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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비정상엔 눈 감는 '비정상의 정상화'


입력 2014.04.13 09:29 수정 2014.04.13 09:31        김지영 기자

<기자수첩>취재 위해 전화했더니 이리 저리 미루다 "검토중" 답변만

청와대 전경.ⓒ데일리안DB 청와대 전경.ⓒ데일리안DB
4년 전 충청북도 제천에 소재한 저수지 의림지의 외래어종 관리 실태를 취재하기 위해 제천시청에 전화를 걸었던 일이 있다. 처음 통화를 시도했던 곳은 농업정책과. 당시 농업정책과는 농업용수 관리만 자신들의 소관이라는 이유로 전화를 문화예술과로 돌렸다. 하지만 문화예술과가 어종을 관리할 턱이 없었다.

전화는 유통축산과, 자연환경과, 충청북도 내수면연구소 등을 거쳐 다시 농업정책과로 돌아갔다. 취재를 위해 통화했던 과, 팀만 7곳. 농업정책과에 이 같은 자초지정을 설명하고 나서야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최근에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이번엔 국가 최고 행정기구인 청와대와 중앙 정부부처에서다.

지난 9일 ‘비정상의 정상화’ 48개 핵심과제 변동사항 확인을 위해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실에 전화를 거니, 직원은 기획비서관실로 전화를 돌렸다. 기획비서관실 관계자는 주무부처인 국무총리실로 문의할 것을 권유했고, 국무총리 비서실 공보실 측은 다시 국무조정실 소속 담당 과장의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하지만 담당 과장이 오전 내내 회의에 참석하고, 오후에 출장을 떠난 관계로 취재는 무산됐다.

이에 대해 청와대 대변인실 측은 내주 중으로 문의 내용에 대한 정부의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관련 사항을 검토 중이기 때문에 미리 알려줄 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기획비서관실과 총리실, 국무조정실 어디에서도 이 간단한 답변을 주지 않았다. 다른 부서로 전화만 돌릴 뿐이었다.

정치인들은 공무원들의 이 같은 관행을 지나친 형식주의라고 비판한다. 매뉴얼에 규정된 자신의 업무가 아니면 손을 대기 꺼려한다는 것이다. 다름 아닌 책임소지 때문이다. 자신의 답변이 언론에 비판의 빌미를 제공할 경우, 또는 자신의 업무량이 늘어날 것을 예단해 처음부터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는 지적이다.

기업을 비롯한 대부분의 민간기관은 공보와 대언론 기능이 일원화돼 있다. 각기 다른 부처나 부서에 연락할 필요도 없이 공보실에만 문의하면 모든 사실과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각 부서에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공보실의 역할이다. 반면 대다수의 공공기관은 공보실에서도 다른 부서로 전화를 돌리기 일쑤다.

‘내 일’과 ‘네 일’을 구분하는 것은 공직사회의 오랜 관행이다. 다른 부서의 업무를 떠안지 않고, 자신의 권한을 지킬 수 있는 굉장히 효율적인 방법이다. 오죽하면 지역 간 경계에서 사람이 죽었을 때, 먼저 본 경찰은 시체를 경계선 밖으로 밀어넘긴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공무원의 행태를 풍자한 말이다.

전화를 돌리더라도 취재만 가능하다면 그나마 그 부서는 양반이다. 지난해 ‘정부 3.0’을 취재할 때엔 과제별로 각기 다른 부처와 부서에 따로따로 취재를 해야 했다. 협업이면 협업, 예산이면 예산 등 자신들의 소관 업무에 대해서만 답변을 준 탓이다. 이마저도 답변이 부족해 민간 전문가의 입을 빌려야 했다.

또 청와대 통일비서관실 측은 이달 중 출범이 예정된 ‘통일준비위원회’와 관련, 모든 질문에 “진행 중이다”, “검토 중이다”라는 답변으로 일관했다. 민간위원 인선이 진행 중이면서 민간위원 선임 기준을 검토 중이라면 기준도 없이 인선부터 진행 중이라는 말인지, 그냥 답변을 주기 싫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정부는 지난해 12월 48개 핵심과제와 32개 단기과제로 구성된 ‘비정상의 정상화’ 과제들을 발표했다. 공공부문의 비정상 과제들은 협력과 소통을 내세운 ‘정부 3.0’과도 맥을 같이 한다. 참여형 콘텐츠와 정책을 확대해 국민과 소통하고, 부처 간 칸막이를 허물어 업무의 비효율을 줄인 다는 것이 정책의 골자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이 모르는 정책은 없는 정책”이라며 수차례 대국민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처럼 국민과 소통, 부처 간 칸막이 제거는 ‘비정상의 정상화’, ‘정부 3.0’의 핵심이다.

하지만 어느 하나도 해결된 것이 없다. 각종 정부 포털사이트에 국민 참여란(欄)을 개설하면서 ‘소통’을 외치고 있지만, 국민의 귀가 돼줄 언론과 소통은 변비에 걸린 장만큼이나 답답하게 막혔다.

그나마 정보 접근이 수월한 언론도 정책 하나를 이해하기 위해 네댓 통의 전화를 돌려야 하는 상황인데, 정부 홈페이지 민원란만 바라보는 국민은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해야 할까. 비정상을 정상화하겠다는 정부가 자신들의 비정상적인 관행에는 너무 관대한 게 아닌가 싶다.

김지영 기자 (jy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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