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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에만 흥분하고 이어도는 나몰라라´
중국 야욕 막으려면 제주에 해군기지를


입력 2011.08.07 08:55 수정         데스크 (desk@dailian.co.kr)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 키, 류큐⑮ 제3세대, 달콤한 과실을 따먹다>

서산다오서 이어도까지 13시간 부산선 21시간 8시간이나 중국이 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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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넓은 일본의 키, 류큐
2. 제1차 일본제국주의의 은신처, 류큐
3. 제2차 일본제국주의의 출항지, 류큐
4. 제3차 불침 항공모함의 출항지, 류큐
5. 이중 종속 왕국, 류큐의 흥망사
6. 30년 터울, 일제의 류큐와 조선의 병탄사
7. 좁은 중국의 족쇄, 류큐
8. 그랜트 전 미국대통령의 류큐 3분안
9. 루즈벨트와 장제스
10. 실크로 포장한 중화제국
11. 순망치한의 입술은 북한이 아니라 만주였다
12. 제1세대, 서남방 티베트와 인도를 침공하다
13. 제2세대, 동남방의 여의주를 입에 물다
14. 남서군도, 이어도와 영서초, 오키노도리
15. 제3세대, 서북방에서 달콤한 과실을 따먹다
16. 제4세대, 실키 중화제국, 동북공정으로 드러나다
17. 독도와 센카쿠
18. 제5세대, 북한과 류큐로 나아갈 것이다

‘바다로 나가자’의 상하이에서 상하이방은 바다로 나갔다

상하이(上海), 아시아 대륙의 최장 민물줄기 장강(양쯔강)이 지구의 육지를 풍덩 다 집어넣어도 남을 만큼 가없이 드넓은 바다 태평양을 향해 행진하다 점차 짠 해수로 농도가 짙어가는 ‘델타 황금 삼각주’ 거기쯤이 바로 오랜 잠에서 깨어난 21세기 중국인의 꿈과 야망이 불꽃놀이를 하는 곳, 이름하여 상하이라는 도시이다.

중국 제1의 경제 무역 금융도시 상하이 도심은 빌딩 바다, 상하이 교외 동쪽 끝은 동중국해와 태평양, 교외 남서북 장쑤성과 저장성 동북부는 가도 가도 끝없는 우리나라 김제평야와 만경들 수백 개 수천 개를 합쳐놓은 듯한 초록 바다이다.

그런데 상하이는 어찌하여 상하이라고 부르게 되었을까? 혹시 바다위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상하이라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전설의 해저도시 아틀란티스 말고 이 세상에 바다 아래 있는 도시가 어디 있겠는가.

중국말로 ‘차를 타자’는 말로 ‘상처’(上車)다. 상하이의 ‘상’(上)은 동사이고 ‘하이’(海)는 명사다. 즉 상하이는 ‘바다로 나가자’는 뜻이다. 바다로 나가자, 이 얼마나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도시 이름인가! 바다로 나가서 장사하겠다는 말은 지난 150여년 동안 상하이의 인근 지역인 저장성의 난징, 양저우(장쩌민과 후진타오의 고향), 장쑤성의 항저우와 닝보 등지에서 성행했다.

뿐만 아니라 멀리 영국의 런던과 미국의 뉴욕 등 세계 각지에서도 유행했다. 당시 세계에서 유일한 무비자 여행도시였던 상하이는 모든 사람들이 상하이에서 창업하는 것을 장려했고 이곳으로 몰리는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의 피부색과 머릿속과 가슴속의 칼라를 묻지 않았다.

20세기 후반, 덩샤오핑 역시 색, 즉 컬러를 묻지 않았다. 아니 컬러 구별을 지극히 혐오하였다. 덩샤오핑은 검은 고양이나 흰 고양이나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니, 자본주의니 사회주의니 허튼 색깔놀음에 빠지지 말고 실사구시 정신으로 경제발전에 일로매진하자고 외쳤다. 권좌에 물러나기 직후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개혁개방의 신호탄을 광둥 선전이 아니라 상하이 푸동(浦東)에서 쏘아 올려야 했다. 중국의 미래는 상하이에 달려 있고 상하이의 미래는 푸동에 달려있다.”

