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대의 무예이야기>택견의 문화유산 등재 엄청난 책임 따르는일
예(藝)와 희(戱)를 구분 못한 학자들의 실수 혹은 고의적 조작?
어느 나라든 전쟁에 지게 되면 승전국의 무예나 호신술을 선호하여 받아들이게 된다. 그들의 무예가 자신의 것보다 강하니까 이겼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해서 열등한 것으로 확인된 자기 것을 부끄러워하여 가차 없이 내다버리게 된다. 특히 다른 문화에 비해 무예 분야가 심하다. 그리하여 강자의 무예를 익혔다 하여 강자의 편에 서서 자기 동포를 얕잡아 보는 이율배반적인 모순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다 보니 결국 자기비하 내지는 패배주의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굳이 정책적으로 말살시키지 않아도 절로 그리 된다. 일제 시대에 우리가 그랬고 지금도 그러고 있는 것처럼.
천안함, 연평도,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을 두고 벌이는 딴지걸기도 따지고 보면 결국 이 패배주의의 소산이라 하겠다. 무예인(武藝人)은 ‘개념’이 없는가? 정신대, 독도, 이어도, 북한 인권에 대해 무예계는 왜 입도 벙긋 못하는가? 금메달을 돈메달로 여기는 스포츠인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실은 누구보다 먼저 분개해야 마땅한 일 아닌가? 그게 어디 진보 보수를 따질 일인가! 연예인들보다 애국심이 없고 동시대에 대한 책임감도 없다 해도 할 말이 없다. 썩은 무혼(武魂)에 변태적 투혼(鬪魂)만 난무하고 있다. 무엇이 우리를 있게 하는가? 왜 이 시대에 전통무예인가? 한 나라의 흥망은 필부(匹夫)에게도 책임이 있다 하였다. 바른 역사, 바른 무예, 바른 정신이라야 나라가 바로 설 것은 불문가지. 전통무예를 바로 세워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무예, 어디로 가는가?
태초에 무(武)가 있었다? 세상의 모든 문화가 처음부터 근사한 모습을 갖추어 태어난 것은 없다. 보잘 것 없는 것에서 시작하여 조금씩 더해지고 꾸며지면서 성장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다른 문화와의 간섭과 변질을 거듭해가는 것이 문화의 속성. 온전한 우리 것, 혹은 전통적인 것이라야만 소중하고, 외래의 것이라 해서 다 하찮은 것은 아니다. 무예라서 더 귀하고, 놀이라 해서 덜 귀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 그 뿌리를 감추려 하거나 억지로 꾸며 역사를 왜곡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무예는 과학이지 종교가 아니다. 미신하는 마음으로 배우고 익히는 것이 아니다. 지난 날 역사의 굴절로 인해 한국무예의 많은 것들이 왜곡되었지만, 언제나 학문의 변방 취급을 받아 온 탓에 터무니없는 무예인들이 저자거리에서 약 팔 듯 제멋대로 역사를 조롱하고 국민을 기만해왔다. 그런 일이 이제는 아예 전통무예계의 ‘전통’처럼 굳어져버렸다. 국가중요무형문화재인 택견이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 무예종목으로 지정되었다. 택견은 무예인가, 놀이인가? 택견이 진정 세계인의 사랑받기를 바라기 전에 먼저 그 역사부터 정확하게 이야기되어져야 할 것이다.
<재물보>(才物譜)의 ‘탁견’
정조14년(1790)에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가 편찬된 지 8년 후, 정조 22년 이만영(李晩永)이 편찬한 백과전서류 <재물보>의 <기희조>(技戱條>에는 ‘卞 手搏爲卞角力爲武 若今之탁견’이라 하여 택견과 관련된 용어가 처음 등장한다.
