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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자본주의, 한국은 사회주의?


입력 2011.07.09 12:12 수정         데스크 (desk@dailian.co.kr)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 키, 류큐⑬-동남방의 여의주를 입에 물다>

마오쩌뚱은 티벳 학살 등 육지영토 확장에 급급 덩은 해양영토 눈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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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넓은 일본의 키, 류큐
2. 제1차 일본제국주의의 은신처, 류큐
3. 제2차 일본제국주의의 출항지, 류큐
4. 제3차 불침 항공모함의 출항지, 류큐
5. 이중 종속 왕국, 류큐의 흥망사
6. 30년 터울, 일제의 류큐와 조선의 병탄사
7. 좁은 중국의 족쇄, 류큐
8. 그랜트 전 미국대통령의 류큐 3분안
9. 루즈벨트와 장제스
10. 실크로 포장한 중화제국
11. 순망치한의 입술은 북한이 아니라 만주였다
12. 제1세대, 서남방 티베트와 인도를 침공하다
13. 제2세대, 동남방의 여의주를 입에 물다
14. 남서군도, 이어도와 영서초, 오키노도리
15. 제3세대, 서북방에서 달콤한 과실을 따먹다
16. 제4세대, 실키 중화제국, 동북공정으로 드러나다
17. 독도와 센카쿠
18. 제5세대, 북한과 류큐로 나아갈 것이다

생래적 자본주의자 중국인들이여, 우향우!

8년 전이던가, 주한 중국대사관의 고위외교관 L은 한 공식석상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말로만 자본주의라지만 실제로는 사회주의국가나 다름없고, 중국은 말로만 사회주의국가이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노선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중국의 고위외교관의 발언치고는 하도 거침없는 언사라서 잠시 귀를 의심했지만, 정곡을 찌르는 표현이라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 바 있다.

중국은 한마디로 말하기에 너무 어렵고 너무 거대하고 너무 복잡하다. 그래도 20여년의 실제 중국체험과 십여 권의 중국관련 책을 펴낸 중국학도의 한 사람으로서 한 가지만은 분명히 말 할 수 있다.

중국은 길게 잡으면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이 1978년 개혁개방노선을 정립하였던 30여년전, 짧게 잡아도 19년 전 남순강화(1992년 덩샤오핑의 동남부연해지역 순시)적에, 이미 보혁 갈등, 좌우대립 따위의 이념 논쟁을 걷어치웠다. 개혁개방과 부국강병을 위해 사회주의 독재정에서 자본주의 독재정으로 줄달음쳐왔다. 문화대혁명시 문자 그대로 ‘자본주의를 향해 치달려가는 주자파 (走資派)의 수괴로 숙청당했던 덩샤오핑. 그는 재집권 하자마자 ’우향우‘ 로 내달았다.

다만 덩의 후배 최고지도층은 실사구시의 실천과정 중에 초고속성장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계속 쾌속 질주해 나갈 것이냐, 아니면 내실을 기하며 착실히 점진할 것이냐 하는, 즉 속도의 완급조절에 지혜를 모으고 있다. 즉 중국은 뒤뚱거리는 좌우의 프레임에서 돌파, 쾌속이냐 초쾌속이냐 속도의 완급차원으로 들어선지 이미 한 세대가 지났다.

중국말로 셩이(生意)는 인생의 의의, 즉 왜 사냐, 무엇 때문에 사느냐 따위의 심오한 형이상학적 의미가 아니다. 장사나 영업을 뜻한다. 중국인에게 삶의 뜻은 한마디로, 장사를 잘해서 잘 먹고 잘사는 현실적 이익과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다. 지금의 중국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중국 땅은 온통 시장이며 중국인은 모두 상인이다.

서구식 자본주의를 도입하여 굳게 단련되었다며 자신만만하던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중국인들이 ‘자본주의적인, 너무나 자본주의적인’사람들이란 것이다. 세계최초로 지폐와 어음, 수표를 상용하고 상업광고를 했던 이들, 이미 3천년 전부터 세계최초의 계산기인 주판을 만들어 주판알을 튕겨 왔던 그들 앞에서 우리나라 자본주의 수 십년의 경험은 어쩌면 가소로운 것이리라.