이러한 덩샤오핑의 술회와 기대는 마치 바둑대국에서 불계승을 거두지 못한 승자의 복기를 연상케 한다. 그가 이토록 안타까워하고 편애한 상하이 푸동은 어디인가? 푸동은 중국 경제 제1의 도시, 상하이 시내를 가로지르며 황푸(黃浦)강 동쪽 땅을 말한다. 서울의 강남인 셈이다.

동방불패 상하이방은 기적의 활을 쏘았다

덩샤오핑은 1989년 천안문 사태를 진압한 후 이를 은밀히 지지했던 자오즈양을 숙청했다. 당시 상하이 제1인자 당서기를 맡고 있던 상하이방(上海帮)의 거두 장쩌민을 그의 마지막 후계자로 지명, 중앙당총서기로 등극시켰다.

세세대대로 윤택한 도시 양저우의 자본가 가문출신인 장쩌민은 상하이 시장과 상하이 당서기 시절 같이 일했던 인물들을 대거 베이징으로 끌어들였다. 경제부총리를 거쳐 국무원 총리를 지낸 주룽지도 상하이 시장을 지낸 사람이다. 이들 상하이방은 아직도 막강한 파워를 보유하고 있는 중국 정치의 실세이다.

현재 중국 최고지도층 9인의 정치국상무위원중 권력서열 2위 우방궈, 4위 자칭린, 5위 리창춘, 9위 저우융캉 등 4명은 상하이방 직계로, 1위 후진타오와 7위 리커창도 범(凡)상하이방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들은 태자당과 손을 잡고 시진핑(習近平 1953년생, 전 상하이 당서기, 칭화대학 법학박사)을 차기 후계자로 지명한 것도 동방불패 상하이방의 저력을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마디로 상하이방은 정치 이념보다는 경제건설에 중점을 두고 중국 전체를 상하이처럼 만들겠다는 계획을 추진해 왔다.

상하이방은 상하이를 용의 머리, 장강(양쯔강)을 용의 몸에 비유하였다. 과감한 개혁개방 정책으로 용의 머리를 자극하고, 그 힘이 용의 몸통, 장강을 통해 꼬리인 중서부 내륙까지 미치게 하자는 것이다. 그들은 거짓말처럼 상하이를 중국을 움직이는 용두마로, 푸동을 상하이를 이끄는 용의 눈으로 변신시켰다.

장쩌민 시대가 정식으로 개막된 1993년, 상하이방은 대외개방에 대한 인식을 동남연해의 광둥의 실험실 차원에서 실제적 차원으로 전환했다. 상하이를 경제 무역 금융 중심지로 건설하여 장강 델타(삼각주)와 장강 전 유역에 걸쳐 지역경제의 발전을 촉진한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장쩌민 정부는 상하이 및 장강 델타 지역을 화살촉으로, 연해지역을 활로, 장강을 화살로서 비유했다. 1980년대는 연해지역의 활을 지속적으로 확장시킨 시기였고, 1990년대는 화살촉을 날카롭게 연마하는 시기로, 다시 2010년까지는 화살을 쏘아야 할 기간으로 설정했다(아래 그림 참조). 그리고 지금 그들의 꿈은 기적처럼 현재화되고 있다.


상하이방은 개방개방 정책으로 용의 머리(상하이)를 자극하고, 그 힘이 몸통(장강)을 통해 내륙까지 미치게 한다는 경제발전계획을 상당부분 실현하였다.

중국의 서부,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동쪽 하늘은 맑으나 서쪽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네”

중국의 번화한 동부 연해지역과 낙후되어 있는 서부 내륙지역간의 격차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구절이다. 빛이 밝으면 그림자도 짙은 법인가. 덩샤오핑의 동남지역을 우선 배부르게 하자는 선부론은 극심한 지역격차를 유발하였다. 덩샤오핑의 경제발전 일변도정책은 원가를 고려하지 않고 동서간의 엄청난 양극화를 초래하여 심각한 사회적 불안요인이 되었다.