원래 이 글은 <한서>(漢書) <애제기>(哀帝紀)에 나온다. ‘의식(贊)을 행할 때 변(卞)과 활쏘기(射)와 무희(武戱)를 관람하였다’는 구절의 ‘변(卞)’에 주(注)를 단 것으로 ‘手搏爲卞角力爲武戱 수박(手搏)이 변(卞)이고, 각력(角力)은 무희(武戱)가 된다’고 하였다. 게다가 이 내용 또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권법>(拳法) 편에도 그대로 인용되어 있다. 이를 이만영이 <재물보>에 옮기면서 ‘희(戱)’자를 빼고, 이들 수박과 각력(씨름)을 지금은 ‘탁견’이라 한다하여 첨술한 것이다. 이미 <기희조>라 분류했기 때문에 끝의 ‘희(戱)’자는 중복을 피하기 위해 뺐을 것이다.
흡사 고구려 고분 벽화의 수박희와 각저희 풍경을 그대로 묘사해 놓은 것만 같다. 이는 고구려가 한(漢)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인 것으로 비슷한 그림이 중국에도 많이 남아 있다. 이런 고대의 수박과 각저와 같은 몸싸움놀이를 통틀어 정조 때에는 우리말로 ‘탁견’이라 했음을 알 수 있겠다. 당시 이에 대한 한자 표기를 남기지 않았던 것으로 미루어 민간에서만 통용되던 용어였음을 짐작케 한다. 해서 이만영조차도 ‘탁견’의 한자어에 대한 정확한 확신이 없어 한글로만 표기해둔 것이리라.
아무렴 그렇다한들 그만한 학자가 무예와 놀이(戱)를 구분하지 못해 <기희조(技戱條)>편에 넣었을 리는 없다. 더구나 정조 대에는 조선 전체를 통틀어서 무예 체계가 가장 잘 정리되어 국가적으로 진흥되던 시기였다. 만약 탁견을 무예로 여겼다면 분명 기희조(技戱條)가 아닌 기예조(技藝條), 또는 무예조(武藝條)로 분류했어야 했다. 또한 굳이 ‘탁견’이란 말 대신 그냥 ‘권법’이라 했을 것이다.<재물보>에는 무예에 대한 언급이 없다.
<해동죽지>(海東竹枝)의 '탁견희(托肩戱)'
일제시대 제국신문 주재(主宰)를 지냈던 최영년(崔永年)이 지은 <해동죽지>(1925년) 놀이[遊戱]편에 <탁견희>가 소개되었다. 허나 이 책 역시 무예서가 아니다. 씨름[角抵戱], 손뼉치기[手癖打], 줄다리기[引索戱], 돈치기[打錢戱], 제기차기[蹴雉毬], 강강수월래[强强曲], 연싸움[鬪風箏], 공기놀이[五卵戱], 팽이치기[氷毬子], 줄넘기[跳索戱], 그네뛰기[送唾韆], 널뛰기[跳板戱] 등등 온갖 풍속과 민속놀이를 모아 설명하고, 거기에다 저자의 문학적 흥취로 한시(漢詩) 한 수씩을 지어 붙인 책이다. <재물보>와 마찬가지로 단 한 종류의 무예도 실리지 않았다.
<탁견희>(托肩戱)
옛 풍속에 각술(脚術)이라는 것이 있는데, 서로 마주 보고 서서 차서 거꾸러뜨린다. 세 가지 법이 있는데 최하는 다리를 차고, 잘하는 자는 어깨를 차고, 비각술(飛脚術)이 있는 자는 상투에 떨어진다. 이것으로 혹은 원수도 갚고, 혹은 사랑하는 여자를 내기하여 빼앗는다. 법관으로부터 금하기 때문에 지금은 이런 작난이 없다. 이것을 탁견이라 한다.
백 가지 기술 신통한 비각술
가볍게 상투와 비녀를 스쳐 지난다
꽃 때문에 싸우는 것도 풍류의 성격
한번 초선(貂蟬)을 빼앗으면 의기양양하다
百技神通飛脚術 輕輕掠過琦簪高
投花自是風流性 一奪貂蟬意氣豪
<수벽타>(手癖打)
옛 풍속에 수술(手術)이 있는데, 예전에 칼 쓰는 기술에서 온 것이다. 마주 앉아서 서로 치는 것인데, 두 손이 왔다 갔다 할 때에 만일 한 손이라도 법에 어기면 곧 타도(打倒)당한다. 이것을 손뼉치기라고 한다.
