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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을 못한 일본은 아시아의 왕따였다


입력 2011.04.02 11:06 수정         데스크 (desk@dailian.co.kr)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 키, 류큐⑧-그랜트의 류큐 3분안>

이홍장 만난 그랜트 "류큐로 인해 천하의 패권은 일본이 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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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넓은 일본의 키, 류큐
2. 제1차 일본제국주의의 은신처, 류큐
3. 제2차 일본제국주의의 출항지, 류큐
4. 제3차 불침 항공모함의 출항지, 류큐
5. 이중 종속 왕국, 류큐의 흥망사
6. 30년 터울, 일제의 류큐와 조선의 병탄사
7. 좁은 중국의 족쇄, 류큐
8. 그랜트 전 미국대통령의 류큐 3분안
9. 루즈벨트와 장제스
10. 실크로 포장한 중화제국
11. 순망치한의 입술은 북한이 아니라 만주였다
12. 제1세대, 서남방 티베트와 인도를 침공하다
13. 제2세대, 동남방의 여의주를 입에 물다
14. 남서군도, 이어도와 영서초, 오키노도리
15. 제3세대, 서북방에서 달콤한 과실을 따먹다
16. 제4세대, 실키 중화제국, 동북공정으로 드러나다
17. 독도와 센카쿠
18. 제5세대, 북한과 류큐로 나아갈 것이다

1879년 4월 4일은 류큐 왕국이 숨을 거둔 날이자 일본의 오키나와현으로 다시 태어난 날이다. 그날로부터 달포 반쯤 지난 뒤, 5월 27일 미국의 제18대 대통령을 역임한 율리시스 심슨 그랜트(Ulysses Simson Grant, 1822 ~ 1885, 미국남북전쟁 때의 북군 총사령관, 대통령 재임기간 1869~1877)는 중국대륙의 텐진(天津)에 첫 걸음을 내디뎠다.

고향 오하이오에서 회고록을 집필하고 있던 그랜트는 일본의 류큐병탄 소식을 접하자마자 샌프란시스코행 미대륙횡단 열차를 잡아탔다. 그는 태평양과 아시아로 향하는 관문인 아름다운 샌프란시스코에서 머뭇거리지 않았다. 곧장 항구로 달려가 요코하마 경유 텐진행 태평양횡단 여객선에 노구를 실었다.

미대륙횡단열차에 이은 태평양횡단여객선 40여일의 긴 여정 끝에 텐진항에 도착한 그랜트는 여독을 풀려고 하지 않았다. 배에서 내린 다음날 곧바로 청조정의 실세인 이홍장과 만나고 5월 30일에는 베이징으로 가서 공친왕을 예방하였다. 6월 12일 다시 텐진으로 돌아온 그랜트는 수행원 융(J.R. Young)과 부영사 페식(W.N. Pethic)을 대동하고 이홍장의 관저를 방문하였다.

 전 미국대통령 그랜트와 청나라 실권자 이홍장, 1879. 6. 12. 텐진. 전 미국대통령 그랜트와 청나라 실권자 이홍장, 1879. 6. 12. 텐진.

이처럼 그랜트의 휘황한 동선(動線)에서 필자는 철인3종(바다수영, 사이클, 마라톤을 한사람이 쉬지 않고 실시하는 인간체력의 한계에 도전하는 경기)이 오버랩 된다. 그 무엇이 전직 미국 대통령으로 하여금 마치 철인3종에 임하는 선수처럼 초강행군을 불사하게 만들었을까?

서부개척이 완료될 무렵 당시 미국 지도층은 태평양을 미국의‘내륙호’로 보았다. 그랜트는 일본의 류큐 병탄은 아시아의 힘의 균형이 중국에서 일본에로의 이동을 의미한다고 내다보았다. 그리하여 향후 내륙호 서편에서 미국이 차지할 몫을 일본이 선점하도록 방관해서는 안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본인은 미합중국의 현직 대통령 자격이 아니라 은퇴한 민간인의 신분으로 귀국을 방문했다. 류큐 처리 문제를 대인과 상의할 목적으로 태평양을 건너오게 되었다.”

동양의 노대국과 서양의 신흥강대국의 전 현직 정상이 처음으로 마주한 역사적 회담의 키워드는 다름 아닌 ‘류큐 ’였다.

“본 대청제국은 골치 아픈 여타 국내외문제들 때문에 류큐에는 미처 신경 쓸 여력이 없었는데......그 섬들이 귀국에게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류큐군도는 미합중국의 국익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비록 류큐는 작은 섬들로 구성 되어있지만 그것이 차지하고 있는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성은 실로 크다. 류큐가 일본의 손에 들어가면 천하의 패권은 귀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 원래 왜구의 소굴이나 매한가지인 섬나라 일본이 작은 섬 몇 개 더 얻었다고 천하의 패권을 쥐게 된다니, 지나친 기우이다. 다만 미국과 수호조약을 체결한 류큐를 일본이 무력으로 병탄한 것은 미국의 체면을 손상한 것이다. 미국과 청국간에는 류큐해역을 통과하여 상하이로 도착하는 항로가 뚫려 있는데, 만일 청-일간에 무력충돌이 발생하면 귀국의 상선도 순조롭게 항행할 수 없을 것 같다. 각하가 류큐문제를 해결할 묘안이 있으면 알려 달라.”