앞에서 여러번 언급한 대로 장쩌민은 지역균형발전의 신균부론에 입각해 이른바 ‘서부대개발’을 내세웠다. 낙후한 소수민족 밀집지역인 서북지역의 개발과 국경지대에 초점을 맞추자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서부대개발은 순전한 ‘국내용 낚시성 구호’였다. 21세기형 동부해안의 눈부신 번영에 19세기형 원시 유목민사회에 머물러 있는 서부지역민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었다.

중국의 서부는 미국의 서부가 아니다. 중국의 서부는 젖과 꿀이 흐르는 미국의 캘리포니아주나 워싱턴 주가 아니다. 주로 설산지대와 사막 등으로 구성된 신장위구르와 시장(티벳) 등 중국의 서부는 인류생존 부적합지역이 대부분이다. 중국서부는 미국서부처럼 태평양이라는 지구최대의 광장과 접하지 않았다. 중국서부는 출구가 없는 꽉 막힌 벽이다. 그런데 이러한 국내불만 무마용 구호에 지나지 않는 ‘서부대개발’을, 우리기업들을 향해 중국서부에로의 투자진출을 장려하였던 적지않은 수의 국내 ‘중국전문가’들의 글과 말을 접할 때마다 나의 뇌리에는 이상(李箱)의 시 ´오감도(烏瞰圖)´가 생뚱맞게 떠올랐다.

´13인의 아해(兒孩)가 도로로 질주하오 /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제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2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하략)


명(名)따로 실(實)따로

중국에서는 명실상부가 드물다. 중국은 ‘명(名)따로 실(實)따로’ 공화국이다. 좌회전 깜박이 등을 켜놓고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우회전하는 게, 사회주의를 내걸고는 자본주의로 질주하는 게, 제1인자보다 제2인자가, 막전의 리더보다 막후의 실세가 판을 쳐온 중국이다. 장쩌민의 행적과 전략을 종합분석해보면 더욱 그렇다.

그의 행태를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고사성어를 찾기 어렵지만 가장 유사한 것을 들라면 성동격서(聲東擊西).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에서 적을 친다는 뜻으로, 동쪽을 치는 듯이 하면서 서쪽을 치는 병법의 하나로서 상대를 기만하여 공격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하지만 성동격서가 아닌, ‘성서격동(聲西擊東)’이라고 할까, 장쩌민을 비롯한 상하이방은 서부내륙을 개발하자며 소리쳤으나 실제로는 동부해안으로 줄창 진출하였다.

약 14~15간 집권하였던 장쩌민의 최대업적은 뭐니 뭐니해도 15년 연속 9% 이상이라는 경이적인 경제성장률과 매년 평균 15%이상의 총수출액 성장률을 기록한 것과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가입을 성공시킨 것이다. 특히 그의 집권 첫해인 1989년에는 총무역액 1168억 달러, 세계 23위의 마이너리그 무역중소국이던 중국을 후진타오에게 바톤을 넘겨준 2003년 총무역액은 8,512억 달러, 세계 제4위의 메이저급 무역대국으로 업그레드시킨 것이다. 2010년말 현재 중국은 대외무역액, 외환보유고, 외자유치액 세계1위의 3관왕을 달성하였고 국내총생산과 국민총소득은 일본을 제치고 세계2위를 차지하였다. 명실상부한 경제통상대국이 되었다.

31개 해군기지 신설, 리모델링하여 해군력 증강

이러한 휘황찬란한 무역증진과 경제발전을 보장하기 위해서 상하이방이 궁리하고 추진한 일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국제경제법과 국제해양법을 열심히 공부한 것이고, 둘째, 중국 전역에 31개의 해군기지(군항)를 신설하거나 리모델링하여 해군력을 증강시킨 것이다.

우선, 장쩌민을 위시한 정치국상무위원 9인은 상하이 화동정법대학 국제경제법교수인 차오젠밍(曹建明)을 비롯한 저명 국제법 교수들을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베이징 중난하이(중국의 청와대 격)으로 초빙하여 90분간 국제경제법과 국제해양법에 대한 강의를 수강하는 것으로 한 주의 업무를 시작한 것이다. 국제경제법은 WTO 가입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고 국제해양법은 제해권 확보를 위한 것이다. 이러한 공로로 차오젠밍은 2011년 현재 중국 최고인민검찰원 검찰장(한국의 검찰총장격)으로 재직 중이다.