검술은 먼저 손재주의 묘한 것으로부터 온다
척장군이 하마 군사에게 재주를 가르쳤다
세 절구에 만일 한 절구만 어긋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주먹이 머리에 떨어진다
劍術先從手術妙 戚將軍己敎兵才
三節朧如差一節 拳鋒一瞥落頭來
저자는 탁견희, 수벽타가 무예가 아니며, 놀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이들을 각각 별개의 놀이로 분류하고 있다. 수벽타에 부친 한시에서 척계광(戚繼光) 장군 운운했듯이, 그도 이미 <십팔기>와 <무예도보통지>를 잘 알고 있었다. 수벽타는 일반명사 수박(手搏)과도 전혀 닮지 않았다. 마주 서서 노는 탁견희와는 달리 지금의 어린이들 손뼉놀이처럼 ‘마주 앉아서’ 손바닥으로 상대의 손을 때리고 노는 놀이라고 분명히 설명했다. 탁견희 역시 수박의 형태에서 상당히 멀어져 오직 발차는 기술로만 형태를 보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둘을 합쳐야만 원래 수박의 모양새가 조금이나마 나올 것 같다.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의‘택기연(擇其緣)’
그러다가 구한말 일제 시기의 국학자이자 우리나라 민속학의 선구자인 이능화(李能和, 1869~1943)의 저서 <조선해어화사>(1990)가 번역 출간되면서 택견의 어원에 대한 학구적인 연구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이 책의 원전은 1930년에 출간되었다. 구한말 학자로서 총독부 조선사편수위원을 지내면서 학문을 하여야 했던 이능화는, 스스로의 호를 '무능(無能)'이라 지어 부를 만큼 자책하면서도 우리나라 종교와 민속, 역사 방면에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의 저서 대부분이 아직까지 번역되지 못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왜놈 치하에서 저술을 하여야 했던 그는 왜놈들의 글자 사용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렇다고 한글로는 책을 출판할 수도 없어 고의적으로 전부 한문체로 글을 썼다. 일반적인 우리말까지 모조리 한자로 표기하는 바람에 이두(吏讀)식 표기가 수없이 많이 사용하여 어지간한 한문학자도 그의 저서들을 번역하기가 용이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해어화사>의 '해어화(解語花)'란 '말을 알아듣는 꽃', 즉 기생(妓生)을 말한다. <조선기생사>의 완곡한 표현이다. 이 책의 '미동(美童)'에 대한 주석에서 택견의 어원을 설명하고 있다.
“[미동(美童)] 세속에서는 비역(枰役)이라 칭하는데, 남색(男色)을 이른다. 중국의 상공자(相公者)와 같은 것이다. 앞서 우리나라 풍속에서는 만약 미동이 하나 있으면 여러 사람들이 질투하여 서로 차지하려고 장소를 정해서 각법(脚法), 속칭 택기연(擇其緣)으로 싸워 자웅(雌雄)을 결정지어 이긴 자가 미동을 차지한다. 세속에서는 이것을 급기롱(給寄弄)이라 한다. 조선조 철종(哲宗, 1849~1863 재위) 말년부터 고종(高宗, 1863-1887 재위) 초기까지 이 풍속이 대단히 성하였으나 오늘날에는 볼 수 없다.”
최영년과 함께 그 시기를 살며 어렸을 적부터 택견을 보고 자랐던 당대 최고 민속학자의 설명이다. 그가 자신의 책보다 수년 앞서 나온 <해동죽지>를 몰랐을 리 없음에도 불구하고 '탁견(托肩)'을 따르지 않고, '인연을 택하다'란 의미의 '택기연(擇其緣)'으로 차자(借字)를 했다.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조선 말 피폐했던 사회상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겠다.
