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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서 나가니 산자들은 먹을것만 챙기더라


입력 2011.06.07 09:14 수정         데스크 (desk@dailian.co.kr)

<그리운 나라 박정희>나라 지킨 이들 망각하고 선진복지국가 외쳐

6.25와 월남전 참전용사들은 병고에 시달리고 정치꾼들만 우글우글

꽃 한송이 놓이지 않는 묘소가 즐비한 현충원

“6.25ㆍ월남전 왜곡, 종북좌파 설치고 군대 안간 자들이 떵떵거리는, 이런 꼴 보자고 목숨 바쳤나!”


무정세월 뜬구름으로 흐르다 그 산자락에 멈추면, 아픔이 엎드리고 눈물이 아래로 떨어지고, 고운 넋 앞에 고개 숙이는 곳, 현충원.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이 있어 조국이 있고, 남들은 잘살게 되었다는 오늘의 우리네 모습을 “참 대단한 대한민국”이라 하건만, 그런 말을 들을 때 가슴 뿌듯해짐이 뻔뻔스럽고 낯 뜨거움을 감출 길이 없다.

무심한 나날 까맣게 잊고 있다가 현충원을 찾아오는 발길마저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꽃 한송이 놓이지 않는 묘소들의 쓸쓸함을 무엇으로 메울 것인가.

때맞춰 나오는 언론보도에 아이들이 “현충일이 무슨 날이냐?”는 물음에 “이순신 장군이 돌아가신 날”이라거나 “학원 안 가고 노는 날”이라 한다니, 이들이 커서 미래의 공동체를 이룰 때를 상상하기조차 아뜩한지라, 대뜸 갈음으로 나오는 것이 우리 교육이 그 모양 그 꼴이라는 탄식이다.

그러나 교육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교육을 그렇게 만든 지난 세월의 정치사회적 배경으로 시각을 넓혀야 선명한 그림이 나타난다. 속칭 ‘잃어버린 10년’의 국가정통성 훼손과 역사 왜곡이다.

주지하다시피 ‘잃어버린 10년’은 대통령 김대중과 노무현의 세월이었다.

국립서울현충원 묘소에 꽃을 바치며 추모하는 어린이들. ⓒ국방부 국립서울현충원 묘소에 꽃을 바치며 추모하는 어린이들. ⓒ국방부

“좌익 때려잡아서 6.25가 터졌다”는 김대중

역대 정권은 6.25참전 16개국의 용사들을 초대해서 감사와 위안의 자리를 마련해 왔고, 지금도 그 연례행사는 정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을 다시 찾아오는 참전 노병들은 “은혜를 아는 나라”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면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던 나라를 구한 것에 보람을 느끼는 한편, 한국전선에서 죽어간 전우들의 넋을 추모하며 감회에 젖곤 한다.

대통령 김대중 때도 그러했다. 2000년 6월 25일은 6.25 전쟁 50주년을 맞는 날이라 노태우 정권 때부터 준비해온 대대적인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날 오후 6시 김대중은 국가보훈처가 서울 신라호텔에서 마련한 참전용사 위로연에 참석했다. 국무위원, 국회의원, 참전국 대표, 주한 외교사절이 함께 참석한 자리였으나 해외 참전용사들의 표정에는 아쉬움의 그늘이 덮여 있었다.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위원장을 맡았던 백선엽 장군은 그 아쉬움을 이렇게 말했다.

“수천 명의 UN 참전용사를 초청했습니다. 전쟁 때 큰 부상을 당한 용사들도 있었는데, 행사의 하이라이트로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출발해 남대문~시청 앞까지 도보로 행진하는 계획이 갑자기 취소된 겁니다. 자신들이 목숨을 걸고 지킨 이 나라가 이렇게 발전했다는 걸 보여주면 그분들이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그런데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거죠.”

그는 “6.25 며칠 전 김대중이 김정일과 남북정상회담을 한 직후 시가행진 취소 지시를 내렸다”면서 “해외 참전용사들 얼굴을 볼 낯이 없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2009-06-06)

6.25 50주년인 2000년 6월 25일 참전용사 위로연에 참석한 김대중 대통령이 연설하고 있다. ⓒ e영상역사관 6.25 50주년인 2000년 6월 25일 참전용사 위로연에 참석한 김대중 대통령이 연설하고 있다. ⓒ e영상역사관

6.25전쟁 50주년인만큼 대통령의 연설도 들어볼 만한 관심거리였다.