중국의 중대형  해군기지(군함) 위치도 중국의 중대형 해군기지(군함) 위치도
장쩌민은 1992년 영해및 접속수역법에 1996년에는 배타적 경제수역 및 대륙붕법에 서명 시행하였다. (일본도 1996년 배타적 경제수역 및 대륙붕에 관한 법을 제정하였다. 반면에 우리나라만 배타적 경제수역법만 제정하고 대륙붕에 관한 별도의 법을 두고 있지 않다. 이 때문에 앞으로 한, 중, 일 당사자간 협상시 제7광구와 같은 배타적 경제수역 이외의 대륙붕에 대해 우리의 권리를 주장할 국내법적 근거가 취약한 실정이다. 입법적 보완이 시급하다.)

중국역사상 최초로 국가원수가 해상사열식 거행

한편 장쩌민은 북해(발해와 서해)에 7개소, 동해(동중국해, 제주도 이어도해역, 류큐해역, 타이완해협)에 8개소, 남해(남중국해)에 16개소, 전국 총 31개소에 중대형 해군기지를 신설하거나 보강하여 해군력 강화에 심혈을 기울였다(그림 <중국의 중대형 해군기지 위치도> 참조). 지면관계상 ‘전대미문적 사례’ 두 가지만 들고자 한다.

1995년 10월 19일은 아시아의 유구한 대륙성 노대국은 왕과 황제, 주석에 이르게까지 단 한 번도 하지 못했던 일을 저질렀다. 장쩌민 당 총서기 겸, 국가 주석, 당 중앙군사위주석 장쩌민은 황해(서해)모 해상에서 당정군 고위 간부를 배석시켜 놓은 자리에서 대규모 관함식을 거행하였던 것이다. 관함식이라는 국가 최고 통치자가 군함의 전투태세와 장병의 군기를 검열하는 해상 사열식이다.

순양함, 유도미사일 구축함, 헬리콥터구축함, 미사일 호위함, 초계함, 대형수송함, 고속정, 고속전차 상륙함, 상륙지원정, 미사일 핵잠수함, 재래형 디젤 재래식 잠수함, 기뢰함 등등 항공모함 하나만 빼고 거의 모든 유형의 군함들이 바다의 무대 위에 출현하였다. 핵잠수함을 포함한 절대다수의 각종 군함들은 중국자체기술로만 개발한 것이다.

이에 최신예 전투기와 전폭기, 헬리콥터, 군사형해상 선박위그(WIG)선 등도 찬조 출연하였다. (2010년 현재 중국해군은 25만 5천명 구축함 26척, 프리깃함 52척 상륙함 60척, 디젤잠수함 62척, 핵잠수함 8척을 보유한 것을 알려져 있다.) 이날 중국인민해방군 해군의 대공사격과 대함사격 능력 등을 선보이는 시범사격이 진행됐다.

중국역사상 미증유의 국가원수가 참관한 해상사열식을 마친 직후 치사에서 장쩌민은 이렇게 강조했다. “해양을 개발하고 이용하는 것은 중국의 장기 발전에 있어서 갈수록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우리는 반드시 전략적으로 높이 해양을 인식하고 전인민들의 해양의식을 증강해야 한다.”

1997년 2월 20일, 덩샤오핑이 사망했다고 발표한 바로 다음날, 112호와 166호의 미사일구축함, 남운 953호의 종합보급선으로 구성된 대규모 중국함대는 태평양을 횡단한 것이다. 미국의 하와이 진주만항과 본토의 센 디아고 군항에 입항하여 각종 전술 공수 훈련을 하였다. 연이어 중국함대는 멕시코 페루 칠레의 중남미 3개국의 주요항구에 오성홍기를 게양한 군함들을 정박시켰다. 이 역시 파천황적 일대 사건이다.

