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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살리겠다고? 근데 문화를 죽여?


입력 2009.01.21 10:53 수정 2013.05.22 16:24        김헌식 문화평론가 (codessss@hanmail.net)

<칼럼>한국경제 성장동력은 문화…문화와 경제의 선순환 구조돼야

‘법, 입법 그리고 자유’와 ‘치명적 자만’에서 오스트리아 출신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는 인간이 함께 잘 살 수 있는 사회는 인간들의 상호작용으로 우연히 생겨난 것으로 이른바 문화적 진화의 결과라고 보았다. 하이에크의 사상적 경쟁자였으며, 대공황을 극복하는 데 결정적인 이론을 제공했던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즈(John Maynard Keynes)는 인간다운 사회는 문화의 사회라며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자신이 문화적 취향이 깊기도 했다. 신제도경제학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제도를 생성, 유지, 소멸시키거나 경제구조를 만들어내는 문화적 요인이다. 이 때문에 한국의 경제발전을 문화요인에서 찾았다. 얼마 전 작고한 사무엘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 같은 일련의 저작을 통해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것은 정치나 경제, 군사적인 영역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았으며 실질적으로 그 영역을 움직이는 것은 문화라고 보았다.

문화는 일부의 이성으로 인위적으로 구획할 수 없는 자발성과 다양성을 기본으로 한다. 자발성과 다양성은 수직계열적 관계에서 나올 수 없다.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수직계열적인 구조가 아니라 병렬 네트워크의 특성 때문이었다. 이러한 구조에서 문화가 창조적으로 정화되고 압축된 것이 문화예술이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톰 행크스가 자신의 손으로 친구 스미스를 만들어내듯이 문화는 사람의 의미 부여에서 비롯한다. 동물의 행태에서 나온 흔적들을 문화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다. 문화예술은 의미부여의 정치(精緻)한 압축적 산물이다. 문화는 병렬 네트워크의 산물이다. 다양성과 자발성을 뒷받침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가치 있고 가치 없음을 이성적 혹은 계획적 판단으로 할 수 없다.

최근 인디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인기를 끄는 만큼 이에 대한 쓴 소리도 많다. 대중문화에 변절했다는 것이다. 인디밴드의 정신을 지키지 못하고 대중상업성에 굴복을 했다는 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인디음악은 대중주류 음악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커트 코베인이 자살한 것은 인디음악과 주류음악의 관계를 너무 이분법적으로 판단한 감이 있다. 핵심은 대중과 소통하는데 있다. 인디 음악의 활동 영역을 확고하게 하고 소통의 도구로 대중음악공간을 이용하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풍성한 음악적 수혜를 누릴 수 있다.그들의 다종한 활동이 흘러넘쳐서 우리 음악은 더 풍성해져 왔다.

무엇보다 인디문화가 상업성에 관심이 없다고 해서 정책적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목표 지향적 정책은 사회주의 문화정책과 같다. 정부 정책이 할 일은 그들의 음악을 일일이 판단해서 지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음악을 앨범으로 내게 하고 음악적 공간을 확보해주는 것이다. 인디음악은 정치(精緻)한 문화적 산물이어야 한다. 그것은 상업성 여부를 떠나서 문화적 유산이다. 문화적 유산은 기록의 차원에서 남겨져야 한다. 이를 통해 뒷세대들이 이를 활용해서 더 많은 음악들을 만들고,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현재 그 음악의 가능성과 의미를 판단할 수 없음은 물론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병렬적 네트워크에 내버려두어야 한다.

정부가 할 일은 후방에서 사회 간접 자본 관점으로 문화를 지원하는 정책적 행태를 갖추는 것이다. 최근에 정부는 인디레이블에 대한 지원액을 대폭 삭감했다. 그들의 음반은 빛을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회간접자본이이나 문화적 자산의 축적이라는 관점에서 보지 않고 있다. 인디음악은 수많은 대중상업 음악 즉 문화산업콘텐츠의 수익성을 담보해주는 수원지(水源池)와 같다. 이는 비단 음악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산업은 어느 한순간 될 만 한 콘텐츠가 갑자기 출연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빗방울이 자연스럽게 방울방울 흘러 한데 집적될 때 어느 순간 터진다.

금융 위기와 불황과 같은 상황에서 문화부문은 가장 먼저 큰 타격을 받게 마련이다. 가정이나 개인은 가장 먼저 문화비를 줄인다. 수많은 문화예술종사자들의 생계는 생존의 단두대에 가장먼저 내 몰린다. 방송에서 문화 프로그램들은 이러한 엄혹한 경제위기 상황에서도 대중과 문화를 연결시켜주는 메신저들이다. 어떻게 보면 문화적 수혜를 받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생명줄과도 같다.

최근에 KBS‘TV, 책을 말하다’가 갑자기 폐지되었다. 또한 곧 EBS‘한영애의 문화 한페이지’, 명로진의 ´책만세´ 가 폐지된다고 한다. ´한영애의 문화 한페이지´는 작년 가을에 한국방송대상에서 상도 받은 프로다. 또한 다른 문화 관련 프로그램들도 폐지되었거나 언제 폐지될지 모르는 상황에 처해있다. 문화를 가장 중시한다는 정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건은 문화 프로그램의 생존에 대한 불안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수없는 문화예술가들을 연결시켜주면서 상호 영감(靈感)을 매개해주는 가운데 대중과 문화예술, 창작자들을 소통시켜 준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메신저와 네트워크의 기능이 활성화 될수록 문화적 영감은 문화 산업의 동력으로 이어진다. 그나마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 프로는 많지 않으며 더 많아져야 할 상황이다. 단기적 수익의 여부로 문화를 판단하는 것은 하이에크가 말한 ‘노예에의 길’에 들어서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하이에크가 말했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암묵지다. 암묵지는 당장에 드러나지 않는다. 수익을 내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것들이 상호시너지효과를 내며 네트워크되는 것이 필요하다. 하이에크의 카탈락시(catallaxy) 개념이 적용되는 것이다. 암묵지는 문화의 상태로 존재하며 그것의 최정예가 문화예술 나아가 문화콘텐츠들이다.

방송프로그램은 문화적 기록을 하는 매개체다. 수많은 문화예술적 영감과 콘텐츠들이 기록되고 문화적 자산으로 축적되는 문화의 장이다. 단순히 호사품처럼 여겨지는 대상이 아니라 좀 더 나은 사회와 경제를 위한 초석이다. 따라서 문화 프로그램은 사회간접자본의 관점에서 보장되어야 하며, 그것을 보장하는 것이 우리가 좀 더 행복하고 공존할 수 있는 미래를 위한 공영 방송의 사회적 책무다.

김헌식 기자 (codess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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