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진 돌확이나 화사석 없어진 평평한 석등받침, 그리고
잃어버린 세월들이 어처구니 빠진 큰 맷돌 앞에서 그늘이 지고 있다-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은 올 겨울 내내 머릿속에서 맴돈다. 겨울답지 않은 포근한 날씨와 지난해에 비해 눈이 적은 때문일 것이다. 이런 날 겨울 답사는 힘이 덜 들어 좋은 점이 많지만 추울 때는 추워야 하는 자연의 섭리가 잘못 돌아가는 것 같아서 불안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또한 겨울에 집을 떠나 멀리 나왔을 때는 해가 짧아 더욱 시간을 맞추어 계획대로 답사를 진행하기가 어렵다. 마음이 조급해지기 십상이어서 어영부영하다보면 어둠이 내려 아쉽게 예정된 담사를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출근을 하는 아침시간,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서울 인근을 지나며 며칠 평일에 말미를 얻어 떠나온 길이 얼마나 자유로운 것인가 새삼 고맙게 느낀다.
서울 이북을 다닌 기억이 별로 없다. 학생군사훈련을 받고 전방입소를 하던 기억과, 판문점에서 무료하게 설명을 들으며 해설사가 필요 이상 감정을 드러내어 불편했던 기억, 그리고 내 형제 중 한 명이 이곳에서 오래 살면서 방문했던 몇 몇 기억들이 고작이다. 의정부 근처에서 고속도로를 내려 동두천 쪽으로 가는 길은 평일인데도 분주하다. 마치 서울의 외곽과 이어진 듯 하고 건설현장들이 눈에 많이 띄는 것으로 보아 이곳도 개발 바람에서 물러나 앉은자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새로운 콘크리트의 대형 건물들이 길가를 메우고 요란한 광고판이 겨울바람에 펄럭이는 길을 따라 운전을 하면서도 머리속에는 회암사에 주석했고 무학대사의 스승이었던 나옹선사의 시 한 편이 노래 가락이 되어 웬 종일 맴맴 돈다.
靑山兮要我以無語 蒼空兮要我以無垢
청산혜요아이무어 창공혜요아이무구
聊無愛而無惜兮 如水如風而終我
료무애이무석혜 여수여풍이종아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나옹(懶翁)선사(1262-1342), 고려시대 1335-1408 1327-1405
동두천 가는 국도를 벗어나 지방도로를 타는 즈음부터 비로소 시골이라는 느낌과 조용해짐을 느낀다. 옛 터들도 문명의 오염지대에서 안전하지 못하다는 우려를 할 즈음 경기도 양주군 회천읍 회암리 산 14-1의 회암사지 광대한 빈 터에 석축기단들과 하나의 부도탑, 그리고 홀수의 당간지주가 눈에 들어왔다.
내 사는 곳에서 500km를 족히 넘는 거리를 오랜 시간 운전을 하여 왔고 언젠가부터 와보고 싶은 곳에 왔다는 느낌에 바삐 전망대 옆에 차를 세우고 카메라 하나만을 들고 차에서 급히 내린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 이 넓은 터 앞에서 숨을 죽이고 크게 쉼 호흡을 한다. 천천히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 이 터를 둘러보는 기본적인 마음자세라는 것을 내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조금은 바람이 있어도 해는 맑고 따스하다. 그냥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소풍이 따로 없다.
높은 지대에서 한참동안 빈터를 바라보다 맨 위쪽 회암사지 부도가 있는 곳으로부터 아래로 내려가며 둘러볼 요량으로 길이 없는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서울을 중심으로 조선시대까지 지속되었다 빈터로 남은 절터들은 그 규모가 방대하다. 여주의 고달사지, 원주 부론면의 거돈사지나 법천사지, 보령의 성주사지, 서산의 보원사지 등이 대표적인 곳들이다. 그러나 이 곳 회암사지가 앉은 모습은 마치 합천의 영암사지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산의 구릉에 위치한 것도 그렇거니와 금당을 중심으로 아래로 내려가면서 석축계단을 몇 단씩 쌓아두고 법당과 요사채들을 만든 점, 특히 영암사지 뒤 바위로 이루어진 황매산의 모습이나 회암사지 뒤의 천보산의 모습이 닮았다.
누구의 것인지 모르나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회암사지 부도탑은(경기도 유형문화재 52호) 상당한 규모를 가진 것임에도 깔끔했다. 겨울이라 주위 잡풀에 가리지도 않고 그늘에서 온전히 알몸으로 보여주는 그 부도는 마치 나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머리에 산 새 한 마리 품었다가 하늘로 날려 보낸다.
팔각원당형의 이 부도에서 특징적인 조각은 기단부의 조각이다. 높이가 과장되게 높은 기단부는 아래, 중간, 윗 기단의 굄돌마다 앙련 없이 복련을 평이하게 조각하였고 그 사이 돌에는 다양한 형태의 조각을 하였다. 아래 기단 각 면에는 비마(飛馬)가 방향을 달리하여 역동적으로 뛰어가는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생긴 모양이 다 달라서 때로는 용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 위에 놓인 아래 몸돌에는 상징적인 형태의 식물을 조각하고 윗 몸돌에는 신장상이 조각되어있다.