예나 지금이나 경제가 어려워져 서민들이 살기 힘들어지면 성(性)풍속이 매우 문란해진다. 조선 말기는 나라가 피폐해져 백성들이 살기가 매우 힘들었다. 모두 다 먹고 살기 힘들어 딸을 낳으면 버리거나 관기(官妓)로 보내 입이라도 하나 덜어야 했다. 그 바람에 어떤 고을에는 관기가 2백 명도 넘었다고 하니 관리의 부패와 백성의 형편이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당패, 남사당패, 걸립패 등 여러 유랑예인 집단들이 생겨나 기희(技戱)와 함께 매춘(계간)도 함께 하고 다녔었다. 민속학자이자 오랫동안 문화재전문위원을 지낸 심우성(沈雨晟) 선생의 저서 <남사당패연구>(1974)에는 당시까지 현존했던 남사당패 출신들의 증언을 싣고 있는데, 당시의 풍속을 충분히 짐작케 하고 있다.
“남사당패는 숫동모[男]와 암동모[女]라는 이름으로 남색 조직을 이루고 있었다. 조직의 제일 말단인 '삐리'는 전원이 여장(女裝)을 하고 암동모 구실을 하였다. 이들은 서로 짝을 이루었는데 패거리의 우두머리인 '꼭두쇠'일망정 암동모를 하나 이상 차지할 수 없었고, 반반한 삐리가 많은 패거리가 인기가 좋았다. 그들이 한마당의 놀이판을 벌이는 데는 일정한 보수가 없고, 숙식을 제공받고 하룻밤을 놀고는 마을을 떠날 때 마을 사람들이 주는 얼마간의 노자가 수입원이 되었다. 이밖에 마을의 머슴이나 한량들에게 자기 몫의 암동모를 해우채[解衣債, 몸값]를 받고 빌려줌으로써 작전(作錢)의 수단으로 삼았다.”
당시 한양은 외세와 더불어 서구 문물이 막 들어오기 시작했고, 경제가 피폐해 서민들의 삶이 무척 곤고한 시기였다. 이 놀이패가 많이 노닐던 왕십리는 하층민과 하급 군인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었다. 하릴없는 동네 아이나 건달들이 이 놀이를 즐겼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동네마다 건들대는 왈패들이 있었으니까.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서로 겨루었다고 하지만, 당시 사회가 아무리 혼란스러웠다고는 하나 조선은 엄연히 엄격한 유교 국가였다. 설마 양갓집, 아니 상놈의 여자라 해도 그런 짓거리로 여자를 빼앗거나 빼앗기는 작태가 있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이능화 선생의 주장대로 비역질의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 놀이임이 분명하다. '미동(美童, 혹은 舞童)'이니 '사랑하는 여인'이니 '꽃'이니 하는 것은 모두 '삐리'의 완곡한 시적(詩的) 표현이다.
이능화 선생이 택견의 어원으로 '택기연(擇其緣)'이란 한자어를 무리하게 만들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가 왜놈 글자를 싫어해서 한자어로 표기하다 보니 엇비슷하게 그 내용과 어울리는 한자를 선택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만약 한글로 글을 쓸 형편이었으면 굳이 '擇其緣'을 만드는 수고를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는 조선 말 관립한성외국어학교 학감을 지냈으며 4개 국어에 능통했던 대단한 언어학자이기도 했다. 비록 조어를 만들었다 해도 전혀 터무니없는 글자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세속에서는 ‘급기롱(給寄弄)’이라 부른다고 하여 신빙성을 높이고, 그것이 성행했던 시기까지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택견은 민속놀이다
그 외에 택견에 대한 자료로는 조선 말기 유숙의 그림으로 추측되는 〈대쾌도〉, <기산풍속도>, 외국 선교사가 찍은 흑백 사진 한 장이 전해진다. 〈대쾌도〉에는 씨름과 함께 노는 택견이 그려져 있다. 이런 놀이판들은 대개 성문 밖 서민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동네에서 벌어졌다. 이로 미루어 보아도 당시 택견은 씨름과 같은 민속놀이였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또 다른 택견 그림도 줄타기 등 여타 민속놀이와 풍속을 그린 그림들과 함께 전해진다. 이들 그림과 사진에서의 품세가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택견이 민속놀이로서 그 형태가 정형화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들 자료로 살펴 보건대 택견은 일종의 발차기[脚法, 脚術] 놀이임이 분명하다. 손을 사용하지 않고 발만으로 누가 먼저 상대의 어깨나 상투를 맞혀 밀쳐내느냐로 승부를 다투는 장난이자 겨루기 놀이였던 것이다. 분명 조선 말기의 택견은 지금과는 상당히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주먹을 쓰지 않고 발로만 태권도겨루기를 하면 당시와 거의 같을 것이다.
