내밀고 있는 2마리의 고양이를 조각해 얹었다. 대길드 상인들은 화를 내며 법정 소송까지 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독일 상인들이 몰락하면서 대길드 건물이 국립 라트비아 교향악단의 연주장으로 바뀐다. 그리고 나서 라트비아 상인은 고양이가 라트비아 교향악단의 연주를 잘 들을 수 있도록 180도 돌려놓았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 건물을 ‘고양이의 집’이라고 부른다.

리가 시내 곳곳에서 여행자들의 옷깃을 잡아 끄는 노천 레스토랑. ⓒ이석원 리가 시내 곳곳에서 여행자들의 옷깃을 잡아 끄는 노천 레스토랑. ⓒ이석원

리가는 북유럽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물가가 저렴한 편이라 아름다운 노천 카페는 여행자들에게 편한 휴식을 제공한다. ⓒ이석원 리가는 북유럽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물가가 저렴한 편이라 아름다운 노천 카페는 여행자들에게 편한 휴식을 제공한다. ⓒ이석원

라트비아 리가 여행은 궁금증과 신비로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에스토니아의 탈린과 리투아니아의 빌니우스와 함께 최근들어 우리나라에서도 상당한 관심을 갖는 곳이 리가지만, 그래도 낯설고 어색한 곳이다. 그러나 리가는 유럽 문화의 당당한 한 축이기도 한다.

유럽 근대 건축사에 큰 족적을 남겨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가우디와 더불어 아르누보 건축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하일 에이젠슈타인이 리가 사람이다. 그의 아들이면서 영화 ‘전함 포템킨’을 통해 몽타쥬 이론을 확립하고 이후 고전 영화 이론의 완성자라는 평가를 받는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도 리가 사람이다. 또한 1985년 개봉해 국내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영화 ‘백야’의 주인공이자 세계적인 발레리노 미하일 바리시니코프도 리가에서 태어났다.

유럽의 중세도시들이 대개 그렇듯이 리가도 골목의 예술이라고 불릴 만큼 멋진 골목을 지니고 있다. ⓒ이석원 유럽의 중세도시들이 대개 그렇듯이 리가도 골목의 예술이라고 불릴 만큼 멋진 골목을 지니고 있다. ⓒ이석원

산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리가는 평평한 대지 덕에 조금 높은 곳에만 올라가도 도시의 외곽까지 조망할 수 있다. ⓒ이석원 산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리가는 평평한 대지 덕에 조금 높은 곳에만 올라가도 도시의 외곽까지 조망할 수 있다. ⓒ이석원

리가의 젖줄인 다우가바강. 발트해로 흘러들어가는 이 강이 러시아에서 발원한 탓에 러시아는 늘 리가를 차지하려고 애써 왔었고, 그래서 제정 러시아가 라트비아를 지배할 당시 리가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에 이어 제정 러시아 제3의 도시가 되기도 했다. ⓒ이석원 리가의 젖줄인 다우가바강. 발트해로 흘러들어가는 이 강이 러시아에서 발원한 탓에 러시아는 늘 리가를 차지하려고 애써 왔었고, 그래서 제정 러시아가 라트비아를 지배할 당시 리가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에 이어 제정 러시아 제3의 도시가 되기도 했다. ⓒ이석원

사실 여지껏 우리에게 라트비아의 모든 것은 구 소련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우리에게는 낯선 곳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엄혹한 시간 속에서도 라트비아는 유럽 문화의 한 축으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북유럽이면서도 동유럽이고, 게르만 문화이면서도 슬라브 문화를 지닌 독특한 곳. 참담한 파괴와 질긴 고집의 유지가 공존하는 곳이다.

점점 라트비아를 비롯한 발트 3국에 대한 문호가 개방되고 있다. 아직까지는 쉽게 접하고, 즐기고, 알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더 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가고자 하는, 그곳을 알고자 하는 노력들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수백년에 이르는 처참한 피지배의 역사 속에서, 이제는 가장 빛나는 역사를 지닌 중세의 찬란함이 그대로 남아 있는 나라 라트비아와 그 중심에 선 리가. 낯설음에 대한 깊은 동경이 있다면 만끽할 수 있는 찬연한 문화의 산소로 행복할 수 있는 곳이다.

글·사진 이석원 여행작가 / 기자

이석원 기자 (galamoi@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0
0
관련기사
이석원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댓글 0

0 / 150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