이 부도탑은 그 수법이나 조형성으로 보아 보물 이상의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 보이지만 누구의 것인지를 모르고 시대가 조선인 점으로 미루어 아직 지방문화재로 남아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 부도탑은 넓은 절터에 홀로 우뚝 한 랜드마크임에 틀림없다.
회암사가 언제 창건했는지 그 연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1174년 (명종4년) ´金의 사신이 회암사에 왕래하였다´ 는 기록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창건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고려 충숙왕 15년(1328)때 인도의 고승 지공(指空)화상이 창건하였다고도 하는데 회암사가 지어지기 이전에도 이곳에는 이미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우왕 2년(1376) 지공의 제자인 나옹(懶翁)이 중창 하였으며, 조선 성종 3년(1472) 세조비 정희왕후의 명으로 12년에 걸친 삼창하였다. 이색이 지은<천보산회암사수조>에 의하면, 고려 우왕 2년(1376) 지공의 제자 나옹이 “이곳에 절을 지으면 불법이 크게 번성한다”는 말을 믿고 절을 크게 짓기 시작하였다고 하며 이 절은 고려시대 불교를 크게 일으켰던 3대사찰의 하나이었고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걸쳐 번창하였던 국찰(國刹)이었다.
지공이 나옹을 통해 인도의 나란다사(寺)를 회암사에 그대로 복원한 것이라 전하며 나중에는 262칸의 대가람으로 완성을 보게 되었고, 법당에는 10척의 관음상을 비롯하여 높이 15척의 부처 7구가 있었으며 3,000 여명의 승려가 머물렀다고 한다. 절터만 남은 지금 목은 이색의 <천보산회암사중수기>는 회암사의 모습을 전체적이면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회암사를 복원하는데 가장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태조 이성계의 각별한 관심으로 나옹의 제자인 무학대사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는 것은 물론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참여토록 하였으며, 이성계가 왕위를 물려주고 난 뒤 회암사에서 수도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나중에 그의 아들인 효령대군과 양녕대군도 이 절의 중창에 관계하고 또 불교중흥에 힘썼다.
맨 위에 자리한 부도탑에서 바로 아래 금당터로 내려오는 석축 기단의 높이가 만만치 않다. 만 여 평의 이 절터에서 맨 앞 당간지주에 이르기까지 층층이 만들어진 석축기단이 구릉을 평지로 만들어 놓았으며 금당의 남쪽 중심으로부터 일직선으로 석축마다 계단을 만들어 두었다. 계단의 소맷돌은 왕궁이나 왕실의 묘역에서나 볼 수 있듯 각각 네 개씩 만들어져 중앙 계단과 바깥의 양 계단 등으로 삼등분 되어있고 태극문양이 아로새겨져 있으며 가운데 계단으로는 아마도 왕이 다녔으리라.
금당터도 다른 절터에 비해 매우 넓게 자리하고 있다. 자세히 보면 처음 창건 때의 금당터와 이후 남으로 월대를 세워 확장한 흔적이 보인다. 여느 금당터처럼 사방에서 오를 수 있게 만들어진 모습을 보이는데 이곳 금당터에서 융성했을 당시를 상상해본다. 모든 전각 사이의 길은 왕궁처럼 회랑으로 영결되어 있었을 것이고 그런 길조차 돌을 맞추어 깔아놓아서 발을 들고 조심스럽게 다니지 않으면 노스님으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졌을 것이다. 더구나 많았을 때 3,000여명에 이르렀다는 스님과 공양주 보살들, 그리고 이곳에서 일한 많은 사람들이 북적였을 당시, 이곳은 조선 초, 중기에 이르도록 가장 번성한 땅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절의 규모가 너무나 커서 가마솥 안에 들어가 팥죽을 쑬 정도였다 라거나, 쌀을 씻는 함지박이 너무 큰 탓에 사람이 빠져 죽어도 모를 정도였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지금도 절터의 양옆에 놓인 돌확(석조)들이나 더불어 입이 딱 벌어질 만큼 큰 맷돌이 당시 이곳에 기식하는 사람들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그뿐이랴. 밤이 되면 각 법당이나 요사채 앞을 밝혔던 석등의 부재들이 곳곳에 넉넉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사용된 돌의 크기나 규모가 만만치 않다.
그런 증거는 그 외에도 무수히 많다. 어느 절에서도 잘 볼 수 없는 완벽한 온돌구조를 가진 난방시설은 물론이고 그냥 또한 이 절터에서 나온 유물들을 보아도 국찰 혹은 왕사로서의 역할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발굴된 것들 중에 보광전 추녀 모서리에 걸려 있던 청동금탁(풍경)은 지름이 30cm가 넘는 것으로 134자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데 회암사란 절 이름이 새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태조, 현비, 세자(방석), 왕사 묘엄존자(무학)란 글씨도 들어 있어서 조선 초기 왕사임을 뚜렷이 증명해준다.
