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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만명 집단자살시킨 도마뱀 일본의 꼬리 자르기


입력 2011.11.13 10:00 수정         데스크 (desk@dailian.co.kr)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 키, 류큐17-2. 독도와 센카쿠>오키나와 잔혹사

간 나오토 총리 "류큐 독립시키자"에 극우파들 "중국 간첩" 맹비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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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넓은 일본의 키, 류큐
2. 제1차 일본제국주의의 은신처, 류큐
3. 제2차 일본제국주의의 출항지, 류큐
4. 제3차 불침 항공모함의 출항지, 류큐
5. 이중 종속 왕국, 류큐의 흥망사
6. 30년 터울, 일제의 류큐와 조선의 병탄사
7. 좁은 중국의 족쇄, 류큐
8. 그랜트 전 미국대통령의 류큐 3분안
9. 루즈벨트와 장제스
10. 실크로 포장한 중화제국
11. 순망치한의 입술은 북한이 아니라 만주였다
12. 제1세대, 서남방 티베트와 인도를 침공하다
13. 제2세대, 동남방의 여의주를 입에 물다
14. 남서군도, 이어도와 영서초, 오키노도리
15. 제3세대, 서북방에서 달콤한 과실을 따먹다
16-1. 제4세대, 실키 중화제국, 동북공정으로 드러나다
16-2. 제4세대, 실키 중화제국, 동북공정으로 드러나다
16-3. 제4세대, 실키 중화제국, 동북공정으로 드러나다
17-1. 독도와 센카쿠
17-2. 독도와 센카쿠
18. 제5세대, 북한과 류큐로 나아갈 것이다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는 도마뱀을 본 적이 있는가. 도마뱀은 위험에 부딪치면 꼬리를 흔들어 적을 유인한 다음, 꼬리를 잘라 적이 당황하는 동안에 도망쳐 숨는다. 1945~1951년의 시간과 서태평양의 공간이 교차하는 접점에서 필자는 일본은 도마뱀, 류큐는 도마뱀 꼬리, 미국은 대머리독수리(미국의 상징)같다는 생각이 든다.

1945년 2월 10일 일본의 패색이 짙어진 가운데 어전회의가 열렸다. 일왕과 군부 및 내각은 이미 전세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알고 있었다.
고노에 총리는 히로히토 일왕에게 진언했다.

“이제 일본의 패전은 불가피하기 때문에 화평의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러자 일왕은 “그것은 다시 한 번 전과를 올린 후에 해도 늦지 않겠는가! ”라고 반문하면서 항복을 거부하였다.

일본은 류큐를 단지 미군의 본토 상륙을 최대한 늦추고 군국주의 천황체제를 보존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한 버리는 돌, 사석(捨石)내지 도마뱀 꼬리로 취급했다. 일본은 일본 본토방위의 준비가 완료될 때까지 오키나와 본섬의 요미칸, 차탄에 비행장을 만들고 미국과의 일전에 대비하였다. 때문에 미군 입장에서는 오키나와를 점령해야 일본 본토 침공의 발진 기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1945년 3월 26일 새벽, 미군은 오키나와 본섬 동쪽에 있는 게라마(慶良間)에 발을 디뎠다. 미일간 최대 지상전이 시작된 것이다. 4월 1일에는 오키나와 본섬 동해안에 상륙했다. 그로부터 약 3개월간 거대 병력 54만명의 미군이 류큐의 왕성옛터에 투입되었다.

이에 비해 일본 황군의 병력은 겨우 6만여명, 일제는 부족한 병력을 채우기 위하여 만 14세에서 70세까지의 오키나와 남성과 여학생을 전쟁에 강제 동원했다. 하지만 '철의 폭풍'((鐵の暴風))이라 불리는 이 전투는 처음부터 일본군에는 승산이 없는 무모한 전투였다.

세계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고 비참했던 오키나와 전투, 희생자 총 30여만명 중 류큐 주민이 22여만명, 미군이 약 1만 2천명, 일본군이 약 5만 5천명, 징용이나 종군위안부로 끌려온 한국인 약 1만명으로 군인보다 류큐 민간인 사상자가 훨씬 많았다.