상인종(商人種)의 나라가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를 실험하였던 시기는 1949-1978년 딱 30년간뿐이었단 사실을 간과하지 말일이다. 한 마디로 덩샤오핑 개혁개방 이후 지금의 중국 땅은 온통 시장이고 중국인은 모두 상인들이며 중국정부는 이름만 공산당 사회주의를 둘러쓴, 본질은 경제성장제일의 원조 자본주의 독재정이다.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은 아래 <표 1>에서와 같이 마오쩌둥 시대의 사회주의 독재정 (D)을 자본주의 독재정(C)으로 이동시켰던 것이다.

덩샤오핑은 중국인의 잠들어 있던 본능을 일깨웠다. 그는 개혁개방의 자명종을 울려 중화민족본성에 걸맞지 않는 사회주의계획경제 30년 긴 악몽에서 신음하던 비단장사 왕서방, 생래적 자본주의자들을 깨어나게 했다. 그렇다면 덩샤오핑 이후 이제껏 우향후를 향해 줄달음쳐온 중국이 꿈꾸는 미래 모델은 어느 나라일까. 자본주의 민주국가 미국이나 서구제국일까. 국민의 80%이상이 중국화교인 싱가포르, 싱가포르만큼 알차고 풍요로우나 통제된, 싱가포르보다 1만 5천배 넓은 거대한 자본주의 독재정 국가일까(<표1 참조>).

<표1> 민주 독재 자본 사회주의와 중국의 방향  <표1> 민주 독재 자본 사회주의와 중국의 방향

나의 유해를 바다에 뿌려 달라

“각막은 기증하고 시체는 해부한 후 화장하여 바다에 뿌려 달라.”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의 유언이다. 1997년 3월, 오색 꽃잎에 쌓인 덩의 유해는 중국 동남부 앞바다에 뿌려졌다.

덩샤오핑이 바다를 처음 만난 때는 그의 나이 15세 되던 해, 1920년이었다. 비교적 부유한 전직관료집안에서 태어난 덕분에 그토록 어린나이에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마오쩌둥에서부터,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에 이르기까지 현대중국 역대 최고지도자들은 모두 중산층 이상의 가정출신이라는 사실에 대해 심층연구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상하이에서 닻을 올린 여객선이 망망대해 인도양을 건너 수에즈운하를 거쳐 지중해를 가로질러 프랑스의 마르세이유 항에 닻을 내리는 길고 긴 해상여행에서 소년은 무엇을 꿈꾸었을까.

1922년 18세이던 덩샤오핑은 프랑스에서 중국소년공산당에 입당했다. 그 후 모스크바의 중산대학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여 1929년 광시성에서 폭동을 주도하였다. 1934년 대장정에 참가, 마오쩌둥파의 유력한 간부가 되어 야전군의 지도자로 다양한 경력을 쌓았다.

덩샤오핑은 평생 바다를 사랑하였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처럼 수영을 좋아했다. 마오는 강이나 호수에서의 수영하길 즐겼지만 덩은 거센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의 수영, 즉 바다수영 마니아였다. 헤엄을 칠 때 마오의 시선은 딱딱한 내륙을 향해 고정되어 있는 반면, 덩의 눈길은 바다 수평선 건너편을 향하고 있었다고 한다.

3번 쓰러지고 3번 일어선 73세의 덩샤오핑이 재집권했을 당시, 전임자 마오에게 물려받은 유산은 죽의 장막에 갇힌 채 평등 가난하게 살아가는, 13억 인민의 과부하에 걸린 극빈국이었다. 집권 이듬해인 1979년 1월 벽두, 덩샤오핑은 태평양을 건너 미국을 방문하였다.

중국역대 최고지도자로서는 사상 최초로 방미한 덩은 워싱턴에서 지미카터 미 대통령과 중-미 정상회담을 개최하였다. 마오 시대 중국은 봉건제국시절 중원에 앉아서 속방으로부터 조공이나 받아오던 전통때문인지 초청외교가 주를 이루었고 방문외교는 드문 편이었다.

덩샤오핑은 방미기간 중 “쇄국은 중국에 정체와 빈곤, 우둔과 낙후를 가져왔다. 쇄국정책으로는 국가 발전은 불가능하다.” “바다는 우리의 장벽이 되어서는 안 된다. 태평양은 중국과 연대하여야 한다.”라고 누차 강조했다.