제주 해군기지건설 서둘러야

최근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둘러싸고 정부와 여야, 좌우 시민단체, 현지주민과 외부단체간에 찬반논란이 격렬해지고 있다. 이에 필자는 제주해군기지에 대한 언론기사를 훑어보았더니 해군기지반대론자들의 반대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었다. 첫째, 해군기지 건설로 인하여 환경파괴가 우려되기 때문, 둘째 중국이나 일본 등 주변국의 자극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해군기지가 환경파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우리나라의 진해시를 보아라, 깨끗하고 아름다운 도시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지 않은가. 중국의 하이난다오(海南島)에도 해군기지가 4군데나 있으나 중국 27개성 중에서 가장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다고 평가받으며 중국최대의 관광휴양단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은 남한 육지 전체면적보다 넓은 제주도 및 이어도 남쪽해역을 방어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우리나라의 수출입물량의 90%이상이 제주 남방해역 항로를 이용한다. 이어도 등에서 중국 등 주변국과 해양분쟁이 일어날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

주변국의 자극을 우려하여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것은 현실을 등한시한 배부른 소리이고 안보영역에서는 평화를 위한답시고 자국의 생존위협을 희생하면서까지 타국의 탐욕을 배려할 가치도 없고 이유도 없다. 기지건설 반대론자 일각에서 우려하는 부분,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만드는 것은 미국에 대한 군사적 의존도를 줄이려는 노력이지 미국을 위한 노력이 아니다.

이미 정치 군사력을 제외하고는 경제무역과 이공과학기술분야에서는 작지만 강한 나라, 강소국이 된 대한민국 영토에 우리나라 해군기지 세우는데 주변국가 눈치 보는 게 옳은 태도일까. 불필요한 도발은 자제해야 하지만, 국제사회에서 영원한 적도, 우방도 없는 것처럼 그들이 불편해야 할 만큼 요충지라면 국가의 주권수호를 위해 해군기지 건설은 오히려 늦은 감이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강효백교수 자료제공 ⓒ국민일보 2009.04.14 강효백교수 자료제공 ⓒ국민일보 2009.04.14
중국, 이어도를 노리고 5개소에 해군기지 건설?

“아차 한발 늦었구나.”중국이 한국의 해양정책의 실행중에서 제일 부러워하는 것은 이어도 건설이다.

중국은 누구나 기피하는 수중 암초인 이어도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1995년 이어도 해양과학연구기지 건설을 착수한 것은 지점과 시점을 절묘하게 선택한 것으로 한국의 이러한 심모원려와 그 실천에 극찬하였다.

그래서일까. 암초에 불과한 통다오(童島)를 이어도의 기점으로 삼던 중국이, 1997년 상하이 앞바다의 서산다오(0.3㎞ 독도의 1.5배 크기)로 기점으로 이동, 중국 측으로 대거 후퇴하였다. 그런 후 중국 정부는 서산다오를 불침항공모함식의 해군기지화를 서둘렀다.

2009년 1월 국토해양부 산하 국립해양조사원은 이어도의 중국측 기점을 이어도에서 287㎞ 떨어진 서산다오(余山島)로 변경했으며 당초 이어도에서 245㎞ 떨어진 퉁다오를 기점으로 한 것에서 42㎞더 멀어진 것이다. 외교통상부는 이를 근거로 해외 공관지도에 이어도 기점을 시정한 바 있다.

앞서 필자는 해양주권 확보차원에서 이어도의 중국측 기점을 서산다오로 바로잡고자 필자는 한국 최초로 <데일리안>에 제기한 이래 지속적으로 주장해왔다. 중국 측의 이어도 관련 사진 및 지도를 보면 퉁다오를 기점으로 한 것은 한국측 지도를 인용한 것 외에는 한 건도 없으며 지금까지 우리스스로 중국측에 유리한 입장을 취해 온 것이었다.

이어도 기점 및 관할권과 관련하여 <데일리안>은 2008년 8월 9일자 기사를 비롯 10여차례의 집중탐사보도한 바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일부 언론과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아직도 통다오로 표시된 잘못된 지도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넓은 의미의 국토참절행위에 해당될 수 있으니 빠른 시정을 촉구한다.