“완전한 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또 평화에 대한 확고한 보장이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는 결코 긴장감을 늦추어서는 안된다. 튼튼한 안보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 확고한 안보태세만이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

이렇게 안보와 평화를 강조한 김대중의 연설에서는 수백만의 인명을 앗아간 전쟁의 본질이 교묘하게 탈색되어 있었다. 그는 전쟁의 원인을 남북분단으로 돌리면서 동족상잔의 비극을 가져온 침략행위에 대한 규탄이나 적개심을 허섭스레기로 매몰해 버렸다.

그러더니 마침내 그는 자서전(김대중 자서전, 2010년)에서 6.25 전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음으로써 자기 본색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놀라지 마시라.

김대중 왈 “6.25 전쟁은 1948년 여수순천반란사건 때문이고 또 그것은 제주 4.3사건으로 거슬러올라간다”는 것. 남한에서 좌익세력의 반란을 진압한 것이 전쟁의 빌미를 주었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 남쪽에서 좌익 공산세력을 타격하는데 북쪽 김일성 집단이 가만 있을 수 있었겠느냐 하는 주장이니, 현충원의 호국영령이 통곡할 노릇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호국영령에 대한 모욕은 그뿐만 아니다. 생전의 김대중은 2001년 한국에 온 베트남 주석 트란 둑 루옹과 정상회담을 하는 자리에서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사과했다.

국가의 최고권력을 가진 사람은 전쟁 참여에 사과할 수가 없다. 국격(國格)과 국가정체성에 관한 문제이고, 또 국민의 아들, 형제가 가서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전쟁인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 한나라당 대표 박근혜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참전용사들의 명예를 이토록 손상시켜도 되는 건지 묻지 않을 수 없다”면서 “이는 6.25 때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16개국 정상들이 김정일에게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서 북한 주민에게 고통을 안겨준 것에 대해 사과한다’고 한 것과 같은 엄청난 일”이라고 강력히 비난했다.

국민이 대통령에게 최고권력을 주는 것은 최고책임을 지라는 것이거늘, 김대중은 무책임하게 그것을 벗어던졌지만, 보다 근본적인 관심은 김대중이 대한민국 자체를 어떻게 보느냐에 있을 것이다.

상기 백선엽의 말에 의하면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배고픈 것은 참을 수 있고 굴욕도 참을 수 있지만 나라 없는 설움은 참을 수 없다.”

김대중이 자서전에서 이승만 시대를 평가한 대목을 보면 “이승만의 당선은 현대사 비극의 시작”이라며 그 이유를 친일파가 득세했기 때문이라 했다. 친일파를 구실로 그 불행의 해방공간에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출범시키고 전쟁의 참화를 딛고 일어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교활하게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김대중 정권 5년은 국가정체성을 잃어버렸고 그래서 역사에서 지워버려야 할 것이라는 의미로 ‘잃어버린 10년’의 절반이다.

‘얼뜨기 권력’의 국정 농단 속에 종북좌파들이 설친 노무현 5년

“군대 가면 썩는다.”
“대통령 힘들어서 못해 먹겠다.”
“내가 좀 사고를 쳤다가 인터넷에서 박살이 났다.”

대통령 노무현의 말이다.

솔직하고 그래서 ‘바보 노무현’으로 일단의 지지자들을 열광케 했었다. 그러가 하면 반대쪽 사람들은 “대통령이 저렇게 경망스러워야 되나. 무슨 시정잡배도 아니고”라며 눈살을 찌푸렸다.

“군대 가면 썩는다”는 발언은 2006년 12월 민주평통자문회의 상임위원회의 군 복무기간 단축에 관한 연설에서 나왔다.

“군 복무기간이 줄어도 국방상 문제가 없다면 복무(기간)를 줄이는 것이 현명한 판단입니다. 저에게 군대는 끌려가는 곳이었습니다. 군 생활하면서 내 가족, 내 나라를 지키는 데 대한 자부심은 그다지 들지 않더군요. …쓸데없는 ‘삽질’만 하려고 군대 간 것도 아닌데. (군대 가면) 썩는 거 맞죠.”