물론 그 근원을 멀리 고구려 고분의 수박도 그림으로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씨름 등 여타 다른 잡기나 놀이도 주장할 수 있는 일반론적인 유추일 뿐이며, 설사 그렇다한들 그 또한 유희(遊戱)이다. 게다가 이 놀이는 구한말 한양에서 한때 성행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단편적이나마 택견에 관한 자료를 남긴 이들이 모두 한양에서 태어났거나 활동했던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택견의 어원적 추측
탁견희(托肩戱)의 ‘托’은 기실 ‘손으로 밀친다’는 의미이다. 아무튼 ‘탁’이든 ‘택’이든 발차기의 의미를 지닌 한자어를 찾을 수가 없다. 수많은 놀이마다 한자어 명칭과 한시를 하나씩 지어 붙일 정도로 한문에 능한 최영년도 도무지 '탁견'에 걸맞는 글자를 찾지 못해 고민했던 것 같다. 해서 겨루는 모양새, 즉 발로 어깨를 밀치는 것에 착안한 한자어 표기이다. 사실 글자그대로 손으로 상대의 어깨를 치는 놀이였다면 차라리 수박희(手搏戱)라고 했어야 옳았겠지만 이미 ‘탁견’이 발차기놀이의 고유명사로 굳어졌기 때문에 무리한 한자어를 고른 것이리라.
이능화 역시 같은 고민 끝에 미동을 차지하기 위해 택견으로 승부를 가렸던 당대의 풍습, 즉 그 용도에서 택기연(擇其緣)이라는 민속학자다운 나름대로의 한자어를 유추해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외에 십팔기 중 <권법(拳法)>의 여러 세명(勢名)에서도 그와 유사한 한자어를 찾을 수가 없다. 아무렴 순 우리말치고는 너무 생소하다. 비슷한 말로는 ‘티격태격하다’가 유일한데 이는 어느 정도 뜻이 상통한다. ‘티격’은 손으로 치고, ‘태격’은 발로 차는 듯한 느낌이 있다.
이상의 모든 문헌 기록에서 하나같이 택견을 '희(戱)'로 분류하였으며, 이능화는 세속에서는 이를 ‘給寄弄’이라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전래의 탁견이 그 시대에 와서는 ‘희롱(戱弄)’의 수단으로 사용되었음이다. 최영년은 ‘지금은 이런 작난이 없어졌다’고 했으며 이능화도 ‘오늘날에는 볼 수 없다’고 했다. 이 역시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탁견으로 삐리를 차지하려는 풍습(작난)이 사라졌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탁견 자체가 없어졌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여기서는 그 둘 다였다 하겠다. 아름답지 못한 풍속을 단속하다보니 그 수단으로 이용되던 택견마저 절로 시들해진 것이다.
어쨌든 택견의 한자적 이름이 ‘擇其緣’이든 ‘托肩’이든 그것이 성행하던 시기에 ‘미동’ 혹은 ‘여인’을 차지하기 위한 겨루기로도 사용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최영년(崔永年)과 이능화(李能和)의 기술이 서로 부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택견의 발생 자체가 처음부터 삐리를 차지하기 위한 놀이는 아니었을 것이다. , <재물보>의 기록으로 미루어 정조 시기에도 존재했음이 분명하고, 그때도 사회가 피폐하여 성풍속이 문란했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여 정조 대에는 수박희나 각저희와 같은 놀이를 ‘탁견’이라 했고, 이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민속놀이화하여 구한말에는 최영년과 이능화가 본 정형화 된 발싸움놀이[脚術]의 고유명사로 굳어진 것이다.