또한 잡상(雜像)이 발굴되었는데 이는 궁궐 지붕의 추녀에만 올리는 조형물로 강화의 선원사지와 더불어 궁궐과 같은 역할을 한 왕사였음을 추정을 할 수 있다. 그 외 회암사 절터 8단지 정청지 부근에서 발견된 정청 출토 청기와나 天, 地, 玄, 黃, 別, 左, 右 등 명문을 새긴 백자조각들, 분청향완 등이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이 절과 왕실의 관계가 잘 드러난다.
사찰에서의 이런 풍성함은 아무리 구복과 국태민안을 빌던 왕사의 구실을 하였던 회암사라 하여도 당시 조선 건국 이데올로기를 담당하였고 정치적 주도권을 쥐고 있던 유생들의 표적이 되고 있었음을 당시 이곳에 주석했던 무학대사나 이후의 스님들은 예감하지 못하였을까? 쓸쓸한 햇살에 구름한 점 없는데 바람은 낮은 소리로 이 절이 불타던 날의 아비규환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듯 무심하다.
빈 터에 석축 기단이 남고, 그 사이 길에는 오래된 돌들이 길을 이루는데 잔설이 덥힌 길에서 융기된 주춧돌들이 눈이 녹으면 황량할 것이나 마치 돋을새김 된 조각처럼 아름답다. 깨어진 돌확이나 화사석 없어진 평평한 석등받침, 그리고 잃어버린 세월들이 어처구니 빠진 큰 맷돌 앞에서 그늘이 지고 있다. 스산한 응달에서 수백 년을 두고 빈터를 바라보았을 돌확, 석등받침, 맷돌은 차마 흙 밑에 파묻히지도 못하고 영욕의 세월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아프다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한 무생물들이지만 그것들은 생명줄을 오늘도 이어가고 있다.
고요한 산그늘 자락,
잊혔던 지난날들이 파헤쳐지는 소리에
바람이 아우성으로 대답을 하고
옛 기억들 신우대 흔들리는 소리에 아련하다.
뭇 사람들 회랑을 따라 금당을 분주히 드나들던 날,
단단한 업을, 욕을 부수기 위해 또 무언가를 갈기 위해
제 몸에 무거운 윗돌이 얹어지고
윗몸과 아랫몸이 만나 서로 마른 살을 부벼야 했던 날들,
바늘처럼 어처구니 깊게 꽂힌 채 천천히 돌아가는 몸
짙은 핏빛의 팥가루가 물에 갠 채 흩어지고 또 흘러서
붉은 울음 쏟고 쏟아냄으로서
비로소 아무것도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은 순간을
공양간 아궁이에 불들어 가는 소리로 알지.
도량석 놓는다고 등불이 켜지는 순간 저 멀리
당간엔 깃발이 새벽바람에 흔들리고
눈이 쌓인 맷돌에는 아직 제 몸 갈아낸 온기가 남아
새벽 예불 지난 뒤 따순 죽 한 그릇 공양하여
가슴 쓸쓸히 쓸어낸 뭇 중생 굳은 피 돌게 하였음을
말하지 않고도 알게 되었던 회암사 절터
외진 응달에 우두커니 앉아 잔설 몸으로 받아 두었던
맷돌 두 개. <회암사지 맷돌/ 전문>
눈을 밟으며 걷는다. 하나하나 중앙에 놓인 계단을 밟고 절 초입으로 내려오다 뒤돌아 금당터와 그 너머를 본다. 툭 트인 풍광이 폐허처럼 변한 지금도 위풍당당하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잔설 위를 걷다보니 맨 아래 당간지주 앞이다. 이 절터의 당간지주는 세 가지가 있다. 아래 왼쪽에 3개의 당간지주가 있는데 온전한 두 개와 홀로 남은 다른 종류의 당간지주가 같은 위치에 옹기종기 모여 있고 가운데쯤에 낮고 두툼한 당간지주가 또 하나 있다, 아마도 왼편에 홀로 남은 것이 맨 먼저 생겼을 것이고 가운데 키 작은 것이 맨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확신 없는 추측을 한다.
다시 돌아서서 위로 끝없이 펼쳐진 빈 터를 바라본다. 위에서 아래를 보는 모습과는 딴판이다. 위에서 볼 때는 국찰이라는 선입견이 주는 위압감이 머리를 지배하고 있을 정도로 규모에 놀랐지만 아래애서 바라보는 모습은 평면적이라 그저 낮은 곳에서 부처님께 기도하는 한사람의 소박한 사내와 절터만 존재할 뿐 그 무엇도 두려움 없이 바라볼 수가 있다.
©(주) 데일리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쓰기