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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그리스의 땅끝 '수니온곶'


입력 2014.03.02 10:30 수정 2014.03.17 08:49        박경귀 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 (kipeceo@gmail.com)

<박경귀의 ad greece!①>포세이돈 신전을 보며 영화 '300 제국의 부활'을 떠올리다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주 >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수니온 곶은 아테네가 지배하고 있던 아티카 반도의 땅끝이다. 아테네에서 수니온 곶까지 가는 해안도로는 에머랄드빛 에게해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길 수 있는 환상적인 드라이브 코스다. 하지만 이동하는 동안의 감탄은 가벼운 전주에 불과하다.

우리의 발길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수니온 곶에 이르러, 파란 하늘과 청람색 바다를 배경으로 황갈색의 척박한 산 위에 웅장하게 솟은 포세이돈 신전의 열주를 보면 말문이 막힌다. 멀리서 보이는 신전과 주변의 풍광도 압도적이지만, 언덕 꼭대기에 올라 탁 트인 에게해를 내려다보면 신전의 탁월한 위치와 장중한 아름다움에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감성이 풍부한 영국의 낭만 시인 바이런이 수니온 곶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시를 남긴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수니온의 대리석 절벽 위에 나를 올려놓아다오,
파도와 나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우리 서로의
속삭임이 서로 휩쓸려 가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그곳에.
거기서, 백조처럼, 노래하면서 죽게 해 다오.
노예들의 나라가 결코 나의 나라가 될 수 없으리.
사모스 포도주의 저 술잔을 내팽개쳐라.


60여 미터의 절벽 위 산 정상에 우뚝 솟은 포세이돈 신전.ⓒ박경귀 60여 미터의 절벽 위 산 정상에 우뚝 솟은 포세이돈 신전.ⓒ박경귀

포세이돈 신전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보다 규모는 작다. 하지만, 해변의 절벽 위의 넓지 않은 공간 위에 세워져 주변 경관을 지배하는 위세는 휠씬 더 당당하다. 건물 양식이 비슷하여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주변에 세워진 헤파이토스 신전을 세운 건축가와 동일 인물의 작품이 아닐까 추정한다. 그리스의 어떤 건축가보다도 신전을 자연의 풍광을 배경삼아 신전의 뚜렷한 윤곽이 두드러지도록 건축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 것 같다.

아테네인들은 왜 이곳에 포세이돈 신전을 세웠을까? 에게해의 해상권을 지배했던 아테네에게 수니온 곶은 해상 전초기지이자, 아테네 진입을 통제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에게해의 풍랑을 헤치고 항해해 온 모든 함선과 상선들은 수니온 곶을 보면서 비로소 그리스 본토에 당도했다는 안도감을 느꼈을 것 같다.

수니온 곶은 그리스 연합함대와 페르시아 함대의 2차 전쟁 당시 살라미스 섬으로 올라가는 페르시아 함대의 대이동을 제일 먼저 관측하고, 아테네로 전령을 띄웠던 곳일 듯싶다.

또 비극적 신화의 이야기가 서린 곳이기도 하다. 기원전 12세기 이전의 그리스 세계의 첫 문명의 꽃을 피운 곳은 크레타 섬이었다. 아테네는 이곳에 해마다 소년 소년 7명씩을 공물로 바쳐야 했다. 아이들은 미노스 왕궁의 미로에 갇힌 소의 몸뚱이와 인간의 머리를 가진 야수 미노타우로스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이 비극적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고 도전한 사람이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였다.

아테네의 왕이던 아버지 아이게우스가 테세우스가 살아 돌아오길 목 빠지게 기다린 곳이 바로 수니온 곳이다. 하지만 비극적이게도 테세우스가 아티카 해안에 가까이 왔을 때 아버지와 약속한 ‘살아 돌아옴’을 표시하는 흰 돛을 달지 않는 바람에 아버지 아이게우스는 테세우스가 죽었다고 단정하고 자결하고 만다. 수니온 곶에는 아이게우스의 바위가 남아있다고 하는데 확인하지 못해 아쉽다.

수니온 곶에는 원래 아테나 신전이 포세이돈 신전과 400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함께 있었다고 한다. 아테네가 위치한 아티카 반도의 땅 끝이었다. 아테네 수호신인 아테나 신전과 바다의 신 포세이돈 신전을 함께 건립했던 아테네인들의 의도와 소망을 이해할만 하다. 물론 원래 중앙아시아 내륙의 한 평원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그리스인 선조들이 남하하여 처음으로 바다를 보았을 당시, 수니온 곶은 더 이상 진출할 수 없는 절망과 두려움을 안겨준 곳이기도 했을 것이다.

