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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으론 못산다" 그들도 이준처럼 자결했다


입력 2011.02.26 09:17 수정         데스크 (desk@dailian.co.kr)

<특별기고 일본-중국 흥망 키, 류큐⑥-30년 터울, 류큐와 조선의 병탄사>

류큐왕 밀사로 청 이홍장 찾아 파병요청…사실 알려지자 일본 병력급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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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넓은 일본의 키, 류큐
2. 제1차 일본제국주의의 은신처, 류큐
3. 제2차 일본제국주의의 출항지, 류큐
4. 제3차 불침 항공모함의 출항지, 류큐
5. 이중 종속 왕국, 류큐의 흥망사
6. 30년 터울, 일제의 류큐와 조선의 병탄사
7. 좁은 중국의 족쇄, 류큐
8. 그랜트 전 미국대통령의 류큐 3분안
9. 루즈벨트와 장제스
10. 실크로 포장한 중화제국
11. 순망치한의 입술은 북한이 아니라 만주였다
12. 제1세대, 서남방 티베트와 인도를 침공하다
13. 제2세대, 동남방의 여의주를 입에 물다
14. 남서군도, 이어도와 영서초, 오키노도리
15. 제3세대, 서북방에서 달콤한 과실을 따먹다
16. 제4세대, 실키 중화제국, 동북공정으로 드러나다
17. 독도와 센카쿠
18. 제5세대, 북한과 류큐로 나아갈 것이다

1876년 일본정부는 모든 류큐 주민의 중국여행을 엄금하였다. 그해 12월 어느 날 밤, 오키나와 나하항의 후미진 부두 어귀에는 작은 어선 한 척이 닻을 올렸다. 어선에는 초라한 어부행색의 ‘특별한 세 사람’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3인의 밀사, 류큐 마지막 왕의 밀명을 받은 향덕굉(向德宏), 임세공(林世功), 채대정(蔡戴程)이었다.

어선의 항로는 희한했다. 이렇다 할 풍랑도 없었는데 처음에는 북동쪽 일본으로 향했다가 닷새쯤 되던 날, 선수를 반대편으로 슬그머니 돌려 남서쪽 중국으로 한 열흘간 항행하였다. 그렇게 어선은 닷새는 북동쪽으로, 열흘은 남서쪽으로 항행하길 반복했다.

삼국(삼산)시대의 류큐왕국. 출처 http://image.baidu.com/ 삼국(삼산)시대의 류큐왕국. 출처 http://image.baidu.com/

어선은 이듬해, 1877년 4월에야 푸젠(福健·타이완의 맞은편에 위치한 중국 남동부의 성) 해안에 상륙하였다. 3인의 밀사는 하선하자마자 곧장 푸젠성 순무(巡撫·성 최고행정책임자)에게 류큐왕의 친서를 올렸다. 거기에는 류큐가 일본의 사실상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는 실정은 누락한 채 다만 일본이 류큐가 청나라에의 조공을 방해하고 있으니 청나라가 일본에 압력을 가해달라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푸젠성 순무는 6월 14일 마땅히 류큐를 구해주어야 한다는 의견서를 첨부하여 베이징 조정에 상신하였다.

류큐왕의 밀서를 받은 청나라 조정은 난감했다. 당시 청나라는 자국의 방위에도 힘겨웠다. 북으로는 러시아와의 영토갈등으로, 남으로는 월남문제로 인한 프랑스와의 분쟁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홍장을 수뇌로 한 양무파들은 평화를 유지하여 중국의 자강을 꾀하려 하였다.

초기 양무파의 외교구상의 골간은 ‘연일항아(聯日抗俄)’ 즉 ‘일본과 연합하여 러시아의 남침에 대항하자’는 것이었다. 이홍장은 미약한 중국의 해군력으로 류큐를 구하려는 것은 무모한 행위일 뿐만 아니라 동중국해 바다 건너 조그만 섬들보다는 광활한 북쪽과 남쪽의 영토를 지키는 것이 훨씬 시급한 일이라고 판단하였다. 결국 청정부는 류큐에 원군을 파견하지 않기로 최종결정을 내렸다.

철석같이 믿었던 종주국의 ‘류큐 포기’라는 비보를 전해들은 향덕굉과 임세공은 배신감과 절망감에 치를 떨었다. 두 밀사는 머리를 삭발하고 탁발승으로 변장, 텐진을 향해 떠났다. 텐진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그들은 이홍장의 관저 대문 앞에 꿇어 앉아 혈서를 썼다.

“류큐 신민들은 살아서도 일본인으로 살 수 없고, 죽어서도 일본의 귀신이 될 수 없다. 대청제국은 조속히 출병하여 류큐를 구해 달라.”

두 밀사는 며칠을 단식하며 빈사의 조국을 구해 달라고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간혹 행인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수군거리며 지켜볼 뿐, 굳게 닫힌 이홍장 관저의 대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러던 일주일째, 임세공은 남동쪽 머나먼 류큐 왕궁을 향해 세 번 절한 후 비수로 심장을 찔러 자결하였다.

류큐왕이 사신을 청나라에 비밀리에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한 사실을 알게 된 일본 정부는 최후의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입안에 넣은 눈깔사탕 같은 섬나라를 목구멍 속으로 삼켜 완전한 자기 것으로 삭혀버려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1879년 3월 27일, 일본정부는 내무대신 마쓰다에게 500여 명의 병력을 딸려 류큐로 급파했다. 일본군은 도성인 슈리성을 무력 점령하고 4월 4일 류큐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을 둔다는 포고령을 전국에 포고하였다. 연이어 류큐의 마지막 왕 상태와 왕자들을 도쿄로 압송하였다.

1875년 류큐가 ‘마쓰다 10개항’으로 사실상 일본에 합병된 지 30년이 되던 해, 1905년 대한제국은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으로 일본의 사실상 식민지가 되었다.

1877년 류큐 상태왕의 3인의 밀사가 실패한지 역시 30년만인 1907년 대한제국의 고종황제는 헤이그에 개최되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 3인의 밀사를 파견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일제의 무력적 침략행위의 부당성을 폭로하고, 국제적인 압력으로 이를 막아 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준은 현지에서 분사하였다. 결국 이 사건은 일제에 역이용 당하여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류큐의 청나라 밀사 사건 3년 만에 일본은 류큐를 완전히 병탄하였던 것처럼, 헤이그 밀사 사건 3년 만에 일본은 반만년 유구한 역사의 한반도를 병합하여 버렸다.

이처럼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류큐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공간(지리)에서 되풀이된 시간(역사)의 반복성은 선명하게 드러난다. 다만 그 반복성의 색조가 지나치게 어두워 슬프다.


* 뱀의 발(사족): 필자가 역사의 반복성을 발굴, 비교 고찰하려는 목적은 21세기 태평양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를 시간과 공간의 교차점위에서 점검해보고, 밝은 미래를 위한 지혜로운 선택이 무엇인가를 성찰하고 교훈을 얻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글/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중국법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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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대만 국립사범대학에서 수학한 후 대만 국립정치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베이징대학과 중국인민대학, 중국화동정법대 등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으며 주 대만 대표부와 주 상하이 총영사관을 거쳐 주 중국 대사관 외교관을 12년간 역임한 바 있다.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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