군통수권자가 “군대에 끌려간다” “쓸데없는 삽질” 운운하는 것은 자기 본분을 망각한 것뿐 아니라 군에 대한 모욕이고 국정 농단(壟斷)이다.

험한 세상 풍파에 부대끼며 살아도 자장면을 팔거나 신문배달을 하거나 길거리에 좌판을 깔고 채소를 팔아도 다 제 구실있는 모습이거늘, 가장 믿음이 안 가고 연민스럽기도 한 것은 자기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를 모르는 경우다.

그런데 노무현에게 연민의 정이 가기는커녕 정나미 떨어지는 것이 TV ‘봉숭아학당’의 코미디처럼 좌충우돌 연기로 웃음을 뿌리고 사랑을 받는 얼뜨기 포퓰리즘을 구사하면서 그 속내에 은밀히 관통하는 고집불통 이념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2006년 인도네시아 방문 중에 6.25 전쟁을 “전면적 내전(內戰)”이라 말했다. 그에 앞서 캄보디아에 가서도 똑같은 말을 했다. 남북 어느 쪽의 잘잘못을 따질 것 없는 ‘통일을 시도한 전쟁’이라는 논리로 6.25의 본질을 희석시키면서 좌파들이 얼씨구나 하도록 ‘친북’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이러하니 애오라지 조국을 위해 젊은 목숨을 바친 저 현충원의 호국영령들과 그 유가족의 분노를 어찌 달랠 수 있을 것인가.

가히 노무현 5년은 친북-종북 좌파들의 전성기였다.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것이 맥아더 동상 철거 소동이다.

얼뜨기 좌파 정권의 은근한 비호 아래 기세등등해진 일단의 좌파들이 2005년 9월 “맥아더는 우리 민족의 원수. 분단과 전쟁 학살의 원흉”이라며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을 끌어내리겠다고 참으로 볼 만한 소동을 벌였었다.

당시 노무현은 미국 방문 중 뉴욕 동포간담회에서 맥아더 동상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맥아더 동상은 역사다. 동상을 끌어내리는 방식으로 한미관계를 풀어나가서는 안된다. 동상을 그대로 두고 역사로서 존중하고 나쁜 건 나쁜 대로 기억하고 좋은 건 좋은 대로 기억해야 한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의 얍삽한 양다리걸침으로 맥아더에게 ‘절반 부정’을 덮어씌우고 있다.

상기 백선엽은 그해 6월 현충일 기념식에 참석한 노무현이 정치인들하고만 악수를 나누고, 군 관계자들을 외면하더라고 했다. 그 자리의 한미연합사령관, 미8군사령관과 미군 장성들, 한국군 원로들이 당혹해하는 것을 보고 백선엽은 “한국군 원로와는 악수를 안해도 괜찮습니다. 싫은데 어떻게 손을 잡겠습니까. 그렇지만 미군 대표와는 그러면 안 되죠. 그 나라의 젊은이 4만명이 한국을 지키기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 싫어도 예의를 표해야죠"라면서 울분을 토했다.

이렇게 김대중부터 노무현까지 10년이 흘러갔다.

그러면 지금의 이명박 정권에선 무엇이 달라졌는가. 한마디로 ‘중도’라는 이름으로 좌우를 살피는 눈동자 돌아가는 소리만 나고 있다. 국가정체성 회복의 의지가 없다.

작년 9월 맥아더 장군 동상이 있는 인천 자유공원과 6.25 때 인천상륙작전 지점의 하나인 월미도 해안에서 인천상륙작전 60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국내외 참전용사와 외교사절, 군장병 및 월남참전 전우회, 그리고 시민 등 수만 명이 참가한 성대한 행사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사람은 전 필리핀 대통령 피델 라모스였다. 그는 유일하게 국가원수를 지낸 6.25 참전용사였던 것이다.

우리보다 훨씬 잘살던 나라에서 우리가 전쟁의 참화 속에 허우적거릴 때 달려와 총을 들고 싸워준 국가원수가 여기 인천에 왔는데, 그 자리에 대한민국 대통령 이명박은 없었다.

그토록 역사 개념이 없다. 이명박의 5년은 기회주의적인 과도기로 매듭을 짓고 넘어갈 수밖에 없게 돼버렸다.