그랜트는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내게 좋은 묘책이 있다. 류큐군도의 북부 아마미제도는 일본에게, 류큐의 중부(오키나와)는 독립을 회복시키되 청-일이 공동 관리하고, 류큐의 남부 미야코와 아에야마 제도는 귀국이 직접 통치하는 방안이다. 이는 청-일-류큐 3자에게 모두 좋은 묘안이라고 생각한다.”

이홍장은 그랜트의 묘책이 겨우 ‘류큐 3분안’이라는 사실에 약간 까칠하게 대꾸했다.

“류큐는 원래 명나라 초엽부터 지금까지 500년 동안 조공을 바쳐온 대청제국의 속방이다. 류큐의 국왕도 대청제국의 황제가 임명(이때 통역관은 이홍장이 말한 ‘책봉’을 ‘임명’이라고 통역)하여 왔다. 류큐 군도의 모든 섬들은 종주국인 우리 대청제국에 관할권이 있다.


그랜트는 이홍장의 입에서 줄줄이 나오는 ‘조공’,‘종주국’, ‘책봉’, ‘속방’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동서양의 문화차이였다. “그럼 대청제국이 류큐왕을 임명해왔다는 말인가? 그리고 종주국은 또 무언가? 속방과 식민지의 차이점은? 무수한 의문부호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기포처럼 떠올랐다.

난감해하는 그랜트의 표정에서 이홍장은 이쯤에서 고자세에서 저자세로 내려와야겠다고 작심하였다. 일본의 문호를 열게 한 나라가 미국이고 그랜트가 비록 전직대통령이지만 일본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속방인 류큐의 단 한 개의 섬도 일본에 할양해줄 수 없는 것이 대청제국의 철칙이다. 그러나 힘이 마음을 따르지 못한다. 차선책으로 각하의 류큐3분안을 수락할 용의도 없지 않다. 각하는 귀국하는 길에 일본에 들릴 계획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일본측을 설득해주길 부탁한다. ”

이토 히로부미의 ‘류큐2분안’

이홍장의 중재요청을 수락한 그랜트는 7월 4일(미국의 103주년 독립기념일), 도쿄에 도착하였다. 7월 22일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만나 류큐 문제에 대한 중재에 나설 뜻이 있음을 표명했다. 이토오는 류큐 병합의 정당성을 극력 해명했다.

“류큐는 삼백년 동안 일본의 속국이었다. 류큐의 작은 섬들은 본래 일본 영역내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류큐가 이전에 청에 조공을 바친 것은 류큐와 중국 간의 무역 형식의 일종일 뿐이지 종주국과 속국관계의 증거가 될 수 없다.

그랜트는 8월 13일 이토에게는 류큐3분안을 최후의 중재안으로 제시하고, 이홍장에게는 서한을 보낸 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랜트는 서한에서 “청일 양국이 화평의 정신으로써 고위관료를 특사로 파견하여 협상할 것을 바란다. 본인은 간사한 어느 나라가 귀국이 쇠약해지는 것을 틈타 야욕을 취하려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청일 양국의 불화로 인하여 서양제국이 어부지리를 취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며 청일 양국이 상호 양보의 정신으로 협상 테이블에 나와 줄 것을 호소했다.

그 무렵 일본 조야에는 미국과 영국, 독일 등 서구열강이 청나라에 군함과 무기를 지원하여 류큐에 대한 군사행동을 감행하도록 부추기고 있다는 괴담이 저녁안개처럼 퍼져있었다. 이듬해 3월 이토오는 청 정부에 그랜트의 류큐3분안을 변형한 ‘류큐2분안’을 제안하였다. 즉, 류큐군도의 북부와 중부는 일본이 지배하고 류큐군도의 남부는 청이 관할하는 것이다. 일본정부는 그랜트에게 당초 류큐3분안에 근거하여 도쿄에 유폐 중인 류큐의 마지막 왕 상태에게 복위할 것을 권유했으나 그가 오키나와의 척박한 땅으로 돌아갈 의사가 없어 하는 수 없이 ‘류큐2분안’으로 개정했다고 적당히 둘러대었다.

1880년 10월 20일, 류큐2분안을 핵심으로 하는 [류큐 수정조약 초안]이 작성되었고 이에 청의 총리아문대신 심계분(沈桂芬)과 일본측 협상대표 이토오가 서명하였다.

그 후, 청 조정은 이홍장에게 초안의 비준여부를 총괄 검토하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홍장은 “일본인의 요구를 응한다면 응한 이상으로 손해를 보고, 거절하면 거절한 이상으로 보복 당하게 된다. 일본인에 대하여는 입장 표명을 최대한 늦추는 묵묵부답의 ‘무대응 지연책’이 최상책이다.”라는 요지의 보고서를 올렸다.