오키나와 결전 최후의 땅, 마부니 언덕에 있는 평화의 공원, 14만 8136명의 류큐인, 7만 4796명의 일본 본토인과 기타 일본식민지인, 1만 4005명의 미국국적인, 82명의 영국국적인, 28명의 대만국적인, 82명의 북한국적인, 189명의 한국국적인 등 모두 23만 7318명의 전몰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오키나와 결전 최후의 땅, 마부니 언덕에 있는 평화의 공원, 14만 8136명의 류큐인, 7만 4796명의 일본 본토인과 기타 일본식민지인, 1만 4005명의 미국국적인, 82명의 영국국적인, 28명의 대만국적인, 82명의 북한국적인, 189명의 한국국적인 등 모두 23만 7318명의 전몰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전세가 불리해진 일본군은 류큐 주민들에게 “항복하면 미군이 여자는 강간한 후 죽이고 남자는 사지를 잘라 처참하게 죽인다”고 거짓 정보를 주면서 집단자결할 것을 강요했다. 집단자결에는 주로 수류탄이 동원되었고 쥐약과 청산가리와 같은 독약이나 돌, 낫과 곡괭이 , 식칼 등 온갖 도구들이 이용되었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끔찍한 비극이 벌어졌다. 결국 약 22만 여명의 류큐 민간인이 이른바 옥쇄작전으로 미화된 강요에 의하여 집단자결하거나 학살당하였다. 이 숫자는 당시 류큐 인구의 3분의 1이상에 해당한다. 나치 독일의 유태인 대학살에 버금가는, 30만 남경대학살에 맞먹는, 그러나 그것들보다 잘 알려져 있지 않는 이른바 ‘류큐인 대학살 사건’이었다.

1945년 2월 어전회의 당시 일왕이 총리의 진언을 받아들여 항복 결단을 하였더라면, 수십만 류큐주민의 참혹한 희생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도 없었을 것이다. 최고 전범은 다름 아닌 히로히토 일왕이다. '천황'의 어명으로 전쟁이 수행되었고 '천황 만세'를 외치며 앳된 병사들이 죽어갔다.

미, 중, 소, 한국이 일본을 분할통치할 수도 있었는데?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였다. 그 후에도 미군은 오키나와 본도 뿐만 아니라 그해 12월 류큐군도 남부의 미야코, 아에야마 제도를 점령하여 군정을 실시했다. 이듬해 1월에는 류큐군도 북부인 아마미와 오시마 제도에 진주했다. 미군은 승자의 군대, 즉 점령군으로서 류큐군도를 일본 본토에서 분리시키고 이곳에 눌러 앉았다.

1948년 2월 히로히토 일왕은 멕아더 점령군 총사령관에게 오키나와에 대한 메시지를 보낸다. 미국이 오키나와의 주권을 일본에 남겨 두고, 조차하는 형식으로 25년 내지 50년 또는 그 이상 장기간 오키나와를 지배하는 것은 미국의 이익이 될 뿐만 아니라 일본의 이익도 된다는 메시지를 극동사령부에 전달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때 오키나와 내 미군기지가 전후 처음으로 타국 공격의 출격기지가 사용되었고, 이후 류큐는 태평양의 요석(keystone of Pacific)으로 불리며 전략 요충지로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전후 처리를 두고 미국과 일본이 강화조약을 맺었는데, 그 안에는 류큐를 미국에게 주고 일본은 독립국으로서 지위를 회복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결국 도마뱀 일본은 도마뱀꼬리 류큐군도를 잘라서 대머리독수리 미국에 내어 준 덕분에 몸체를 온전히 보전하게 되었다. 패전 후 미, 영, 불, 소 4개국의 점령지로 변해 국토가 거열형에 처해져 사지가 찢겨진 마냥 처참한 전쟁도발 죄의 대가를 받은 독일과 대비한다면 일본은 저지른 만행에 비해 지나치게 가벼운 형벌을 받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전범국인 일본은 통일된 자유 국가로 남고, 식민지로 질곡의 세월을 겪어야 했던 한반도는 갈라져 지금까지도 남북으로 대치하고 있으니 말이다.

2010년도 중국 10대 블로거로 선정된 차이(蔡)모 푸저우(福州) 대학 교수는 태평양전쟁이 조금 만 더 늦게 종전되었더라면 일본 본토는 미, 중, 소, 한국 4개국에 의해 4분되고, 이들 4개국에 의한 분할 통치를 받았을 것이라는 만화 같은 분석을 내놓고 있다.