그러하니 저 현충원은 일년 삼백예순날의 단 하루 다녀가면 그만이라는 형식상의 행사장이라는 이름뿐이니 요즘 아이들이 현충일을 “이순신 장군이 돌아가신 날”로 아는 것이 결코 무리가 아닐 터이다.

현충원을 찾는 사람들이 박정희 묘소를 참배하는 이유

현충원을 찾는 유가족과 일반인들이 거의 대부분 꼭 들르는 곳이 있다. 대통령 박정희 묘소이다. 이는 통계상으로 확연히 드러나 있다. 유가족은 자기 혈연의 묘소를 애끓는 손길로 더듬고 나면 발길을 박정희 묘소로 옮기고, 저마다 생각이 있고 사연이 있어 현충원에 오는 일반인들도 줄줄이 올라가는 곳이 벅정희 묘소이다.

왜 그럴까.
당찬 몸짐을 곧추 세우고 굽힘을 모르는 박정희가 고개를 숙이는 곳이 현충사, 현충원 같은 곳이다. 숭고한 역사 앞에서만은 그가 허리를 90도 가까이 꺾는 것을 볼 수가 있다.

6.25 전몰장병이 현충원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피를 뿌린 곳곳에 미처 수습할 수 없이 그대로 묻힌 영혼들이 어느 곳에 얼마나 되는지 헤아릴 수 없다.

6.25 때 전투가 치열했던 설악산 일대의 경우, 휴전 후 그곳을 보병 7사단에서 관할하고 있었다.
7사단의 8연대에서 대청봉 일대에 진지 구축작업을 할 때 현장을 시찰한 사단장은 대대장으로부터 뜻밖으로 별도의 보고를 들었다.

“제가 전쟁 때 이곳에서 소대장으로 있었습니다. 적과 교전하다가 부하 병사 한 사람이 참호 안에서 죽어 있는 것을 수습하지 못한 채 후퇴했습니다. 시신을 비옷으로 덮어놓고 돌로 참호를 채운 뒤 표시를 해두고 물러났는데 이번에 진지 작업을 하러 와서 유골을 찾았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단장은 다른 보고는 필요없다는 듯 즉각 현장으로 가서 유골을 확인했다. 그런 다음 해발 1천7백미터 고지 정상을 두루 살피더니 한곳을 지휘봉으로 가리켰다.

“여기에 매장해.”

곧 구덩이를 파고 유골을 고이 싸서 옮겨 묻었다. 나무를 깎아 비목(碑木)을 세운 다음, 막걸리를 붓고 위령제를 지냈다.

“그대의 호국 충혼은 조국과 더불어 영원불멸하리니, 이제 편히 쉬시게.”

이때가 1958년. 병사의 비목을 세운 7사단장이 박정희 소장이다. 그는 6.25전쟁을 거쳐 1955년 양구 5사단을 맡아 처음 사단장직에 오른 후 인제 7사단장으로 옮겨다니면서 일선부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비장하고 힘찬 가곡 ‘비목’이 등장한 것은 1967년의 일이다. 전방 소대장으로 복무했던 방송국 프로듀서 한명희가 6.25 격전지였던 강원도 화천의 백암산 기슭에서 무명용사의 무덤과 주변에 나뒹굴던 녹슨 철모와 비목 등을 회상하며 노랫말을 짓고 작곡가 장일남이 곡을 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랫말의 발상지인 강원도 화천군에서는 해마다 ‘비목 문화제’를 개최하여 지난날 덧없이 스러져간 젊음을 추모하고, 호국의 충혼을 기리고 있다.

설악산 대청봉에 병사의 비목을 세우고 3년이 지난 1961년 박정희는 5.16혁명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5.16은 과연 무서웠다. 병역기피ㆍ병역미필로 공직에 엉겨붙어 있던 자들이 모조리 쫓겨났다. 대통령 박정희는 고위 공무원과 재벌 자녀들의 병적기록부에 ‘특´’이란 도장을 찍어 모두 군대에 보내도록 했으며, 정·재계의 실력자 K씨가 아들을 군대 보내지 않으려고 미국 유학 보낸 것을 알고 불같이 화를 내자 K씨는 아들을 불러들여 월남전에 보낸 일도 있었다.