청 조정은 이홍장의 보고서를 채택, 초안에 서명을 하지 않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무대응 지연책은 일본의 전체 류큐군도 병탄을 저지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무대책’이나 다름없었다. 더욱이 무대응 지연책은 국제법상으로도 ‘묵시적 승인’으로 간주되기 십상이었다.

중화질서 -  전근대 중국적 조공질서, 동심원 구조 중화질서 - 전근대 중국적 조공질서, 동심원 구조

 대동아공영권  -일제가 구상하였던 아시아 신질서, 피라미드구조. 일제시대, 일본은 자국을 정점으로, 일본이 점령하거나 식민지화한 순서대로 차등 대우하는 피라미드 구조의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을 구상한 바 있다. 대동아공영권 -일제가 구상하였던 아시아 신질서, 피라미드구조. 일제시대, 일본은 자국을 정점으로, 일본이 점령하거나 식민지화한 순서대로 차등 대우하는 피라미드 구조의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을 구상한 바 있다.

이홍장을 비롯한 당시 청 지도층이 최소한의 해양의식과 지정학적 사고능력, 국제법적 식견만 갖
추었더라면 일본의 류큐병탄을 저지하기에는 무기력한 당시 자국의 현실을 감안하여 류큐2분안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렇게 중국은 아주 간단하게, 역설적으로 국제법에 부합되게, 센카쿠를 포함한 류큐군도 남반부와 태평양으로 나아가는 출구를 상실해버렸다. 이렇게 부활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류큐 왕국은 영영 어둠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또한 이렇게 중국을 중심으로 했던 동아시아의 전통적 조공체제는 결정적인 첫 균열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중화질서는 동심원, 대동아공영권은 피라미드

‘조공’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김에 한마디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흔히들‘조공’하면, ´상납´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많다. ‘조공’을 사대주의의 징표라 하며 수치스럽게 여기거나 ,괜한 역사적 열등감에 빠져드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꽤 있다. 그러나 이는 일제 식민사관에 기반한 왜곡된 역사교육이 남겨준 인식상의 오류이다. 조공은 일방적인 상납이 아니라 물물교환 형식의 정부주도형 무역이다.

국경지역에 개설된 시장에서 행해지는 변경무역이나, 민간상인에 의한 무역을 금지하고 국가에서 임명한 관납상인들에게 무역상품의 조달권을 독점하게 한 억상정책의 질곡을 뛰어넘는 거상의 활약상을 그린 소설 [상도]에서나, 맹인 홀아비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삼백 석에 인신공양물이 되어 인당수에 빠져 죽는 [심청전]에서 나오는 밀무역 등, 이러한 가뭄에 콩 나듯 나오는 민간무역행태 이외에는 조공무역이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한마디로 조선시대 무역형태의 주류는 조공무역이었다. 조공국에서 조공을 바치면 사대국에서는 사여(賜與)를 내린다. 사여품이 조공품보다 몇 배 많은 것이 원칙이었다. 그래서 조선은 조공을 1년에 3번 바치던 것을 1년에 4번 바칠 것을 요청했으나 명은 월남처럼 3년에 1번만 바치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명나라 멸망의 주요원인의 하나는 과도한 사여품의 방출로 인한 국고의 탕진이었다.

중국은 책봉 관계(상명하복관계가 아닌, 의례적인 외교형태)에 있는 나라에 대해서만 조공무역을 허용하였다. 중국적 조공질서의 동심원(<그림 1> 참조)안에 들어온 조선(매년3공)과 류큐(격년1공), 월남(3년1공)은 중국과 가장 밀접한 이너서클의 일원이었다.

이와 반면에 일본은 극히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는 동아시아 제국 중에서 특히 조선과 비교하며 중국에 조공을 바치지 않은, 중화질서의 밖에서 자유롭게 활동하였던 유일한 나라인 것처럼 교과서에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일본이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된 것이다. 중국과의 조공무역을 하지 않더라도 일본은 왜구(일본에서는 왜구를 주로‘민간무역업자’라고 미화하여 부른다)의 눈부신 활약(?)을 위시하여 류큐를 통한 중개무역, 네덜란드와의 교역 등으로 무역수요를 충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국과 조선, 류큐를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일본을 주로‘왜(倭)’또는‘일역(日域)’으로 칭하여 왔다. 왜라고 부르는 밑바닥에는 일본을 왜구의 본거지로 폄하하는 어감이 배어 있었고, 일역이라 칭하는 이면에는 일본을 중국적 세계질서의 동심원내의 멤버로 함께하기에는 부적절한, ‘국가’로서의 자격에 미달하는‘지역’으로 보는 시각이 깔려있었다. 자주독립의 역사를 자부하여온 일본은 사실상, 동아시아 국가사회에서의 아웃사이더 내지 왕따였다.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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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대만 국립사범대학에서 수학한 후 대만 국립정치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베이징대학과 중국인민대학, 중국화동정법대 등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으며 주 대만 대표부와 주 상하이 총영사관을 거쳐 주 중국 대사관 외교관을 12년간 역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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