차이 교수는 일본 본토가 마침 4개의 큰 섬으로 구성되어 있어 혼슈는 미국이, 시코쿠(류큐 포함)는 중국이, 홋카이도는 소련이, 규슈는 한국이 사이좋게 갈라 먹기가 독일보다 훨씬 편리하였을 것이라는, 일본이 들으면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고약한 독설을 내뱉고 있다. 또 이러한 독설들이 지금 중국의 대표 포털사이트 메인페이지에 버젓이 걸려 있다.

류큐의 다음차례는 슬픔이었다

일본을 추방하고 류큐의 새 주인이 된 미국은 류큐인에게 많은 자치권을 주었다. 미군정은 의식적으로 ‘오키나와’란 일본식 용어 대신에 원래의‘류큐’를 쓰길 장려했으며 일왕의 연호사용을 금지했다. 류큐인은 일정기간의 자치 뒤에는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1962년 사모아 독립에 이어, 1970년 피지와 통가 등 류큐보다 면적이 작고 인구가 적고 역사도 일천한 태평양상의 여러 군도들이 속속들이 독립국이 되어갈 무렵 ‘다음차례는 우리겠지’, 하며 류큐인의 꿈은 금방 이루어질 것 같았다.

일본 교과서 왜곡을 규탄하며 류큐독립을 외치는 오키나와 주민, 사진 출처:http://image.baidu.com/ 일본 교과서 왜곡을 규탄하며 류큐독립을 외치는 오키나와 주민, 사진 출처:http://image.baidu.com/

그래서 1970년 7월 류큐 토박이인 다케히코(武彦)를 중심으로 한 류큐의 독립지사들은 일본제국에 무력 점령되었던 옛 류큐 왕국을 류큐 공화국(琉球共和國, Republic of the Ryukyus)으로 되살려 명실상부한 독립국 수립을 최고강령으로 하는 ‘류큐독립당’을 창당하였다.

그러나 ‘류큐의 다음차례’는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슬픔이었다. 류큐인의 부푼 꿈은 무너졌다. 1972년 5월 15일, 미국의 일본에 대한 오키나와 반환은 류큐인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그 후 류큐는 다시 ‘오키나와’로 불리게 되었고 일본 본토에서 오키나와로 가던 국제선은 국내선이 되었고, 미국식으로 우측에서 달리던 차량은 일본식으로 좌측으로 달리게 되었다.

일본에 대한 반감은 류큐인들의 히노마루(일본국기), 기미가요(일본의 국가)에 대한 태도에서 표출된다. 일본에 반환된 이후에 류큐에서 히노마루와 기미가요에 대한 거부가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더욱이 1987년에는 오키나와에서 개최된 전국체전의 소프트볼 개회식장에서 지역주민이 게양대에 걸려 있던 히노마루를 끌어내려 소각한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류큐인들의 대부분은 여전히 자신을 일본정부에 의해 여러 차례 희생양으로 이용되었던 경험 때문에 독특한 류큐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 오늘날 류큐인들은 일본어는 사용하지만 자신들의 언어인 우니나 구치를 포기하지 않았다. 류큐어를 일본인들이 그리고 일본어를 류큐인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과 류큐인들 사이의 문화적 차이는 류큐가 독자적 국가를 형성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크다.

2006년 류큐독립당 당수 야라 조스케(屋良朝助)는 당명을 류큐어로 행복, 자연과의 조화를 뜻하는 가리유시 클럽(かりゆしクラブ)으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미-일제국주의의 공동지배를 철폐하고 완전독립주권을 건국한다” “일본정부는 300억달러의 전쟁배상금을 류큐인에게 지불하여야 한다” 등의 모두 3개 장, 23개조로 구성된 당헌을 제정하였다.

그 무렵 타이완의 지롱(基隆)을 거점으로 '류큐독립'을 내걸고 활동하고 있는, 류큐혁명동지회와 류큐독립협회는 다음과 같은 6대 강령을 반포하였다.

1. 류큐인은 일본의 류큐의 식민통치를 더 이상 용인해서는 안 된다.
2. 류큐는 유구한 역사의 자주독립의 평화애호 왕국이었다.
3. 류큐의 주권을 회복하고 전체 류큐군도에 대한 영토의 완전성을 회복하여야 한다.
4. 류큐 공화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
5. 류큐독립후 채택하는 정치제도는 류큐인의 염원을 반영하여야 한다.
6. 어떠한 개인, 단체, 당파, 국가도 류큐독립을 저해하는 언행을 할 수 없다.