미국방문에서 돌아온 후 덩샤오핑은 중국을 발전시키는 데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관계없다고 주장하며 유명한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남쪽 기슭이든, 북쪽 기슭이든 정상에만 오르면 된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원래 이 말은 그의 고향 스촨 지역에 널리 전해오는 속담이다. 실질적이고 실효성을 중시하는 스촨 지역민의 가치관을 대변해주는 격언이기도 하다.

84세의 고령이던 1988년 바다에서 수영을 즐기며 노익장을 과시하던 덩샤오핑 84세의 고령이던 1988년 바다에서 수영을 즐기며 노익장을 과시하던 덩샤오핑

바다는 물이라기보다는 영토이다

덩샤오핑에게 바다는 물이라기보다는 진출할 시장이자 확보하여야 할 영토이다. 자본의 선박이 종횡무진하는 탁 트인 영토, 바다에서 덩은 경제특구, 일국양제, 외상투자기업제 등 창의적이면서 실사구시적인 정책들을 건져 올렸다.

세계적인 중국학 석학, K 페어뱅크 하버드대 교수마저도 “덩샤오핑의 문호개방 정책은 중국의 유구한 대륙성 전통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라고 어리둥절했다.

중국대륙의 옆구리에는 바다가 항시 있어 항해업이 잠시 발달한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중국에는 바다가 부여한 문명이 없었다. 바다는 중국인의 문화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예로부터 중국인들은 좀체 바다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설령 연해지역에 위치해있더라도 역사상 어떤 왕국도 바다 쪽으로 발길을 떼려고 하지 않았다. 원래 바다를 두려워하는 ‘공해증(恐海症;필자의 조어)’이라도 걸렸는지, 오로지 내륙의 중원을 차지하려고만 하였다.

지정학적으로 중국은 내륙적 환경을 이루고 있어 해외로의 진출은 제약을 받아왔던 곳이라서 폐쇄적인 주민생활을 영위해왔다. 오직 공간만 있을 뿐 시간은 멈춘 대륙이었다. 이러한 지리적 환경은 중국민족으로 하여금 황하의 중하류, 즉 중원지역이 천하의 중심으로 보이게끔 하였다. 이민족이 사방에서 포위한 피해의식 속에서 그들은 강력한 응집력과 내향성 문화의 심리구조와 전통적 가치관을 형성하여왔다.

그런데, 불굴의 작은 거인 덩샤오핑은 돌파구를 바다에서 모색한 것이다. 바다로 향하는 것만이 중국의 개혁개방 부국강병의 유일한 활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성공적 사고치기’를 상상하는 가능성을 특히 동남연해와 남중국해에서 찾았다. 대륙성에서 해양성으로 전환, 반만년 대륙성 일변도 중국사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이었다.

바다는 마치 어머니가 자녀를 낳아 기르듯 자유무역을 낳아 기르는 것 같다.비옥한 논밭과 평원은 인간을 토지에 속박시키지만 드넓고 변화무쌍한 바다는 인류로 하여금 이윤을 추구하게 하고 무역에 종사하게 한다. 외골수적 대륙지향성이라는 자폐증에다 중화사상이라는 과대망상증의 합병증을 앓아오던 중국사에서, 경제발전과 무역진흥의 씨앗을 광대무변한 바다의 전답에 최초로 파종한 자는 다름 아닌 덩샤오핑이다.

그는 특히 동남부해안 광둥지역의 발전을 내륙지역으로의 파급효과를 기대하는 선부론(先富論)을 내걸었다. 산을 등지고 바다를 마주보는 자연환경은 광둥사람에게 개방과 자유를 중시하는 기풍을 함양시켰다. 일찍이 송나라 시절부터 광둥의 중심 광저우는 만국의 상인들이 끊이지 않고 출입한 대외무역항구였다.

명나라 시절에는 광둥에만 오늘의 세관격인 행(行)이 13개소나 설립되었고 청나라 때에는 중국의 대외통상항구가 되기도 했다. 대외무역과 중상전통의 기풍은 광둥사람들을 바다쪽으로 향하게 했으며, 끊임없이 외국사람과 교역을 하며 살아가게 했다. 광둥은 현대 중국의 자생적 하이파이(海派; 바다와 같은 개방파)의 근거지였다. 이러한 광둥사람들은 덩샤오핑 필생의 열렬한 지지세력이기도 하였다.