에게해가 풍광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위에 웅장하게 솟은 포세이돈 신전의 모습.ⓒ박경귀 에게해가 풍광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위에 웅장하게 솟은 포세이돈 신전의 모습.ⓒ박경귀

아테나 신전은 아마 왼쪽으로 수니온 곶의 언덕과 오른쪽으로 더 높은 언덕에 위치한 포세이돈 신전의 사이 약간 낮은 곳이지만 에게해의 아름다운 풍광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지점에 있었을 듯하다. 지금은 그리스 커피 등 식음료를 파는 카페가 들어서 있다. 세기의 결혼으로 화제를 뿌린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와 재클린 여사도 이곳에 와서 에게해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고 한다. 관광객이 낭만적 분위기에 취하기 좋은 경관이다.

왼쪽으로 수니온 곶 언덕과 오른쪽으로 포세이돈 신전을 바라볼 수 있는 중간 지점의 조금 낮은 지점에 위치한 까페에서 바라본 포세이돈 신전, 이곳에 아테나 신전이 위치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박경귀 
왼쪽으로 수니온 곶 언덕과 오른쪽으로 포세이돈 신전을 바라볼 수 있는 중간 지점의 조금 낮은 지점에 위치한 까페에서 바라본 포세이돈 신전, 이곳에 아테나 신전이 위치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박경귀

포세이돈 신전은 기둥머리의 부재(部材)가 도리아식 건물로 단순하고 안정적이다. 전면 6개의 기둥, 측면 각각 13개 기둥의 균형감이 돋보인다. 포세이돈 신전의 원래 추정 그림을 보면 박공(pediment)에 말이 부조된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 흰말이 끄는 황금 마차를 타고 삼지창을 꼬나 쥔 포세이돈의 형상이지 않았을까 싶다. 포세이돈은 바다는 지배하는 신이었지만, 말을 창조하고, 인간에게 마술(馬術)을 가르친 '경마의 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포세이돈 신전의 원래의 추정 모습. ⓒ'ATHENS', Niki Drosou-Panagiotou(2012), pp.101.(아테네에서 필자가 직접 구입한 책이다.)
포세이돈 신전의 원래의 추정 모습. ⓒ'ATHENS', Niki Drosou-Panagiotou(2012), pp.101.(아테네에서 필자가 직접 구입한 책이다.)

그리스인에게 바다는 식량을 구해 떠나는 삶의 루트이자, 전쟁과 교역을 위해 받느시 헤쳐 나가야 할 도전과 극복의 대상이기도 했다. 아름다운 바다는 언제든지 험한 파고와 풍랑으로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괴물로 돌변하기 일쑤였다.

안전한 항해를 위해 바다의 신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트로이를 치기 위해 거병한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 아가멤논 왕이 거친 풍랑으로 출항을 못하다, 자신의 딸 이피게이아를 바다의 제물로 바치고 나서야 출항할 수 있었던 신화가 이를 잘 대변해 준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바다의 위력 앞에 초월적 신의 가호에 기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포세이돈 신전은 군사적 기능 못지않게 정치적 기능도 적지 않았을 듯싶다. 우선 아테네로 진입하는 모든 함선을 통제하는 군사기지 역할을 했을 것이다. 신전 주위를 크게 둘러치고 있는 방벽의 유적이 이를 말해준다. 지금도 발굴과 복원이 진행되고 있다. 바다의 신을 공경하고 위무함으로써 출정하는 아테네 병사들에게 바다에 대한 자신감을 고취하는 데에도 기여했을 듯싶다.

나아가 아티카 반도의 끝자락에 거대한 신전을 세움으로써 아테네의 국력을 과시하는 상징적 역할도 하지 않았을까.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처럼 말이다. 실제로 포세이돈 신전이 기원전 7세기경에 세워졌다가, 페르시아 군에 의해 파괴되고, 아테네의 최고 융성기인 기원전 440년에 페리클레스가 다시 재건한 것으로 볼 때, 이러한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현재 포세이돈 신전을 둘러싼 방벽이 발굴 및 복원되고 있다.ⓒ박경귀 
현재 포세이돈 신전을 둘러싼 방벽이 발굴 및 복원되고 있다.ⓒ박경귀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박경귀 기자 (kipec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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