<권법>과 택견의 연관성?
사실 우리나라의 전통무예나 호신술, 전통 무무(武舞), 민속놀이로서의 권박(拳搏)을 연구하자면 먼저 십팔기 각 기예와의 연관성부터 탐색하지 않고는 그 어떤 것도 학문적 완성도를 인정받기 어렵다. 하여 택견과 군사무예 십팔기 중의 일기인 <권법>과의 연관성을 살피자면, 당시 훈련원(訓鍊院)을 비롯한 군영의 군사들이 연마하던 <권법>이 동네 아이들에게 전해져 놀이화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선조실록>에 나온다.
'선조 33년 4월에 비망기(備忘記)로 정원(政院)에 전교하기를 "어제 중국 병사들이 진 친 곳을 보니, 그 중의 한 부대는 모두 목곤(木棍)을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 중국 조정의 말을 들었는데, 목곤의 기술이 장창이나 용검(用劍)보다 낫다고 하였으니 그 기술을 익히지 않을 수가 없다. 또 권법(拳法)은 용맹을 익히는 무예이니 아이들로 하여금 이를 배우게 한다면 동네 아이들이 서로 본받아 연습하여 놀이로 삼을 터이니, 뒷날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두 가지 무예를 익힐 아동을 뽑아서 종전대로 이(李) 중군(中軍)에게 전습(傳習)받게 할 것을 훈련도감에 이르라" 하였다. 그리고 인하여 <기효신서>(紀效新書) 가운데 목곤과 권법에 관한 두 도해에 표식을 붙여 내리면서 이르기를 "이 법을 훈련도감에 보이라" 하였다.'
전쟁 통에 명군(明軍)으로부터 어렵사리 입수한 비급 <기효신서>까지 훈련도감에 내려 보내며 임금이 직접 내린 명이니 분명 그대로 실행되었을 것이다. ‘종전대로’란 조선군에서 이전에 70명의 날랜 군사를 뽑아 이여송(李如松) 휘하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의 군영에 들여보내 척계광의 <기효신서>에서 <권법>을 제외한 병장기예를 전습(傳習) 받아 조선군에 보급한 일을 말한다. 나중에 이 6기(六技)를 바탕으로 《무예제보》를 만들어 조선군의 무예교본으로 삼았다. 그리해서 당시 군사훈련장 근처의 동네 아이들부터 <권법>을 배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군사들처럼 의무적인 훈련이 아니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그 중에서 어렵고 힘든 동작은 차츰 떨어져나가고 재미있는 몇 동작만 남아 유행되다가 민속놀이화 했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권법>에는 ‘현각허이세(懸脚虛餌勢)’ 등 활달한 발차기 동작이 많다. 굳이 선조의 명이 아니라 해도 군영 근처의 동네 사내아이들이라면 그런 멋진 동작을 보고 그냥 지나칠 리 없을 터, 부러움에 금방 흉내 내어 저희들끼리 으스대며 티격태격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이보다 앞서 선조 31년, 32년에 중국 병사들의 '권법'을 ‘타권(打拳)’이라 부른 적이 있다.