중국측 변경된 이어도 기점인 서산다오에 건립한 기점 표시석.(사진 왼쪽) 서산다오의 해군기지, 이어도로부터 불과 13 시간 거리, 반면 부산은 21시간 거리.(사진 오른쪽) 중국측 변경된 이어도 기점인 서산다오에 건립한 기점 표시석.(사진 왼쪽) 서산다오의 해군기지, 이어도로부터 불과 13 시간 거리, 반면 부산은 21시간 거리.(사진 오른쪽)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시 중국보다 5시간 먼저 이어도에 도착

이어도에서 분쟁이 발생할 경우 부산 작전사령부에서 출동하려면 21시간 (481㎞,시속 22㎞기준), 현재 이어도의 중국측 기점이자 해군기지가 있는 서산다오에서는 13시간 (287㎞)이다. 중국 해군이 한국보다 무려 8시간 먼저 이어도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제주 서귀포 강정마을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불과 8시간(174km)거리로 우리가 중국보다 5시간이나 먼저 이어도에 다다를 수 있다.


비단 서산다오 뿐만 아니다. 한국의 제주도와 이어도해역 및 일본의 류큐 해역에 대응하는 중국의 해군기지는 난통, 저우산, 닝버, 원저우 등 5개소나 된다. 섬 전체가 중국경제특구이자 관광특구이자 현재 제주도와 자매결연관계를 맺고 있는 하이난다오만 하더라도 하이커우, 양푸, 바수오, 산야 등 무려 4개소에 해군기지를 건설해놓고 있다.

이들 해군기지들은 대부분 장쩌민을 위시한 상하이방의 주도로 건설하거나 보강한 것이다. 주변 상황이 이런데도 오로지 평화, 평화만을 시조 읊듯 하면 제주도는 원래 평화의 섬이니 저절로 제주도와 주변해역의 평화가 유지되리라고 보는가.

끝으로 동북아 해상왕국 류큐 멸망의 최대 원흉은 누구일까? 그는 일본도 중국도 아닌, 류큐 왕국 자신이었다. 평화애호라는 미명하에 안보는 일본이나 중국 등 외세에 맡겨버리고 돈벌이에만 몰두했던 극단적인 ‘숭상경무(崇商輕武)주의’를 실행한 류큐 왕실 자신이었다.

700년 무역왕국 류큐는 불과 500명 일본군대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류큐는 수천척의 상선만 있었지 한척의 군함도 없었다. 상인만 득시글거렸지 군인은 반 사람도 없었다. 류큐의 무력이라고는 경무장한 궁중 호위병 몇몇과 왕실 주변의 치안을 맡은 순라꾼 수십 명이 전부였다. 이러고도 나라가 멸망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류큐 망국은 필연이었다.

참고로 사(士)는 우리나라에서는 으레 문사인 선비를 의미하고, 일본에서는 무사인 사무라이로 통하게 되지만 중국에서는 문사와 무사를 불가분적으로 통칭하는 뜻으로 쓰이고 막내 류큐는 무역관원을 뜻하였다. 평화는 주어지는 게 아니다. 강한 국방력을 토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균등한 힘을 가지는 사이에서만 평화는 오래계속 된다.

우리는 막대하고도 참혹한 값을 치르고서야 평화를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평화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워왔다. 단순히 평화를 사랑하는 것만이 아닌, 정신무장과 아울러 군비무장에 힘쓰는, 즉 평화의 창조가 평화를 지키는 가장 유효한 수단의 하나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문화를 창조하려는 자는 반드시 무력의 준비가 있어야 한다 (有文事者 必有武備) <공자세가>



<참고문헌>

張世平, 中國海權, 人民日報出版社, 2009.
李明春, 海洋權益與中國&23835;起, 海軍出版社, 2007.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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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대만 국립사범대학에서 수학한 후 대만 국립정치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베이징대학과 중국인민대학, 중국화동정법대 등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으며 주 대만 대표부와 주 상하이 총영사관을 거쳐 주 중국 대사관 외교관을 12년간 역임한 바 있다.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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