그 시대에는 어떤 사유로든 군대에 안 갔다 오면 국회의원 공천은 꿈도 못꾸고 청와대는 물론 공직사회의 어느 구석자리도 비집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왜 그리 지독했을까. 박정희가 군인 출신이라 그것을 군사정권의 본색이라 말할 수 있을까.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를 나뒹구는 참상 중에 잊지 못할 장면이 있다. 70여만의 상이용사들이 구걸을 하는 모습이다. 망가진 얼굴을 검은 안경으로 가리고 한쪽 다리가 없는 몸을 기우뚱거리며 이 집 저 집 대문 앞에서 쇠갈고리 손을 내미는 그들은 ‘인간 이하’였다.

실상을 너무 잘 알고 있는 박정희는 5.16 직후인 1961년 7월 5일 군사원호청을 창설하고 다시 원호처(지금의 국가보훈처)로 승격 개편해 상이용사들에 대한 보상에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그러나 빈약한 정부 재정으로는 한계가 있으므로 차마 그대로 볼 수 없는 원호 대상자들은 청와대 정치자금으로 구제해야 했다. 좌절하지 말고 힘껏 살아가도록 대통령의 권위로 용기를 주었다.

1975년 8월 25일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6.25때 사병으로 참전, 실명한 다렐 루프씨 부부와 악수를 나누며 위로하고 있다. ⓒ 국가기록원 1975년 8월 25일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6.25때 사병으로 참전, 실명한 다렐 루프씨 부부와 악수를 나누며 위로하고 있다. ⓒ 국가기록원

알려진 사례를 보자.

원호처장 박기석은 밤 10시 대통령의 전화를 받고 벌떡 일어났다. 대통령은 “6.25 때 남편을 잃고 월남전에서 외아들까지 잃은 신복진 여사가 병고에 시달리고 있으니 도와주라”는 분부였다. 대통령은 이튿날 금일봉을 보내면서 신 여사의 생계 대책을 세우면 계속 조력하겠다는 친서를 보내왔다. (1967년)

서라벌대 재학중 입대해 월남전에 참전했던 고상현 병사는 얼굴부터 전신에 이르는 화상을 입어 길거리 노점상을 해도 사람들이 놀라서 달아나는 지경인지라 굶어죽을 형편이었다. 대통령은 그에게 수술비를 보내주었다. 고상현 상이용사가 수술한 곳은 명동 장상숙 성형외과. 세차례에 걸친 대수술이었다. 장상숙 원장은 수술비 수령액 50만5700원 중에서 40만원을 고상현 용사에게 돌려주면서 자립하기를 바란다고 격려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대통령은 “나라를 위하여 심신을 바친 상이용사에게 장 여사께서 베푼 혜택은 행동으로써 애국애족한 높은 덕행이며 국민들에게 훌륭한 귀감이 될 것으로 믿고 대통령으로서 진심으로 치하하는 바입니다”라는 요지의 친서를 장상숙 원장에게 보냈다. (1971년)

다음, 청와대 초대를 받은 모범 원호대상자들이 대접견실에서 대통령을 기다렸다. 이윽고 나타난 대통령은 그들 중에 얼굴에 화상을 입어 검은 안경을 쓴 김진택 용사를 불러냈다. 대통령이 오른손으로 그의 손을 잡고 왼손으로 화상 입은 얼굴을 쓰다듬으며 원호처장에게 “내가 돕겠으니 수술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라”고 지시하자, 김진택 용사의 검은 안경 밑으로 눈물이 쏟아졌다. (1974년)

다음, 전주시 서로송동 고산철길 건널목에 열차가 다가올 때 3살짜리 어린이가 차단기 밑으로 뛰어들자 간수가 재빨리 철길 밖으로 떠밀어 냈으나 그 자신은 열차에 머리를 부딪쳐 사망하고 말았다. 순직 간수가 6.25 때 한쪽 다리를 잃은 김영신 상이용사임을 알게 된 대통령은 즉각 황인성 전북지사를 통해 유족에게 조의를 전달했다. (1977년)

현충원을 찾는 사람들이 대통령 박정희 묘소에 참배하는 것은 그렇게 해야만 후련하고 보람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위기에 처한 조국의 부름을 받고 전선에 나가 꽃다운 청춘을 불태워 대한민국을 지켜낸 충혼을 교감하고 싶은 것이다.