‘유격이 타권(打拳)의 기법을 앞에서 보여줬는데, 그 법은 뛰면서 몸을 날려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이나 목, 혹은 등을 치며 가슴과 배를 번갈아 치기도 하며 볼기와 허벅지를 문지르기도 하는데, 주먹 쓰는 것이 어찌나 빠르고 민첩하든지 사람이 감히 그 앞에 접근할 수 없을 정도였다’
‘상이 별전에 나가 두 부사를 접견하였다. 부사가 말하기를 “저의 부하들이 타권(打拳)을 잘 하는데 왕께서 한번 관람하시겠습니까?” 하니 상이 승지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타권(打拳)은 <기효신서>에 실려 있는데 이 또한 무예 가운데 한 가지이니 보아야 할 듯 하다”고 하였다“
‘유격’은 중국 장수 허유격(許遊擊)을 가리킨다. 선조가 중국 병사들이 활달하게 주먹으로 온몸을 쳐가며 권법을 익히는 걸 수차례 직접 보고 감동을 받으면서 차츰 그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훗날을 대비해 목곤과 함께 동네 아이들에게 가르치도록 하였다. 실제 《기효신서》에는 ‘타권’이 아니라 <권법>이란 이름으로 실려 있다. 그러니까 ‘타권’은 이 <권법>의 별칭이었던 것이다. 이후 광해군 때 만든 <무예제보번역속집>에 이 <권법>이 정식으로 도입된다.
혹여 이 ‘타권(打拳)’이 나중에 ‘탁견’으로 변이되지 않았을까 하는 연구가 있었다. ‘타권’과 ‘탁견’ 사이 2백년이라는 공백과 놀이화의 핵심 요소인 ‘겨루기’를 설명하기엔 부족하지만 상당히 일리 있는 주장이다. 그렇지만 겨우 ‘打拳’ 정도의 의미가 분명하고 쉬운 한자어라면 설사 민간에서 수 세기를 흘렀다 해도 이만영 등의 학자들이 짐작 못할 만큼 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선조 37년에 한 번 더 ‘打拳’이 등장하지만, 그전에 이미 정식 명칭인 <권법(拳法)>으로 대치되면서 기록에서 사라진다.
‘타권(打拳)’, 동네 아이들이 먼저 배우다
헌데 상기 문헌 기록으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당시 명군(明軍)에서는 <권법>을 ‘타권(打拳)’이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조선에서 이 권법[打拳]을 처음으로 익힌 사람은 조선의 병사들이 아니라, 동네 아동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그것도 ‘종전대로’, 즉 아이들을 중군(中軍)에 들여보내어 중국 병사들한테서 직접 전습(傳習)케 했다. 바로 여기에서 ‘打拳’이 당시 중국식 발음과 함께 아이들에게 전해지고 그것이 ‘탁견’으로 변해간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아이들이 중국 병사들에게서 놀이삼아 배운데다 나중에 조선군에 <권법>이 정식으로 도입되는 바람에 관에서는 그때의 일을 곧 잊었을 것이다.
‘打拳’을 현대 중국식으로 발음하면 ‘따췐’이 된다. 이를 배워 기고만장해진 아이들이 ‘打拳’의 우리말 발음보다 당시 중국식 발음을 선호했을 것은 당연한 노릇. 오늘날 ‘공수도(空手道)’를 ‘가라테’라 하고, 다시 ‘카라대, 가랏때, 까라대’ 등으로 불리듯이. 그 외에도 입빠이, 싹쓰리, 조비끼, 빠떼루, 오라잇, 빤스, 빵꾸 등등 일제 시대와 한국전쟁을 통해 들어온 일본어와 영어들에서 글자는 사라지고 변이된 음으로만 통용 되는 용어는 물론, 심지어 원래의 의미까지 바뀐 예도 무수히 많다. 몽고(元)에서 유래한 '설렁탕(설농탕, 선농탕)'과 같이 이치이다. 알파벳도 모르는 기지촌 사람들의 영어처럼 ‘打拳’ 역시 아이들 사이에서 한자를 잃어버리고 중국식 음(音)만 남아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가는 과정에서 조선음과 뒤섞이다가 수박과 같은 몸싸움놀이의 일반명사로 따라붙었을 것이다. 이승만이 가라테 시범을 보고 "택견이구먼!'라고 했듯이.