이 밖에도 ‘류큐독립운동 지하본부’, ‘류큐코 선주민족회(先住民族會)’ 등 사회단체들도 미국이나 일본으로의 편입이 아닌, 류큐공화국이란 한 국가로서의 독립국가를 주장하였고, 현재에도 진행 중이다.

2005년 국립 류큐대학 린췐중(林泉忠) 교수(동경대학 법학박사)팀이 18세 이상의 류큐인에게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질문에 답한 1029명의 류큐인 중 40.6%의 류큐인은 자신이 류큐인이며 일본인이 아니라고 하였다. 21%만 일본인이리고 생각하고 있다고 답했으며 24.9%의 사람은 류큐독립운동을 지지한다고 답했다. 2006년 류큐인을 대상으로 한 또 다른 설문조사에서 75%가량은 주민투표를 통한 류큐독립을, 25%가량은 독립에는 반대하나 자치의 확대를 찬성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11만 여명에 달하는 류큐인들은 2007년 9월 29일, 오키나와 기노완시 해변공원에 집결하여 류큐독립을 외치는 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들은 일본 문부과학성이 심의한 역사교과서에 제2차 세계대전시 일본군이 류큐인에게 강제로 집단자살을 하게 한 내용을 삭제 한 과거사 은폐에 대해 강력히 규탄하였다.

일 총리, 아싸리 류큐를 독립시켜버리자

비단 류큐에서뿐만 아니다. 류큐차별과 류큐독립의 핫이슈는 일본 본토의 각계에서도 꾸준히 거론되어왔다.

1978년 일본인 나까무라(中村) 교수는 류큐의 일본에 대한 경제예속관계 등 구체적 지표를 들어 류큐가 ‘국내식민지’라는 결론을 내렸다. 일본은 류큐인의 정서를 전혀 위무하지 않고 류큐인을 ‘천민’으로 천시하며 류큐에 잔혹한 식민통치를 자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1982년 일본인 야마자끼(山崎) 교수도 국내식민지론에 대한 구체적 해석을 더했다. 즉 류큐는 국가내의 종속지역으로서 착취, 약탈, 압제, 소외, 멸시 등 5중고에 시달리고 있는데도 일본정부는 류큐문제의 본질인 국가침략과 민족박해 등 주요모순에 대한 해결을 외면하고 있다고 질타한 바 있다. 실제로 2010년말 현재 오키나와현은 일본 47개 현 가운데 가장 넓은 면적(바다면적 포함)을 차지하고 있지만 소득수준은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1997년 2월 13일, 일본중의원 예산심사회의에서 류큐 출신 중의원 한 사람은 당시 하시모토 총리에게 류큐는 모욕과 착취를 당할 만큼 당해왔으니 더 이상 참을 수 없으니 이제 류큐왕국을 부활시키거나 차라리 류큐를 독립시켜 줄 것을 공식 요구했다.

더구나 2009년 일본본토 출신 민주당 참의원 한 사람은 <오키나와의 자기 결정권-지구의 눈물에 무지개가 걸릴 때가지>라는 책을 펴내면서 중국이 류큐에 대한 권리를 공식적으로 요구하기 전에 일본은 류큐독립을 위한 준비를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압권은 간 나오토(菅直人) 일본 직전 총리의 발언이다. 2009년 9월 그가 부총리겸 국가전략상을 맡고 있을 때 한 참의원에게 류큐의 강력한 반미 반일 정서와 후텐마 기지이전 등 현안에 대해 이렇게 토로했다.

“기지문제는 속수무책이다. 우리가 어떻게 해도 미국인도 류큐인도 만족시킬 수 없다. 아싸리(あっさリ) 류큐를 독립시켜버리는 게 좋다.”

간 나오토의 발언은 일본의 우익분자들에게는 중국 간첩이자 매국노라는 비난의 돌팔매가 되었으나 중국에게는 ‘류큐공정’이라는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기폭제가 되었다.

류큐독립을 외치는 류큐 주민  2009년 9월 29일 오키나와 기노완시 해변공원, 사진 출처:http://image.baidu.com/ 류큐독립을 외치는 류큐 주민 2009년 9월 29일 오키나와 기노완시 해변공원, 사진 출처:http://image.baidu.com/

바다와 섬과 반도로 향진하는 ‘류큐공정’
 
제1세대 마오쩌둥에서 제4세대 후진타오 전반집권기까지의 중국의 팽창전략범위는 대부분 청나라 말엽 당시의 국경내로 국한되어왔다. 이때까지 동북공정(초기)을 비롯한 서남공정, 서북공정 등은 중국의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연구 프로젝트였다 그런데 2006년 12월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 ‘중국의 해양대국화’를 선포한 이후부터는 중국의 팽창전략범위는 중국의 국경 밖의 바다와 섬과 반도로까지 향하고 있어 탈이다.