덩샤오핑은 사회주의 중국 동남부 바다에 5개의 자본주의 섬, 선전, 주하이, 산터우, 샤먼, 하이난 등 경제특구를 설립하였다. 개혁개방과 현대화건설의 총설계사는 바다의 기백으로 중국대륙에 개혁개방의 거대한 물결을 일게 하여 싱싱한 활기로 되살아나게 하였다. 덩샤오핑은 바다를 등지고 누워있던 중국을 일으켜 세워 바다를 향해 나아가도록 하였다. 검버섯 가득한 노대국의 뺨에 홍조가 돌게 만들었다. 빈곤의 어둠에 혼곤히 젖어 있던 중국대지를 윤기 자르르 흐르는 피부로 빛나게 만들었다.

육지면적은 업그레이드, 해양면적은 무단 팽창

1984년, 용의 여의주에 비견되는 홍콩을 반환받는 중영공동성명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덩샤오핑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1997년에도, 다시 말해서 신중국이 성립되고 48년이 지나서도 홍콩을 회수하지 못했다면 중국 지도자나 정부 모두 중국 인민에게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현 중국정부는 청조 말엽이나 다를 바가 없고, 현 중국 지도층도 류큐군도와 대만을 일본에 할양해준 이홍장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해안선을 가진 국가가 바다를 제패하지 못하고 바다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다면 바다는 재화와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비탄과 고통을 가져온다.”

정치 군사적 목적만으로 획득한 제해권은 온전히 유지될 수 없다. 재해권 장악의 주요목적이 무역증진과 경제발전이어야만 오래 유지될 수 있다. 명나라 초에 취해진 금해(禁海)정책이후 중국의 바다는 텅빈 곳간과 같았다. 비록 정화(鄭和)의 함대가 15세기 전반 7차에 걸친 해외원정을 실시했으나 그 원정의 주요목적은 무역이 아니라 명나라 황제의 권위 선양이었다. 무역이익은 전무했고 내륙농업의 가치만 소모하였을 뿐이었다. 설령 금해정책이 없었더라도 경제적 이익의 동기가 부실한 제해권은 대가가 비싼 사치였을 뿐이었다.

“칼날의 빛을 숨기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르자”의 도광양회(韜光養晦)를 기치로 내걸며 마오쩌둥에 비해 비교적 온건한 대외정책을 펼쳤던 덩샤오핑은 해양영토 팽창에만은 무력침략도 마다하지 않았다. 1988년 3월, 남사(南沙·Spratlys)군도 8개 섬을 베트남으로부터 무력으로 강탈하였다.

1992년 중국 영해법으로 남중국해 전체에 대한 영유권을 선언하여 남사군도를 1974년 점령한 바 있는 서사군도와 함께 하이난성 관할에 포함시켰다. 230여개의 섬, 초(礁), 탄(灘)과 사주(沙柱)로 구성되어 있는 남사군도의 전체육지 면적은 작지만 그것의 해역 면적은 약 80여만 ㎢로서 중국 해양국토면적의 3분의 1에 달한다. (이는 마치 류큐군도 해역이 일본 전체해양국토면적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것과 흡사하다.)

그리하여 덩샤오핑은 중국 27개 성급 광역행정자치구에서 원래 가장 작은 하이난 성(육지면적 3.4만 ㎢)을 배타적 경제수역 등 관할해양면적 213.4만 ㎢을 더하면 가장 큰 성으로 팽창시켰다. 마오쩌둥은 산소결핍지역인 티벳을 무수한 피를 흘려가며 거칠게 점령하는 등 육지영토만을 팽창시키는데 몰입했다. 그와 대조적으로 덩샤오핑은 육지영토는 경제발전으로서 질적 업그레이드를 기하고, 해양영토는 민첩 윤활(潤滑)하고, 무단하게 팽창시켜왔다.

<표2> 중국 세대별 팽창 방향 <표2> 중국 세대별 팽창 방향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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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대만 국립사범대학에서 수학한 후 대만 국립정치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베이징대학과 중국인민대학, 중국화동정법대 등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으며 주 대만 대표부와 주 상하이 총영사관을 거쳐 주 중국 대사관 외교관을 12년간 역임한 바 있다.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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