그 후 훈련도감에는 따로 별기군(別技軍)이 편성되었는데, 이들은 십팔기 전 종목에 능했다. 그들은 때로는 십팔기교관으로 타 군영에 파견되기도 하고 일부는 무예청(武藝廳) 군사로 뽑혀 임금과 궁궐의 호위를 맡았는데 그들이 바로 무예별감(武藝別監)이다. 당연히 이 별기군은 조선 최고의 무사집단으로 군사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훈련도감 군사들의 자제들로 편성된 대년군(待年軍)이 있어 일찍부터 십팔기를 훈련시켰는데, 그중에서도 신체조건이 좋고 무예에 소질이 있는 아이들만 선발해 별기군으로 편입시켰다. 왜냐하면 일반 병졸로서 단기간에 십팔기 전 종목을 습득한다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신라의 화랑과 비슷한 제도라 하겠다.
말을 타면 달리고 싶고 활을 쥐면 당기고 싶어진다. 기예를 배우면 써먹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한창 혈기 넘치고 장난기 많은 대년군 아이들이 <권법>으로 겨루기를 즐겼을 것은 당연한 일. 이런 과정을 통해 자연스레 동네 아이들에게 권법이 전해져 호신술 내지는 놀이로 흘렀을 것이다.
전쟁놀이와 '탁견'
군사들이 십팔기 각각의 기예를 익히고 나면 실전에 대비해 최종적으로 겨루기[對鍊, 交戰]를 단련하는 것은 당연한 일. 각종 병장기끼리의 교전훈련도 하였겠지만, 특히 십팔기 <권법>의 끝자락에는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고 대련(對鍊)을 하고 마치도록 짜여 있다. 이들이 치고받고 둘러메치는 모습이 아이들에게 가장 흥미있고 부러웠을 것은 당연한 일. 해서 위험한 병장기예 대신 이 <권법>을 흉내 낸 겨루기가 별도로 민간에서 놀이화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할 수 있다.
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무예든 권법대련은 기본적인 훈련, 바로 이 부분이 전형적인 수박의 형태로서 <재물보>에서 말한 ‘탁견’과도 가장 유사한 모습이다. 아마도 당시 중국이나 조선 군영에서는 이 권법겨루기를 따로 ‘대권(對拳)한다’고 했을 것이다. 앞서의 ‘타권(打拳)’과도 상당히 상통한다. 중국식 발음으론 ‘뛔첸’이 되겠다. ‘타권(打拳)’이든 ‘대권(對拳)’이든 민간에서 글(한자)을 모르는 동네 아이들 사이에서 된소리 발음이 빠지거나 보태져 ‘대꿘, 태꿘, 택꿘, 태껸, 탁견, 착견, 뎍견, 택껸' 등으로 변해가지 않았을까.
어느 민족이나 전쟁을 치르고 나면 새로운 무기, 무예, 전술 체계가 생겨나게 마련이다. 그리고 동네 아이들은 한동안 전쟁놀이에 열중하게 된다. 임란 병란을 연거푸 겪으면서 조선의 아이들 사이에 무예를 흉내 낸 놀이가 성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 3백 년 동안 군사들이 날마다 익히던 권법대련을 병영 근처의 아이들이 흉내내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해서 당시 유행하던 ‘놀이화 된 권법겨루기’에 별칭이 따라 붙지 않았겠는가. 그게 2백년 후 <재물보>에 ‘탁견’으로 흔적을 남긴 것일 수 있다.
선조 이후부터는 궁중이나 군영의 의식에서 수박희와 각저희를 행한 기록이 차츰 사라진다. 아마도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체계화된 <권법>과 무예가 도입된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연희의 일부가 민간에 남아 유랑예인집단에 전해지지는 않았을까? 아쉽지만 그 외에는 군사들이 익히던 권법과 민간에서 유행하던 탁견을 연결할만한 구체적인 자료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임란의 먼지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다시 병란을 치렀으니 청군(淸軍)의 영향을 받아 ‘탁견’이란 생소한 용어가 생겼을 수도 있다. 임란을 통해 명(明)과 왜(倭)의 무예와 권법을 받아들였듯, 병란을 통해 청(淸)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보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