최근 중국은 자신의 영역을 이른바 조공국 관계였던 류큐군도와 제주-이어도 해역, 북한지역에까지 확장시키려는 움직임이 갈수록 도드라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제상황을 자국에게 유리하도록 바꾸어 보려는 전략적 공세를 백열화하고 있다.

류큐공정은 동북공정의 초기 단계처럼 중국과 류큐간의 역사 문화관계를 중점적으로 연구하여 류큐를 우선 역사 문화적으로 편입시키려고 하고 있다. 이를테면 2010년 중국국가사회과학기금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중국해군의 직속기관 ‘해군출판사’는 <중국-류큐관계 연구 총서>의 발행을 시작하였다.

이 총서는 중국-류큐관계 사료연구, 중국-류큐문화 교류사, 중국-류큐역사관계 및 문헌연구논고, 복건인과 류큐, 명청시대 사대부와 류큐, 명청시대 중국-류큐 우호관계역사, 청대 류큐사신 조공활동보고, 청대 중국-류큐관계연구, 중국-류큐 희곡비교연구, 류큐- 무기가 없는 나라, 류큐왕국 흥망사, 고대중국교육체제하의 류큐유학생, 명청시대 중국-류큐교류중의 중국전통섭외제도 등 모두 13권의 방대한 서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서 중 제1권 ‘중국-류큐관계 사료연구’를 펼쳐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주를 이룬다.

정치 경제 문화 사상 풍속 등 류큐의 모든 전통들은 중국으로부터 오지 않는 것이 없다. 혈통으로 말하자면 중국 푸젠지방에서 이주한 36개 대성의 자손이 류큐 인구의 과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나머지가 한반도와 동남아에서 온 이주민이며 일본 본토에서 건너온 이주민의 비율은 극소수이다. 류큐방언은 일본어보다는 중국의 푸젠 남부지방 방어인 민난어와 유사한 점이 많다. 실제로 일본어와 류큐방언은 마치 프랑스어와 스페인어가 다른 만큼 다르다.

류큐인의 과반수는 중국말에 가까운 류큐방언을 쓰는 중국혈통이기에 류큐인은 중국의 동포나 마찬가지다. 그러한 류큐 동포가 고통을 받고 있는데 중국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면 안 된다.

류큐어로 엄마는 ‘움마’ 이다

그렇게 따지면 류큐는 우리나라와도 유사한 점이 없지 않다. 자국이 삼한(三韓)의 빼어남을 모았다며 동북아 3국 중 조선을 유난히 따랐던 류큐왕국이 아니던가. 일례로 류큐어로 엄마는 '움마' 라고 한다.

일본은 돼지고기를 구워먹는 문화가 없지만 류큐는 한국과 같이 삼겹살 구이를 좋아하고 일본의 가부키는 얼굴에 화장을 하고 춤을 추지만 류큐는 우리의 안동하회탈과 유사한 탈을 쓰고 추는 탈춤을 즐긴다.

<홍길동전>의 홍길동은 류큐왕국의 혁명선구자로 추앙받고 있는 아에야마제도의 이시가키섬의 아카하치와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 아카하치는 홍가와라(洪家王)라고도 불리었는데, 홍가와라가 홍길동이라는 분석이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삼별초가 제주도를 탈출, 오키나와 본섬의 남쪽 우라소에성(浦添城)으로 가서 류큐왕국을 세운 기초를 다졌다는 연구도 있다 ('삼별초 오키나와로 갔는가' KBS 역사추적 2009년 4월 20일 방송 참조). 2009년 12월1일 오키나와 시립극장에서는 '고국의 고려전사 삼별초'가 공연됐다. 실제로 류큐에서는 고려의 기와 양식과 문양이 동일한 기와가 발견되고 있고, 조선식 산성과 초가집, 칠기, 도자기 등 유적과 유물들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계속)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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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대만 국립사범대학에서 수학한 후 대만 국립정치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베이징대학과 중국인민대학, 중국화동정법대 등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으며 주 대만 대표부와 주 상하이 총영사관을 거쳐 주 중국 대사관 외교관을 12년간 역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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