‘잃어버린 10년’ 내내 통곡하고 싶었던 세세곡절 사연을 되새기며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현충원을 감싸고 있다는 굳은 믿음을 가슴에 간직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거기에 있다.

김대중ㆍ노무현의 ‘잃어버린 10년’을 아무리 뒤져봐도 조국을 위해 희생한 호국영령들에 대한 진정어린 존중이란 씨알머리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런 세월을 우리가 살았다.

1972년 6월 6일 제17회 현충일에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은 월남전 전몰자 가족. ⓒ 정부기록사진집 1972년 6월 6일 제17회 현충일에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은 월남전 전몰자 가족. ⓒ 정부기록사진집

국가정체성 확립+국민통합만이 미래로 가는 로드맵

대통령 박정희가 그토록 원호대상자를 보살핀 것이 군인 출신이기 때문이었을까. 군사독재의 단면일 뿐으로 치부하기엔 박정희 시대 18년 뒤로 이어진 세월이 국가정체성을 심각하게 훼손했다는 진실을 비켜설 수가 없게 돼버렸다.

보자.
6.25 때 미국은 알짜 수재들인 하버드대생 17명이 한국전선에서 죽었다. 앞서 인기 절정의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는 2차대전이 터지자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원 참전했다. 한국전선에서는 전쟁을 지휘한 밴 플리트 사령관의 아들도, 그리고 침략군 중공의 마오쩌둥 아들도 참전했다가 죽었다. 미국의 한 시대를 풍미한 마릴린 먼로도 한국전선의 미군을 찾아와 위문했고, 최고 코미디언 보브 호프도 왔었으며, 가슴을 울리는 흑인 영가의 마리안 앤더슨도 왔었다.

국민의 사랑을 받는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것이다. 팔을 잃은 국회의원과 한쪽 눈을 잃은 국방장관을 가진 나라가 미국이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외쳐댄 ‘꼴통 대한민국’의 권력 실상은 어떤가. 군대 안 가고 출세한 자들의 전성기가 이어지고 있다.

노무현 정권 때 장관급 감투를 쓴 자들의 40퍼센트가 군대를 안 갔다. 병역을 면제받을 정도로 질병이 나빴네 어쩌네 하고는 번드르르한 얼굴로 감투를 꿰어찼다.

속칭 386의원이란 자들도 10명 중 4명이 군대를 안 갔고, 노무현 청와대에 엉겨붙은 2~4급 비서관들도 4분의 1 가량이 군대를 가지 않았다.

지금 이명박 정권의 요직을 차지해온 자들도 청문회 때마다 군 미필 사유에 곤혹을 치렀음은 굳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이명박부터 군대에 가지 않았으니. 김영삼과 김대중도 병역이 두루뭉술 포장되어 있는데 전선에 나가 총 들고 싸운 현역 군인이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국가관 혹은 애국심, 국민이 가져야 할 임무 같은 것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남자는 억지로라도 군대를 갔다와야 사람으로서의 됨됨이가 갖춰지게 된다.” (세계일보 2005-05-15)

작가 김주영의 말이다.
인간의 기본을 말하고 있다.

대한민국 ’진짜 사나이’이기를 거부한 기회주의자, 민주주의를 외치며 떵떵거리는 자들이 노블리스 오블제를 모르는, 천박한 도덕불감증으로 이 나라를 좌지우지했으니, 6.25와 월남전 참전용사들은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는데 권력을 향해 불나방처럼 몰려드는 정치꾼들과 좌파들이 저토록 설치고 간첩을 민주화 인사로 둔갑시키는 등 그 꼴이 오죽했겠느냐 하는 것이다.

현충원의 호국영령들이 어찌 통탄하지 않을 것인가.

우리 대한민국은 온갖 눈물겨운 수난을 극복해온 수십년 세월 동안, 예전의 아이가 장년이 되고, 또 지금의 아이가 다음 세상을 이어받아 가는 역사 이정표 위에 선후 세대가 함께 있다. 세월이 무상하고 세태가 아무리 변한다 해도 역사를 동행하는 운명의 공동체간에 국가관과 역사관의 진정성이 빛바래져서는 안될 것이다.

호국영령들에 보답하고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선 국가정체성을 바로잡고 국민통합을 이끌어 선진복지국가로 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게 우리 후손을 위한 진정한 로드맵이다.

글/김인만 작가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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